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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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 (저자)이 살았던 최악의 ‘유감스러운 시대’의 ‘사회소설’의 진수였다. 이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기적과도 같은 두뇌유희를 일으킬만한 메타픽션임이 확실하다. 비범한 작가의 비범하지 않은 독자에 대한 황홀한 지적게임으로의 안내서이기도 그와는 정반대로 넘어가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솔직히 독서리뷰 대회 기한이라는 장애물만 없었다면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차분히 재독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리뷰대회를 핑계 삼아 이후에 재독을 반드시 해봐야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가 제안했듯 한 권 더 사서 펼쳐놓고 비교해 보며 읽어야하는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주석과 색인을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넘나들며(이렇게 책 아랫부분에 손때가 묻어난 책은 이 책에도 몇 번이나 나왔고 내가 16일이나 걸려 읽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한 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후 내 독서인생 중 그 책보다 손때가 특히 999행의 운문과 색인에 단연 많이 묻어서 두 군데가 아주 새까매진 최초의 책이다.) 내가 만들어낸 해석은 내가 전문 서평가나 비평가, 아니면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면서도 그리고 그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을 만한 모든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독자들을 마지막 퍼즐조각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공회전’ 시키면서 희열을 느끼는 위대한 V.N. 자신이 아닌 이상 아무리 해도 단 하나로 압축할 수가 없다.

해설을 보면 의외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S의 딸 헤이즐이 S의 시와 K의 주석에까지 초월적 영향을 미쳤다는 다소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종합적 해법’에 도달했다는 브라이언 보이드의 비평서가 이 책을 더 깊이 읽기 위한 독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는 것이나 르네 알라다예라는 사람이 최근 비평서에서 추리소설과 같은 이 소설의 서스펜스와 살인자는 과연 누구인지를 찾아내려는 탐정 서사의 설정을 도치했다고 분석했다는 것에 그저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권의 소설에 대한 비평으로 분파가 나누어지고 그 분파에 따른 비평서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신세계였기 때문이다.

위의 해석들에 비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므로 아예 논외로 하고 순전히 나만의 가설에서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은 ‘어깨가 구부정한 우리의 살인자’이자 ‘굽은 등의 추한 음모자’, ‘눈먼 거지’, ‘절름발이’, ‘주정뱅이 영웅’, ‘미치광이’이기도 한 한 인물이 그림자(셰이드, 옹브르; 결국 우리 모두-어차피 우리 인간 모두 죽음에 빗대어 봤을 때 죽음과 삶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또는 유령(같은 인물이 되는) 연극(호디나 혹은 호딘스키가 수집한 12세기 익명 작가의 걸작 ‘콩스스쿠그-시오’ ; 왕의 그림자 연극 아니면 왕의 거울-천재적인 거울 제조업자 보카이의 수다르그가 만든 깊이를 알 수 없는 불빛으로 환히 빛나는 실로 환상적인 세 폭짜리 맑디 맑은 거울인 비밀스러운 반사 장치, 그리고 수많은 창문들)을 통해서, 그리고 ‘편견’에 맞서려는 ‘그라두스’의 ‘자아분열’과도 같은 그와 다른 인물들 간의 대화와 갈등, 그리고 그들을 묘사한 부분들이 모두 단 한명의 인물인 ‘그라두스’에게서 비롯되어 거울 속 깊이 무수한 나체를 모으고 우아하고 비탄에 잠긴 일군의 소녀로 이루어진 화관이 작아지거나 제각각 다른 님프로 나뉘기도 하면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일련의 수수께끼 같은 퍼즐 조각들을 맞추듯이 따라오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즉 이 소설 모두 ‘그라두스’의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설이 첫 번째.