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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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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 벵하민 라바투트 (노승영 옮김)

앞표지부터 시작해서 고작 260여 쪽에 담겨 있는 활자들이 이렇게도 소중하고 참담하면서도 빛날 줄이야. 밤의 정원사를 읽을 때쯤 밤의 정원사가 분명히 앞에 나왔던 인물들 중 한 명일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제대로 독서의 묘미를 알려주는 고마운 책의 가격이 궁금해져서 뒤표지를 들춰 보았다. 16,000원이라니! 이건 순전히 책의 두께로만 책정된 금액인 것 같았다. 겨우 16,000원에 나는 평소라면 접하기 힘들었을 엄청난 지적 여정을 할 수 있었고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하기도 힘들거니와 이해할 수도 없을 우리의 이 세상에 대해 저 유명하고 명석한 학자들이 신경쇠약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재와 실재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에 대해 해왔던 몰입과 고뇌, 그리고 심오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논쟁과 탐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얻을 수 있었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 책 리뷰의 키워드를 2개로 잡았다. ‘우연의 아이러니’와 ‘영원회귀’.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해하길 멈출 때 세상이 잘못 된다?’였는데 다 읽고 나서 리뷰 작성을 위해 한 번 더 훑어보며 들었던 생각은 아무래도 이것이다. ‘이해하길 멈출 때 이해가 된다.’ 이 말 또한 아이러니이기에 이참에 아이러니를 사랑해야겠다는 마음도 든다. 그리고 우연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상을 좀 더 초연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코로나 때문에 독서토론이 힘들기에 평소 독서를 할 때에도 온라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리뷰까지 꼼꼼하게 읽으며 나의 독서 경험과 비교하는 걸 즐기는데 이 책은 리뷰까지 작성할 요량이라 작가에 대해서도, 다른 리뷰들도, 게다가 리뷰 심사위원이라는 옮긴이에 대해서도 쭉 살펴보고 나서 지금 리뷰를 작성중이다. 독서하며 떠오르는 말들이나 쓰고 싶은 글귀들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그것들을 글로 써 보고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보통 소설도 아니고 수포자이자 과학 문외한이었던 내가 읽기에는 진도가 빨리 나갈 수 없었던 소설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만학도를 자처하며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버브 부녀가 쓴 책인 ‘만화로 보는 이해하면 이상한 양자역학’을 가볍게 읽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으로 조금이나마 개념을 인지하고 있던 터라 마감기한에는 맞춰서 읽어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고전문학 독서를 꽤 해 왔었기에 이 책의 행간과 맥락을 큰 끊김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수식어구들이 짧지 않은 편이라 잠깐 헛생각이 들면 문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부분이 꽤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독서력을 쌓았던 것 또한 다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모르는 단어들과 인물들이 나올 때에는 인터넷 검색해서 연관된 내용들까지 연구하다시피 모조리 둘러보느라 흐름이 꽤 오래 끊기기는 했지만. 그래서 마감일을 이렇게 딱 맞춰서 작성한 적은 처음이라 긴장감이 조금 들기는 하는데 이게 야릇한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어서 마치 웹투니스트나 작가들이 마감기한에 맞춰서 작품을 끝내는 맛이 있다고 하던 그런 느낌이랄까. 서론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빠뜨리고 싶지 않았던 나의 리뷰 서론이었다. 대회에서 지정한 리뷰 분량이 적은 편이라서 서론은 짧게 들어가고 본론을 더 많이 써야겠지만 내가 리뷰 초고를 짜면서부터 생각하기에 이 책은 본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서론을, 그리고 서론보다는 결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야릇한 긴장감을 지닌 채 내가 정성껏 읽었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 너무나 다양해진 이 시대에 리뷰 작성도 하나의 이야기일 테니.
작가가 참고했던 많은 서적을 토대로 실제 있었던 일들을 뼈대삼아 세우고 그 뼈대를 중심으로 해서 작가의 기발한 상상에서 태어난 스토리들로 살붙여가며 뼈대를 촘촘하게 메꾸어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기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에서 배우고 느낄 수 있던 것이 너무 많았다.
