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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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 (저자)이 살았던 최악의 ‘유감스러운 시대’의 ‘사회소설’의 진수였다. 이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기적과도 같은 두뇌유희를 일으킬만한 메타픽션임이 확실하다. 비범한 작가의 비범하지 않은 독자에 대한 황홀한 지적게임으로의 안내서이기도 그와는 정반대로 넘어가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솔직히 독서리뷰 대회 기한이라는 장애물만 없었다면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차분히 재독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리뷰대회를 핑계 삼아 이후에 재독을 반드시 해봐야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가 제안했듯 한 권 더 사서 펼쳐놓고 비교해 보며 읽어야하는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주석과 색인을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넘나들며(이렇게 책 아랫부분에 손때가 묻어난 책은 이 책에도 몇 번이나 나왔고 내가 16일이나 걸려 읽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한 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후 내 독서인생 중 그 책보다 손때가 특히 999행의 운문과 색인에 단연 많이 묻어서 두 군데가 아주 새까매진 최초의 책이다.) 내가 만들어낸 해석은 내가 전문 서평가나 비평가, 아니면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면서도 그리고 그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을 만한 모든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독자들을 마지막 퍼즐조각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공회전’ 시키면서 희열을 느끼는 위대한 V.N. 자신이 아닌 이상 아무리 해도 단 하나로 압축할 수가 없다.

해설을 보면 의외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S의 딸 헤이즐이 S의 시와 K의 주석에까지 초월적 영향을 미쳤다는 다소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종합적 해법’에 도달했다는 브라이언 보이드의 비평서가 이 책을 더 깊이 읽기 위한 독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는 것이나 르네 알라다예라는 사람이 최근 비평서에서 추리소설과 같은 이 소설의 서스펜스와 살인자는 과연 누구인지를 찾아내려는 탐정 서사의 설정을 도치했다고 분석했다는 것에 그저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권의 소설에 대한 비평으로 분파가 나누어지고 그 분파에 따른 비평서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신세계였기 때문이다.

위의 해석들에 비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므로 아예 논외로 하고 순전히 나만의 가설에서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은 ‘어깨가 구부정한 우리의 살인자’이자 ‘굽은 등의 추한 음모자’, ‘눈먼 거지’, ‘절름발이’, ‘주정뱅이 영웅’, ‘미치광이’이기도 한 한 인물이 그림자(셰이드, 옹브르; 결국 우리 모두-어차피 우리 인간 모두 죽음에 빗대어 봤을 때 죽음과 삶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또는 유령(같은 인물이 되는) 연극(호디나 혹은 호딘스키가 수집한 12세기 익명 작가의 걸작 ‘콩스스쿠그-시오’ ; 왕의 그림자 연극 아니면 왕의 거울-천재적인 거울 제조업자 보카이의 수다르그가 만든 깊이를 알 수 없는 불빛으로 환히 빛나는 실로 환상적인 세 폭짜리 맑디 맑은 거울인 비밀스러운 반사 장치, 그리고 수많은 창문들)을 통해서, 그리고 ‘편견’에 맞서려는 ‘그라두스’의 ‘자아분열’과도 같은 그와 다른 인물들 간의 대화와 갈등, 그리고 그들을 묘사한 부분들이 모두 단 한명의 인물인 ‘그라두스’에게서 비롯되어 거울 속 깊이 무수한 나체를 모으고 우아하고 비탄에 잠긴 일군의 소녀로 이루어진 화관이 작아지거나 제각각 다른 님프로 나뉘기도 하면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일련의 수수께끼 같은 퍼즐 조각들을 맞추듯이 따라오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즉 이 소설 모두 ‘그라두스’의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설이 첫 번째.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 편의 첩보영화처럼 ‘젬블라 혁명’으로 친애왕 카를 2세가 도망자 신세가 된 상태에서 그와 닮은 그라두스 아니면 오돈이(개인적으로 오돈보다는 그라두스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색인들을 짜 맞춰 보면 그라두스의 이니셜 G가 신이기도 하면서 ‘잿빛 gray’와 ‘점점 gradual’ 막연히 다가오는 죽음의 첫 글자 G를 나타내므로) 왕 행세를 하며 블라빅에서 떨어져나간 쌍둥이섬 니트라와 인드라-각각 ‘안’과 ‘밖’을 의미하는 단어들, 나는 이런 곳에서도 ‘자아분열’의 이미지를 받았다. 이 모든 단서들을 색인과 각주를 따라 가다보니 알게 되어 소름이 돋기도 했다.-처럼 각자 생활하다 말도 안 되게도 왕 행세를 하던 범죄자이자 죄인 혹은 ‘잭 그레이’이자 ‘그라두스’는 정신병원 탈출자가 되어 쓰레기통에서 면도날을 빼돌려 목을 긋는 ‘최악, 최고의 바보짓’을 함으로써 ‘죽음의 징표’인 S(내 해석으로 ‘셰이드’라 쓰고 ‘킨보트’라 읽고 ‘그라두스’로 인식한)네 지하실의 ‘장난감 태엽장치’의 힘없는 탁탁거림이 아니라 인간 비슷한 존재의 절망적인 몸짓(진짜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의 그림자나 유령)으로 종말을 맞이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이것으로 됐다’며 ‘잭 그레이 퇴장’이라는 섬뜩하면서도 산뜻하고 냉소적이기까지 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자살(바로 ‘자’신의 ‘살’인자)로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내용을 운문과 산문, 저자가 직접 쓴 색인과 각주들을 혼합하여 웬만한 독자들은 읽기 어렵게 만들고 새로운 독자,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독자가 되고자 하는 독자들이라면 끝까지 집요하게 포기하지 않고 읽게 만드는 소설이며 진정한 ‘야수’, ‘미치광이’, ‘광인’이 된 상태에서 쓴 것 같은 천재적인 소설이다.

읽는 것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머리 아프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특히 색인에 가서 끝까지 읽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데 포기하기는 또 싫어서 짜증나기도 하고 눈물까지 날 정도인 책을 쓰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도 높은 몰입과 에너지를 요했을 것이 뻔하다. 그 어려운 걸 견뎌내고 소설을 끝낸 V.N.에게 존경과 감탄의 뜻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는 신체적, 물리적으로는 없다. 그가 마지막 주석에서 (이게 과연 진심인지 아니면 이 또한 허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고백했듯이 그의 주석도 그 자신도 점점 지리멸렬해 지고 있으며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며 그의 시인을 죽이고 그의 일을 끝냈으니. 그러나 고맙게도 그가 같은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변장과 외관으로 꾸밀지 모르지만 계속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한만큼 나와 우리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소설 창백한 불꽃 속에서 정신적, 심리적으로 그것도 치열하게 만날 수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고 싶다.

또 다른 한 가지의 해석으로는 위대한 시인 알렉산더 포프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에서 찾아보고 싶다. 포프 또한 당대 지식인들의 현학성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장편 서사시를 익명으로 발표했다가 서문, 주석, 부록, 색인, 철자교정 등의 치밀한 모방논평을 실어 재발간한 적이 있다고 하고 셰익스피어가 쓴 ‘아테네의 타이몬’에서 바다를 도둑질하는 ‘태양’, 바다를 강탈해 간 바로 그 태양에게서 은빛을 훔쳐가는 ‘달’, 그리고 그 달을 녹여버리는 도둑 ‘바다’를 원점에서 시작해서 원점으로 돌아가도록 ‘공회전’시킨 부분도 그렇고 이 세 도둑들(지리멸렬한 거래자들)을 각각 킨보트, 셰이드, 그리고 그라두스에 대치 시켜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나의 한계는 이 관계를 소설과 관련해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라 참 아쉽다. 어쨌든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흥미로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거창해서인지 가능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책에서 한걸음 나와 숨을 좀 돌리면서 멀리 크게 보면 가장 그럴 법도 한 ‘주변의 합성 젤리 같은 두뇌’를 가진 나의 마지막 해석은 이것이다. 무슨 레포트 수준으로 긴 내용이기 때문에 읽는 분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고 싶다.