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 편의 첩보영화처럼 ‘젬블라 혁명’으로 친애왕 카를 2세가 도망자 신세가 된 상태에서 그와 닮은 그라두스 아니면 오돈이(개인적으로 오돈보다는 그라두스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색인들을 짜 맞춰 보면 그라두스의 이니셜 G가 신이기도 하면서 ‘잿빛 gray’와 ‘점점 gradual’ 막연히 다가오는 죽음의 첫 글자 G를 나타내므로) 왕 행세를 하며 블라빅에서 떨어져나간 쌍둥이섬 니트라와 인드라-각각 ‘안’과 ‘밖’을 의미하는 단어들, 나는 이런 곳에서도 ‘자아분열’의 이미지를 받았다. 이 모든 단서들을 색인과 각주를 따라 가다보니 알게 되어 소름이 돋기도 했다.-처럼 각자 생활하다 말도 안 되게도 왕 행세를 하던 범죄자이자 죄인 혹은 ‘잭 그레이’이자 ‘그라두스’는 정신병원 탈출자가 되어 쓰레기통에서 면도날을 빼돌려 목을 긋는 ‘최악, 최고의 바보짓’을 함으로써 ‘죽음의 징표’인 S(내 해석으로 ‘셰이드’라 쓰고 ‘킨보트’라 읽고 ‘그라두스’로 인식한)네 지하실의 ‘장난감 태엽장치’의 힘없는 탁탁거림이 아니라 인간 비슷한 존재의 절망적인 몸짓(진짜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의 그림자나 유령)으로 종말을 맞이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이것으로 됐다’며 ‘잭 그레이 퇴장’이라는 섬뜩하면서도 산뜻하고 냉소적이기까지 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자살(바로 ‘자’신의 ‘살’인자)로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내용을 운문과 산문, 저자가 직접 쓴 색인과 각주들을 혼합하여 웬만한 독자들은 읽기 어렵게 만들고 새로운 독자,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독자가 되고자 하는 독자들이라면 끝까지 집요하게 포기하지 않고 읽게 만드는 소설이며 진정한 ‘야수’, ‘미치광이’, ‘광인’이 된 상태에서 쓴 것 같은 천재적인 소설이다.

읽는 것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머리 아프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특히 색인에 가서 끝까지 읽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데 포기하기는 또 싫어서 짜증나기도 하고 눈물까지 날 정도인 책을 쓰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도 높은 몰입과 에너지를 요했을 것이 뻔하다. 그 어려운 걸 견뎌내고 소설을 끝낸 V.N.에게 존경과 감탄의 뜻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는 신체적, 물리적으로는 없다. 그가 마지막 주석에서 (이게 과연 진심인지 아니면 이 또한 허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고백했듯이 그의 주석도 그 자신도 점점 지리멸렬해 지고 있으며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며 그의 시인을 죽이고 그의 일을 끝냈으니. 그러나 고맙게도 그가 같은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변장과 외관으로 꾸밀지 모르지만 계속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한만큼 나와 우리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소설 창백한 불꽃 속에서 정신적, 심리적으로 그것도 치열하게 만날 수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고 싶다.

또 다른 한 가지의 해석으로는 위대한 시인 알렉산더 포프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에서 찾아보고 싶다. 포프 또한 당대 지식인들의 현학성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장편 서사시를 익명으로 발표했다가 서문, 주석, 부록, 색인, 철자교정 등의 치밀한 모방논평을 실어 재발간한 적이 있다고 하고 셰익스피어가 쓴 ‘아테네의 타이몬’에서 바다를 도둑질하는 ‘태양’, 바다를 강탈해 간 바로 그 태양에게서 은빛을 훔쳐가는 ‘달’, 그리고 그 달을 녹여버리는 도둑 ‘바다’를 원점에서 시작해서 원점으로 돌아가도록 ‘공회전’시킨 부분도 그렇고 이 세 도둑들(지리멸렬한 거래자들)을 각각 킨보트, 셰이드, 그리고 그라두스에 대치 시켜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나의 한계는 이 관계를 소설과 관련해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라 참 아쉽다. 어쨌든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흥미로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거창해서인지 가능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책에서 한걸음 나와 숨을 좀 돌리면서 멀리 크게 보면 가장 그럴 법도 한 ‘주변의 합성 젤리 같은 두뇌’를 가진 나의 마지막 해석은 이것이다. 무슨 레포트 수준으로 긴 내용이기 때문에 읽는 분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고 싶다.

