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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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 / 손보미

나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어렸을 적 살던 작은 동네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동네가 무지하게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기억의 작은 파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동네는 ‘작은’ 동네일 것이다. 그 동네는 대부분 추억의 정경으로서, 오늘의 내가 무언갈 잃어버렸다고 느껴질 때마다 들여다보는 화폭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도 나를 쥐고 있다면, 좀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고통스럽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소설의 화자는 어머니의 죽음과 이혼했던 아버지로부터의 느닷없는 연락, 유명 연예인의 실종을 경험하면서 짧게 요약되었던 작은 동네에서의 과거를 향해 의심의 촉을 세우고 탐정처럼 치밀하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들 가족과 거리를 두었던 동네 사람들,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옆집 할머니와 그 집에 살던 개, 화재로 인해 동네 사람 모두가 죽음을 겪고 그 죽음을 개를 키우면서 달래려했던 것, 화자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오빠, 소나무 숲에 혼자 살았던 젊은 여자. 어리지만 나름의 분별력으로 삶을 체득하고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왔다고 믿던 화자는 과거를 복습하면서 지금도 불가해한 것들을 문장으로 건져 올린다. 그 불가해는 말하자면 ‘실종’이다. 모두가 고통을 당해왔다고들 말하지만 누군가는 ‘실제로’ 사라진다. 그 누군가들은, 화려한 과거가 있었지만 불행히 남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몰락하고, 실종된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도 그 ‘실종’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전까진 가십거리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소문들이 거짓말처럼 잠식된다. 모두가 겪어온 것이나 다르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에 너무도 무관심한 남편처럼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화자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화자는 그 실종에 몰두해서 증거와 정황 없는 사건에 갖가지 질문을 남긴다. 하지만 도저히 답이란 게 나오지 않는데,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서있다. 언제나 화자가 일정 거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를 바래왔던, 그녀를 보호하는 걸 지상과제로 삼은 어머니가. 어머니는 동네 사람 중 가장 화려한 옷차림으로 시내를 다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동경했으며, 자신만의 삶을 위해 고향 섬에서 몰래 나왔다. 그런 어머니는 이상하게 동네사람과 어울리지 않았고, 소나무 숲에 살던 이상한 젊은 여자만을 유일한 친구로 대했다. 화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나를 보호하면서도 나를 방임한 어머니. 그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죽었고, 그러므로 화자는, 지금으로선

증오해마지 않던 아버지와 만나 그 고통스러운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아버지와 만나서 질문을 쏟아내고 그에 대한 답을 듣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예상하지 못한 답들이 나와서 놀랐다. 과거가 거짓이었으며, 거짓이다 믿고 싶은 일이 실제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예상 밖의 일들은 결국 어머니의 행동을 수긍하게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런 행동을 해서 돌려받았던 게, 과연 있었을까?

어머니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뭐가 안심이 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의 인생이.”
너의 삶.
너의 행복.
너의 안전.
- p.83

이 거짓말 같은 과거를 건네받은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거에 있었던 일들, 사라지고 실종된 것들-거짓이든 진실이든-을 오롯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견딜 수 없다면, 같은 의도의 다른 일면들을 환상처럼 가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일러주었듯 팔을 앞으로 휘젓고 발을 힘차게 차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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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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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기적 소리를 내지르며 검은 덩어리의 기관차가 다리 위를 지나갔다. 멀리서도 철로에 걸리는 바퀴 소리와 철교가 아우성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p.52~53

