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솔아의 소설은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초파리 돌보기」로 처음 접했다. 그때의 기억이 꽤나 강렬해서 신작의 티저북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자마자 신청했다.

정식 출간본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내가 받은 티저북은 2부가 실려 있었다. 2부는 ‘우주’의 이야기이다.

우주는 고등학교 동창인 선미를 만나며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주를 향한 선미의 시선은 “네가 남자였다면 좋았”겠다는 데에서 그치고 만다. 새로운 남자친구들을 만나는 선미의 뒤에 서서, 우주와 선미는 ‘연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소설을 읽는 내내 레드벨벳의 노래 ‘Psycho’가 생각났다. ‘참 별나고 이상한 사이’면서 ‘아름답고 슬픈 사이’. 우주와 선미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사 같다.

정말 우주가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안된 거라면 선미의 마음은 뭐였을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자의 시선으로 본 그들은 분명 우정 이상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선미가 성적 지향을 깨닫지 못한 건지, 사회적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건지, 혹은 그런 태도를 취했던 우주에게 실망했던 건지. 그래서 남자를 만나는 ‘보통’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건지. 그 속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다. 혹은 본인조차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세부적인 것들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둔 듯하다.

분명한 건 헤어짐이 우주를 성장하게 했다는 것이다. 선미를 만남으로써 우주는 성적 지향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타인을 위해 억지로 만나던 남자를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별이었다. ‘원리를 분석’하고 수리하고 만들어내는 일을, 기어이 선택했다. 우주가 생각한 것처럼, ‘이별은 우주와 선미가 함께 만들어낸 축복이었다’.

다른 부의 등장인물인 화영, 보라, 정수의 이야기는 어떨지 무척 기대된다.

#임솔아 #나는지금도거기있어 #티저북 #북클럽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트콤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의 코믹함이 어디서 기인되나 했는데, 우선 저자인 나보코프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 가차 없이 질주하는 기차의 객실⸺옆에 빈 좌석 하나를 두고 앞에 빈 좌석 둘을 마주하는 북측 창가⸺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승객이 바로 티모페이 프닌 교수였다. 완전무결한 대머리, 그을린 피부, 깨끗이 면도한 얼굴⸺그 커다란 갈색 돔, 거기에 뿔테 안경(어린아이 같은 눈썹의 숱 없음을 가려주는), 원숭이 같은 윗입술, 굵은 목선, 좀 꽉 끼는 트위드 상의 속의 장사 상체⸺그 시작은 제법 창대했지만, 그 끝은 홀쭉한 다리(지금은 플란넬 바지를 입고 서로 교차), 그리고 여자 발처럼 약해 보이는 발이었으니 다소 미약했다. (7쪽)

소설의 첫 문단이다. 여기서부터 프닌을 묘사하는 나보코프의 방식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프닌이 하는 행동도 그를 우스꽝스러운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소설에 등장해서 한 첫 행동이 기차를 잘못 탄 것이었으니.

프닌은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혁명을 피해 프랑스에서 자랐고 종국에는 미국에 정착해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이민자이다. 그에게 “영어라는 언어”는 “특별 위험 지대”이다. 오류로 가득한 영어, 어딘지 희극적이게 느껴지는 그의 행동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된다.

7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6장까지는 거침없이 프닌과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프닌의 행동과 외양 관련 묘사 역시 적나라하고 막힘없다.
그러나 7장에서는 최초로 ‘나’라는 화자를 주어로 하는 문장이 시작된다. 그전까지 간간이 등장한 화자는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막연히 나보코프라고 생각해 왔다. 화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불현듯 튀어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 의문점은 완벽히 해소되지 않지만, 「옮긴이의 말」을 통해 화자가 정말 나보코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장은 앞의 장들과는 결이 다르다. 화자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봐 왔던 프닌을 다시 조명하게 만든다. 프닌의 말투와 행동을 기막히게 흉내내는 연극 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웃음을 잃게 된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프닌을 그런 방식으로 보아 온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혹 당신들이 불쾌하다면 그건 기만이라고.