머리말 앞에 발췌해 놓은 제임스 보즈웰의 ‘새뮤얼 존슨전’과 549행 ‘대문자 G까지 포함해 모든 신을 무시하면서’의 주석에서 저자가 ‘바로 여기에 문제의 요점 Gist가 있다’고 써 놓은 걸 보고 해석해낸 나만의 방식인데, 6월 23일에 K와 S가 혹은 므시외 보샹과 미스터 캠벨이 체크 게임 한 판 (회문유희를 비롯한 언어유희, 단어골프; 루이스 캐럴이 고안한 것으로 단어 사다리 게임이라고도 함, 의도적인 오탈자와 오식, 각종 젬블라어와 조어들과 앙장브망, 압운, 비유, 연상, 중의법들, 999행의 운문과 그에 대한 주석과 색인을 통한 몽타주 기법 등등 이 모든 게임들의 시작)을 비긴 후 K의 집 테라스에서 나눈 대화를 언급한 ‘메모’가 당면 주제와 전체 사태의 주제에 대한 ‘요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요점’을 시작으로 가공의 인물들과 상상의 나라와 자연환경, 그리고 초자연현상 등을 변형, 확장하여 갖가지 무대장치와 커튼막 혹은 인공연기 같은 것들을 적재적소에 혹은 종잡을 수 없이 횡설수설하는 식으로 배치 서술했는데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에서의 ‘맥거핀’ 역할을 하는 알고 보면 별 의미 없는 복선인 척 위장하는 상황들(카를 왕이 도주하며 숨거나 보트를 타고 이동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소문이 도는 것과 ‘아득히 먼 젬블라’를 떠나 ‘푸른 애팔래치아’까지 나아가는 그라두스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시 전편을 통해 따라가며 시간과 사건들을 병치시키는 등)부터 소설 전체의 설정과 소재들(없어진 장갑, 크리스털 위에 크리스털이라 표현한 손목시계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 하나, 유년 시절 외숙부의 성에서 봤던 환상적인 공연을 마친 마술사의 분칠한 뺨, 하얀 카네이션이 된 마술 꽃, 그의 손가락, 죽은 여새와 색인에서 여새 옆에 영어표기를 Waxwings라고 병렬시켜 왜 여새가 밀랍 날개인지 박제표본을 지칭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하는 것, 그림자, 잿빛 솜털의 얼룩, 크리스털 나라-젬블라, 머나먼 북쪽의 나라, 뾰족한 단검(botkin, bodkin)과 단검에서 첩보물의 낌새나 국왕 시해(regicide)의 전조가 느껴지는 것에 주목하라는 화자의 언급, 첨적(stillicide), -> 이 두 단어의 각운 -cide가 자살 suicide의 각운과 같게 만들어 킨보트가 그라두스는 동일인물일지를 궁금하게 하는 것, 골즈워스와 워드스미스 사이 정사각형 녹지 위의 목조 가옥과 그것의 창문들, 성스러운 나무라는 히커리 나무, 헤이즐이 탔다던 그네, 그리고 55행인 이 행 뒤에 삭제 되었다는 내용 (정신분석학자와 공모하여 부모의 침실을 설계하여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 현대적인 건축가라는 설정), 새 TV, 나의 침실, 괴짜 모드 고모의 잡동사니들이 있는 곳은 ‘손대지 않은’ 성소라는 설정, 5분이 고운 모래 40온스와 같음, 무한대를 상징하는 렘니스케이트 곡선 -‘공회전’과 일맥상통, S네 지하실 태엽장치 장난감, 괜한 “삼단논법 :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벌통으로 비유한 시공간, 길들여진 유령, 개인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 