이 소설을 읽으며 세계 최초의 ‘영화’가 떠올랐다. 기억하건대 그 영화는 6분짜리 단편으로 유럽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장면의 전환이나 이야기 따위 없이 그저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만 담겨 있었다. 지금 보기엔 한없이 지루해 보이는 영상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생각해보면 온통 흙길이었을 세상에 전국 각지를 이을 정도로 기나긴 쇠를 놓고 그 위에 아주 거대한 물체가 빠른 속도로 움직여 사람과 화물을 나르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이제 막 기계가 도입되던 시기인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커다란 문명을 만들어냈다. 철도를 놓게 된 것은 기술의 발전도 발전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그 사람들은 다 누구였을까. 한국에 철도가 놓인 시기에 우리나라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조선인은 조선인이 아니었다. 때문에 노예를 부려먹어 만든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거기엔 어떤 억압과 폭력이 자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 그 씁쓸한 답이 나와 있다.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졌다.’
황석영 작가에 대해서는 그가 쓴 책보다도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모두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이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채널예스에서 ‘마터 2-10’(‘철도원 삼대’의 전 제목)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을 때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데 그게 벌써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노동 소설이다. 그러나 그 노동은 과거의 의미가 아니다. 노동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곁에 있었고, 부당 해고로 굴뚝 위에서 농성을 막 시작한 이진오도 그런 인물이다. 이 소설을 다르게 말하자면 시대의 이야기이다. 이진오의 증조할아버지 이백만과 엄청난 전설을 가진 증조할머니 주안댁에서부터 시작해 철도원이 되고자 했던 할아버지 이일철과 노동쟁의에 뛰어들었던 작은할아버지 이이철, 예지력을 지닌 할머니 신금이와 한국전쟁 때 부상당한 아버지 이지산, 그리고 이진오 자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가로지르며 지난 백년 간 한국이 겪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이 엄청난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시대가 진행되는 걸 봐가면서 종국에 현재에 도달하게 된 우리는 어떤 답을 내놓게 될까. 가제본에는 소설 전체의 삼분의 일 정도만이 나와 있어서 얼른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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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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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할 수도 없는 삶이란 게 있다. 잉글랜드에서 살고 있는 어떤 금발 외국인의 삶이나 미국에서 큰 공을 세운 유명인사, 그런 이들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삶들은 내 삶의 반경에 미치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와 비슷하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 예를 들면 백 년 전의 조선이었을 이 땅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삶. 이처럼 나와 가까웠을 삶들은, 그 가깝다는 거리와 무관하게, 아니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상상이 되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럴 때 나는 소설을 읽는다.
상상되지 않는 삶을 다룬 소설을 읽으면 때로 그것은 마치 나와 가까운 어둠에 불을 밝히는 듯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국소설을 좋아한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나라 전체가 위기였던 100년 전의 하와이 이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당장 책을 펼치고 싶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 페이지에는 내가 읽고 싶었던 나와 비슷한 사람이 느꼈을 낯섦과 고난, 감정이 서려 있었고 나는 그 불빛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 점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개인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설이 시작되면 그 역사에 치중하게 되어 개인의 목소리가 묻히기도 하는데, 이 소설은 버들, 홍주, 송화라는 세 인물의 끈끈한 연대와 우정은 물론 버들의 어머니, 버들, 그리고 버들의 딸 펄에게까지 이어지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마음이 아늑한 기분이었다. 나는 때론 버들의 어머니처럼 버들을 지켜보았고, 때론 버들처럼 펄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성장해가며 자신을 위한 삶을 추구할 때, 나는 그들이 가장 그들다워 보여서 행복했다. 그 시대에 짙게 깔린 비극의 내음에서 잠깐의 향기를 찾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그들만큼은 정말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현실도 많이 보았다. 제대로 된 이름도 가지지 못했던, 사진으로 결혼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하와이에 도착해 남편의 사진이 사기였음을 알게 되지만 도망칠 수 없었던, 조선의 여성들. 그리고 하와이 내에서 이승만과 박용만으로 편을 가르던, 지주인 미국인들에게 무시당하던 조선인들. 하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꿋꿋이 파도가 되어 살아내고 살아내던 버들의 모습은 나 자신을 많이 들여다보게 했다.
처음에 반갑게 시작했던 알로하라는 인사는 이제 사랑과 기쁨, 존중의 의미를 담은 인사가 되고 예뻐 보이기만 했던 꽃목걸이는 끈끈하게 살아온 이들의 연결고리가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다 페이지의 끝에 다다라서 무거운 마음이 되듯이. 책을 덮으면 나를 펼쳐보게 되듯이. 이제야 ‘나의 엄마들’의 ‘엄마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알로하’라는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 사람들은 영원히 밀려오는 따뜻한 파도가 되어 나의 페이지에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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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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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이상하다. 그것은 왜곡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왜곡될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사를 얼핏 기억한다. 새파랗게 젊은 나에게 추억은 어릴 적이라 할 수 있는 시절밖에 없다. 어릴 적엔 그토록 괴롭고 지루했는데도, 나는 <지금> 있다. 그리고 그토록 괴롭고 지루한 일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웃음 짓는 추억만이 어릴 적의 시냇물에서 건져 올려진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추억은 가장 추상적인 기억이다. 그때 내가 왜 괴로웠냐고 하면 세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른들의 강압적인, 주입식의 사고방식 때문이었고, 지루했던 것은 내가 그걸 받아들이고 살겠노라 다짐했는데도 수시로 나타나는 그 광경을 참을 수 없어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런 거침없는 생각만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 앓았을 뿐이고, 밖으로 삐져나온다 한들 거침없이 휘두르는 세상에 겁을 먹어 금방 움츠리듯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설이는 달랐다. 나처럼, 혹은 작가의 전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처럼 행동했을 아이들과 다르게 솔직했다. 그건 어른들도 감히 행동하지 못하는 사고이자 방식이었다.



