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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ㅣ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미시마 유키오가 말년에 집필한 ‘풍요의 바다’ 시리즈 중 2권 <달리는 말>. 1권 <봄눈>에서는 사랑의 화신, 감정의 화신이던 아름다운 ‘기요아키’가 주인공이고 ‘혼다’는 이성에 몰두해서 기요아키를 바라보는 그의 친구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20년이 지난 시점을 다루는 2권에서는 기요아키의 서생이었던 ‘이누마’의 아들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 믿고 그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혼다가 진정한 주인공이며 ‘시대의 목격자’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기요아키/이사오는 시대 자체이며, 혼다는 시대의 관찰자, 서술자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1권에서는 1910년대, 다이쇼 시대의 몰락의 기운 속에서 기요아키에게 찾아온 ‘사랑’이 기요아키를 정열로 이끌다가 햇빛이 스러져가며 깃드는 어둠처럼 죽음으로 수렴하게 했다면, 2권에서는 쇼와 시대, 외국 문명과 자본에 휘둘리며 백성이 궁핍해져가는 나라(기업가와 정치인)에 불만을 가진 이사오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풍련사화’처럼 정치적 혁명(유신)을 일으키고자 자신의 순수한 ‘충의’에 올라타 마치 말을 타고 달려나가듯 한층 더 맹목적으로, 혁명과 그 혁명의 최종장인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이사오는 허약했던 기요아키와 달리 검도에 뛰어나며, 정치 혁명을 일으키고 할복을 하고자하는, 순수에 대한 고집이 더욱 드센 인물이다. 그 순수는 일왕에 대한 충성과 우국을 상징하기도 한다(그래서 소설에 일본의 상징과 문화가 많이 등장한다). 혁명을 위해 또래 동지를 모으고 군인들과 교류하는 이사오의 모습은 거대한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기요아키가 아니다. 하지만 기요아키가 사랑이란 감정에 순수하게 달려들었듯이 이사오 또한 충의란 감정에 순수하게 달려든다.
이사오의 순수는 악을 처단하는 것에 향해 있다. 그 점에서는 정의와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추상적이며 모호해서 더욱 악다웠던 악은 제거 대상이던 신카와 남작, 구라하라 등의 인물이 아버지 이누마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사오가 가진 순수를 더럽히기 시작한다. 이사오는 자신의 발밑에 깔린 악에서 부유해 순수의 하늘로 승천하고자, ‘인버네스’를 씌우려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악을 쓴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누군가 그들을 밀고하는 바람에조기에 진압된다. 누군가의 배신, 자신을 아껴준 마키코의 시적인 사랑에 포함된 거짓, 여론과 국가가 그의 진지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동정하는 모습은 이사오의 순수가 장난감처럼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사오는 자신의 순수가 환상이었음을,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 대가로 벌을 받고 있는 중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혼다는 다르게 생각한다. 사랑 받아본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느낄 미움이 그가 가진 맹목적인 순수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보다 더 큰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줄거라 생각한 것이다.
마키코의 위증(그것은 마키코와 이사오 모두를 구하는 증언이기도 한데)으로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거짓을 인정해야만 하는 위기에 빠진 이사오가 위증 속에서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듦으로써 스스로 구원의 길을 내는 그 모습은 그 성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 장면은 1권에서 사토코에 대한 사랑을 위해 처음으로 편지에 거짓말을 적은 기요아키를 연상시킨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거짓’은 현실에서 또다른 현실로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이며, 또다른 현실 속에서 전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재현되는 이러한 장면들은 그 도약이란 과정 자체, ‘환생’을 믿도록 만든다. 거짓의 진실함, 소설만이 갖는 특성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성장의 증거, 씨앗은 배신의 주인공이 아버지와 마키코라는 게 밝혀지면서 한순간에 시들고, 이사오의 내면을 망가뜨린다. 망설이던 이사오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 순수를 실천하기 위해 실종되기에 이른다.