“내가 미국 유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행복할 때조차 불가능하(90쪽)”다는 프닌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에 달린 각주는 대부분 말장난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solution에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뜻과 함께 ‘성분을 용해시키다’는 뜻이 있음을 이용한 말장난. (86쪽 각주)

각주를 읽어야 말장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솔직히 각주를 읽어서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한국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봤을 때만큼의 감흥은 없다.
모국어가 주류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서(특히 한국어 사용 비중은 더욱 극악이므로) 소설을 읽는 내내 프닌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7장에서 그를 향한 조롱이 매우 불쾌하게 다가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까.

우습게 묘사해도 프닌의 행동이 보여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목마른 다람쥐의 갈증 해소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급수 장치를 정중하게 누르는 사람(86쪽)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프닌 #블라디미르나보코프 #나보코프 #프닌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물화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예술과 문학 작품 속의 정물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림으로서의 정물 위주로 전개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속 인물 및 일화가 자주 등장해서 조금 놀랐다. 뿐만 아니라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에드거 앨런 포 「어셔가의 몰락」 같은 문학 작품과, 피카소나 고흐 등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본격적으로 언급되었다. 관련 배경 지식을 알고 읽으면 보다 다채로운 독서가 가능할 것 같다.

‘스틸라이프‘가 정물이라는 사실은 본문의 첫 장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갈수록, 정물은 삶에 깊게 들어와 있는 대상이었다.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컵도 정물이다. 이미 정물은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해 온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정물의 영문명이 still life라는 게 더없이 잘 어울리고 제 이름을 찾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배는 그동안 사과보다 덜 시적이라고 여겨졌다. 서과처럼 예쁘지도 향기롭지도 않지만 배는 그 맛이 뛰어나서 훌륭한 미각에 어필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사과를 꿈꾸지만 전직 판사들은 배를 먹는다. 배의 이름은 황제와 왕과 여왕과 남작과 남작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배가 미국인의 이름을 언제 갖게 될지… 공화당원이 소화할 수 있는 배의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는 좀 기다려야 할 듯하다. (123쪽)

즉 예술은 인공적이고, 무기적이고, 돌로 만들어지고, 물감으로 그려지고, 종이 위에 잉크 또는 흑연의 흔적으로, 표백한 나무 펄프에 젖은 탄소를 찍는 타자기의 금속 키로 만들어지지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의미는 살아 있는 것이다. (198쪽)

-
내 책상에 정물이 놓여 있다. 물컵과 연필, 탑처럼 쌓여 있는 책 다섯 권이 있다. 영양제가 가득 담긴 통들과 면봉과 헤드폰과 작은 봉제인형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그 자체로는 사소한 것들을 무작위로 모아 놓은 것이다”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그의 말이 내게는 관점의 차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책상 위 물건을 치워야 할 잡동사니로 본다면 그것들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고, 아름다운 질서로 본다면 정물로 존재한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정물 #정물화 #예술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격정과 신비 을유세계문학전집 128
르네 샤르 지음, 심재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시를 읽기 시작했을 땐 잘 읽히지 않아 힘들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들』의 시들에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한자어가 아니라 사전으로 그 뜻을 찾아봐야 할 정도로 낯선 한자어였기 때문에.

그러나 『히프노스 단장』은 달랐다.
르네 샤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최전선에서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히프노스’는 그 시절 샤르가 사용한 가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히프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잠의 인격신이자 밤의 아들이고,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의 쌍둥이 형제이며, 대지와 바다 위를 빠른 속도로 날면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267-268쪽).
르네 샤르가 “메모”라고 부른다는 『히프노스 단장』은 정말 일기 같았다. 전쟁 도중 겪은 일화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그와 관련된 생각이나 느낌이 모여 단장(斷章)을 이루고 있었다. 저항 없이 웃게 되는 부분들이 제법 많아 좋았다. 또 시와 관련된 문장이 많았다. 그 문장들이 너무 공감되고 적절해서 샤르의 시를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동료를 잃은 일화도 몇 번 등장한다.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절망감과 무력감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희망을 가지려는, 정확히는 인간을 향한 희망을 표출하는 마음을 샤르의 시에서 읽을 수 있었다.
혼란과 혐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뉴스가 한줄기 빛처럼 등장하곤 한다. 그럴 때면 잃어버린 인류애를 조금이나마 되찾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런 게 르네 샤르의 마음이었던 걸까. 그리고 인생이란 이렇게 굴러가는 걸까 생각해 본다. 희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은 찾아오고야 만다고.