머리말 앞에 발췌해 놓은 제임스 보즈웰의 ‘새뮤얼 존슨전’과 549행 ‘대문자 G까지 포함해 모든 신을 무시하면서’의 주석에서 저자가 ‘바로 여기에 문제의 요점 Gist가 있다’고 써 놓은 걸 보고 해석해낸 나만의 방식인데, 6월 23일에 K와 S가 혹은 므시외 보샹과 미스터 캠벨이 체크 게임 한 판 (회문유희를 비롯한 언어유희, 단어골프; 루이스 캐럴이 고안한 것으로 단어 사다리 게임이라고도 함, 의도적인 오탈자와 오식, 각종 젬블라어와 조어들과 앙장브망, 압운, 비유, 연상, 중의법들, 999행의 운문과 그에 대한 주석과 색인을 통한 몽타주 기법 등등 이 모든 게임들의 시작)을 비긴 후 K의 집 테라스에서 나눈 대화를 언급한 ‘메모’가 당면 주제와 전체 사태의 주제에 대한 ‘요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요점’을 시작으로 가공의 인물들과 상상의 나라와 자연환경, 그리고 초자연현상 등을 변형, 확장하여 갖가지 무대장치와 커튼막 혹은 인공연기 같은 것들을 적재적소에 혹은 종잡을 수 없이 횡설수설하는 식으로 배치 서술했는데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에서의 ‘맥거핀’ 역할을 하는 알고 보면 별 의미 없는 복선인 척 위장하는 상황들(카를 왕이 도주하며 숨거나 보트를 타고 이동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소문이 도는 것과 ‘아득히 먼 젬블라’를 떠나 ‘푸른 애팔래치아’까지 나아가는 그라두스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시 전편을 통해 따라가며 시간과 사건들을 병치시키는 등)부터 소설 전체의 설정과 소재들(없어진 장갑, 크리스털 위에 크리스털이라 표현한 손목시계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 하나, 유년 시절 외숙부의 성에서 봤던 환상적인 공연을 마친 마술사의 분칠한 뺨, 하얀 카네이션이 된 마술 꽃, 그의 손가락, 죽은 여새와 색인에서 여새 옆에 영어표기를 Waxwings라고 병렬시켜 왜 여새가 밀랍 날개인지 박제표본을 지칭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하는 것, 그림자, 잿빛 솜털의 얼룩, 크리스털 나라-젬블라, 머나먼 북쪽의 나라, 뾰족한 단검(botkin, bodkin)과 단검에서 첩보물의 낌새나 국왕 시해(regicide)의 전조가 느껴지는 것에 주목하라는 화자의 언급, 첨적(stillicide), -> 이 두 단어의 각운 -cide가 자살 suicide의 각운과 같게 만들어 킨보트가 그라두스는 동일인물일지를 궁금하게 하는 것, 골즈워스와 워드스미스 사이 정사각형 녹지 위의 목조 가옥과 그것의 창문들, 성스러운 나무라는 히커리 나무, 헤이즐이 탔다던 그네, 그리고 55행인 이 행 뒤에 삭제 되었다는 내용 (정신분석학자와 공모하여 부모의 침실을 설계하여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 현대적인 건축가라는 설정), 새 TV, 나의 침실, 괴짜 모드 고모의 잡동사니들이 있는 곳은 ‘손대지 않은’ 성소라는 설정, 5분이 고운 모래 40온스와 같음, 무한대를 상징하는 렘니스케이트 곡선 -‘공회전’과 일맥상통, S네 지하실 태엽장치 장난감, 괜한 “삼단논법 :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벌통으로 비유한 시공간, 길들여진 유령, 개인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 명언 같은 경구 “인생은 어둠 속에서 갈겨쓴 메시지다.”, 텅 빈 에메랄드 상자, 니스의 영국인, 레드 애드머러블로 불리다가 후에 레드 애드머럴로 비속화 되었다는 에스터 판홈리를 재조합해 만든 진홍색 줄무늬가 있는 (검은) 바네사이자 신성한 큰멋쟁이나비인 벨벳으로 된 불꽃 같은 화려한 생물이면서 ‘창고의 영혼’이 말한 S의 최후 장면에 나오는 아탈란타의 별처럼 날아간 ‘아탈란타 나비’-젬블라어로 하르발다, 즉 문장 나비, 결혼한 지 40년이 되었다는 설정, 저녁노을의 불꽃 위로 제트기가 남긴 분홍색 꼬리, ‘시간 어멈’역을 맡은 수줍음 타는 한 어린 손님인 순하디 순한 ‘소녀’가 ‘등이 굽은’ 식모 차림으로 등장해서는 ‘남자’화장실에서 바보처럼 울어버렸다는 운문에서 ‘등이 굽은’ 사람은 이 소설에서 단 한 명 ‘그라두스’밖에 없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은 연극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극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 낡은 창고, 총, 깜둥이, 루비 반지, 백발에 ‘등이 굽은’ 야경꾼, ‘시간 아범’- 다시 한 번 ‘등이 굽은’이라는 표현과 ‘시간 ㅇㅇ’이라는 표현 등장, L'if와 I.P.H. 즉, 내세 준비 연구소-내세를 준비하는 연구소인 만큼 if ‘만약’이라는 발음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사실, 어머니와 아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면충돌, 작고 진지한 소년, 그 집 지하실에 있는 웅덩이, 창백한 젤리와 공중에 뜨는 만돌린, 아이와 함께 있는 아버지, 더욱 확실한 최종 목적지, ‘베일 너머의 땅’에 있는 하얀 샘 fountain (하얗고 높은 솟는 샘, 우리의 샘)과 하얀 산 mountain (절묘한 한 수였던 오식 하나가 ‘영원한 삶’의 근거 역할을 했던 몽 블롱에 대한 시)의 연관성, 그 세계와 이 세상의 대조, 환각에 빠지거나 꿈을 꾸거나 반사 상태에서의 사후 세계에 대한 암시, 바람 빠진limp 비행선blimp처럼 낡고 불안정한unstable 심장으로서 덜컹거리고 뒤뚱거릴wobble 적당한 시기의 무르익음, 편지와 주소, 훌륭한 기구; 면도용품, 작시법 A와 B, 그리고 무언의 명령, 갈색 신발 한 짝, 비누와 ‘우리의 크림’, 안전면도날, 큰 트럭들과 정기선, 말편자 등)까지 세세한 모든 것들을 저자는 교활한 노인처럼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묘사하고 보여주며 독자에게 추리를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척 하면서 좀처럼 ‘요점’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기 위해 괄호 안의 것들에서 보이듯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요점’을 말하고자 했던 부분부터 위의 많은 문장들까지 읽어 봐도 ‘요점’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 가소롭겠지만 나름대로 반전을 꾀하며 나도 일부러 그렇게 서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말 길고 긴 시간을 지나 왔고 많고 많은 생각과 기록들을 해 오며 독서리뷰대회 마지막 날까지 끈질기게 고심했던 진짜 감상문을 써내려갈 시간이 온 것 같다.