명언 같은 경구 “인생은 어둠 속에서 갈겨쓴 메시지다.”, 텅 빈 에메랄드 상자, 니스의 영국인, 레드 애드머러블로 불리다가 후에 레드 애드머럴로 비속화 되었다는 에스터 판홈리를 재조합해 만든 진홍색 줄무늬가 있는 (검은) 바네사이자 신성한 큰멋쟁이나비인 벨벳으로 된 불꽃 같은 화려한 생물이면서 ‘창고의 영혼’이 말한 S의 최후 장면에 나오는 아탈란타의 별처럼 날아간 ‘아탈란타 나비’-젬블라어로 하르발다, 즉 문장 나비, 결혼한 지 40년이 되었다는 설정, 저녁노을의 불꽃 위로 제트기가 남긴 분홍색 꼬리, ‘시간 어멈’역을 맡은 수줍음 타는 한 어린 손님인 순하디 순한 ‘소녀’가 ‘등이 굽은’ 식모 차림으로 등장해서는 ‘남자’화장실에서 바보처럼 울어버렸다는 운문에서 ‘등이 굽은’ 사람은 이 소설에서 단 한 명 ‘그라두스’밖에 없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은 연극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극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 낡은 창고, 총, 깜둥이, 루비 반지, 백발에 ‘등이 굽은’ 야경꾼, ‘시간 아범’- 다시 한 번 ‘등이 굽은’이라는 표현과 ‘시간 ㅇㅇ’이라는 표현 등장, L'if와 I.P.H. 즉, 내세 준비 연구소-내세를 준비하는 연구소인 만큼 if ‘만약’이라는 발음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사실, 어머니와 아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면충돌, 작고 진지한 소년, 그 집 지하실에 있는 웅덩이, 창백한 젤리와 공중에 뜨는 만돌린, 아이와 함께 있는 아버지, 더욱 확실한 최종 목적지, ‘베일 너머의 땅’에 있는 하얀 샘 fountain (하얗고 높은 솟는 샘, 우리의 샘)과 하얀 산 mountain (절묘한 한 수였던 오식 하나가 ‘영원한 삶’의 근거 역할을 했던 몽 블롱에 대한 시)의 연관성, 그 세계와 이 세상의 대조, 환각에 빠지거나 꿈을 꾸거나 반사 상태에서의 사후 세계에 대한 암시, 바람 빠진limp 비행선blimp처럼 낡고 불안정한unstable 심장으로서 덜컹거리고 뒤뚱거릴wobble 적당한 시기의 무르익음, 편지와 주소, 훌륭한 기구; 면도용품, 작시법 A와 B, 그리고 무언의 명령, 갈색 신발 한 짝, 비누와 ‘우리의 크림’, 안전면도날, 큰 트럭들과 정기선, 말편자 등)까지 세세한 모든 것들을 저자는 교활한 노인처럼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묘사하고 보여주며 독자에게 추리를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척 하면서 좀처럼 ‘요점’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기 위해 괄호 안의 것들에서 보이듯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요점’을 말하고자 했던 부분부터 위의 많은 문장들까지 읽어 봐도 ‘요점’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 가소롭겠지만 나름대로 반전을 꾀하며 나도 일부러 그렇게 서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말 길고 긴 시간을 지나 왔고 많고 많은 생각과 기록들을 해 오며 독서리뷰대회 마지막 날까지 끈질기게 고심했던 진짜 감상문을 써내려갈 시간이 온 것 같다.