-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등불 하나, 세상 끝에 있는 등불 하나가, 용기와 침묵을 깨어 있게 했다. (61쪽)

시인은 덤덤하게 패배를 승리로, 승리를 패배로 바꾼다. (81쪽)

시인은 각성 상태의 물리적인 세계와 수면 상태의 엄청난 자유로움 사이의 저울을 평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삶의 서로 다른 그 두 가지 상태를 무차별적으로 오가면서, 시인은 각성과 잠이라는 인식의 분할선 위에 시의 예민한 몸을 눕힌다. (82쪽)

아이들은 일요일이 따분하다. 참새는 하루 이십사 시간을 일주일로 만들어 일요일을 잘게 나누자고 제안한다. 요컨대 매일매일 한 시간의 일요일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그게 식사 시간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맨 빵만 먹는 식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참새에게 일요일 이야기는 그만하자. (107쪽)

닷새 밤 동안 계속된 경계 근무에 기진맥진한 프랑수아가 내게 말한다. “내 칼을 커피 한잔과 기꺼이 맞바꾸겠어요!” 프랑수아는 스무 살이다. (125쪽)

한 편의 시가 그리는 비행 궤적. 그 궤적이 누구에게나 감지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27쪽)

한 오라기라도 끊어지면 안 되는 무수한 신뢰의 끈으로, 나는 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나와 동류인 사람들을, 희생보다 훨씬 더, 열령히 사랑했다. (135쪽)

함께 하는 식사마다, 우리는 자유를 동석하라고 초대한다. 자리는 비어 있지만 식기는 계속 놓여 있다. (135-136쪽)

저항은 그저 희망일 뿐이다. 오늘 밤 구석구석 꽉 채운 만월이 되어, 내일이면 시편詩篇들이 지나가는 길 위의 비전이 될, 히프노스의 달처럼. (145쪽)

“이 땅에서, 우리는 조금 이기고, 많이 져요. 시대의 명령은 되돌릴 수 없어요. 사실상 그 점이, 천둥처럼 나를 뒤흔드는 삶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나를 평온하게 만들어 줘요.” (162쪽)

그는 내게 말들의 밤 위로 날아오르는 법, 닻을 내린 배들의 몽롱한 마비로부터 아득히 멀리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빙하가 아니라 영원한 빙하를 가능케 해 주는 것, 빙하의 고독한 개연성이었다. (212쪽)

해바라기를 믿는 사람은 집 안에서 궁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 생각이 그의 생각이 될 것이다. (214쪽)

우리는 섬광 속에 살지만, 그 섬광이 영원의 심장이다. (218쪽)

도시의 거리에 내 사랑이 있다. 분기分岐된 시간 속에서 내 사랑이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내 사랑은 더 이상 내 사랑이 아니고, 모두가 내 사랑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내 사랑은 이제 기억하지도 못한다. 정확히 누가 자기를 사랑했고, 자기가 넘어지지 않도록 누가 멀리서 불빛을 비춰 주는지. (240-241쪽)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세계문학 #세계문학추천 #시집추천 #시선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주의
웬만하면 스포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나 이 소설만큼은 그러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 채 겉핥기만 하다가 끝낼 것 같달까.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은 독서 후에 이 서평을 읽기를 권한다.