소설인데 소설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440쪽짜리 책 한 권에는 얼마나 많은 인물상과 나라들과 작가들, 위인들과 곤충들, 식물들, 음악들, 신화들이 존재해 있고 살아 움직이는지 모른다. 이 책의 (가상의) 주석자인 ‘킨보트’가 쓴 머리말로 시작되어 아예 원래 저자인 V.N.은 저자인지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기법으로 독자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한다. K가 S를 힐책했듯 그 또한 그의 ‘전 존재’가 곧 하나의 ‘가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상대로 치열한 두뇌싸움을 시도한 책은 또 생전처음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짜증도 났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면서도 당연하게도 재미있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두뇌유희를 맛보았고 열린 결말을 만나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정도가 광기에 가깝고 편집증세와 망상장애도 극도로 심하고 불안과 의심, 그리고 질투 속에서 모든 것을 환각에 가까운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통해 본인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 증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신격화 하기도 하고 칠절, 배려가 몸에 밴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는 반면, 알면서도 비열하게 행동하기도 하다가 아닌 척 하다가 체념했다가 극에 달하면 무너져 내렸다가 나와 내가 유일한 친구라 믿는 이와의 우정관계 외에는 관심도 없고 냉소적이며 둘 이외의 모든 이가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자기들 좋을 대로 지껄이는 거라고 치부해 버리고 아름다운 시 한 편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엄청나게 열정적, 열성적, 헌신적으로 돕고 있다고 강하게 믿으며 자신의 노고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동시에 당연히 돕는 게 맞다고 믿기도 하며 자신이 세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믿으며 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몰라줬을 때의 좌절감과 그 느낌을 안 받는 척, 모르는 척, 괜찮은 척 하면서 끊임없이 착각과 오해를 하면서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복수와 응징에 신경을 쓰며 사건 하나마다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관련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분명히 현대용어로 소시오 패스 기질과 조현병 증세가 다분함에도 자신을 절대 모르고 있다, 끝까지. 책 속에서 그는 지금도 그렇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프린스턴 대학교의 수학과 교수이자 천재 중에서도 ‘진짜 천재’이면서도 (제2의 아인슈타인, 겨우 20살에 단 27쪽짜리 논문에 ‘균형 이론’의 단서의 발견을 실으며 자신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찾아낸 결과 ‘내쉬 이론’을 세웠으니) ‘괴짜 천재’인 (사랑할 줄도 모르고 소심의 극치에 무뚝뚝하기까지 한 남자가 오만하고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 사랑에도 힘들도 하고 자신이 너무 똑똑해서 냉전시대 최고의 엘리트들 중 한명으로서 소련의 암호 해속 프로젝트에 비밀리에 투입됐다고 믿고서는 소련 스파이에게 목숨을 위협 받는다는 망상에 사로 잡혔으니) ‘존 내쉬 박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시가 있지만 시가 아닌 독창적인 소설을 써낸 V.N.도 문학계에서의 ‘진짜 천재’이자 또한 ‘괴짜 천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이 책을 직ㄱ접 여기 저기 앞으로 뒤로 수도 없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이 페이지 저 페이지마다 손가락들로 다 끼워 놓고 읽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봐야 만이, 게다가 한 번으로 끝내면 안 되고 재독을 해 봐야 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 곳곳마다 나의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정말 혀를 내두를만한 치밀함과 디테일함, 그리고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이 과도한 것이 아닐 정도다. 감히 인간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도 본다. 이 책을 쓸 때 그는 아마 신에 가까운 정도로 몰입하여 그런 경지에서 미친 듯이 써내려가고 골몰했을 것이다. 이 책은 아무리 표현해 보려 하더라도 제대로 느낌과 감동을 옮기는 것이 힘들 것이고 이와 비슷한 흉내라도 내보려 해도 절대로 이런 구성과 전개를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반드시 재독한 사람에 한하여 그 한 사람의 지평을 열어주고 생각을 깨워주고 영혼을 흔들어주는 역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떻게 이렇게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조용히 이 책의 재독을 권함. 분명히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독자가 되어 있을테니. 신세계경험이란 이런 것! 부디 알에서 깨기를! 위대한 그가 위대하다고 존경했던 셰익스피어에게서 영향 받은 제목 ‘창백한 불꽃’은 달이 태양에게서 훔친 빛으로 이는 화자뿐만이 아니라 화자인지 아닌지 그가 진짜 화자는 아닐까 의심스러운 999행의 시로 나머지 한 행의 완성은 ‘순환’으로 만들어버린 시인도, 그리고 우리 모두 띠고 있을지 모르는 ‘욕망과 희망과 망상의 빛’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요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는 그 ‘요점’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고 싶다. ‘죄악’, ‘범죄’, ‘인간의 본성’, ‘연민’, ‘삶과 죽음의 경이로움’에 대해 S와 K가 대화하다가 ‘섭리’가 있음으로 인해 ‘영혼’이 ‘육신’에 감금된 동안 경험에 의존함에 따라 ‘개별성’에 유치하게 ‘집착’하지만 ‘믿음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희미한 인광’에서 시작해 ‘청백한 빛’을 거쳐 ‘휘황찬란한 광채’로 드러나는 ‘신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더 높은 지성’을 인정하여 ‘영원에까지 미치는 우연’이라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개념을 받아들여야 ‘세계는 우발적으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우주가 생성되는 데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때 그리고 ‘우주정신’이든 ‘제1원인’이든 ‘절대’든 ‘자연’이든 ‘정신’이라는 것에 맞는 이름을 찾으려 할 때 ‘신의 이름이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한 K의 대화 전체가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의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패러디한 것이라는 것과 오식 하나에 담긴 ’영원한 삶‘이라는 암시가 바로 실제 핵심이자 대위법적인 주제였으며 ‘텍스트text’가 아니라 ‘텍스트의 결texture’‘이며 ‘꿈’이 아니라 ‘거꾸로 뒤집힌 우연’이며 ‘얄팍한 난센스’가 아니라 ‘의미의 그물’이라는 것과 소설 속 인물들이 유음어 유희를, 게임에서 상호 연관 패턴과 오묘한 예술적 수완을 발견했던 것처럼 저자도 삶 속에서 그러한 것들과 같은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운문을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단락 안에 꽁꽁 숨겨놓고 독자들이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과거에 집착하는 자’가 ‘우리는 매일 죽는다는 가장 흥미로워하는 진실’을 놓치므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망각’은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되똑대는 작은 테이블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타자기를 앞에 두고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고 도는 내 머리 안팎의 장소나 사물들 사이에 앉아 만들어내고 살아가는 가상의 삶 속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사실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지금의 나)와 주변 환경, 성향 등의 사실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오직 나만의 해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언에 나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저자 V.N.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999행 뒤 빠져 있으면서 순환하는 마지막 1행)을 하는 이는 바로 독자(나)다.

백발이 성성한 K의 친구, 사랑하는 늙은 마술사 S가 그의 색인카드 한 뭉텅이를 그의 모자 속에 넣고 흔들어 한 편의 시를 끄집어 냈듯이 V.N.은 그의 마음속 제목이었던 ‘솔루스 렉스’를 그의 영혼 속에 넣고 흔들어 긴 인생의 불씨를 지피고 짧은 인생의 불씨를 꺼버리기도 하고 한 왕국의 왕을 죽이기도 하고 얼음덩어리를 떨어뜨리고 농부를 맞혀 죽이고 소설속 인물의 열쇠나 안경이나 파이프를 숨기는 등 모든 사건과 사물을 먼 옛날의 사건과 소멸한 사물과 연결시키면서 이런저런 우연들과 가능성들을 한낱 장식물로 취급할 수 있는 한 편의 ‘소설 같은 독서리뷰’ (감히 나의 이 독서리뷰를 말하는 것이다)를 끄집어 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내가 생각하는 역설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것은 삶의 추함보다 죽음의 아름다움을 선호했다는 점에서 깊은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했던 헤이즐 셰이드를 길들여진 유령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헤이즐은 폴더가이스트 현상을 일으켰거나 경험했던 인물로 위대한 미국시인 존 프랜시스 셰이드의 딸인데 이 인물 또한 환영이나 다름없는 가공의 인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과연 우리가 자살을 함으로써 아름다운 죽음을 선택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왜 그랬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가 최악의 유감스러운 시대라서 그런 시대를 살아가느니 자살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였을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에 상징적으로 와 닿는 사건과 기묘한 일이 있듯이 ‘마흔 명의 추종자’ 혹은 나에게서 분리된 마흔 개의 자아를 ‘비밀 조력자들’로 두고 독자들의 상상과 허구의 세계를 자신처럼 그려보기를 바라서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카라마조프 수사’가 중얼거린 말에 용기를 얻고 나의 욕망을 언젠가는 꼭 충족시키고 말겠다. “모든 것이 허용 된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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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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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으로는 존재 하지도 않았던 ‘제국’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 존재했다.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속마음으로 오직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도 죽지도 않고,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제국이다.
그리고 그것 자신의 존속과 영속성을 위하여 마찬가지로 존재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그것 자신의 폭력과 억압을 위한 구실과 수단으로 만들어 낸 허상으로 존재해 주어야‘만’ 했던 사람들, 우주와 대자연의 섭리에 따른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 혹은 멸망’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는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 그것 자신의 모순을 정당화 하려는 핵심적, 필수적인 해결책으로서 존재해 주어야‘만’ 했던 ‘타자’로서의 사람들인 ‘야만인’이라는 것도 또한 역사 속에 존재했다.
