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제적으로는 존재 하지도 않았던 ‘제국’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 존재했다.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속마음으로 오직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도 죽지도 않고,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제국이다.
그리고 그것 자신의 존속과 영속성을 위하여 마찬가지로 존재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그것 자신의 폭력과 억압을 위한 구실과 수단으로 만들어 낸 허상으로 존재해 주어야‘만’ 했던 사람들, 우주와 대자연의 섭리에 따른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 혹은 멸망’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는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 그것 자신의 모순을 정당화 하려는 핵심적, 필수적인 해결책으로서 존재해 주어야‘만’ 했던 ‘타자’로서의 사람들인 ‘야만인’이라는 것도 또한 역사 속에 존재했다.
실체가 없는 그들을 기다리며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자연의 섭리에 따른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이 불가능해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고 분개하면서도 한 명의 힘을 바꿀 수 없음을 알기에 30년 넘게 식민지 변방의 행정과 사법권을 관할하는 최고책임자인 치안판사직에 있으면서 제국의 모순도, 그 제국의 일원으로 제국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도 드러내는 화자를 이 책에서 처음 만나고 또 함께 아파했고 함께 생각하고 반성도 해봤다. 특히 그가 혼잣말을 하면서 체념하다시피 과거를 회상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화자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느낄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원래 사람들은 비겁할 수도 있고 그래서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할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 하다가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치안판사직을 내놓으려고까지 생각해본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어차피 그런 직위에 있으면서 또 수치스러운 공무를 감당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변할 게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감옥에 갇히는 사건에 휘말리게 될 때까지 그냥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꼭 지금의 나와 같은 모습을 봤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다. 바꾸고 시정해야 할 부분이 눈에 보이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젊었던 20대 시절에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으나 30대가 넘어간 지금으로서는 책에서 얻은 간접경험으로, 그리고 15년 넘는 직장생활을 해 오며 내가 겪어왔던 직접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러자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동료들과의 협력을 꾀하고 싶지만 그 또한 사실상 너무 어려운 것이 그들은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 눈에 띄기 싫어서, 미움 받기 싫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하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한계를 느끼고 체념 비슷한 감정과 화자의 저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아서 화자의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한 이 화자는 이분법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적인 인물로서의 자기를 내세워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정당성을 안으로부터 폭로하면서도 그 허구성과 정당성에 대한 화자의 ‘공모성’ 또한 자기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하며 더욱 부각시키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소설 전체를 현재형으로 서술해서 마치 영화관에 앉아 때로는 의아하게(맹인소녀에게 육체적인 욕망을 느끼면서도 욕망을 표출하지 않고 덮어버리고는 오히려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얹어주는 것 같기도 했던 화자의 모습과 독백들) 때로는 불편하게(굳이 야만인들의 편을 들어서 제국주의자인 졸 대령에 의해 자신과는 영원히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감옥에 갇힌 그가 갖은 폭력과 고문, 그리고 치욕을 받았던 장면들) 관람할 수 있는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을 작품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역설적이게도 재밌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는 화자가 순응도 저항도 아닌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경계를 헤매기도 하다가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에게 별다른 참견도 않고 제국이 식민지와 야만인들에 대해 그러하듯이,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다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처럼 ‘야만인을 기다리는 목적’을 가지고 ‘목적 없이’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대비하여 보여준 것도 아주 좋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보고 내가 크게 느낀 점은 ‘야만인’이야말로 우주와 신과 자연의 섭리대로 태어나고 살고 죽는 진정한 ‘자연인’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책의 마지막 공간에 손으로 썼던 짧은 감상문을 옮기는 것과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고 나서 예전에 영어학습도 할 겸 사 놓고 아직 단 한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은 총, 균, 쇠 원서를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읽어보리라고 다짐하게 했던 작가의 마음에 드는 점을 번역가의 해설의 힘을 빌려서 옮기는 것(물론 그대로 보고 타자를 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문장을 바꿔 쓰는 것)으로 독서감상문을 마치려고 한다.
“마치 한 편의 예술 영화 작품을 관람했다는 느낌으로 읽기를 마쳤다. 상상하기 힘든 시대, 역사, 사건, 탐욕, 허세, 사기, 기만, 고통. 소위 문명이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에서 만들어진 실체도 없고 진실도 아닌 허상 같은 ‘미개’나 ‘야만’이라는 모호한 의미와 개념 때문에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추잡하고 포악하고 잔인하고 무식하게 소중한 생명들을, 더군다나 대자연과 소통을 하며 평화로이 살아가던, 원시적일뿐 어떤 죄도 없던 생명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짓밟고 유린했다는 데에 부끄럽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써내려간 글들인데 기다리던 야만인과의 만남이나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잡을 수 없는 꿈이자 목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룰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떠돌아다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각인된 허상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부럽다고 생각했던(작가와 직접 만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할 때 조언도 많이 구하고 대화도 많이 나눴다고 해서) 이 책의 번역가는 해설에 이렇게 썼다. 화자의 ‘공모성’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가 바로 식민주의자의 후손이자 남아프리카 백인 작가라서 더 숙명적이고 절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로부터 거리를 좁혀서 작가 자신도 또한 책임이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 득이 될 리가 없는 질문과 답을 찾으려는 과정을 글로 쓴 것인지에 대해 작가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때로는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은 행위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윤리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에 내게 너무나 와 닿고 멋진 해석이다. 그에게 그렇듯이 나에게도 ‘문학은 윤리’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