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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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해지기 쉬운 불행을 그렇지 않게 진심으로 쓰는 김애란 작가의 장편소설. 고등학생 시절 단편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을 때의 그 빠져나갈 길 없는, 너무나 선명하고 묵직한 불행들에 한동안 가슴이 저몄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 호기롭게 이 소설을 들어버렸다.

같은 반이지만 서로 친하게 지낸 적 없는 세 아이-지우, 소리, 채운-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번갈아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고 겹겹의 거짓과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현재에 도달하는 이야기라서 복잡한 데다, 인물들의 사연이 비슷해서 반복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갈수록 이런 공통점, 유사점이 결국 하나의 흐름이 되어 이야기를 아프고 아릿하게 만들었다. 별것 아닌 덤덤한 문장들이, 마치 소설 속 가난에 대한 비유처럼, 머리통이 터질 듯한 눈송이 마냥 천천히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세상이 부여하는 거대한 체념을 부모라는 보호막 없이 습득한 세 아이는 자신들에게 서둘러 찾아온 불행(부모의 불화, 부재) 앞에서 체념으로부터 본능적으로 터득한 거짓말로 자신을 숨긴다. 채운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를 찔렀다는 사실을, 소리는 자신이 손으로 죽음을 예상할 줄 안다는 것을, 지우는 학교로 돌아갈 생각 없이 공사판 노동을 하러 간 사실을 감춘다.

하지만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창조해야만 유지할 수 있다. ‘없어도 되는 것(거짓)’의 탄생은, 그 즉시, 그것이 진짜처럼 ‘있어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이유는 언제까지나 ‘거짓’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진실의 잔혹함을 회피하고자 세 아이가 각자 만든 하나의 거짓은 서로 교환되고 공유되며 부풀려진다.

거짓말을 하는 것만 알지 그걸 어떻게 유지하고 감당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아이들은 저마다 벌을 받는다. 채운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이 건네는 위로를 벌처럼 느끼고, 소리는 투병 중인 엄마가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는 것으로 괴로워하며, 지우는 공사판의 고된 노동, 엄마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반려동물 용식이를 소리에게 맡겨두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다.

진실이 잔혹한 만큼, 거짓은 그것보다 두 배 고통스럽다. 거짓이라는 막의 허위뿐만 아니라, 그 허위 속에 본인만이 알고 있으며 떨쳐낼 수 없는 진실이란 알맹이가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숨 쉴 틈을 주는 건 다름 아닌 ‘이야기’다. 이야기는 아직 세상을 보는 ‘시야’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 놓고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는 ‘형식’이 되어준다. (진실의 내용이 포함된) 거짓의 무게에 짓눌리던 아이들은 애초에 거짓이라고 약속된 ‘틀’ 속에 진심과 진실을 몰래 털어놓게 된다.

지우는 만화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가족에게 닥쳤던 불행을 풀고, 채운은 ‘바람영어’라는 인공지능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서툰 영어 문장으로 불행과 죄를 고백한다. 이 소설이 가슴이 아팠던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고백이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지우가 키우는 도마뱀 용식이, 채운이 키우는 리트리버 뭉치, 소리가 찾아간 어머니의 봉분… 아이들은 답을 들을 수 없는 그들에게 의지한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닌(혹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그들에게 진심과 진실을 위탁한다. 자신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자신이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는 대상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거짓 자체가 주는 긴장감과 그 거짓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지 하는 불안한 예감에 소설의 서사는 추동된다. 그리고 그런 서사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게임이 꿰뚫는다. 다섯 개의 문장 중 한 문장에만 거짓을 섞는 게임. 그 거짓을 알아맞히는 게임. 거짓을 알아맞히면 진실이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게임. 진실(4)의 비중이 거짓(1)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소설에서 이 게임은 학교 교실에서 소개되는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된다. ‘진짜 삶’을 사는 아이들과 ‘가짜 같은 삶’을 사는 세 아이는 이 게임을 다르게 대할 것이라고.

‘진짜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그 게임은 황당하고 신기한, 마치 ‘가벼운 거짓말’ 같은 진실을 밝히는 ‘게임’일 것이다. 게임이 끝나면 거짓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즐거운 진실들만 남을 것이다. 반면 ‘가짜였으면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세 아이에게 그 게임은 사람들을 향해 마치 ‘무거운 거짓말’ 같은 진실을 고백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무대가 막을 내리면 거짓은 유일하게 붙들고 싶은 문장이 되고 나머지 진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문장으로 남을 것이다. 거짓과 진실에 부여하는 무게의 차이 때문이다. 무게가 달리자, 거짓과 진실은 모습을 뒤바꾸며 혼란을 야기한다.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한다. 부정하고 싶은 진실을 거짓이라 여기고 달콤한 거짓을 진실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 아이에게 이 단순한 게임조차 게임으로 대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야말로, 이 소설의 불행이 납작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읽힌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무거움이 느껴졌던 건, 그리고 그 무거움에 마음이 기울었던 건, 세 아이에게 찾아온 거짓 같은 불행이 일시적이지 않으며, 엄정한 현실임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인 나 아니면 그 셋 모두를 응시할 시선이 없다는 걸 느꼈기에. 삶에 닥친 불행의 기운을 별다른 노력 없이 웃어넘길 줄 아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삶에 닥친 불행을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아이들도 있다. 전자의 아이들에게 응원이 필요하다면, 후자의 아이들에게는 경청이 필요하다. 김애란의 시선이 그 경청에 특화되어 있다는 걸 나는 느꼈다.

아이들만 진실을 거짓으로 감추고 견디고 살까. 어른들도 거짓을 견디고 산다. 대신 어른들은 언젠가 그 거짓을 찢고 그 속의 알맹이, ‘진실’을 ‘고백’한다. 거짓의 형식이 아닌 진실의 형식으로. 자신과 온전한 소통이 가능한 이들에게. 채운의 엄마 태선은 채운에게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고 고백하고, 소리의 아빠 호민은 소리에게 투병 중일 때 엄마가 조력사를 원했다는 것을 알리고, 지우의 새 아빠 선호 아저씨는 지우에게 자신이 겪은 불행과 어머니 지연의 죽음이 사고였음을 알린다. 선호 아저씨는 진실을 고백할 때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을 이용하는데, 게임 규칙을 어기고 진실인 다섯 문장을 말해버린다. 그 장면에서 어른이란 규칙에 무조건 자신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위해 규칙을 부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어른의 고백 과정이 나는 사뭇 슬펐는데, 아이가 감당한 불행을 알고 있던 어른들이 아이가 자신들을 ‘버리도록’ 선택권을 줌으로써 스스로 벌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어른이란 잘못에 대한 벌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소한 거짓말을 만든 세 아이는 결국 거짓의 끝, 감당할 수 없는 끝에 다다른다.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이 죄다 벗겨지고 진실의 알맹이만 남게 된다. 그러자 아이들은 묵묵했던 전과는 다르게 서로에게 말을 건다. 진실은-스스로를 감추려는 속성을 가진 거짓에게 포획되더라도 결국-스스로 드러나려는, 말해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감출 수 있는 거짓이 아니라 드러낼 수 있는 진실이었다. 거짓의 허위에 자신을 기만하며 진실을 한없이 유예하는 것보다, 진실을 그것이 잔혹하더라도 감당하며 드러내는 것이었다. 먼저 거짓을 찢고 진심을 고백한 어른들이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야말로 미약하지만 확실한, 보이지 않으나 느껴지는, ‘성장’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전서림 이달의 소설 다섯 번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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