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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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나와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거지소녀라니... 주문했던 이 책이 집으로 도착한 걸 보고 제목을 무심코 소리 내서 읽었다. “거.지.소.녀.” 그걸 몰랐던 엄마는 “뭐?” 하시면서 씁쓸한 웃음을 소리 내어 웃으셨다. 지금 내가 딱 금전적으로 ‘거지소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밝힌다. 나는 엄마께서 혹시나 오해하셨을 까봐 사실인데도 더 사실처럼 “책 제목이 거지소녀에요.”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서 읽기 시작했다.
로즈에게 패트릭이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라면서 말했던 그 겸손을 가장한 오만에 로즈 자신도 부인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예 ‘상대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 척하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그녀 자신’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지나치게 솔직하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어찌 보면 나도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을 하게 되는 시점에서 안타깝게도 그리고 바보 같게도 15년 넘게 열일하고 받았던 월급들을 부모님 도와드리느라 맏딸로서 집을 일으켜 세우느라 모두 쓰는 바람에 모아놓은 돈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걸 체감하고 나서 나 하나만 보고 내 비전 하나만 보고 결혼을 결심해 준 고마운 사람에게 결혼준비와 자금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억울한 부분을 여과 없이 쏟아내며 결혼하기 싫다고 앓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나를 더 좋아해 준다는 이유로 나는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준비도 안 된 상태였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결혼하게 돼서 이게 무슨 거지같은 꼴이냐고, 내가 왜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아야 하는 거냐고, 이렇게 돈을 써 가면서까지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거냐고, 나는 남들 하는 대로 정해놓은 제도대로 하기 싫다고 쏟아 내면서(이 책에서 ‘모두에게 이 무슨 사기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라는 구절을 보고 당장 들었던 생각은 ‘맞아!! 진짜 나에게는 갖춰진 게 하나 없이 이렇게 태어나게 되어서 이런 일이 내게 생긴 거야!’였다. 무척이나 공감이 됐었다.) 그 사람 마음을 무겁게 하고는 알아서 하라며 ‘나를 그 사람의 처분에 맡기는 척’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인연이 생기면 결혼할 생각은 있었고 가족들에게 돈을 모두 안 써도 되는 거였는데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 대해 온전한 책임을 질 생각도 하지 못 했고 계획도 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결과를 불쌍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짐을 지운 것이다. 이 심한 말들을 그에게 내뱉었던 밤에 자기 전 나의 하루를 돌이켜 보니 ‘그게 그의 잘못도 탓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라면서 반성을 하게 됐고(묘하게도 위에서 읽었던 똑같은 문장인 ‘모두에게 이 무슨 사기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라는 구절이 떠올라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참 신기한 문장인 것 같다.), 그에게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그 때 다행히 서로 대화로 잘 해결해서 결혼은 곧 할 예정이다.
꼭 내가 그랬듯이 로즈도 이따금씩 이유 없는 말다툼을 일으키고 싸움을 유발하고 싶어 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욕망을 보여주며 그녀 나름의 자존심과 그리고 생기는 수치스러움, 혹은 자신의 속물근성에 대한 혐오나 경멸감을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욕망에 압도되거나 지배되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는 로즈의 모습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기도 했다. 로즈는 인간이라면 특히 감수성 예민한 여자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만한 잘못되고 무모한 선택을 자주 했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임을, 후에 돌이켜 보면 ‘도대체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할 짓임을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더 잘 아는 것인데도 바보처럼 어리석게 끈질기게 매달리고 사정하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 귀퉁이에 계속 써 나갔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거 모두 순간일 뿐인데... 너무 어리석은데... 어쩜 이럴 수가 있지...’ 그럴 정도로 지극히 순간의 감정에 따른 즉흥적인 행동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했는데, 그럼에도 로즈는 상처를 받아도,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버림 받았다는 걸 확인해도, 어떻게든 이런 저런 회유의 말들과 행동들을 하면서 자기의 본모습을 찾아 가려고 애를 쓴다. 잘 살펴보면 상처를 받은 만큼 그녀도 상대방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새엄마 플로에게도 아빠에게도 패트릭에게도 그리고 본의 아니게도 딸 애나에게도 말이다.
원래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상처’라는 것은 (물론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상처 내려는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본의 아니게 생기는 거니까 말이다.