실체가 없는 그들을 기다리며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자연의 섭리에 따른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이 불가능해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고 분개하면서도 한 명의 힘을 바꿀 수 없음을 알기에 30년 넘게 식민지 변방의 행정과 사법권을 관할하는 최고책임자인 치안판사직에 있으면서 제국의 모순도, 그 제국의 일원으로 제국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도 드러내는 화자를 이 책에서 처음 만나고 또 함께 아파했고 함께 생각하고 반성도 해봤다. 특히 그가 혼잣말을 하면서 체념하다시피 과거를 회상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화자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느낄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원래 사람들은 비겁할 수도 있고 그래서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할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 하다가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치안판사직을 내놓으려고까지 생각해본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어차피 그런 직위에 있으면서 또 수치스러운 공무를 감당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변할 게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감옥에 갇히는 사건에 휘말리게 될 때까지 그냥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꼭 지금의 나와 같은 모습을 봤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다. 바꾸고 시정해야 할 부분이 눈에 보이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젊었던 20대 시절에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으나 30대가 넘어간 지금으로서는 책에서 얻은 간접경험으로, 그리고 15년 넘는 직장생활을 해 오며 내가 겪어왔던 직접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러자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동료들과의 협력을 꾀하고 싶지만 그 또한 사실상 너무 어려운 것이 그들은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 눈에 띄기 싫어서, 미움 받기 싫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하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한계를 느끼고 체념 비슷한 감정과 화자의 저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아서 화자의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한 이 화자는 이분법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적인 인물로서의 자기를 내세워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정당성을 안으로부터 폭로하면서도 그 허구성과 정당성에 대한 화자의 ‘공모성’ 또한 자기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하며 더욱 부각시키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소설 전체를 현재형으로 서술해서 마치 영화관에 앉아 때로는 의아하게(맹인소녀에게 육체적인 욕망을 느끼면서도 욕망을 표출하지 않고 덮어버리고는 오히려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얹어주는 것 같기도 했던 화자의 모습과 독백들) 때로는 불편하게(굳이 야만인들의 편을 들어서 제국주의자인 졸 대령에 의해 자신과는 영원히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감옥에 갇힌 그가 갖은 폭력과 고문, 그리고 치욕을 받았던 장면들) 관람할 수 있는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을 작품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역설적이게도 재밌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는 화자가 순응도 저항도 아닌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경계를 헤매기도 하다가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에게 별다른 참견도 않고 제국이 식민지와 야만인들에 대해 그러하듯이,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다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처럼 ‘야만인을 기다리는 목적’을 가지고 ‘목적 없이’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대비하여 보여준 것도 아주 좋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보고 내가 크게 느낀 점은 ‘야만인’이야말로 우주와 신과 자연의 섭리대로 태어나고 살고 죽는 진정한 ‘자연인’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책의 마지막 공간에 손으로 썼던 짧은 감상문을 옮기는 것과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고 나서 예전에 영어학습도 할 겸 사 놓고 아직 단 한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은 총, 균, 쇠 원서를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읽어보리라고 다짐하게 했던 작가의 마음에 드는 점을 번역가의 해설의 힘을 빌려서 옮기는 것(물론 그대로 보고 타자를 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문장을 바꿔 쓰는 것)으로 독서감상문을 마치려고 한다.
“마치 한 편의 예술 영화 작품을 관람했다는 느낌으로 읽기를 마쳤다. 상상하기 힘든 시대, 역사, 사건, 탐욕, 허세, 사기, 기만, 고통. 소위 문명이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에서 만들어진 실체도 없고 진실도 아닌 허상 같은 ‘미개’나 ‘야만’이라는 모호한 의미와 개념 때문에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추잡하고 포악하고 잔인하고 무식하게 소중한 생명들을, 더군다나 대자연과 소통을 하며 평화로이 살아가던, 원시적일뿐 어떤 죄도 없던 생명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짓밟고 유린했다는 데에 부끄럽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써내려간 글들인데 기다리던 야만인과의 만남이나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잡을 수 없는 꿈이자 목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룰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떠돌아다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각인된 허상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부럽다고 생각했던(작가와 직접 만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할 때 조언도 많이 구하고 대화도 많이 나눴다고 해서) 이 책의 번역가는 해설에 이렇게 썼다. 화자의 ‘공모성’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가 바로 식민주의자의 후손이자 남아프리카 백인 작가라서 더 숙명적이고 절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로부터 거리를 좁혀서 작가 자신도 또한 책임이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 득이 될 리가 없는 질문과 답을 찾으려는 과정을 글로 쓴 것인지에 대해 작가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때로는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은 행위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윤리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에 내게 너무나 와 닿고 멋진 해석이다. 그에게 그렇듯이 나에게도 ‘문학은 윤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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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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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나와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거지소녀라니... 주문했던 이 책이 집으로 도착한 걸 보고 제목을 무심코 소리 내서 읽었다. “거.지.소.녀.” 그걸 몰랐던 엄마는 “뭐?” 하시면서 씁쓸한 웃음을 소리 내어 웃으셨다. 지금 내가 딱 금전적으로 ‘거지소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밝힌다. 나는 엄마께서 혹시나 오해하셨을 까봐 사실인데도 더 사실처럼 “책 제목이 거지소녀에요.”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서 읽기 시작했다.
로즈에게 패트릭이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라면서 말했던 그 겸손을 가장한 오만에 로즈 자신도 부인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예 ‘상대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 척하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그녀 자신’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지나치게 솔직하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어찌 보면 나도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을 하게 되는 시점에서 안타깝게도 그리고 바보 같게도 15년 넘게 열일하고 받았던 월급들을 부모님 도와드리느라 맏딸로서 집을 일으켜 세우느라 모두 쓰는 바람에 모아놓은 돈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걸 체감하고 나서 나 하나만 보고 내 비전 하나만 보고 결혼을 결심해 준 고마운 사람에게 결혼준비와 자금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억울한 부분을 여과 없이 쏟아내며 결혼하기 싫다고 앓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나를 더 좋아해 준다는 이유로 나는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준비도 안 된 상태였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결혼하게 돼서 이게 무슨 거지같은 꼴이냐고, 내가 왜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아야 하는 거냐고, 이렇게 돈을 써 가면서까지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거냐고, 나는 남들 하는 대로 정해놓은 제도대로 하기 싫다고 쏟아 내면서(이 책에서 ‘모두에게 이 무슨 사기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라는 구절을 보고 당장 들었던 생각은 ‘맞아!! 진짜 나에게는 갖춰진 게 하나 없이 이렇게 태어나게 되어서 이런 일이 내게 생긴 거야!’였다. 무척이나 공감이 됐었다.) 그 사람 마음을 무겁게 하고는 알아서 하라며 ‘나를 그 사람의 처분에 맡기는 척’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인연이 생기면 결혼할 생각은 있었고 가족들에게 돈을 모두 안 써도 되는 거였는데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 대해 온전한 책임을 질 생각도 하지 못 했고 계획도 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결과를 불쌍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짐을 지운 것이다. 이 심한 말들을 그에게 내뱉었던 밤에 자기 전 나의 하루를 돌이켜 보니 ‘그게 그의 잘못도 탓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라면서 반성을 하게 됐고(묘하게도 위에서 읽었던 똑같은 문장인 ‘모두에게 이 무슨 사기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라는 구절이 떠올라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참 신기한 문장인 것 같다.), 그에게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그 때 다행히 서로 대화로 잘 해결해서 결혼은 곧 할 예정이다.
꼭 내가 그랬듯이 로즈도 이따금씩 이유 없는 말다툼을 일으키고 싸움을 유발하고 싶어 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욕망을 보여주며 그녀 나름의 자존심과 그리고 생기는 수치스러움, 혹은 자신의 속물근성에 대한 혐오나 경멸감을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욕망에 압도되거나 지배되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는 로즈의 모습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기도 했다. 로즈는 인간이라면 특히 감수성 예민한 여자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만한 잘못되고 무모한 선택을 자주 했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임을, 후에 돌이켜 보면 ‘도대체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할 짓임을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더 잘 아는 것인데도 바보처럼 어리석게 끈질기게 매달리고 사정하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 귀퉁이에 계속 써 나갔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거 모두 순간일 뿐인데... 너무 어리석은데... 어쩜 이럴 수가 있지...’ 그럴 정도로 지극히 순간의 감정에 따른 즉흥적인 행동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했는데, 그럼에도 로즈는 상처를 받아도,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버림 받았다는 걸 확인해도, 어떻게든 이런 저런 회유의 말들과 행동들을 하면서 자기의 본모습을 찾아 가려고 애를 쓴다. 잘 살펴보면 상처를 받은 만큼 그녀도 상대방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새엄마 플로에게도 아빠에게도 패트릭에게도 그리고 본의 아니게도 딸 애나에게도 말이다.
원래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상처’라는 것은 (물론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상처 내려는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본의 아니게 생기는 거니까 말이다.
나를 당혹스럽게 했었다는 로즈의 순간의 감정에 따른 즉흥적인 행동들은 ‘한순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부유한 패트릭에게 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 동년배나 선배언니들의 시샘을 즐긴 것이나 기차의 옆자리 땅딸막한 남자의 성희롱에 희생자이자 공모자-흥미롭고 놀라운 내면표현-가 되어 순간의 욕정을 즐긴 것, 혹은 ‘한순간의 욕망을 즐기려고 무모하게 시도했던 것들’(유부녀인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것-이성을 차리고 보면 사실은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나 요즘 시대가 아니기에 만날 약속과 장소를 잡기 힘든 여건에서 한 번이라도 만나려고 안달이 나서 스스로 남자가 있는 곳에 찾아가는 것 등)이다.
