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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평점 :
나에겐 낯선 이름이었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를 받는 루스 오제키의 네 번째 소설이다. 루스 오제키는 소설가이면서 영화 제작자, 문예창작과 교수, 선불교 승려였던 다양한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이번 소설 [우주를 듣는 소년]은 비극적인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상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회복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줄로 요약되는 전체적인 내용이지만 책은 무려 700페이지에 이르는, 한 손에 들기도 어려운 벽돌책이다. 와! 내가 읽어냈다구!😊
소설 속 베니는 아빠를 잃고 나서 사물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우주의 소리를 듣는 가벼운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던 내 착각을 제대로 깨주는 책이었다. 소설 속 베니와 그의 엄마 애너벨은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입고 함께 있어도 나눌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채 방황하는 매일의 상황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묘사된다. 베니의 시선과, 베니가 듣기 시작한 베니만의 '책'의 시선이 번갈아 묘사되며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독특한 읽는 재미도 주었다.
계속 언급되는 발터 벤야민과 선불교 사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어우러져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베니와 애너벨에게 닥친 상황들에 절묘히 섞여 버무려지며 이야기를 끌어가기에 또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맴도는 생각 한 가지. 저장강박증을 앓는 애너벨의 모습은 역시 그녀의 병적인 상태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넘쳐나는 욕망에 사로잡혀 더 많이, 더 큰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구를 대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 이 많은 물건들이 만들어지고 버려지는지, 이런 소유에 대한 집착은 나를 얼마나 파괴시킬 수 있는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여러 번 되묻게 했다. "진짜"란 과연 무엇일까? 책 속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주제지만 "진짜"를 찾는 건 결국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중요하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다. 나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소중하고 빛을 발하며 어딘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야기는 나의 전부라는 철학적인 메시지!! 세상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책이다(p.93).
책의 무게 만큼이나 묵직하고 깊은 이야기였다. 아마 며칠 동안 베니가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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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원래 이야기는 결코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아, 베니.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삶과 다르지.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는 거야 처음부터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말이야. 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말하는 거야. 말하자면 이야기는 거꾸로 사는 삶이지.
93. 세상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책이다.
102. 당신들의 채울 수 없는 욕망, 애초에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었던 그 욕망의 불꽃이 이제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 새로움을 향한 끝없는 욕구는 당신들로 하여금 우리 몸에 계획적 진부화를 설계해 넣도록 이끌었고, 그래서 우리의 수가 증가할 때도 우리의 수명은 줄어들고 있다. 참 잔인한 계산이다! 우리는 만들어지자마자 버려져서, 다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 구현되지 않은 존재로 돌아간다.
200.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도 베니와 그의 가족이 따돌려야 할 타자이며 그들의 이상함과 비교하여 자신들의 집단적 정상성을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225.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것을 원하게 하는 걸까? 무엇이 물건들에게 인간을 매혹시키는 힘을 주는 것이며,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에 한계라는 게 있을까?
328.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나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그것을 이용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뿐이라고 했지.
391. 중요한 건 과제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행동' 자체임을
525. 일단 어떤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때로 돌아갈 수 없어. 한번 까진 신뢰는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쉬운 답은 없어.
578. 다른 사람들은 간신히 대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되었다. 집과 자동차, 옷과 패물, 전자제품과 가재도구, 그들이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얻은 모든 것들, 사진첩과 편지, 선물, 추억거리,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소중하게 전해져 내려온 가보 같은 소중한 기념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치관과 물질적 소유에 대한 집착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ㅡ내 소유물, 내 가족과 내 인생ㅡ이 한순간 휩쓸려 가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진짜란 무엇인가?' 해일은 우리에게 무상함이 진짜임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하고 있다.
582.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특별한 망상의 풍선 속에 갇혀 있고, 거기서 탈출하는 게 모든 사람의 인생 과제야. 책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우린 과거를 현재로 만들 수 있고, 너를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네가 기억하도록 도울 수 있어. 그리고 우린 너에게 이것저것 보여주고 시간을 경험하는 순서를 바꾸고 너의 세계를 넓혀줄 수 있지. 하지만 깨어나는 건 오롯이 너에게 달려 있어. 준비됐니?
611. 당신의 인생은 자기계발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냥 이대로 완벽해요!
618. 모든 독자는 고유하기 때문에, 지면에 뭐라고 쓰여 있건 당신들은 각자 우리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똑같은 책도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힐 때 전혀 다른 책이 되고, 파도처럼 인간의 의식을 관통해 흐르는, 끊임없이 변하는 책들의 집합체가 된다. 'Pro captu lectoris habent sua fata libelli.' 읽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모든 책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
682. 오래되었지만 아름다운 기계들인데. 인터넷 세상에서는 더이상 말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난 동의하지 않아. 말은 종이에 귀속되는 걸 좋아하지. 경계를 필요로 해. 어떤 규율과 제약이 없으면, 말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다닐 거야. 하지만 내가 좀 구식인가 싶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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