설이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낯선> 사람이다. 어린 우리는 겁이 많은 게 사실이다. 아는 게 없고, 알아야 할 게 많고, 고갤 숙여야 할 일이 많고, 함부로 내세웠다가 어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우리에게조차도 날이 선 언어로 그것들을 표현했지만 가장 약한 사람에겐 우리의 지겨운 익숙함도, 자신의 앞에 놓인 그 무엇도 한없이 날카롭다). 그것은 의지할 곳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 어린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설이에겐 어린 마음 따윈 없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꺼내져 왔듯이, 세 번이나 파양을 당했듯이, 굳게 의지할 만한, 어린 마음 가져도 된다고 둥지를 기꺼이, 오래 내어주는 데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당연하고 익숙한 버팀목이 설이에겐 가장 낯선 것이었다.



버팀목이 없는 사람은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기어가는 아이는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일어서 있는 법을 배우고서 걷는 방법을 배운다. 설이는 처음부터 걸어야 했다. 어른들이 만든 줄 위에 서서 위태롭게 걸어야 했고, 설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줄을 걸었다. 게다가 그 줄을 만든 세상의 거짓과 싸웠다. 설이의 가장 특출난 점은 그런 것이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세상과 싸운 것. 세상의 모순과 거짓을 술술 풀어내고자, 갈갈이 찢어버리고자 기꺼이 세상과 가장 친한 어른들과 싸웠다. 젊은 나는 내가 못했던 행동을 하는 설이를 금세 이해했고 응원했다.



그래서 설이는 가장 <날이 선> 아이다. 어른들은 아이였을 적 속으로 감춰온 그 날을 자라나면서 채찍으로 바꿨다. 그 채찍은 세상보다 어리석은 자신을 향하기도 했고, 자신보다 어리숙한 남에게 휘둘러졌다. 설이는 그 날을 감추지 않았다. 그 칼날을 채찍만 갖고있는 어른들에게 휘둘렀다. 어떤 어른들은 혀를 차며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어른들은 강제했다. 그러나 이모는 그런 건 아이일 때나 할 수 있는 거라며 이해했고, 곽은태 선생님은 거짓에 대해, 자기 아이에게만 독하게 구는 어리석은 마음에 대해 사과했다. 설이에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없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그것보다 더 순수한 구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이는 세상을 영원히 미워하고자 했다. 자신의 모든 삶이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거짓과 참의 구분마저 헷갈려졌을 때, 설이는 모두를 미워하고자 했다. 냉소적으로 대하고 물어뜯고 햘퀴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설이는 운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우는 것일까.



그렇게 설이는 자란다. 설이는 세상을 안기로 결심했다. 거짓과 참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친, 그 무게조차 각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이 세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으면 참이 되지 못했을 자신의 삶 때문이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의 강물은 잡을 수 없고 놓아주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고, 참과 거짓으로 감히 구분 지을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의 강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육원 원장님으로부터 고마움을 받아야 할 이모가 한순간만으로 죄책감을 영원히 안고 가야 하는 모습을 보고 설이는 각자에게 주어진 괴로움을, 각자에게만 주려고 노력한 이모를 가족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만큼 아량 넓은 감정은 없다. 사랑은 강철처럼 단단히 굳은 설이의 마음에 산소처럼 배어들었고, 설이는 세상의 공기를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것은 과거에 가졌던 모든 미움에 대한 포기이자 안녕이었다. 여태껏 알았던 사람과의 이별도 슬픈 일이지만, 여태껏 자신이 욕망하고 자신을 행동하게 했던 어떤 것과의 포기와 안녕과 이별도 그에 비길 수 없이 눈물 나는 일이다. 설이는 그래서 울었다.