-
삶에는 종종 비논리적인 모순이 필요하며, 바로 그것이 삶을 사랑스럽고 또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거지. (47-48쪽)

친화력이라는 건 그러니까 그것이 이혼에 영향을 미칠 때 비로소 흥미로워지는 거요. (58쪽)

그래서 지금은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들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선호되는 양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58-59쪽)

나는 서로 헤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어떤 두 사람의 긴밀한 결합이 제3의 인물의 우연한 등장에 의해 해체되고, 애초에는 그처럼 아름답게 결합되었던 이들 중 하나가 무기력하게 저 멀리로 내쫓기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잘 알고 있답니다. (60쪽)

말하자면 이전에는 둘씩 결합되어 있던 네 개의 존재가 서로 접촉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결합을 버리고 새롭게 결합하는 경우들 말입니다. 이렇게 떠나보내고 붙잡고, 또 이렇게 달아나고 찾고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드높은 섭리를 실제로 볼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사람들은 그러한 존재들에게 일종의 의지와 선택 작용이 있다고 인정하며, 따라서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조어를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60-61쪽)

제목이 『선택적 친화력』인 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예상보다 빠르게 ‘선택적 친화력’에 대한 설명과 비유가 소설에 등장했다. 그것도 대놓고. 관련 대목만 읽어 보더라도 네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결말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이혼해서 각각 오틸리에와 대위와 결합할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 그러니까 쌍방 불륜 행위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샤를로테와 대위는 그래도 그들의 사랑이 부도덕한 것임을 알고 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세기의 연인인 것처럼 속절없이 서로에게 빠져들고 이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샤를로테는 대위에게 집을 떠나라고 한다. 모든 일은 에두아르트가 친구인 대위를, 샤를로테가 양딸인 오틸리에를 집으로 오게 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위는 샤를로테의 말을 받아들여 금세 떠나지만,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원래 지내던 기숙 학교로 보내려는 샤를로테의 결정에 반대한다. 차라리 자신이 떠나겠다고 말하며. 급기야 샤를로테에게 이혼해 달라는 말까지 들먹이던 에두아르트는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듣곤 곧장 전쟁터로 간다. 오틸리에는 여전히 에두아르트에 대한 마음을 단념하지 못한 채 샤를로테의 집에서 살아간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이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부에 이미 폭풍처럼 사건이 휘몰아쳐서 절반 넘게 남은 분량엔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몹시 궁금했다.

-
우리는 영국 해군이 애용하는 특별한 장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왕실 함대의 모든 밧줄은, 가장 질긴 것에서부터 가장 약한 것에 이르기까지, 한 가닥의 붉은 실이 전체를 관통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전체를 다 풀어헤치지 않고는 그 붉은 실을 뽑아낼 수가 없고, 그래서 아주 작은 토막의 밧줄일지라도 그것이 왕실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틸리에의 일기는 애정과 애착이라는 실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서로 연결하고 전체를 특징짓는다. (214쪽)

오틸리에의 일기에서

삶 이후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마음은 언젠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가족들 곁에 모인다”는 말은 정말이지 가슴에 사무치는 표현이다.
멀리 떠난 사람이나 돌아가신 분들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하는 기념비나 표지들이 있긴 하지만 그림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다. 비슷하게 닮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친구와 다툴 때처럼 무언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몸은 둘이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포근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종종 그림을 보면서 그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눈다. 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며,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거나 무엇을 느끼지도 않고, 오로지 그림으로서만 우리를 대하는데도 우리는 그를 바라보고,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느끼며, 심지어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더 깊어질 수도 있다. (214-215쪽)

우리는 그처럼 모순된 존재다! 건축기사는 자신이 선조들의 그러한 무덤을 파헤쳤다고 고백하면서도, 후세들을 위해 비석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과연 영원을 위한 것일까? 우리가 아침에 옷을 입는 것은 밤에 그것을 다시 벗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비록 백 년 동안에 불과하더라도 우리가 가족 곁에서 쉬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교인들의 발에 밟혀 퇴락한 수많은 묘비들과 그 위로 무너져 내린 교회들을 보면, 죽음 후의 삶이란 언제나 제2의 삶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림 속에서, 그리고 비문 속에서 제2의 삶 안으로 들어가 원래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오랫동안 거기서 머무른다. 하지만 제2의 삶인 그림도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에게와 마찬가지로 비석에게도 시간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다. (216쪽)