그녀가 외도남이 있는 장소로 가려고 했으나 딸 애나 때문에 발이 묶이게 되자 심지어 딸을 데리고 서둘러서 기차역으로 가서 대합실에 머물렀던 장면은 로즈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대합실에서 공중전화의 동전 반환함에 다임 동전 한 개라도 발견할 요량으로 그 때도 역시 그곳을 만지작거리던 애나 덕분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게 되어 이 소설을 읽는 내용 중 로즈가 자기 자신을 잊은 채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가장 흥겹고 신나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졌던 장면(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터진 돈복. 상실과 행운의 연속. 로즈가 과거나 미래에, 사랑에, 혹은 그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때, 얼마 안 되는 시간, 이기적이게도 애나도 똑같이 느끼기를 바랐던 순간)이 펼쳐진다는 건 정말 ‘인생의 알 수 없음(미혹함)과 운명, 그리고 우연’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갖게 해 주었던 나에게도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이런 것들을 로즈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차근차근 서술하고 담담하게 인정하고 그것이 이후에는 자신에게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소설이 끝나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솔직히 이런 부분들을 읽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도 나의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순간의 판단착오나 실수로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정에게 이성의 자리를 내줘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면 나 같아도 그렇게 즐기고도 남기 때문에 당황할 것도 없는데 당황스럽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유독 그녀의 작품은 독후감을 쓸 때 진짜 나의 본모습으로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철저하게 나의 본질과 속마음, 본질을 관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마지막 작품일 거라고 했던 최신작 ‘디어 라이프’를 읽고 나서도 그랬다. 사실 그 책도 읽기 수월하거나 재미있는 단편집은 아니었다. 적나라한 심리 묘사와 상대의 심리까지 꿰뚫어 보는 서술들에 왠지 독후감을 꾸며서 쓰면, 가식적으로 쓰면 그녀의 작품에 대한, 그녀의 작품을 읽은 독자로서의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처음에는 잠잠하고 조용했으나 다 읽고 나서 울림이 되었던)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 이 작품에서 그녀는 내가 인물들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고 인물의 매력과 그에 대한 당연한 반작용인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난 것을 눈치 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글들은 그 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 ‘나라면 어떨까?’ ‘나라도 이럴까?’라고 반성하게 한다. 주인공이자 태어났던 공동체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그래도 된다’라는 식의 체념적인 동화를 강제하는 전형적인 폐쇄적인 분위기의 시골에서 자란 로즈.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표면적으로는 저항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끝내는 결코 체념하지도 동화되지도 않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현명하지 못하기도 하고 지극히 감정에 치우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여성상을 대표하는 것 같았다. 소설의 처음과 끝으로 가기 직전까지 내가 그 상황에 처해있지 않아서인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했으나 끝에 가서 ‘참 멋진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서다. 읽을 때는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던 로즈와 마찬가지로 로즈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하는 남편이었던 패트릭과의 반복되는 다툼 이후 그와 더 이상 싸우지는 않지만 손목과 몸에 면도칼로 자해까지 하면서 서로에게서 떨어져야 살 수 있다고 느끼는 그녀를 봤을 때, 성적 일탈을 저지르고 큰 후회나 자책도 없이 또 다른 성적 일탈을 저지르는 그녀를 봤을 때)이 그녀가 살아왔고 지내왔던 일생을 눈 감고 내가 겪었다 생각하며 감정이입하며 곱씹어 보니 과연 그럴 만도 했겠다고 공감이 되어서다. 그런 로즈뿐만이 아니라 새엄마였던 플로, 로즈의 아빠, 로즈의 남편이었던 패트릭 블래치퍼드와 그와의 사이에 있던 딸 애나, 그녀의 본모습을 찾게 해 준 인물이나 다름없는 유년시절 전우이자 동료와도 같은 친구였던, 불쌍하게도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치명적인 두부 손상으로 사망했던 전역 해군 랠프 길레스피까지 모두들 성격이나 인생관도 흥미로웠다. 그 외에도 그녀의 욕망을 순간순간 흔들었던 지나쳐 갔던 사람들인 기차 옆자리 그 남자, 함께 불륜을 저질러놓고 ‘장난질’이라는 단어 하나로 매도해 버렸던 그녀의 친구 조슬린의 남편 클리퍼드(가장 공감이 안 됐던 부분. 어떻게 친구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 이후 셋이서 가끔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친구 관계로 남을 수 있을까.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던 영어식 표현인 Friends with benefit. 나로서는 공감 제로였다.), 밀회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다정하고 유머가 가득한 장문의 편지에 운명을 운운하며 애달프면서도 안도하며 로즈와의 불륜관계에 포기선언을 했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불륜남 톰, 자존감이 낮은 로즈에게 얼굴이 좀 두꺼워지도록 노력하자는 매력적이고 요리를 잘 하는, 어렸을 때 전쟁 중 독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는 행운이 있었던 사이먼(결국 행운이 그녀에게 옮겨 가려고 했는지 사이먼은 췌장암을 앓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로즈도 슬프고 놀랐겠지만 나도 정말 슬프고 놀랐고 아까웠다, 현실에 있는 인물이든 아니든 사이먼이라는 괜찮은 청년이.)도 기억에 남을 만큼 주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정작 내 주변에는 없고 잘 보이지도 않는 유형의 인물들을 만났다는 것도 흥미라면 흥미였다.
이 책 ‘거지소녀’는 인물들에 더하여 책의 표현들이나 공감을 일으키기도 공감이 전혀 되지 않는 부분도, 앨리스 먼로는 단연 심리묘사의 달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표현도,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 드는 표현이나 재미있는 표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 표현들을 나의 독서수첩에 따로 기재해 놓았다.)
또한 이 책 ‘거지소녀’는 각각의 단편들이 시간의 흐름으로 되지 않고 시공간을 넘나들었기에 정신 차리고 읽지 않거나, 대충 눈으로 따라가며 가볍게 읽거나, 앉은 자리에서 오래 읽지 않고 띄엄띄엄 읽는다면 흐름을 꽤 많이 놓치고 재미있는 소설인지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구성이어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을 때에도 시간을 충분히 낼 수 있을 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해설에서 너무 마음에 들고 훌륭한 내용들이 있어서 한 번 필사하듯이 정리하고 기나긴 독후감을(이런 작품을 읽고 단 한 문장이나 짧은 단문으로 독서소감을 쓸 수 있는 재간이 아쉽게도 나에게는 아직 없다.) 마치겠다.