한편, 판사가 되어 이성의 요새에서 살아가는 혼다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이사오라는 ‘환생’은 법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이사오의 순수의 생몰을 지켜보면서 혼다의 굳어져가던 이성 또한 균열이 가는 것이다. 1권에서는 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의문’으로 그쳤다면 2권에서는 법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집행자로서의 ‘균열’로 발전한 것이다. 의문이 비로소 균열이 되는 순간의 그 비이성적인, 반이성적인, 초이성적인 그 떨림을 나도 같이 목격한 듯하다. 그 초이성적인 환생, 윤회의 세계관은 마치 계속해서 꾸며지고 부풀려지는 ‘이야기’ 자체를 표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성도 감성도, 순수도 악도 아닌 이야기 그 자체에 전율했던 것 같다.
이사오가 일으키려 했던 쇼와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여러 성격이 다른 혁명, 정치적 테러, 반란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전두환이 일으킨 반란이 연상된다. 만일 이사오가 군인이었다면 그 반란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오가 충성이 임무인 군인으로서가 아닌 학생으로서 충성을 가지고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 자체,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뒤 죽으려 한 사실은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과 달리 이사오가 ‘순수’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사오의 그 순수가 피로 맺어진 ‘혈맹’이었다는 점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이사오가 혈맹을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이를 아득바득 갈며 속으로 내뱉는 비판-돈에 의한 결탁은 얼마든지 허용되는 현실, 법이 정의를 수호하지 못하고 소수의 혁명이 사기나 도둑질 같은 형편없는 악으로 취급되는 현실, 불만은 가지되 지켜만 볼 뿐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사오는 죽음만이 인간이 가진 순수의 동기이자 귀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순수를 극도로 추구해야 했을만큼 그 시대는 악과 혼돈으로 가득한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순수는 깨끗함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이사오가 열아홉에 일으키려던 순수의 바람은 어리석었을지 몰라도 깨끗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순수는 그 기간이 짧듯이 이사오의 순수도, 생애도 짧았다. 찰나였다. 그럼에도 그 찰나가 길었으면 하는 바람을 혼다도 나도 했던 것 같다. 어떤 악과 절망, 분노에서도 고결하게 살아남아 어리석지 않고 현명하게 시대를 이끌어갔으면 했다. 이사오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씨앗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육군 자위대를 찾아가 극우파로서 정치적 궐기를 촉구하고 할복으로 자결한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한편,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안타깝게까지 느껴졌는데, 이 소설에서 극우파적인 사상, 할복에 집착하고 욕망하는 이사오의 어리석음이 혼다나 다른 인물들에 의해 드물지 않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사상이 어쨌건 간에 소설 속 검사가 이사오의 견해에 비약이 있다고 비판했듯이, 혁명은 소수가 아닌 평범한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야 마땅한 듯하다. 촛불혁명처럼.
각각의 권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다는 게 이 시리즈의 독특한 점이기도 한데, 1권에서 약간은 불분명하게 느껴지던 기요아키와 혼다의 관계가 2권에서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좀 더 집중이 잘 되었다. 1권에 나온 인물들이 2권의 서사에서 퍼즐조각처럼 잘 맞춰서 등장하는 것도 놀랍다. 추상을 정확하게 포착해 현실로 가져오는 문장, 현실을 추상으로 가감없이 밀어내는 문장은 이젠 말할 것도 없고… 인덱스를 붙이려다 보니 이 책은 인덱스는 오만 개는 써야할 듯 싶어서 밑줄을 치기 시작했는데, 책은 곧 선뜻 누구한테도 빌려주기에 미안할 정도로 밑줄로 도배가 되고 말았다.
꿈 이야기로 다음 환생이 암시되는 건 1권과 마찬가지인데, 2권 <달리는 말>에서는 이사오가 남성의 한순간을 위해 휩쓸듯이 살아가는 일시성과 반대되는 여성의 영원성을 체험하는 꿈이 등장한다. 이 대비가 독특한데, 3권 <새벽의 사원>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어떻게 기요아키의 환생이 혼다와 만날 것인지, 혼다는 또 어떤 시대를 목격하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