우리는 겨울도 기꺼이 감수한다. 나무들이 그렇게 유령처럼, 헐벗은 채 우리 앞에 서 있을 때면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롭게 자신을 펼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또한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싹이 트고 꽃잎이 나오면, 사람들은 잎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주변 풍경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며, 나무가 하나 의 완성된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까지 조급해한다. 자기 부류에서 완벽해진 모든 것은 그 부류를 넘어서기 마련이며, 무언가 다른 것, 비교 불가능한 무엇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이팅게일은 이런저런 소리를 내는 데 있어서 여전히 새에 머무른다. 하지만 일단 새라는 종을 뛰어넘으면 날개 달린 모든 동물에게 노래란 대체 무엇인가를 암시해 주려는 듯 보인다. (303-304쪽)

2부에는 오틸리에의 일기가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그녀의 일기를 읽으며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처음에는 배은망덕하고 가증스럽게만 느껴졌으나 일기 속 오틸리에의 생각과 문장들은 너무 좋았다. 특히 가장 처음 나오는 일기는 통째로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문장들 투성이였다. 마치 괴테가 아니라 오틸리에라는 실존 인물이 쓴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틸리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변한 시점은 아무래도 샤를로테 아들의 죽음 이후이지 않을까. 오틸리에의 실수로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의 아들은 강에 빠져 죽는다. 그 이후로 오틸리에의 심경에는 매우 큰 변화가 생긴다.
사실 오틸리에는 아기가 태어나고 아기를 맡아 기르면서 에두아르트와의 사랑을 포기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에두아르트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그에게 떠나라고 단호하게 외쳤다. 그리고 아기가 죽자 속죄의 뜻으로 단식 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라나 아기의 죽음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반응은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는 불쌍한 아기를 애도하는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을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별안간에 치워 준 하나의 운명으로 여겼다. (357쪽)

뿐만 아니라 아기가 죽기 전, 에두아르트는 친구(=대위=소령)에게 샤를로테와의 이혼을 다시 한 번 논한 바 있다. 아들을 생각하라는 친구를 향해 에두아르트는 “아이를 위해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부모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야.”라고 말했다. 게다가 자신은 재산이 많으니까 문제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에두아르트의 지독히도 냉랭한 속내는 샤를로테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기가 애정 없는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샤를로테는 대위를 떠올리며 관계가 행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기의 눈과 몸은 오틸리에와 대위를 닮았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기묘함과 불쾌함이 있다.
종종 이런 질문을 발견하곤 한다.
‘정신적 불륜과 육체적 불륜 중에 뭐가 더 나쁜가‘
네 인물은 실제로 육체적 불륜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러나 아기를 통해, 그런 걸 재고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작가가 질문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처음 봤을 땐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샤를로테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젊은 시절 사랑했으나 주변의 반대로 헤어지고 중년이 되어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곧 시들해진다.

에두아르트는 정말 사랑을 한 게 맞을까? 샤를로테를 갖고 나서 식어버린 그의 사랑이 오틸리에에게는 영원히 유효했을까? 에두아르트가 소설에서 내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오틸리에는 내 것”이라는 뉘앙스의 말. 어쩌면 에두아르트에게 사랑이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
보통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들의 끝은 파멸, 즉 죽음이다. 이건 이 소설에 한정된 게 아니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결말이다. 그래서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가 죽었을 때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문단은 끝까지 내게 찜찜함을 안겨 줬다.

이렇게 하여 사랑하는 두 사람은 나란히 쉬고 있다. 그들의 묘소 위에는 평화가 감돌며, 밝은 표정의 낯익은 천사들은 둥근 천장으로부터 그들을 내려다본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 함께 잠에서 깨어난다면 그건 얼마나 다정한 광경이 될 것인가. (405쪽)

괴테의 목소리로 읽히는 이 문장들은 그들이 죽음으로써 마침내 사랑을 이룬 것처럼 읽히기도, 그 불륜의 끝이 죽음임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괴테 #고전문학 #소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