그리고 이제 설이는 <춤>을 춘다. 버팀목도 없이 자신이 만든 줄 위에서 자신만의 춤을 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춤을 흥겹게도 춘다. 그것만큼 설이를 잘 표현한 몸짓은 없을 것이다. 설이가 갓 어른이 되어 나처럼 어릴 적을 추억한다면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 어른에게 반항했던 일들이 아니라 이모나 강아지 야코처럼 단순한 것들에 관한 사소한 기억뿐이겠지만, 거기에 배어드는 사랑의 향기는 설이를 괜히 웃음 짓게 할 것이다. 그리고 설이 역시 추억만큼 이상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졸업식 날 자기의 짝 시현과 춤추고 있는 자신을 떠올릴 수도 있다. 설이가 추억하는 졸업식 날 췄던 춤은, 이제는 손에 쥐어진 <나침반>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나비>의 모습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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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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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기와 위에 올라간 작은 몸집의 여자. 기억나는 건 그것뿐. 그러나 그것만 기억하면 될 뿐.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찍었을 법한 오래된 흑백사진. 어쩌다 보았던 거겠지. 아마도 교과서일테다. 교과서밖에 없다. 역사는 그렇게, 교과서는 그렇게, 사진 한 장으로 인물의 외모를, 뿐만 아니라 삶을, 그렇고 그랬던 시대를 남겼다. 고렇게 기억될 뿐이다.
모든 교과서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두껍다. 그 중 역사교과서는 특별하다. 일종의 대하소설이다. 서술이 딱딱하고 등장인물은 많고 2천년의 대서사시인데다 시험 앞에선 무기력하게 암기과목으로 변신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역사란 것은 본래 승리의 서사인 만큼, 세상에 승리는 넘쳐나고, 그래서 승리만 기록하기도 바쁜데, 그럼에도 역사교과서는 역사의 승패 따윈 무시한 채 한 나라의 모든 서사를, 퍼 담을 수 있을 만큼 담는다. 고조선이 백제 고구려 신라가 발해가 고려가 조선이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이 승리만 하고 살았을 리는 없다. 더구나, 패배만 하고 살았을 리도.

그렇게 패배와 승리를 한데 엮은 한 권의 대하소설을
우리는 언젠가 읽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거나
되풀이하거나
간직하거나

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기억한다. 혹은 처음 안다. 뭐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얼 기억하는지 무얼 처음 아는지 지금 말해본다. 교과서의 단 한 페이지, 페이지의 5분의 1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 사진의 주인공, 평양의 고무공 노동자, 두루주에 용룡을 쓰는 강주룡姜周龍.

누구나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읽을 뿐만 아니라 ‘말’도 할 것이란 걸,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독자들은 장담한다. 구수한 말이자, 북한의 언어다. 가장 가까운-외국이라기엔 요즘 상황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한-나라의 언어다. 사진 한 장을 오래도록 포착했을 눈썰미 좋은 작가는 분명 공부를 많이 했을 것이다. 시험으로 끝맺어지지 않는 공부를 나는 언제나 존경하고 응원한다. 어쨌든 작가는 공부를 참 많이 했다. 혹시 거기 사람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소설을 눈으로 쓸 때는, 그러니까 ‘읽을’ 때는 이 단어가 뭔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 하면 “아하”하게 되는 묘한 독서를, 독자들은 체험할 수 있다. 진귀한, 혹여나 나중에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물론 자유에 의해) 친근하게 들릴 법한 언어를 말이다. 그런 언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언어가 문체인 이 소설은 분명히 재미지다.
개인이란 사회에 귀속되기도 하지만 개인 자체로서 귀결되어 주객전도처럼 역사가 그 개인에 귀속될 때가 있는데, 이 이바구는 그런 미묘한 사실을 들려준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게 되고, 감옥에 갇히고, 시댁에서 쫓겨난다는 수동의 이야기 사이에 남편을 위해 독립군에 가담하고, 주인댁의 아내가 되기 싫어 평양으로 떠나고, 주도적으로 파업을 실행하고, 끝끝내 혼자서 모두를 대표해 투쟁하여 임금 감하 철폐를 공장장으로부터 약속받는다는 능동의 서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란 바람에 떠밀리면서도 바람을 만들어낼 줄 아는 존재라는 걸 강주룡은 증명해내고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증거로 지금 여기에 남는다. 여전히 인간을, 여성을, 노동자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규정짓는 이들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정도로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그런 사고방식이 현 시대에 뒤쳐져 있으면서도 현 세대의 주인이라고 오해하는 그들만의 부끄러운 전유물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도.

드디어 그 사진은 강주룡의 투쟁에 관한 몇몇 신문기사와 함께 이 소설의 부록에 남는다. 부록임에도, 거기에 달린 <제목>이 꽤 길다. 추천사까지 포함해 249페이지짜리 제목이다. 요약하자면 <을밀대 위에 강주룡이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 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타고 있으면서” 앉아있고, 그 아래 누군가가 ‘저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치던 한 장면>이 되겠다.
특이한 것은, 그 사진 한 장에 이천여 년에 걸친 대하소설이 더해져 한 권의 역사교과서가 됐다면, 이젠 그 사진 한 장이 사진의 모든 이유를 담은 투쟁의 서사와 합쳐져 한 권의 소설로 남았다는 것이다. 승패 중 비교적 평범한, 굵직한 것들만 기억돼왔던(암기되었던) 교과서 같은 역사에서 드디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이 시대에 다시금 기억되어야 할 하나의 인물이 튀어나온다. 체공녀 강주룡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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