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동조자 - 전2권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Nothing is more precious than independence and freedom!"
‘동조’란 내편과 다른 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배우다! 무엇들의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않는다면, 허물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자연과 별과 행성들, 신과 인간의 경계, 남성과 여성의 경계. 이것들이 허물어졌을 때 우리들도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을 세로로 반을 접어 맨 위 왼쪽에는 인간으로서의 특징들, 오른쪽에는 여성으로서의 특징들을 적어 나가는 나 자신에 관한 색인을 만드는 꽤 괜찮은 작업을 완수해보고 싶은 계획을 세우게 되다! 주인공 ‘나’의 색인 중에서 아니라는 뜻일 때 그렇다고 대답한다는 동양적 특질을 제대로 표현했던 작가의 통찰에 공감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그랬지만 학창 시절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확실히 어른이 되어 사회적응을 하면서 관습, 사회 분위기, 인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부터도 아니라는 뜻일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돌이켜보면 말이다.
베트남 출신의 미국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 봤다. 이게 모두 독서리뷰대회를 위해 도서를 구매해서 그다지 크게 공감되는 부분들을 찾지 못한 채로 읽다가 포기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어느 대목에서는 격하게 공감도 했다가 미소 짓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해 가며 2권 모두 더러 발견했던 오타들을 포함하여 소설 속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된 이유다. 솔직히 1권 읽으면서 베트남 작가라서 그런 건지 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고엽제 말고는 아는 게 전무해서인지 평소처럼 책에 밑줄 그으면서 읽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는 그다지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들이 없어서 눈으로 많이 읽어서인지 얼마나 졸았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성적인 내용들도 약간씩 나오고 너무 많은 장황한 비유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듯한 글의 흐름이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아서 솔직히 100페이지까지 읽는 데에만 최소한 3일은 걸린 것 같다.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은 내 인생 최초다. 그러나 다행히도 100페이지 넘어가면서부터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활주로에서의 난민구조 상황에서의 긴박하고 처절한 묘사들이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조금씩 흥미가 생기게 됐다. 이 부분에서야 흥미가 생기게 된 내 모습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도 비판하는 내가 일상적이거나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것에 그리도 무관심하고 지루해 하면서도 누군가가 총을 쏘고 그 총에 맞는 장면묘사에 이르러서야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느끼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런 게 ‘이중적’이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얼굴의 남자’는 스스로 두 얼굴의 남자라고 인정한다. 나도 이를 거울삼아 자책감과 ‘죄책감이라는 깃털’의 목덜미 간질임과 ‘양심의 딸꾹질’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서 나도 두 얼굴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두 얼굴의 남자’가 행했던 스파이로서의 임무 (도덕적인 선악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와 그의 생각의 흐름들과 ‘소장’이라는 인물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서술해 나가는 시간의 흐름들이 2권의 18장까지 이어지고 19장부터 마지막 22장까지는 주인공인 ‘나’의 (다 읽고 나서까지 결코 알 수도 없고 힌트조차 없고 그저 남베트남 특수 부대 소속 육군 대위로서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인 주인공 스스로도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하지만 찾기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의 어머니의 말대로 ‘무언가의 반절’이 아닌 ‘모든 것의 갑절’인 주인공의) 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으며 자백 아닌 자백을 하고 나서 남베트남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으려고’ 다른 150명의 사람들과 배에 타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원래 북베트남 출신이었던 주인공이 어렸을 때 전쟁을 피해 남베트남으로 피난을 가다가 CIA 공작원인 클로드에게 발탁되어 정보 요원으로서의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지만 사실 그는 북베트남에서 심어 놓은 고정 간첩이었다.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겠지만 당시 열세 살이었던 베트남 소녀를 유혹하여 임신을 시켰는데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인공 ‘나’였다. 이러한 이유로 태어나면서부터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태어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 자연스럽게 태어난 아이가 혼혈 아이를 지칭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인 것만으로도 인류의 야만적인 본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베트남의 혼혈 아동들을 가리키는 의미인 ‘속세의 티끌’이자 ‘이중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차별과 따돌림을 받던 잡종 새끼라 불렸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 ‘나’는 이중성 속에서 자아분열을 겪다가 결합이 되어가는 과정을 바로 이 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서 겪게 된다. 자아분열이라...... 나로서는 살아오면서 이게 자아분열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공감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 주인공의 삶은 참 팍팍하고 기구하고 잔인하구나라고 느꼈다. 평생 경험하기 힘든 전쟁이며 그 전쟁 후의 스파이로서의 삶이며 고국을 떠나 이민을 갔다가 돌아왔더니 갖은 의심으로 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고문을 받으며 자백을 해야 하는 상황이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내게는 너무 이질적이고 상상초월인 경험이라서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롭고 즐겁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가도 소설에 서술했듯이 설사 자신들이 천국에 있음을 알더라도 지옥만큼 따뜻하지 않다고 투덜거릴 기회를 찾아낼 정도로 매일 불평불만과 시기질투와 전쟁싸움을 끊지를 못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지.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여전히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와 균형을 외치는 이 모순은 이러한 것이 진짜 우리 인간의 삶의 면모일까라는 의구심과 회의를 들게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고 마는 점도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유감이다. 나부터도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니 말이다. 다른 인류가 모두 그렇듯이.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 호 아저씨(호찌민)의 좌우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각오를 했던 그들 중에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주제인 “Nothing is more precious than independence and freedom."을 일반적인 의미이자 호 아저씨의 ‘공허한 정장’을 비유하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nothing'을 주체로 보고 교묘한 구호, 즉 ’농담‘이자 중의적인 의미에서 유추해 낸 언어유희이며 ’기묘한 정장‘을 비유하는 ’아무것도 없음,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하다‘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로 양분되는 현상에도 나는 뜻 모를 슬픔과 모순을 느꼈다.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며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켜낸 그것들이 지금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고 정신적 독립은 여전히 갈 길이 먼 데다 자유는커녕 방종만 남았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멋대로 누리는 ’잘못된 자유‘와 의존만 하는 ’잘못된 독립‘이라고 볼 수 있기에 내가 볼 때 대다수가 의존은 하면서 자존심만 남은 그런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은 현실세태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다. 소수의 인간들도 느끼다시피.