나를 당혹스럽게 했었다는 로즈의 순간의 감정에 따른 즉흥적인 행동들은 ‘한순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부유한 패트릭에게 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 동년배나 선배언니들의 시샘을 즐긴 것이나 기차의 옆자리 땅딸막한 남자의 성희롱에 희생자이자 공모자-흥미롭고 놀라운 내면표현-가 되어 순간의 욕정을 즐긴 것, 혹은 ‘한순간의 욕망을 즐기려고 무모하게 시도했던 것들’(유부녀인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것-이성을 차리고 보면 사실은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나 요즘 시대가 아니기에 만날 약속과 장소를 잡기 힘든 여건에서 한 번이라도 만나려고 안달이 나서 스스로 남자가 있는 곳에 찾아가는 것 등)이다.
그녀가 외도남이 있는 장소로 가려고 했으나 딸 애나 때문에 발이 묶이게 되자 심지어 딸을 데리고 서둘러서 기차역으로 가서 대합실에 머물렀던 장면은 로즈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대합실에서 공중전화의 동전 반환함에 다임 동전 한 개라도 발견할 요량으로 그 때도 역시 그곳을 만지작거리던 애나 덕분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게 되어 이 소설을 읽는 내용 중 로즈가 자기 자신을 잊은 채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가장 흥겹고 신나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졌던 장면(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터진 돈복. 상실과 행운의 연속. 로즈가 과거나 미래에, 사랑에, 혹은 그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때, 얼마 안 되는 시간, 이기적이게도 애나도 똑같이 느끼기를 바랐던 순간)이 펼쳐진다는 건 정말 ‘인생의 알 수 없음(미혹함)과 운명, 그리고 우연’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갖게 해 주었던 나에게도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이런 것들을 로즈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차근차근 서술하고 담담하게 인정하고 그것이 이후에는 자신에게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소설이 끝나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솔직히 이런 부분들을 읽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도 나의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순간의 판단착오나 실수로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정에게 이성의 자리를 내줘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면 나 같아도 그렇게 즐기고도 남기 때문에 당황할 것도 없는데 당황스럽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유독 그녀의 작품은 독후감을 쓸 때 진짜 나의 본모습으로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철저하게 나의 본질과 속마음, 본질을 관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마지막 작품일 거라고 했던 최신작 ‘디어 라이프’를 읽고 나서도 그랬다. 사실 그 책도 읽기 수월하거나 재미있는 단편집은 아니었다. 적나라한 심리 묘사와 상대의 심리까지 꿰뚫어 보는 서술들에 왠지 독후감을 꾸며서 쓰면, 가식적으로 쓰면 그녀의 작품에 대한, 그녀의 작품을 읽은 독자로서의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처음에는 잠잠하고 조용했으나 다 읽고 나서 울림이 되었던)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 이 작품에서 그녀는 내가 인물들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고 인물의 매력과 그에 대한 당연한 반작용인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난 것을 눈치 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글들은 그 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 ‘나라면 어떨까?’ ‘나라도 이럴까?’라고 반성하게 한다. 주인공이자 태어났던 공동체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그래도 된다’라는 식의 체념적인 동화를 강제하는 전형적인 폐쇄적인 분위기의 시골에서 자란 로즈.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표면적으로는 저항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끝내는 결코 체념하지도 동화되지도 않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현명하지 못하기도 하고 지극히 감정에 치우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여성상을 대표하는 것 같았다. 소설의 처음과 끝으로 가기 직전까지 내가 그 상황에 처해있지 않아서인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했으나 끝에 가서 ‘참 멋진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서다. 