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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친화력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주의
웬만하면 스포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나 이 소설만큼은 그러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 채 겉핥기만 하다가 끝낼 것 같달까.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은 독서 후에 이 서평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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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종종 비논리적인 모순이 필요하며, 바로 그것이 삶을 사랑스럽고 또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거지. (47-48쪽)
친화력이라는 건 그러니까 그것이 이혼에 영향을 미칠 때 비로소 흥미로워지는 거요. (58쪽)
그래서 지금은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들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선호되는 양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58-59쪽)
나는 서로 헤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어떤 두 사람의 긴밀한 결합이 제3의 인물의 우연한 등장에 의해 해체되고, 애초에는 그처럼 아름답게 결합되었던 이들 중 하나가 무기력하게 저 멀리로 내쫓기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잘 알고 있답니다. (60쪽)
말하자면 이전에는 둘씩 결합되어 있던 네 개의 존재가 서로 접촉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결합을 버리고 새롭게 결합하는 경우들 말입니다. 이렇게 떠나보내고 붙잡고, 또 이렇게 달아나고 찾고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드높은 섭리를 실제로 볼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사람들은 그러한 존재들에게 일종의 의지와 선택 작용이 있다고 인정하며, 따라서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조어를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60-61쪽)
제목이 『선택적 친화력』인 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예상보다 빠르게 ‘선택적 친화력’에 대한 설명과 비유가 소설에 등장했다. 그것도 대놓고. 관련 대목만 읽어 보더라도 네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결말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이혼해서 각각 오틸리에와 대위와 결합할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 그러니까 쌍방 불륜 행위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샤를로테와 대위는 그래도 그들의 사랑이 부도덕한 것임을 알고 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세기의 연인인 것처럼 속절없이 서로에게 빠져들고 이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샤를로테는 대위에게 집을 떠나라고 한다. 모든 일은 에두아르트가 친구인 대위를, 샤를로테가 양딸인 오틸리에를 집으로 오게 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위는 샤를로테의 말을 받아들여 금세 떠나지만,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원래 지내던 기숙 학교로 보내려는 샤를로테의 결정에 반대한다. 차라리 자신이 떠나겠다고 말하며. 급기야 샤를로테에게 이혼해 달라는 말까지 들먹이던 에두아르트는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듣곤 곧장 전쟁터로 간다. 오틸리에는 여전히 에두아르트에 대한 마음을 단념하지 못한 채 샤를로테의 집에서 살아간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이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부에 이미 폭풍처럼 사건이 휘몰아쳐서 절반 넘게 남은 분량엔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몹시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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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국 해군이 애용하는 특별한 장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왕실 함대의 모든 밧줄은, 가장 질긴 것에서부터 가장 약한 것에 이르기까지, 한 가닥의 붉은 실이 전체를 관통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전체를 다 풀어헤치지 않고는 그 붉은 실을 뽑아낼 수가 없고, 그래서 아주 작은 토막의 밧줄일지라도 그것이 왕실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틸리에의 일기는 애정과 애착이라는 실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서로 연결하고 전체를 특징짓는다. (214쪽)
오틸리에의 일기에서
삶 이후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마음은 언젠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가족들 곁에 모인다”는 말은 정말이지 가슴에 사무치는 표현이다.
