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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평점 :
전에 『SF 보다 벽』이라는 소설에 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 소설의 도입부를 열었던 문지혁 소설가의 글을 다시 한 번 빌려오겠다.
카프카 소설의 화자에 따르면 만리장성은 북방 이민족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 그렇다. 벽은 나누고 막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7쪽)
그러나 벽은 반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중략)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모험 사이에는 언제나 (비록 문지방처럼 야트막할지라도) 벽이 세워져 있고, 이를 넘는 행위는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의미한다. 문지방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 주인공을 필요로 하는 낯선 우주가 기다리고 있다. (8-9쪽)
문학이 무엇인지, 장르와 SF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끝없이 벽을 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아닐까? 사람과 방과 계단과 궁전을 넘어, 누군가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그리는 일. 우리에게 메타포가, 비유와 우화가, 문학이 그런 것처럼. 이야기는 벽이 되고 문이 되고 세계가 된다. 책은 벽돌이다.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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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정말로 다른 세상과 이어지는 문을 넘나드는 소녀 재뉴어리의 이야기이다. 그 이전에 그녀의 부모님이 먼저 그렇게 했다.
재뉴어리의 어머니인 애들레이드, 에이드는 우연히 다른 곳에서 온 소년인 유령 소년을 마주한다. 율 이언, 그러니까 재뉴어리의 아버지인 줄리언은 문을 통해 왔다. 그 찰나의 순간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에이드는 사흘 후에 또 만나기로 한 율을 기다리지만 그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녀는 율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 세상의 모든 문을 여는 여정을 떠난다. 직접 배를 만들어서.
사흘 후에 만나자는 약속은 12년이 되어서야 이행된다. 마침내.
그들은 아이를 가지고, 부부가 되고,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향수병에 걸린 듯한 에이드를 위해 줄리언은 기어이 함께 떠나기로 한다. 불행한 사고를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에이드와 헤어진 줄리언은 그녀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의 문을 열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딸인 재뉴어리는 고용인인 로크의 집에 맡긴 채. 줄리언은 재뉴어리가 커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재뉴어리는 그런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어느 날, 재뉴어리는 로크로부터 아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지나치게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책 속으로 뛰어든다.
그 책의 이름은 『일만 개의 문』.
바로 에이드와 줄리언의 이야기.
재뉴어리는 그 책이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긴 기록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아빠는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이제는 아빠를 찾기 위한 재뉴어리의 여정이 시작된다. 재뉴어리는 아빠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아빠는 왜 실종된 건지, 모든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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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보면 나무 판자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열리고 닫힌다는 성질 때문일까. 문 너머엔 왠지 이쪽과 다른, 낯선 세상이 존재할 것만 같다.
낯선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상상에서 그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우리의 상식과 질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설에서는 실제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을 찾아 헤매고 그 문을 열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건 얼마나 큰 사랑이 담긴 행위인 걸까. 현재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사랑을 나도 언젠가 경험할 수 있을까.
새삼, 사랑은 힘이 세다.
그리고 이야기도 그렇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