성숙한 인생은 자신을 알아가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겠지만 그런 여정의 끝에 반드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로즈는 부딪치며 나아간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경로를 수정하며 상처를 입거나 입히고, 수치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더 초라해지더라도 결국에는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제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Who do you think you are? -이 책 ‘거지소녀’의 캐나다 제목이며, 그녀의 최신작 ‘디어라이프’중 ‘밤’이라는 단편에서 그녀가 독자에게 던졌던 질문인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기도 했으며, 내가 사랑하는 미국 락밴드 Imagine Dragons의 노래 Thunder의 가사이기도 한-)’의 로즈가 중년에 다시 찾은 핸래티에서 어린 시절 친구 랠프를 만나 비로소 자기와 닮은 영혼을 찾았다고 느끼는 것도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화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로즈의 이야기를 실패와 실망으로 점철된 우울한 넋두리로 읽는 독자들도 많은 듯하지만, 표면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아픈 경험을 통해 주류에서 벗어날 용기를 낸 로즈는 궁극적으로는 만족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탈출의 꿈만 꾸지 않고 직접 가봤으므로, 부딪치고 살아봤으므로, 궁금한 것은 끝가지 들여다봤으므로, 그 모든 수치와 비아냥을 견뎌냈으므로. 외롭고 보잘것없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삶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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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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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웃기다. 흥미진진하다. 멋지다. 치밀하다. 감동적이다. 교훈적이다. 유익하다. 현대판 인생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정말 두고두고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스토리들을 쓸 수 있을까? 정말 존경스럽다, 에이모 토울스 그리고 그가 탄생시킨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특히 대미를 장식하는 소피야와의 재회 장면을 만났을 때는 책을 다 읽어 ‘버렸다’는 아쉬움에 속으로 ‘아 어떡해!!’ 탄식하면서 다리를 동동 굴리기까지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모습이 스스로도 웃기다. 정말 말 그대로 대여섯 번 정도를 동동 굴렸다.) 웰메이드 영화 한 편을 단 한 순간의 지루함이나 헛생각 없이 본 느낌이다. 가히 최고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호텔 안에서 만의 배경으로 이런 소설을 쓰기까지 얼마나 작가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정성을 쏟았는지 읽는 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재치 있고 기발한 묘사와 비유를 사용했는지 따로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감성의 대표로는 안나 카레니나, 이성의 대표로는 몽테뉴의 수상록. 이 둘을 대비하는 것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거기다 내가 잘 몰랐던 것들 (볼셰비키 혁명, 러시아 대문호들 그 중에서도 특히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삼시대체계법의 기원, 와인과 칵테일에 대한 조예, 클래식 음악들, 각종 시와 소설과 영화들, 유명한 별자리들, 마셜플랜에 대항한 몰로토프 플랜, 푸시킨에 대항한 페트라르카, 커피의 이면성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을 시로 표현했던 나폴레옹의 외교관이자 킹메이커였던 탈레랑,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로서 향신료의 여왕이자 여름태양의 진수인 사프란)과 생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들 (자릿수의 합이 3으로 나뉘면 그 수 자체로 3으로 나뉘므로 1,173은 소수라는 것, 알파와 오메가의 의미 -처음과 끝이자 전 존재이며 창조자이자 완성자, 디드로 효과, 마르세유의 이프 성,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필름 누아르라는 용어와 의미, 스탈린의 별칭인 소소, 코바 등), 그리고 수많은 프랑스 기본회화들과 러시아 격동의 시기와 그 때의 사건들을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접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른다. 덤으로 나의 최대 관심사인 교육, 양육에 대한 지침 아닌 지침 (부모의 책임이란 매우 단순한 것이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키움으로써 아이가 목적 있는 삶,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경험을 자유롭게 맛볼 수 있게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담요를 푹 덮어주고 단추를 꼭꼭 채워주는 대신, 그들에게 믿음을 갖고 그들 스스로 덮고 채우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 앞에서 실수한다 해도 우리는 느긋하고 관대해야 하며, 신중한 태도를 잃으면 안 된다. 우린 그들이 우리의 감시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인생의 회전문을 통과할 때 뿌듯하게 숨을 내쉬는 것이다. 어린 예술가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도록 돕는 일은 꿈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다.) 까지 고전이 아님에도 나의 양서목록에 추가했을 정도로 이 책은 훌륭하다. 옮긴이인 서창렬 씨도 번역해 놓은 말을 빌려서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모스크바의 신사라는 제목에서 교육이나 양육에 대한 내용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고 참신했으며 기발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옮긴이에게도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번역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에이모의 재치와 백작의 위트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엄청난 센스를 발휘한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는 단어들을 정리해 보자면 태도와 말투에서 배어나오는 자연스러운 우아함, 올바른 처신, 섬세한 배려와 공경, 인간적이고 일차적인 감정은 느끼지만 바로 연이은 초연한 차분함, 신중함, 요령, 점잖음, 부드러운 지혜, 혼란의 시대라 할지라도 언제나 존재하는 미덕, 민첩한 기지와 예리한 지성, 넘치는 매력, 진지한 태도, 감성과 낭만 (가죽 상자에도 ‘대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너그럽지만 신경질적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불공정함에도 세상을 원망하려 들지 않았던 친구 미시카 -나는 그 덕분에 나에게 최초로 문학작품 리뷰대회 참가를 독려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로 시작하여 일곱 겹의 선물 상자에 ‘호텔 마스터 키’라는 마법 같은 선물을 담았던 노란색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곧은 금발의 아홉 살배기 시절의 니나, 오래된 괘종시계에 노인네라 명칭하고 한 마리의 비둘기에게 날개 달린 친구라 불러주고 한 마리의 애꾸눈 고양이에게도 쿠투조프 사령관이라느니 드로셀마이어라는 별칭을 지어주고 인사도 건넬 줄 알고 그의 시선을 의식하기까지 하는 뼛속까지 러시아인인 백작, 15년 넘게 그 누구에게도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자기만의 만능 식칼을 조용히 건네주며 칼 네 개 저글링을 시연하게 하고 감동받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그렁거렸던 비관주의자이면서 낙관주의자인 에밀, 그런 에밀을 위해 거위 구이 요리를 주문했던 스위스 외교관이 고기의 신선함을 문제 삼은 것을 알고 신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다 자란 거위 세 마리를 풀어놓는 소동을 일으켜놓고서는 짐짓 모르는 체 하며 유쾌한 복수를 해주는 안드레이, ‘아이들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며 ‘은색골무’를 쥐어준 마리나, 백작의 권유로 영화 카사블랑카를 감상하고서 백작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며 아주 사소한 내용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술집에서의 소동이 벌어졌을 때 주인공 릭이 손님들을 안심시키며 탁자를 지나가는 그 짧은 행동의 와중에 소동이 벌어졌을 때 쓰러졌던 ‘칵테일 잔 하나를 똑바로 세우는 장면’을 보고 ‘한 사람의 가장 사소한 행동으로도 세상의 질서를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믿음을 실천해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는 빅토르, 순간이동 놀이를 하다가 이마가 심하게 찢어져 정신을 잃은 소피야를 들쳐 업고 백작의 젊었던 시절에는 가장 시설이 훌륭했던 병원 가운데 하나였던 성 안셀름 병원이 30년이 지난 후에는 난민들이나 갈법한 병원으로 변해버려 곤경에 처한 순간 모스크바에서 제일가는 외과의를 보내주어 소피야를 치료하게 도와준 오시프 -그 덕분에도 바로 앞서 읽었던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에서도 할리우드에 대해 서구화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내용을 읽었는데 오시프도 할리우드는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고 독서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했다.- 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나에게 모두 이 소설에서 각자의 감성을 보여준 충분히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었다.), 모험심과 지칠 줄 모르는 정신에 대한 동경, 호의적인 관대함, 참여정신 등이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배우고 체득하고 싶은 성격과 특질들이 너무도 많았다. 묵직한 말과 재치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과장 없이, 혹은 반박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일 없이 동의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사람. 분별력과 우아함을 갖춘 사람. 언제나 마음을 여는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는 주위 사람의 존재에 결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 소유물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 365개의 눈금은 불굴의 정신의 증거라는 것을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 적시에 나타나고 적절한 표현을 하고 필요한 것을 예측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한발 뒤처질 줄 아는 사람. 상대가 너그럽게 행동하지 못해도 그걸 용인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모두 내가 본받고 싶어 하는 기질들이다.
이러한 정보들과 감성들을 함께 담을 줄 아는 에이모 토울스, 그가 얼마나 치밀한 작가인지를 보여주는 근거는 너무도 많다. 성공 여부에 대한 불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굴하지 않고 돌고 도는 인생과 같은 호텔 회전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던 니나와 소피야의 연결성,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고운 손가락의 소유자인 안드레이가 서커스단에서 일하며 익혔다는 저글링을 보여주기 위해 ‘삼인조(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너무나 사랑했고, 커피숍에서 읽다가 옆 사람들 때문에 몰래 엎드려서 눈물이 날 정도로 웃게 했던 조직 - 읽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부야베스의 밤‘에 에밀의 주방과 바깥 세계를 가르는 문을 열고 들어왔던 비숍과 “누구의 요청으로?”에서 “누구의 요청으로!”로 변모해갔던 에밀의 분노와 그것을 너무도 잘 표현했던 허공에서 떨고 있었던 녹색의 조그만 셀러리 잎들. 그냥 영화다, 영화.)’가 결코 잊지 못할 그 전설의 ‘부야베스의 밤’을 준비하다 남았던 ‘탁자 위 오렌지 세 개’의 연결성, 영화 카사블랑카를 같이 봤던 오시프가 책 뒤편의 ‘그 후’ 부분에서 국가 특수보안 기구 특별 분과 행정국장이 되어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말의 연결성, “그게 어디 갔어요?” 라는 간단한 질문으로 백작과 니나와의 우정을 시작하게 해 주었던 1922년 오후의 사건(호텔 이발소에서 건장한 손님에 의해 한쪽 콧수염이 사정없이 잘려 나간)과 백작의 유일한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고 “그게 어디 갔어요?”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질문인 ‘콧수염은 왜 잘랐냐’는 소피야의 질문으로 이어지는 연결성부터 가택 연금이 시작된 1922년부터 시간의 빠르기가 절반으로 줄어들며 진행되는 기점인 1938년에는 백작이 아침마다 했던 쪼그려 앉기와 스트레칭과 심호흡을 스무 번의 횟수가 8년 뒤인 1948년에는 열다섯 번으로 줄어들고 연금 생활이 시작된 이래로 장장 32년이나 지난 1954년에는 그 횟수가 다섯 번으로 줄어든다는 것까지 스토리에 담아내는 스타일까지, 그리고 그가 탄생시킨 인물인 백작이 호텔을 탈출하기 위해 세운 계획들이 이틀 전, 그 다음날 밤, 마지막 날 오후까지 단계적으로 완전하게 구성되었던 대목들과 탈출 이후에 이루어질 그의 32년에 걸린 소중한 우정을 나눈 친구들에게 전달될 5통의 작별의 편지들과 그 안에 영원한 우정의 징표로서 담은 ‘동봉한’ 금화들까지 전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한 사건 한 사건마다 나를 사로잡았다.