18세기에 스위스 염료 제조업자 요한 야코프 디스바흐와 그의 도제 요한 콘라트 디펠이 있었다. 그들은 스페인의 카민 독점을 무산시키고자 했다. 디펠이 혼합한 동물 부위 증류액 위에 디스바흐가 칼륨염을 부어 레드루비 색깔을 재현하여 카민을 만들어내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물은 그들이 원하던 빨간색이 아닌 파란색이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프러시안 블루다. 별이 빛나는 밤과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에 쓰인 이 파란 염료는 순전한 우연에서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프러시안 블루는 우연의 탄생이었고 그 색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디펠이 혼합했다던 동물 부위 증류액은 우연히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그 증류액에서 만들어지고 내뿜었던 색의 아름다움과는 거리도 멀었다. 디펠이 그 증류액을 생명의 영약이라며 만들어 내던 과정이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산 동물과 죽은 동물들로 실험을 했고 희생물의 부스러기를 짜 맞추는 데서 변태적 쾌감을 느꼈다고까지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우연의 산물을 내버려 두지 않았던 화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칼 빌헬름 셸레다. 그가 1782년에 극미량의 황산을 입힌 스푼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휘저어 화합물을 만들어 이를 프러시안산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강력한 독약이 된다. 작가가 인간의 사유에 한계가 어디까지일까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데 사유뿐만 아니라 탐욕에도 한계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아니라면 우연에 의한 발견도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이어지는 두 이야기만 보더라도 스페인의 카민 독점을 없애고 본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붉은 안료를 만들어 내려다 우연히 프러시안 블루를 탄생시켰고 이 우연에서 시작된 발견이 아름다움이었다가 아름다운 부산물을 합성한 화합물이 다시 강력한 독약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런 아이러니가 비단 위에 언급한 일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만 보더라도 공기에서 빵과 죽음을 동시에 만들어낸 과학자로 알려진 프리츠 하버,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 이론의 방정식을 발표한 지 한 달도 안 된 때 전장에서 총알들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집중포화 속에서 해를 풀어낸 슈바르츠실트, 양자역학을 혐오해서 코펜하겐 해석의 옹호자들을 부정하고자 상자 속 고양이 이론을 만들어 내 오히려 현재까지 양자역학을 설명할 때 대표적인 예시로 쓰이게 한 슈뢰딩거, 양자역학 이론을 처음 발표하고도 정작 자신은 양자역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 책 밖에서도 이런 아이러니는 셀 수가 없고 지금도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우연을 믿지 않거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 그 중에 내가 우연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책들 덕분에 책에 나왔던 몇몇 인물들처럼 세상을, 세상을 구성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나 원칙을 알아내고자 스스로를 정신을 잃을 정도로 한계까지 밀어붙이거나 자연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과 등질 정도로 은둔하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내가 아무리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들 수많은 우연들로 이뤄진 공간, 아니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론이나 방정식, 좌표, 기하학 들을 연구하는 수학과 물리학이 앞으로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이 세상은 이해될 수 없고 이해하려고 할수록 더욱 이해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말 자체가 실재가 아니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진 기원 자체가 우연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게 된 과정 자체도 아마 우연일 수 있기에 원리를 파헤치려 할수록 참 명제나 명확함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았다고 생각해 꽉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알들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 빠져 나가는 모래알들마저 단 한 톨도 놓치지 않고 파악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가지 방정식을 해결했는데 거기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방정식이 난데없이 튀어나와 풀리기를 기다리고, 그 새로운 방정식을 해결하면 또 새로운 방정식이 우연히 발견되어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마치 지금의 양자역학처럼 말이다. 이는 역학에서뿐만이 아니라 화학, 생물학, 미생물학, 고고학, 천문학 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혹시나 양자역학을 인류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또 다른 이해불가의 영역이 도래할 것이다. 그게 세상의 알 수 없는 원리다. 정말 얼마나 절망적이고 좌절스러운지 모른다. 끝이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원리인 or 이 아닌 and 개념처럼 인간은 삶 and 죽음을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살고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치 양자역학에 빗댔을 때 신이 우리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측정하면 삶이고 실재하지 않는 대상으로 측정하면 죽음인 것과 같다. 그런데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실체가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실체의 죽음일 뿐 신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 인류의식은 또 다른 개별적인 모든 것의 탄생이자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우로보로스처럼 끝이 없다. 끝없이 문제와 해결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이 절망적이고 좌절스러운 세상에서 인류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해 가며 살아갈 것이다. 거기에 ‘타인은 없다.’고 했던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처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아름다움도 지켜가며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지구가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 다다라 돌아올 수 없는 지점으로 사로잡힐 때까지.