남베트남을 상징하는 주인공과 북베트남을 상징하는 정치위원이었던 만, 그리고 본이라는 형제애로 맺어진 관계에 대한 우정, 그들 간의 사상과 이념간의 대립, 그리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작가의 고도의 사회, 정치적인 풍자로 이야기를 꾸려나간 작가의 정치, 사회, 문화와 예술(각종 음악양식과 장르들, 시와 소설들, 그리고 미술사조들), 와인이나 특히 각종 음식과 과자간식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깊은 조예에 큰 인상을 받았다. 이 작가 덕분에 용어나 단어를 새로 접할 때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봐야 했으며 그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도 많은 책을 읽어왔고 상식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해 보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수도 없이 펼쳐져 있고 널려 있는 지식들에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자기 육체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진 누군가’의 이름(주인공 본인) 대신에 죄가 미약한 ‘자기 죄보다 더 무거운 육체를 가진 남자’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죄를 덜 지은 무절제한 소령을 죽여야만 했을 때와 남베트남 독립군에 대한 회의적인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장군의 명령에 따라 소니를 죽여야만 했을 때 주인공의 심경과 갈등은 나로서는 상상불가였다. 나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도 양심에 꺼려하고 힘들어하는 내가 과연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더지’가 할 일이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기에 애초에 나는 ‘두더지’ 행세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기도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살고자 하는 욕망’과 ‘삶에의 강한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너무 어려운 선택일 것 같다. 두더지로 조금 더 오래 살다 죽느냐 두더지로서 갈등하느니 목숨이 아깝지만 미련 없이 죽음을 택하느냐는 너무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또한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인도 범죄가 아닌 그저 비극이 되어버리는 이런 전쟁이라는 것이 역사를 통틀어 끊임없이 일어나 죄 없는 백성이나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모를 말 그대로 남은 게 없는 nothing을 위해 그렇게도 셀 수 없이도 많은 아까운 목숨들을 너무도 짧은 한 순간에 앗아가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오랜 시간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게 한 것인지 화도 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다 죽은 우리나라 선조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지도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진 것이 있을수록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힘이 더 들기에 너무 심난한 선택의 문제에 부딪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나는 그저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럼에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은 사실 그런 전쟁들을 통해 역사가 발전되었고 그 와중에 인간이 태어나고 대가 이어지고 인류와 세대를 보존해 왔다는 너무도 불가사의한 기적 같은 일이 이어져오고 있기에 이 또한 너무도 모순적인 ‘불편한 진실’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책에도 작가가 언급한 바 있는 헤겔의 말 중 비극은 옮음과 그름이 아니라 옮음과 옮음 사이의 갈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러한 자기모순에 기반한 정당화 혹은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기에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무죄이면서도 유죄인 점도 인정해야 한다. 이에 더하여 과거 선조들간의 전쟁에 대한 원한은 잊지 않아야 하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용서는 하되 그 원한마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순한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원한을 그 원한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에는 우리나라 또한 독립 운동하면서 겪었던 고난과 역경들을 베트남 전쟁에서도 겪었던 일들을 상상하며 ‘익숙함’이라는 뜨거운 납이 ‘내 육체’라는 주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아픔이 덮쳐 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전쟁 자신은 전쟁을 대변할 수 없는 이유로 예술 작품으로라도 대변되어야 하기에 문학이나 예술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전쟁은 확실히 과거에 일어났다 할지라도 여전히 죽지 않고 잠들어 있다가도 되살아나고 확대되다가 축소되다가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다음 세대를 살아갈 후손에게도 이 중요한 순간들을 기억하게 할 수 있는 재현작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정말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우리들이 살인이라는 말을 별 어려움 없이 내뱉는데 반해 자위라는 단어를 말할 때 더 많이 주저하고 꺼려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자위가 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살인이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러움에도 우리는 가면을 쓰고 이율배반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위에서 느꼈던 두 가지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모순과 이중성, 그리고 이율배반을 지니기에 주인공이 ‘소장’에게 썼던 보고서의 초반부 내용에서 읽었던 대로 ‘모순 없이는 우리라는 존재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우리 인간이 곧 모순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다면 이 글은 정말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그 이유는 환경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꼭 아름다운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아주 볼품없는 것이라도, 혹은 그리 많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에 한 방울의 사랑스러움을 첨가하는 한 가지 방법은 환경이나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기에 나도 나의 이 소설에 대한 읽는 방식을 바꾸고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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