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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한 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기와 위에 올라간 작은 몸집의 여자. 기억나는 건 그것뿐. 그러나 그것만 기억하면 될 뿐.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찍었을 법한 오래된 흑백사진. 어쩌다 보았던 거겠지. 아마도 교과서일테다. 교과서밖에 없다. 역사는 그렇게, 교과서는 그렇게, 사진 한 장으로 인물의 외모를, 뿐만 아니라 삶을, 그렇고 그랬던 시대를 남겼다. 고렇게 기억될 뿐이다.
모든 교과서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두껍다. 그 중 역사교과서는 특별하다. 일종의 대하소설이다. 서술이 딱딱하고 등장인물은 많고 2천년의 대서사시인데다 시험 앞에선 무기력하게 암기과목으로 변신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역사란 것은 본래 승리의 서사인 만큼, 세상에 승리는 넘쳐나고, 그래서 승리만 기록하기도 바쁜데, 그럼에도 역사교과서는 역사의 승패 따윈 무시한 채 한 나라의 모든 서사를, 퍼 담을 수 있을 만큼 담는다. 고조선이 백제 고구려 신라가 발해가 고려가 조선이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이 승리만 하고 살았을 리는 없다. 더구나, 패배만 하고 살았을 리도.
그렇게 패배와 승리를 한데 엮은 한 권의 대하소설을
우리는 언젠가 읽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거나
되풀이하거나
간직하거나
잊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기억한다. 혹은 처음 안다. 뭐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얼 기억하는지 무얼 처음 아는지 지금 말해본다. 교과서의 단 한 페이지, 페이지의 5분의 1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 사진의 주인공, 평양의 고무공 노동자, 두루주에 용룡을 쓰는 강주룡姜周龍.
누구나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읽을 뿐만 아니라 ‘말’도 할 것이란 걸,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독자들은 장담한다. 구수한 말이자, 북한의 언어다. 가장 가까운-외국이라기엔 요즘 상황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한-나라의 언어다. 사진 한 장을 오래도록 포착했을 눈썰미 좋은 작가는 분명 공부를 많이 했을 것이다. 시험으로 끝맺어지지 않는 공부를 나는 언제나 존경하고 응원한다. 어쨌든 작가는 공부를 참 많이 했다. 혹시 거기 사람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소설을 눈으로 쓸 때는, 그러니까 ‘읽을’ 때는 이 단어가 뭔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 하면 “아하”하게 되는 묘한 독서를, 독자들은 체험할 수 있다. 진귀한, 혹여나 나중에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물론 자유에 의해) 친근하게 들릴 법한 언어를 말이다. 그런 언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언어가 문체인 이 소설은 분명히 재미지다.
개인이란 사회에 귀속되기도 하지만 개인 자체로서 귀결되어 주객전도처럼 역사가 그 개인에 귀속될 때가 있는데, 이 이바구는 그런 미묘한 사실을 들려준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게 되고, 감옥에 갇히고, 시댁에서 쫓겨난다는 수동의 이야기 사이에 남편을 위해 독립군에 가담하고, 주인댁의 아내가 되기 싫어 평양으로 떠나고, 주도적으로 파업을 실행하고, 끝끝내 혼자서 모두를 대표해 투쟁하여 임금 감하 철폐를 공장장으로부터 약속받는다는 능동의 서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란 바람에 떠밀리면서도 바람을 만들어낼 줄 아는 존재라는 걸 강주룡은 증명해내고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증거로 지금 여기에 남는다. 여전히 인간을, 여성을, 노동자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규정짓는 이들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정도로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그런 사고방식이 현 시대에 뒤쳐져 있으면서도 현 세대의 주인이라고 오해하는 그들만의 부끄러운 전유물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도.
드디어 그 사진은 강주룡의 투쟁에 관한 몇몇 신문기사와 함께 이 소설의 부록에 남는다. 부록임에도, 거기에 달린 <제목>이 꽤 길다. 추천사까지 포함해 249페이지짜리 제목이다. 요약하자면 <을밀대 위에 강주룡이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 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타고 있으면서” 앉아있고, 그 아래 누군가가 ‘저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치던 한 장면>이 되겠다.
특이한 것은, 그 사진 한 장에 이천여 년에 걸친 대하소설이 더해져 한 권의 역사교과서가 됐다면, 이젠 그 사진 한 장이 사진의 모든 이유를 담은 투쟁의 서사와 합쳐져 한 권의 소설로 남았다는 것이다. 승패 중 비교적 평범한, 굵직한 것들만 기억돼왔던(암기되었던) 교과서 같은 역사에서 드디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이 시대에 다시금 기억되어야 할 하나의 인물이 튀어나온다. 체공녀 강주룡이라는 이름을 달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