작가가 한국 독자에게 감사인사를 촬영해서 보낸 영상을 보니 다음 작품에서 다루는 인물들 중 한 명이 이세돌 9단이라며 고맙게도 한국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세돌 9단을 그려냈다는 이유 외에도 지금 리뷰작성을 거의 끝내가는 그의 3번째 작품에 말 그대로 반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다음 작품도 매우 기다려진다. 덧붙여 나의 책장에 구매만 해 놓고 나중에 읽을 책들이 참 많이도 꽂혀 있는데 그 중 옮긴이의 아름다운 번역으로 알려졌다는 향모를 땋으며도 바로 읽어볼 작정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으며 작가뿐만 아니라 옮긴이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했고 얼마나 아름다운 번역인지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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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어게인 - 모르는 것을 아는 힘
애덤 그랜트 지음, 이경식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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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무가내식 워커홀릭이었다. 또라이라 불릴 만큼 열정을 불태웠다. 나는 누구보다 파이터고 아웃사이더라 자만하며 스스로 벽을 친 적도 허다하다. 이런 자만을 겸손으로 바꾸기 위한 유연성은 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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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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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게 말이 쉽지 직접 겪는다면 정말 힘들겠다는 걸 통감하게 해 준 보부아르. 욕설 섞인 잔소리나 의견 마찰로 너무 밉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어떤 준비를 한들 가슴 찢어질 당신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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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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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다리를 건너 온 감탄 그 자체인 너를 품에 안은 순간,
너를 남겨 두고 내일을 기약하며,
아침햇살 등에 진 내 앞에서 환한 미소로 반기는 너에게,
무지개 다리로 건너 갈 당신께 언젠가는 고해야 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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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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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공간을 이루는 것인가 공간이 시간을 이루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 책 제목 ‘태고의 시간들’.
‘태고’는 이 책 속에서 가상의 지명인 데다 태고의 네 경계선을 지키는 대천사들과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존재하기에 ‘어디에도 없지만’, 태고에서 살던 인물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평범한 사람들이고 지금은 지나간 역사인 20세기를 배경으로 그곳에서와 그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기에 ‘어디에나 있는’ 장소이자 시간이다.
멀리서 내려다보면 운명과 역사의 물레로 씨줄과 날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교하게 짜 놓은 무채색 직조물이다. ‘태고의 시간’으로 시작되는 짤막한 글에서 ‘아델카의 시간’으로 끝나는 짤막한 글까지 총 84개의 ‘◯◯의 시간’으로 자아 놓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기가 막히고 환상적인 얼개다. 신과 인간, 그에 못지않은 생명체인 우주행성, 동식물, 사물들의 시공간이 들고 나는.