소설인데 소설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440쪽짜리 책 한 권에는 얼마나 많은 인물상과 나라들과 작가들, 위인들과 곤충들, 식물들, 음악들, 신화들이 존재해 있고 살아 움직이는지 모른다. 이 책의 (가상의) 주석자인 ‘킨보트’가 쓴 머리말로 시작되어 아예 원래 저자인 V.N.은 저자인지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기법으로 독자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한다. K가 S를 힐책했듯 그 또한 그의 ‘전 존재’가 곧 하나의 ‘가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상대로 치열한 두뇌싸움을 시도한 책은 또 생전처음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짜증도 났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면서도 당연하게도 재미있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두뇌유희를 맛보았고 열린 결말을 만나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정도가 광기에 가깝고 편집증세와 망상장애도 극도로 심하고 불안과 의심, 그리고 질투 속에서 모든 것을 환각에 가까운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통해 본인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 증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신격화 하기도 하고 칠절, 배려가 몸에 밴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는 반면, 알면서도 비열하게 행동하기도 하다가 아닌 척 하다가 체념했다가 극에 달하면 무너져 내렸다가 나와 내가 유일한 친구라 믿는 이와의 우정관계 외에는 관심도 없고 냉소적이며 둘 이외의 모든 이가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자기들 좋을 대로 지껄이는 거라고 치부해 버리고 아름다운 시 한 편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엄청나게 열정적, 열성적, 헌신적으로 돕고 있다고 강하게 믿으며 자신의 노고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동시에 당연히 돕는 게 맞다고 믿기도 하며 자신이 세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믿으며 이 자신의 모든 노력을 몰라줬을 때의 좌절감과 그 느낌을 안 받는 척, 모르는 척, 괜찮은 척 하면서 끊임없이 착각과 오해를 하면서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복수와 응징에 신경을 쓰며 사건 하나마다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관련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분명히 현대용어로 소시오 패스 기질과 조현병 증세가 다분함에도 자신을 절대 모르고 있다, 끝까지. 책 속에서 그는 지금도 그렇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프린스턴 대학교의 수학과 교수이자 천재 중에서도 ‘진짜 천재’이면서도 (제2의 아인슈타인, 겨우 20살에 단 27쪽짜리 논문에 ‘균형 이론’의 단서의 발견을 실으며 자신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찾아낸 결과 ‘내쉬 이론’을 세웠으니) ‘괴짜 천재’인 (사랑할 줄도 모르고 소심의 극치에 무뚝뚝하기까지 한 남자가 오만하고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 사랑에도 힘들도 하고 자신이 너무 똑똑해서 냉전시대 최고의 엘리트들 중 한명으로서 소련의 암호 해속 프로젝트에 비밀리에 투입됐다고 믿고서는 소련 스파이에게 목숨을 위협 받는다는 망상에 사로 잡혔으니) ‘존 내쉬 박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시가 있지만 시가 아닌 독창적인 소설을 써낸 V.N.도 문학계에서의 ‘진짜 천재’이자 또한 ‘괴짜 천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이 책을 직ㄱ접 여기 저기 앞으로 뒤로 수도 없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이 페이지 저 페이지마다 손가락들로 다 끼워 놓고 읽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봐야 만이, 게다가 한 번으로 끝내면 안 되고 재독을 해 봐야 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 곳곳마다 나의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정말 혀를 내두를만한 치밀함과 디테일함, 그리고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이 과도한 것이 아닐 정도다. 감히 인간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도 본다. 이 책을 쓸 때 그는 아마 신에 가까운 정도로 몰입하여 그런 경지에서 미친 듯이 써내려가고 골몰했을 것이다. 이 책은 아무리 표현해 보려 하더라도 제대로 느낌과 감동을 옮기는 것이 힘들 것이고 이와 비슷한 흉내라도 내보려 해도 절대로 이런 구성과 전개를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반드시 재독한 사람에 한하여 그 한 사람의 지평을 열어주고 생각을 깨워주고 영혼을 흔들어주는 역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떻게 이렇게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조용히 이 책의 재독을 권함. 분명히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독자가 되어 있을테니. 신세계경험이란 이런 것! 부디 알에서 깨기를! 