통독과 정독을 선호하는 나에게 특히나 동기부여가 되는 말이 있었는데 바로 ‘세심한 독자라면... 기억할 것이다.’였다. 바로 스탈린 사망 시 존재했던 저명인사 8명이 스위트룸 417호에서 1954년 최고 간부회 및 각료 이사회의 공동 만찬을 위한 행사장에서 탁자 상석의 좌석이 6명에게 돌아갔다는 내용에 대한 보충을 따로 담은 페이지에서 만난 글이었다. 그 외에도 에이모는 작가와의 거리를 좁히는 대목을 심어 놓았는데 처음은 미세한 온도의 변화가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며 백작의 철학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기상학적이라고 밝히면서 그 예시를 들어주기 위해 아름다운 노보바츠키 공녀의 스물한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아 참석했던 어느 늦가을의 파티를 생각해 보라고 하는 부분과 사프란을 제공해 준 주인공인 늘씬한 몸매의 인물이 백작과 오후의 밀회를 가지게 되는 대목에서 ‘우리가 1923년에 이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목격했을 때... 백작을 내보내지 않았던가?’ 라며 두 번째로 거리가 좁아졌고 마지막은 스위트룸 417호에서 1954년 최고 간부회 및 각료 이사회의 공동 만찬을 위한 행사장에서 백작이 최고의 하인들처럼 유능한 웨이터의 기본 업무로서 탁자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이야기들과 비밀스러운 논평, 신랄한 여담, 낮은 소리로 내뱉는 오만한 발언들을 모두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엿들었던 대목에서 ‘이 부분을 읽은 여러분은 혹시... 잘못되었다.’라며 재치를 발휘한 부분들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을 수 있게 이벤트를 소개해 준 알라딘에 감사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현대문학 출판사에도 너무 고마웠던 것은 책 표지에 금박으로 이미지들을 그려 넣어 그 이미지들을 소설의 내용들과 마치 퍼즐 조각들을 맞춰 볼 수 있게 하여 나름의 쏠쏠한 재미를 갖게 해 줬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재미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기에 정말 나만의 재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 아니겠는가.
책 제목인 모스크바의 신사 아래를 장식한 1922년 6월 이후로는 깔끔하게 없어져 버린 백작의 젊은 시절의 콧수염과 그 위로는 크렘린 궁전과 애꾸눈 고양이, 아래로는 백작 아버지의 하루에 두 번만 울리는 오래된 괘종시계, 대지, 흑갈색, 우울함을 대변하는 검은 호밀빵에 대비를 극대화 시키는 햇빛, 황금색, 즐거움을 대변하는 벌꿀과 벌, 백작에게 천체와 별자리를 그려보고 볼 수 있게 해 준 산전수전 다 겪은 진정한 여배우 안나와 그녀의 보르조이 두 마리,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아버지의 조언을 새겨듣고 결국 환경을 지배하여 웨이터 주임이 된 백작의 실루엣, 그와 대칭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호텔 마스터 키, 그 위에는 아마 그의 고향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눈처럼 떨어지는 사과꽃 혹은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라일락 혹은 사도보예 환상도로의 벚꽃,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중반부까지 미스터리였던 (기차는 도대체 언제 나올지 너무 궁금하게 했던) 기차! 기차까지 만나고 나자 모든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어서 성취감과 쾌감까지 느꼈더랬다. 그 기차는 니나가 콤소몰 무리들과 함께 호텔로 들어왔다가 백작을 우연히 만난 후 호텔 회전문을 통해 테아트랄나야 광장을 가로질러 나가서 타고 갔을 법한 이바노보를 향해 동쪽으로 달리는 기차 혹은 호텔 로비에서 엄마를 떠나보내며 강인한 엄마에게 걸맞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검은 머리에 상아색 피부의 다섯 살이었던 소피야가 씩씩하게 예의바르게 기다리면 엄마와 함께 아빠한테 타고 갈 수 있는 기다란 기차 혹은 미시카를 반성의 영역인 시베리아로 보내 버렸던 기차일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쥬느세콰 (Je ne sais quai)!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책의 머리말과 같은 곳에 1905년 봉기와 그에 따른 탄압이 있던 때에 위험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갈증이 담겼던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시를 썼던 사람은 실제로 백작의 친구 미시카였으나 비밀경찰의 탄압을 벗어나기 위해 경마 클럽 회원이자 차르의 자문역이었던 분의 대자인 백작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로 하여 평생 메트로폴 호텔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 선고가 주어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행운이 되어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될 수 있도록 했던 점. 그것도 백작이 훌륭하고 격조 있는 신사라서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나는 니나의 행방과 이후의 스토리도 궁금하다. 그리고 독자로서의 자그마한 욕심으로는 로스토프 각하와 소피야, 그들의 이후의 삶도 궁금하다. 아마 나처럼 그들도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겠지. 니나는 호텔 마스터 키와 맞바꾼 선물이었던, 그녀와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로스토프 백작 부인의 육각형 오페라 글래스를 죽는 날까지 소중히 간직하며 ‘실제’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 그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도록 마르코 폴로처럼 콜럼버스처럼 그리고 표트르 대제처럼 그녀만의 여행을 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녀 특유의 특성인 열정과 확신,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갖고서.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 로스토프 백작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 몽테뉴
이 소설이 그의 겨우 두 번째 소설이라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우아한 연인’도 꼭 읽어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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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조자 - 전2권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Nothing is more precious than independence and freedom!"
‘동조’란 내편과 다른 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배우다! 무엇들의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않는다면, 허물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자연과 별과 행성들, 신과 인간의 경계, 남성과 여성의 경계. 이것들이 허물어졌을 때 우리들도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을 세로로 반을 접어 맨 위 왼쪽에는 인간으로서의 특징들, 오른쪽에는 여성으로서의 특징들을 적어 나가는 나 자신에 관한 색인을 만드는 꽤 괜찮은 작업을 완수해보고 싶은 계획을 세우게 되다! 주인공 ‘나’의 색인 중에서 아니라는 뜻일 때 그렇다고 대답한다는 동양적 특질을 제대로 표현했던 작가의 통찰에 공감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그랬지만 학창 시절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확실히 어른이 되어 사회적응을 하면서 관습, 사회 분위기, 인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부터도 아니라는 뜻일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돌이켜보면 말이다.