한 번 가볍게 읽어볼 때는 그저 신화와 성서에 기반을 두고 비유와 은유를 많이 함축하고 있어 허무맹랑할 수도,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는 소설이고 신화와 성서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면 별 재미도 감흥도 없을 수 있을 소설이지만 옮긴이의 말까지 모두 읽고 책을 덮은 후 내용들을 되짚어 본다면, 혹은 필기구로 따로 표시해 두었던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빠르게 다시 훑어본다면 완전히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신은 아이마다 천사를 지정해준다고 한다. 세상을 물질이 생성됐다가 스스로 파괴를 거듭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에 담긴 가치와 영혼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천사는 산모의 육체를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갓 생겨나 환하게 빛나는, 텅 빈 공간으로 보고 그러다 아이가 태어날 때는 그 공간에 반쯤 의식이 깃든 한 영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뿐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사건이 어디서 비롯되고 어디로 흘러갈지, 그 시작과 끝을 이미 알기에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건의 흐름들을 그저 흐르는 물을 바라보듯 지켜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같은 지성이 없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유추나 판단, 논리도 없다. 이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자기 안에 있는 지혜의 나무에서 따 온 열매인 ‘순수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온갖 두려움을 제거하고 편견을 배재한 지식이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기질로 아이가 천사를 필요로 할 때 자리를 자주 비우곤 하는데 그렇게 자리를 비우다 보니 아이는 원래 천사만큼이나 본래의 ‘순수한 지식’을 자꾸 잊어버리고 다른 인간, 동물들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아이는 천사의 순수한 본성을 잃어가게 된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집단과 사회를 만들어 내면 당연히 순수함과 자연스러움, 지혜로움보다는 추함과 참혹함, 어리석음이 그들을 잠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천사가 자리를 비울 때라도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되찾으려고 한다면, 욕심과 탐욕,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고 한다면, 다시 그러한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다. 크워스카의 시간처럼.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약탈당한 사람은 그 파손과 파멸 후에 오는 혼돈으로 혼란스러워하며 ‘신은 선한 존재인데 왜 악을 허락하는지, 세상의 악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의아해한다. 그리고 ‘신은 선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심한다. 자신에게 갑자기 불어온 혼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온갖 변화들이 일어나는 시기에 힘을 내 보려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바쁜 시기를 보내본다. 그러나 고작 1년 정도만 노력해 보고서는 고작 감기와 폐렴 같은 사소한 이유를 들며 스스로 1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그리고 어떤 물건이나 현상을 보고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착각이다. ‘낙관주의는 청춘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이라는 착각. 그 착각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독약처럼 은밀히 지니고 다니던 ‘절망으로 가득 찬 그릇’을 그의 내부에 깨뜨리고 고난과 죽음, 부패를 목격한다. 그리고 시간의 불길에 희생양으로 던져진 인류의 운명과 모든 생이 깃들어 있는, 부단히 거듭되는 분신도 떠올려본다. 마치 사상가나 철학가라도 된 듯이 인류와 생은 시간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느끼며. 이미 내면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만 남은 그에게는 성당을 가도 성모의 성화를 봐도 그의 바람을 들어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기적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 ‘구멍 난 그릇’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슈코틀레 성모가 선하고 유익한 힘을 그에게 주려고, 그가 그 힘에 흠뻑 젖게 만들려고 애를 써도 성모의 본성인 치유력이 그의 몸을 미끄러져 흘러내리고 땅으로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처럼.