위대한 그가 위대하다고 존경했던 셰익스피어에게서 영향 받은 제목 ‘창백한 불꽃’은 달이 태양에게서 훔친 빛으로 이는 화자뿐만이 아니라 화자인지 아닌지 그가 진짜 화자는 아닐까 의심스러운 999행의 시로 나머지 한 행의 완성은 ‘순환’으로 만들어버린 시인도, 그리고 우리 모두 띠고 있을지 모르는 ‘욕망과 희망과 망상의 빛’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요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는 그 ‘요점’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고 싶다. ‘죄악’, ‘범죄’, ‘인간의 본성’, ‘연민’, ‘삶과 죽음의 경이로움’에 대해 S와 K가 대화하다가 ‘섭리’가 있음으로 인해 ‘영혼’이 ‘육신’에 감금된 동안 경험에 의존함에 따라 ‘개별성’에 유치하게 ‘집착’하지만 ‘믿음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희미한 인광’에서 시작해 ‘청백한 빛’을 거쳐 ‘휘황찬란한 광채’로 드러나는 ‘신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더 높은 지성’을 인정하여 ‘영원에까지 미치는 우연’이라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개념을 받아들여야 ‘세계는 우발적으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우주가 생성되는 데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때 그리고 ‘우주정신’이든 ‘제1원인’이든 ‘절대’든 ‘자연’이든 ‘정신’이라는 것에 맞는 이름을 찾으려 할 때 ‘신의 이름이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한 K의 대화 전체가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의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패러디한 것이라는 것과 오식 하나에 담긴 ’영원한 삶‘이라는 암시가 바로 실제 핵심이자 대위법적인 주제였으며 ‘텍스트text’가 아니라 ‘텍스트의 결texture’‘이며 ‘꿈’이 아니라 ‘거꾸로 뒤집힌 우연’이며 ‘얄팍한 난센스’가 아니라 ‘의미의 그물’이라는 것과 소설 속 인물들이 유음어 유희를, 게임에서 상호 연관 패턴과 오묘한 예술적 수완을 발견했던 것처럼 저자도 삶 속에서 그러한 것들과 같은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운문을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단락 안에 꽁꽁 숨겨놓고 독자들이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과거에 집착하는 자’가 ‘우리는 매일 죽는다는 가장 흥미로워하는 진실’을 놓치므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망각’은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되똑대는 작은 테이블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타자기를 앞에 두고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고 도는 내 머리 안팎의 장소나 사물들 사이에 앉아 만들어내고 살아가는 가상의 삶 속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사실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지금의 나)와 주변 환경, 성향 등의 사실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오직 나만의 해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언에 나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저자 V.N.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999행 뒤 빠져 있으면서 순환하는 마지막 1행)을 하는 이는 바로 독자(나)다.

백발이 성성한 K의 친구, 사랑하는 늙은 마술사 S가 그의 색인카드 한 뭉텅이를 그의 모자 속에 넣고 흔들어 한 편의 시를 끄집어 냈듯이 V.N.은 그의 마음속 제목이었던 ‘솔루스 렉스’를 그의 영혼 속에 넣고 흔들어 긴 인생의 불씨를 지피고 짧은 인생의 불씨를 꺼버리기도 하고 한 왕국의 왕을 죽이기도 하고 얼음덩어리를 떨어뜨리고 농부를 맞혀 죽이고 소설속 인물의 열쇠나 안경이나 파이프를 숨기는 등 모든 사건과 사물을 먼 옛날의 사건과 소멸한 사물과 연결시키면서 이런저런 우연들과 가능성들을 한낱 장식물로 취급할 수 있는 한 편의 ‘소설 같은 독서리뷰’ (감히 나의 이 독서리뷰를 말하는 것이다)를 끄집어 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내가 생각하는 역설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것은 삶의 추함보다 죽음의 아름다움을 선호했다는 점에서 깊은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했던 헤이즐 셰이드를 길들여진 유령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헤이즐은 폴더가이스트 현상을 일으켰거나 경험했던 인물로 위대한 미국시인 존 프랜시스 셰이드의 딸인데 이 인물 또한 환영이나 다름없는 가공의 인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과연 우리가 자살을 함으로써 아름다운 죽음을 선택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왜 그랬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가 최악의 유감스러운 시대라서 그런 시대를 살아가느니 자살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였을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에 상징적으로 와 닿는 사건과 기묘한 일이 있듯이 ‘마흔 명의 추종자’ 혹은 나에게서 분리된 마흔 개의 자아를 ‘비밀 조력자들’로 두고 독자들의 상상과 허구의 세계를 자신처럼 그려보기를 바라서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카라마조프 수사’가 중얼거린 말에 용기를 얻고 나의 욕망을 언젠가는 꼭 충족시키고 말겠다. “모든 것이 허용 된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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