베트남 출신의 미국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 봤다. 이게 모두 독서리뷰대회를 위해 도서를 구매해서 그다지 크게 공감되는 부분들을 찾지 못한 채로 읽다가 포기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어느 대목에서는 격하게 공감도 했다가 미소 짓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해 가며 2권 모두 더러 발견했던 오타들을 포함하여 소설 속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된 이유다. 솔직히 1권 읽으면서 베트남 작가라서 그런 건지 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고엽제 말고는 아는 게 전무해서인지 평소처럼 책에 밑줄 그으면서 읽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는 그다지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들이 없어서 눈으로 많이 읽어서인지 얼마나 졸았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성적인 내용들도 약간씩 나오고 너무 많은 장황한 비유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듯한 글의 흐름이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아서 솔직히 100페이지까지 읽는 데에만 최소한 3일은 걸린 것 같다.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은 내 인생 최초다. 그러나 다행히도 100페이지 넘어가면서부터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활주로에서의 난민구조 상황에서의 긴박하고 처절한 묘사들이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조금씩 흥미가 생기게 됐다. 이 부분에서야 흥미가 생기게 된 내 모습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도 비판하는 내가 일상적이거나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것에 그리도 무관심하고 지루해 하면서도 누군가가 총을 쏘고 그 총에 맞는 장면묘사에 이르러서야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느끼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런 게 ‘이중적’이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얼굴의 남자’는 스스로 두 얼굴의 남자라고 인정한다. 나도 이를 거울삼아 자책감과 ‘죄책감이라는 깃털’의 목덜미 간질임과 ‘양심의 딸꾹질’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서 나도 두 얼굴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두 얼굴의 남자’가 행했던 스파이로서의 임무 (도덕적인 선악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와 그의 생각의 흐름들과 ‘소장’이라는 인물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서술해 나가는 시간의 흐름들이 2권의 18장까지 이어지고 19장부터 마지막 22장까지는 주인공인 ‘나’의 (다 읽고 나서까지 결코 알 수도 없고 힌트조차 없고 그저 남베트남 특수 부대 소속 육군 대위로서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인 주인공 스스로도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하지만 찾기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의 어머니의 말대로 ‘무언가의 반절’이 아닌 ‘모든 것의 갑절’인 주인공의) 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으며 자백 아닌 자백을 하고 나서 남베트남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으려고’ 다른 150명의 사람들과 배에 타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원래 북베트남 출신이었던 주인공이 어렸을 때 전쟁을 피해 남베트남으로 피난을 가다가 CIA 공작원인 클로드에게 발탁되어 정보 요원으로서의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지만 사실 그는 북베트남에서 심어 놓은 고정 간첩이었다.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겠지만 당시 열세 살이었던 베트남 소녀를 유혹하여 임신을 시켰는데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인공 ‘나’였다. 이러한 이유로 태어나면서부터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태어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 자연스럽게 태어난 아이가 혼혈 아이를 지칭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인 것만으로도 인류의 야만적인 본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베트남의 혼혈 아동들을 가리키는 의미인 ‘속세의 티끌’이자 ‘이중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차별과 따돌림을 받던 잡종 새끼라 불렸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 ‘나’는 이중성 속에서 자아분열을 겪다가 결합이 되어가는 과정을 바로 이 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서 겪게 된다. 자아분열이라...... 나로서는 살아오면서 이게 자아분열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공감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 주인공의 삶은 참 팍팍하고 기구하고 잔인하구나라고 느꼈다. 평생 경험하기 힘든 전쟁이며 그 전쟁 후의 스파이로서의 삶이며 고국을 떠나 이민을 갔다가 돌아왔더니 갖은 의심으로 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고문을 받으며 자백을 해야 하는 상황이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내게는 너무 이질적이고 상상초월인 경험이라서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롭고 즐겁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가도 소설에 서술했듯이 설사 자신들이 천국에 있음을 알더라도 지옥만큼 따뜻하지 않다고 투덜거릴 기회를 찾아낼 정도로 매일 불평불만과 시기질투와 전쟁싸움을 끊지를 못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지.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여전히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와 균형을 외치는 이 모순은 이러한 것이 진짜 우리 인간의 삶의 면모일까라는 의구심과 회의를 들게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고 마는 점도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유감이다. 나부터도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니 말이다. 다른 인류가 모두 그렇듯이.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 호 아저씨(호찌민)의 좌우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각오를 했던 그들 중에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주제인 “Nothing is more precious than independence and freedom."을 일반적인 의미이자 호 아저씨의 ‘공허한 정장’을 비유하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nothing'을 주체로 보고 교묘한 구호, 즉 ’농담‘이자 중의적인 의미에서 유추해 낸 언어유희이며 ’기묘한 정장‘을 비유하는 ’아무것도 없음,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하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로 양분되는 현상에도 나는 뜻 모를 슬픔과 모순을 느꼈다.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며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켜낸 그것들이 지금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고 정신적 독립은 여전히 갈 길이 먼 데다 자유는커녕 방종만 남았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멋대로 누리는 ’잘못된 자유‘와 의존만 하는 ’잘못된 독립‘이라고 볼 수 있기에 내가 볼 때 대다수가 의존은 하면서 자존심만 남은 그런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은 현실세태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다. 소수의 인간들도 느끼다시피.
남베트남을 상징하는 주인공과 북베트남을 상징하는 정치위원이었던 만, 그리고 본이라는 형제애로 맺어진 관계에 대한 우정, 그들 간의 사상과 이념간의 대립, 그리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작가의 고도의 사회, 정치적인 풍자로 이야기를 꾸려나간 작가의 정치, 사회, 문화와 예술(각종 음악양식과 장르들, 시와 소설들, 그리고 미술사조들), 와인이나 특히 각종 음식과 과자간식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깊은 조예에 큰 인상을 받았다. 이 작가 덕분에 용어나 단어를 새로 접할 때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봐야 했으며 그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도 많은 책을 읽어왔고 상식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해 보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수도 없이 펼쳐져 있고 널려 있는 지식들에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자기 육체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진 누군가’의 이름(주인공 본인) 대신에 죄가 미약한 ‘자기 죄보다 더 무거운 육체를 가진 남자’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죄를 덜 지은 무절제한 소령을 죽여야만 했을 때와 남베트남 독립군에 대한 회의적인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장군의 명령에 따라 소니를 죽여야만 했을 때 주인공의 심경과 갈등은 나로서는 상상불가였다. 나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도 양심에 꺼려하고 힘들어하는 내가 과연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더지’가 할 일이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기에 애초에 나는 ‘두더지’ 행세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기도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살고자 하는 욕망’과 ‘삶에의 강한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너무 어려운 선택일 것 같다. 두더지로 조금 더 오래 살다 죽느냐 두더지로서 갈등하느니 목숨이 아깝지만 미련 없이 죽음을 택하느냐는 너무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또한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인도 범죄가 아닌 그저 비극이 되어버리는 이런 전쟁이라는 것이 역사를 통틀어 끊임없이 일어나 죄 없는 백성이나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모를 말 그대로 남은 게 없는 nothing을 위해 그렇게도 셀 수 없이도 많은 아까운 목숨들을 너무도 짧은 한 순간에 앗아가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오랜 시간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게 한 것인지 화도 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다 죽은 우리나라 선조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지도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진 것이 있을수록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힘이 더 들기에 너무 심난한 선택의 문제에 부딪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나는 그저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럼에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은 사실 그런 전쟁들을 통해 역사가 발전되었고 그 와중에 인간이 태어나고 대가 이어지고 인류와 세대를 보존해 왔다는 너무도 불가사의한 기적 같은 일이 이어져오고 있기에 이 또한 너무도 모순적인 ‘불편한 진실’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책에도 작가가 언급한 바 있는 헤겔의 말 중 비극은 옮음과 그름이 아니라 옮음과 옮음 사이의 갈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러한 자기모순에 기반한 정당화 혹은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기에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무죄이면서도 유죄인 점도 인정해야 한다. 이에 더하여 과거 선조들간의 전쟁에 대한 원한은 잊지 않아야 하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용서는 하되 그 원한마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순한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원한을 그 원한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에는 우리나라 또한 독립 운동하면서 겪었던 고난과 역경들을 베트남 전쟁에서도 겪었던 일들을 상상하며 ‘익숙함’이라는 뜨거운 납이 ‘내 육체’라는 주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아픔이 덮쳐 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전쟁 자신은 전쟁을 대변할 수 없는 이유로 예술 작품으로라도 대변되어야 하기에 문학이나 예술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전쟁은 확실히 과거에 일어났다 할지라도 여전히 죽지 않고 잠들어 있다가도 되살아나고 확대되다가 축소되다가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다음 세대를 살아갈 후손에게도 이 중요한 순간들을 기억하게 할 수 있는 재현작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정말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우리들이 살인이라는 말을 별 어려움 없이 내뱉는데 반해 자위라는 단어를 말할 때 더 많이 주저하고 꺼려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자위가 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살인이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러움에도 우리는 가면을 쓰고 이율배반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위에서 느꼈던 두 가지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모순과 이중성, 그리고 이율배반을 지니기에 주인공이 ‘소장’에게 썼던 보고서의 초반부 내용에서 읽었던 대로 ‘모순 없이는 우리라는 존재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우리 인간이 곧 모순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다면 이 글은 정말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그 이유는 환경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꼭 아름다운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아주 볼품없는 것이라도, 혹은 그리 많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에 한 방울의 사랑스러움을 첨가하는 한 가지 방법은 환경이나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기에 나도 나의 이 소설에 대한 읽는 방식을 바꾸고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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