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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평점 :
시트콤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의 코믹함이 어디서 기인되나 했는데, 우선 저자인 나보코프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 가차 없이 질주하는 기차의 객실⸺옆에 빈 좌석 하나를 두고 앞에 빈 좌석 둘을 마주하는 북측 창가⸺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승객이 바로 티모페이 프닌 교수였다. 완전무결한 대머리, 그을린 피부, 깨끗이 면도한 얼굴⸺그 커다란 갈색 돔, 거기에 뿔테 안경(어린아이 같은 눈썹의 숱 없음을 가려주는), 원숭이 같은 윗입술, 굵은 목선, 좀 꽉 끼는 트위드 상의 속의 장사 상체⸺그 시작은 제법 창대했지만, 그 끝은 홀쭉한 다리(지금은 플란넬 바지를 입고 서로 교차), 그리고 여자 발처럼 약해 보이는 발이었으니 다소 미약했다. (7쪽)
소설의 첫 문단이다. 여기서부터 프닌을 묘사하는 나보코프의 방식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프닌이 하는 행동도 그를 우스꽝스러운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소설에 등장해서 한 첫 행동이 기차를 잘못 탄 것이었으니.
프닌은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혁명을 피해 프랑스에서 자랐고 종국에는 미국에 정착해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이민자이다. 그에게 “영어라는 언어”는 “특별 위험 지대”이다. 오류로 가득한 영어, 어딘지 희극적이게 느껴지는 그의 행동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된다.
7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6장까지는 거침없이 프닌과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프닌의 행동과 외양 관련 묘사 역시 적나라하고 막힘없다.
그러나 7장에서는 최초로 ‘나’라는 화자를 주어로 하는 문장이 시작된다. 그전까지 간간이 등장한 화자는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막연히 나보코프라고 생각해 왔다. 화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불현듯 튀어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 의문점은 완벽히 해소되지 않지만, 「옮긴이의 말」을 통해 화자가 정말 나보코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장은 앞의 장들과는 결이 다르다. 화자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봐 왔던 프닌을 다시 조명하게 만든다. 프닌의 말투와 행동을 기막히게 흉내내는 연극 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웃음을 잃게 된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프닌을 그런 방식으로 보아 온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혹 당신들이 불쾌하다면 그건 기만이라고.
“내가 미국 유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행복할 때조차 불가능하(90쪽)”다는 프닌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에 달린 각주는 대부분 말장난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solution에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뜻과 함께 ‘성분을 용해시키다’는 뜻이 있음을 이용한 말장난. (86쪽 각주)
각주를 읽어야 말장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솔직히 각주를 읽어서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한국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봤을 때만큼의 감흥은 없다.
모국어가 주류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서(특히 한국어 사용 비중은 더욱 극악이므로) 소설을 읽는 내내 프닌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7장에서 그를 향한 조롱이 매우 불쾌하게 다가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까.
우습게 묘사해도 프닌의 행동이 보여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목마른 다람쥐의 갈증 해소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급수 장치를 정중하게 누르는 사람(86쪽)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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