멀리 떠난 사람이나 돌아가신 분들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하는 기념비나 표지들이 있긴 하지만 그림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다. 비슷하게 닮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친구와 다툴 때처럼 무언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몸은 둘이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포근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종종 그림을 보면서 그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눈다. 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며,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거나 무엇을 느끼지도 않고, 오로지 그림으로서만 우리를 대하는데도 우리는 그를 바라보고,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느끼며, 심지어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더 깊어질 수도 있다. (214-215쪽)
우리는 그처럼 모순된 존재다! 건축기사는 자신이 선조들의 그러한 무덤을 파헤쳤다고 고백하면서도, 후세들을 위해 비석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과연 영원을 위한 것일까? 우리가 아침에 옷을 입는 것은 밤에 그것을 다시 벗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비록 백 년 동안에 불과하더라도 우리가 가족 곁에서 쉬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교인들의 발에 밟혀 퇴락한 수많은 묘비들과 그 위로 무너져 내린 교회들을 보면, 죽음 후의 삶이란 언제나 제2의 삶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림 속에서, 그리고 비문 속에서 제2의 삶 안으로 들어가 원래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오랫동안 거기서 머무른다. 하지만 제2의 삶인 그림도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에게와 마찬가지로 비석에게도 시간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다. (216쪽)
우리는 겨울도 기꺼이 감수한다. 나무들이 그렇게 유령처럼, 헐벗은 채 우리 앞에 서 있을 때면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롭게 자신을 펼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또한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싹이 트고 꽃잎이 나오면, 사람들은 잎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주변 풍경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며, 나무가 하나 의 완성된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까지 조급해한다. 자기 부류에서 완벽해진 모든 것은 그 부류를 넘어서기 마련이며, 무언가 다른 것, 비교 불가능한 무엇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이팅게일은 이런저런 소리를 내는 데 있어서 여전히 새에 머무른다. 하지만 일단 새라는 종을 뛰어넘으면 날개 달린 모든 동물에게 노래란 대체 무엇인가를 암시해 주려는 듯 보인다. (303-304쪽)
2부에는 오틸리에의 일기가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그녀의 일기를 읽으며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처음에는 배은망덕하고 가증스럽게만 느껴졌으나 일기 속 오틸리에의 생각과 문장들은 너무 좋았다. 특히 가장 처음 나오는 일기는 통째로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문장들 투성이였다. 마치 괴테가 아니라 오틸리에라는 실존 인물이 쓴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틸리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변한 시점은 아무래도 샤를로테 아들의 죽음 이후이지 않을까. 오틸리에의 실수로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의 아들은 강에 빠져 죽는다. 그 이후로 오틸리에의 심경에는 매우 큰 변화가 생긴다.
사실 오틸리에는 아기가 태어나고 아기를 맡아 기르면서 에두아르트와의 사랑을 포기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에두아르트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그에게 떠나라고 단호하게 외쳤다. 그리고 아기가 죽자 속죄의 뜻으로 단식 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라나 아기의 죽음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반응은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는 불쌍한 아기를 애도하는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을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별안간에 치워 준 하나의 운명으로 여겼다. (357쪽)
뿐만 아니라 아기가 죽기 전, 에두아르트는 친구(=대위=소령)에게 샤를로테와의 이혼을 다시 한 번 논한 바 있다. 아들을 생각하라는 친구를 향해 에두아르트는 “아이를 위해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부모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야.”라고 말했다. 게다가 자신은 재산이 많으니까 문제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에두아르트의 지독히도 냉랭한 속내는 샤를로테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기가 애정 없는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샤를로테는 대위를 떠올리며 관계가 행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기의 눈과 몸은 오틸리에와 대위를 닮았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기묘함과 불쾌함이 있다.
종종 이런 질문을 발견하곤 한다.
‘정신적 불륜과 육체적 불륜 중에 뭐가 더 나쁜가‘
네 인물은 실제로 육체적 불륜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러나 아기를 통해, 그런 걸 재고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작가가 질문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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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처음 봤을 땐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샤를로테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젊은 시절 사랑했으나 주변의 반대로 헤어지고 중년이 되어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곧 시들해진다.
에두아르트는 정말 사랑을 한 게 맞을까? 샤를로테를 갖고 나서 식어버린 그의 사랑이 오틸리에에게는 영원히 유효했을까? 에두아르트가 소설에서 내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오틸리에는 내 것”이라는 뉘앙스의 말. 어쩌면 에두아르트에게 사랑이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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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들의 끝은 파멸, 즉 죽음이다. 이건 이 소설에 한정된 게 아니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결말이다. 그래서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가 죽었을 때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문단은 끝까지 내게 찜찜함을 안겨 줬다.
이렇게 하여 사랑하는 두 사람은 나란히 쉬고 있다. 그들의 묘소 위에는 평화가 감돌며, 밝은 표정의 낯익은 천사들은 둥근 천장으로부터 그들을 내려다본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 함께 잠에서 깨어난다면 그건 얼마나 다정한 광경이 될 것인가. (405쪽)
괴테의 목소리로 읽히는 이 문장들은 그들이 죽음으로써 마침내 사랑을 이룬 것처럼 읽히기도, 그 불륜의 끝이 죽음임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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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