읽을 때는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던 로즈와 마찬가지로 로즈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하는 남편이었던 패트릭과의 반복되는 다툼 이후 그와 더 이상 싸우지는 않지만 손목과 몸에 면도칼로 자해까지 하면서 서로에게서 떨어져야 살 수 있다고 느끼는 그녀를 봤을 때, 성적 일탈을 저지르고 큰 후회나 자책도 없이 또 다른 성적 일탈을 저지르는 그녀를 봤을 때)이 그녀가 살아왔고 지내왔던 일생을 눈 감고 내가 겪었다 생각하며 감정이입하며 곱씹어 보니 과연 그럴 만도 했겠다고 공감이 되어서다. 그런 로즈뿐만이 아니라 새엄마였던 플로, 로즈의 아빠, 로즈의 남편이었던 패트릭 블래치퍼드와 그와의 사이에 있던 딸 애나, 그녀의 본모습을 찾게 해 준 인물이나 다름없는 유년시절 전우이자 동료와도 같은 친구였던, 불쌍하게도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치명적인 두부 손상으로 사망했던 전역 해군 랠프 길레스피까지 모두들 성격이나 인생관도 흥미로웠다. 그 외에도 그녀의 욕망을 순간순간 흔들었던 지나쳐 갔던 사람들인 기차 옆자리 그 남자, 함께 불륜을 저질러놓고 ‘장난질’이라는 단어 하나로 매도해 버렸던 그녀의 친구 조슬린의 남편 클리퍼드(가장 공감이 안 됐던 부분. 어떻게 친구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 이후 셋이서 가끔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친구 관계로 남을 수 있을까.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던 영어식 표현인 Friends with benefit. 나로서는 공감 제로였다.), 밀회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다정하고 유머가 가득한 장문의 편지에 운명을 운운하며 애달프면서도 안도하며 로즈와의 불륜관계에 포기선언을 했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불륜남 톰, 자존감이 낮은 로즈에게 얼굴이 좀 두꺼워지도록 노력하자는 매력적이고 요리를 잘 하는, 어렸을 때 전쟁 중 독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는 행운이 있었던 사이먼(결국 행운이 그녀에게 옮겨 가려고 했는지 사이먼은 췌장암을 앓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로즈도 슬프고 놀랐겠지만 나도 정말 슬프고 놀랐고 아까웠다, 현실에 있는 인물이든 아니든 사이먼이라는 괜찮은 청년이.)도 기억에 남을 만큼 주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정작 내 주변에는 없고 잘 보이지도 않는 유형의 인물들을 만났다는 것도 흥미라면 흥미였다.
이 책 ‘거지소녀’는 인물들에 더하여 책의 표현들이나 공감을 일으키기도 공감이 전혀 되지 않는 부분도, 앨리스 먼로는 단연 심리묘사의 달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표현도,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 드는 표현이나 재미있는 표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 표현들을 나의 독서수첩에 따로 기재해 놓았다.)
또한 이 책 ‘거지소녀’는 각각의 단편들이 시간의 흐름으로 되지 않고 시공간을 넘나들었기에 정신 차리고 읽지 않거나, 대충 눈으로 따라가며 가볍게 읽거나, 앉은 자리에서 오래 읽지 않고 띄엄띄엄 읽는다면 흐름을 꽤 많이 놓치고 재미있는 소설인지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구성이어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을 때에도 시간을 충분히 낼 수 있을 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해설에서 너무 마음에 들고 훌륭한 내용들이 있어서 한 번 필사하듯이 정리하고 기나긴 독후감을(이런 작품을 읽고 단 한 문장이나 짧은 단문으로 독서소감을 쓸 수 있는 재간이 아쉽게도 나에게는 아직 없다.) 마치겠다.
성숙한 인생은 자신을 알아가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겠지만 그런 여정의 끝에 반드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로즈는 부딪치며 나아간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경로를 수정하며 상처를 입거나 입히고, 수치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더 초라해지더라도 결국에는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제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Who do you think you are? -이 책 ‘거지소녀’의 캐나다 제목이며, 그녀의 최신작 ‘디어라이프’중 ‘밤’이라는 단편에서 그녀가 독자에게 던졌던 질문인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기도 했으며, 내가 사랑하는 미국 락밴드 Imagine Dragons의 노래 Thunder의 가사이기도 한-)’의 로즈가 중년에 다시 찾은 핸래티에서 어린 시절 친구 랠프를 만나 비로소 자기와 닮은 영혼을 찾았다고 느끼는 것도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화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로즈의 이야기를 실패와 실망으로 점철된 우울한 넋두리로 읽는 독자들도 많은 듯하지만, 표면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아픈 경험을 통해 주류에서 벗어날 용기를 낸 로즈는 궁극적으로는 만족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탈출의 꿈만 꾸지 않고 직접 가봤으므로, 부딪치고 살아봤으므로, 궁금한 것은 끝가지 들여다봤으므로, 그 모든 수치와 비아냥을 견뎌냈으므로. 외롭고 보잘것없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삶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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