그리고 그의 독서로 시작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첫 번째 질문’, 나는 어디에서 온 걸까? 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내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 ‘두 번째 질문’, 뭔가를 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획득한 지식은 얼마나 유용한 걸까? 뭔가를 끝까지 다 안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 ‘세 번째 질문’, 인간은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그는 자신에게서 생겨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독서에 더욱 심취한다. 그를 걱정한 부인이 치료사로 랍비를 추천하는데 상속자의 집에 찾아온 랍비는 그에게서 생겨난 세 가지 질문을 듣고 던진 ‘네 번째 질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음 날 랍비와 함께 왔던 사팔뜨기 유대인 소년이 그에게 주고 간 이그니스 파투스,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판. 살다가 누구나 생각해 본 적이 있을 법한 세 가지 질문, 그리고 한번쯤 궁금해 해 본 적 있을 법한 네 번째 질문. 그 질문에 대한 해결책으로 게임판이 주어지는데 여덟 개의 ‘세계’로 이루어진 미로가 그려진 천 위에 그려져 있다. 중앙에서부터 시작되는 그 세계들은 ‘첫 번째 세계’부터 ‘여덟 번째 세계’까지 복잡하고 빽빽하며 골목들과 작은 통로들이 수도 없다. 그러나 ‘첫 번째 세계’부터 다음 단계의 세계로 이어지는 구역들은 이전의 세계보다 두 배씩의 출구를 갖고 있고 중앙보다 점점 여유가 있다. 그에 비해 바깥쪽은 아예 ‘방랑’을 권장하듯 밝고 널찍하고 통로들도 더 넓다. 소년이 주고 갔던 건 게임판 뿐만 아니라 게임 설명서인 책자도 있는데 그 책자의 내용은 모든 게 복잡하고 앞뒤가 맞지 않아 비논리적이다. 처음 시작되는 내용은 이렇다. ‘이 게임은 여행의 일종이다. 여행길에서 가끔 선택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선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게이머는 때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하리라.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그를 두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리고 무엇과 마주하게 되느냐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속자와 랍비의 질문들’, 그리고 ‘게임판과 책자’의 관계성에 꼭 무언가 있는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책자의 서문이 완전히 인간의 ‘삶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옮긴이의 말에서 보더라도 포피엘스키가 탐닉하는 게임은 ‘태고’의 축소판으로 ‘소우주’를 상징하며 게이머는 소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 이것을 해석해 보면 반드시 작가가 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아 적지 않은 시간을 고민해 보고 내용 전체들과 연결시켜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 나름의 해석이 나왔다. ‘첫 번째 질문’이 생겨날 때부터 우리는 게임판의 ‘첫 번째 세계’에서부터 게임을 시작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너무 복잡하고 비논리적이라서 힘들 것이다. (삶과 인생, 그리고 우주나 신, 그리고 자연의 진리와 사람의 본성에 관한 질문과 해답은 처음에는 비정상적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출구가 있기에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일은 전 단계에서보다 점점 수월해 질 것이고 (그러나 그 질문과 해답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진리는 단순하고 단 한가지로 자명하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된다.), 그렇게 ‘여덟 번째 세계’까지의 미로를 빠져 나오고 나면 기다리고 있는 바깥쪽에서 여유롭고 자유롭게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시작되는 어떻게 보면 ‘진짜 여행’인 ‘방랑’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과 인생이라는 ‘여행’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나면 정체되어 있거나 새로운 도전과 기회에 발을 들이지 않으려는 습관이나 타인이나 사회, 또는 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규정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부단히 움직이고 깨어있고 도전하는 ‘방랑’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만일 나의 해석대로 작가가 나에게 말하려고 한 것이 이게 맞다면 정말 놀라울 뿐이다. 게임의 시간이 총 7번 나오는데 각 시간마다 신, 그리고 세상과 인류와의 관계의 변화, 인간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신의 마음과 심정을 어쩌면 이렇게도 성서와 맞물리게 그리며 통렬하게 써 냈는지. 작가의 치밀함과 이야기 구성력이 존경스럽다.
이렇듯 범접할 수 없고 거대한 이야기의 큰 흐름 사이사이에 남편들로부터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아내들의 이야기, 자식을 위해서라는 구실의 선하지 않은 의도로 행동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살아가면서 겪지 않아도 될 끔찍하고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을 겪는 바람에 광기에 사로잡혀 달에게서 박해받는다고 여기고 동물들과 대화하는 법을 아는 노인이라든가 신이 식물에게 현현하여 임신하게 한 대지와 숲의 여신과도 같은 여인, 그리고 태고의 경계를 알고 있으며 동식물보다 버섯을 더 좋아하고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줄 아는 버섯균의 일생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는, 한 때 세속에 이끌렸지만 지루해 하기만 하다 결국 태고의 경계선에서 자유롭게 대자연으로 빨려 들어간 그녀의 딸의 이야기부터 정신수준이 낮아서 떳떳하게 대우받지 못 하다 우연히 분실된 편지의 보상금을 받은 계기로 생활비를 벌게 되어 마침내 가족의 정당한 일원이 된 아들의 이야기, 아빠를 쏙 빼닮아서 언제나 엄마를 기다리게 하고 돈은 잊지 않고 챙기다가 엄마가 죽은 후에야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이야기, 아내가 죽은 후에야 떠나간 자식들과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독과 외로움을 느껴서 평소 연주하던 바이올린으로 먼지투성이의 뻑뻑한 줄이 하나, 둘, 모두 끊어질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연주를 한, 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딸에게 자신이 죽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필요치도 무섭지도 않다고 말한 남편이자 아버지, 전쟁으로 타향에 묻힌 장교까지 모든 인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의 시간’으로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생명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강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첫 번째 강은 깊고 어두운 ‘흑강’이고 두 번째 강은 얕고 생기발랄한 ‘백강’이다. 그리고 이 두 강이 미하우가 밀가루를 만들어내는 방앗간의 기슭에 이르러 또 다른 강력한 하나의 강으로 재탄생된다. 나는 그 ‘강’이라 불리는 세 번째 강이 진정한 강이라고 봤다. 이 강이 있음으로 미하우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앗간이 돌아갈 수 있게 할 수 있으니까. 정말 치밀한 구성이다.
감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작가가 위대한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위대한 소설은 신화로 통한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다. 변신 이야기부터 오딧세이와 일리아드를 너무너무 힘겹게 읽어본 나로서, 신화를 빌려와 인간세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잘 알기에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놀랍고 작가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미하우가 타슈프에서 온 러시아의 젊은 장교와 만나서 인사하는 장면을 과거에 언젠가 겪었던 일인 듯했다는 부분을 보면 전생이나 윤회사상을 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옮긴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가 불교사상에도 관심이 있어서 인 것 같다. 비단 불교사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데자뷰 현상을 종종 겪곤 하는 걸 보면 ‘인간의 탄생, 성장, 노화, 죽음에 이르는 보편적인 생의 과정을 통과’하며 이어온 ‘유구한 삶의 원형’의 존재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을 초월해 모든 과정 안에 있고 모든 변형 속에서 박동하는 신과는 달리 인류는 다양한 인간과 개인의 육체로 스며들어 이 ‘유구한 삶의 원형’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에 구체적이며 실체가 분명한 일상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다 시간의 풍화 작용 속에서 스러져 결국에는 ‘신화’가 되는 것이다. 젊은 여자는 다 나이 많은 여자의 딸이듯이, 개인의 육체와 존재는 스러질지언정 인간 행동과 심리의 원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탄생, 변주, 지속되고 있듯이, 그렇게 강한 생명력을 뜻하는 ‘존속’이 계속되듯이, 개별적인 존재의 시간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내듯이.
‘태고의 시간들’은 앞으로도 ‘생성과 소멸의 과정’ 안에서 ‘지속과 변형이 되풀이’될 거라는 것을 (등장인물들을 통한 인류의 탄생, 성장, 병듦, 노화, 죽음이 되풀이될 거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미시아의 그라인더’를 상징물로 만들어 ‘연속성과 지속성, 그리고 어머니라는 존재의 계승’을 보여준다. 관념을 물질로 형상화한 ‘미시아의 그라인더’. 살아있는 따뜻한 손이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한, 그럼으로써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가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하고 일시적이고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그라인더 속에 붙잡아두고 저장’하여 그라인더 자신과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돌리고 있는 살아있는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 세상 전체가 갈아낸 커피 향기 속에서 하나로 융합될 것이다.
비록 영겁한 시간 속에서 광활한 공간 속에서 미미하게 살아가는 생명체로 존재하는 개인인 나지만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는 헛된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상속자의 부인처럼 시간의 흐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덥수룩한 붉은 털을 가진 암캐 랄카처럼 끊임없이 신을 인지하며 언제나 현재형인 시간을 살고 싶고 보리수처럼 ‘존재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신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영원히 이어지는 꿈’을 꾸고 싶다. 작가가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책으로 수를 놓았듯이 나도 ‘나의 시간들’로 내 삶의 수를 놓으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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