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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과 신비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8
르네 샤르 지음, 심재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처음 시를 읽기 시작했을 땐 잘 읽히지 않아 힘들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들』의 시들에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한자어가 아니라 사전으로 그 뜻을 찾아봐야 할 정도로 낯선 한자어였기 때문에.
그러나 『히프노스 단장』은 달랐다.
르네 샤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최전선에서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히프노스’는 그 시절 샤르가 사용한 가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히프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잠의 인격신이자 밤의 아들이고,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의 쌍둥이 형제이며, 대지와 바다 위를 빠른 속도로 날면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267-268쪽).
르네 샤르가 “메모”라고 부른다는 『히프노스 단장』은 정말 일기 같았다. 전쟁 도중 겪은 일화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그와 관련된 생각이나 느낌이 모여 단장(斷章)을 이루고 있었다. 저항 없이 웃게 되는 부분들이 제법 많아 좋았다. 또 시와 관련된 문장이 많았다. 그 문장들이 너무 공감되고 적절해서 샤르의 시를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동료를 잃은 일화도 몇 번 등장한다.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절망감과 무력감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희망을 가지려는, 정확히는 인간을 향한 희망을 표출하는 마음을 샤르의 시에서 읽을 수 있었다.
혼란과 혐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뉴스가 한줄기 빛처럼 등장하곤 한다. 그럴 때면 잃어버린 인류애를 조금이나마 되찾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런 게 르네 샤르의 마음이었던 걸까. 그리고 인생이란 이렇게 굴러가는 걸까 생각해 본다. 희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은 찾아오고야 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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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등불 하나, 세상 끝에 있는 등불 하나가, 용기와 침묵을 깨어 있게 했다. (61쪽)
시인은 덤덤하게 패배를 승리로, 승리를 패배로 바꾼다. (81쪽)
시인은 각성 상태의 물리적인 세계와 수면 상태의 엄청난 자유로움 사이의 저울을 평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삶의 서로 다른 그 두 가지 상태를 무차별적으로 오가면서, 시인은 각성과 잠이라는 인식의 분할선 위에 시의 예민한 몸을 눕힌다. (82쪽)
아이들은 일요일이 따분하다. 참새는 하루 이십사 시간을 일주일로 만들어 일요일을 잘게 나누자고 제안한다. 요컨대 매일매일 한 시간의 일요일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그게 식사 시간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맨 빵만 먹는 식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참새에게 일요일 이야기는 그만하자. (107쪽)
닷새 밤 동안 계속된 경계 근무에 기진맥진한 프랑수아가 내게 말한다. “내 칼을 커피 한잔과 기꺼이 맞바꾸겠어요!” 프랑수아는 스무 살이다. (125쪽)
한 편의 시가 그리는 비행 궤적. 그 궤적이 누구에게나 감지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27쪽)
한 오라기라도 끊어지면 안 되는 무수한 신뢰의 끈으로, 나는 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나와 동류인 사람들을, 희생보다 훨씬 더, 열령히 사랑했다. (135쪽)
함께 하는 식사마다, 우리는 자유를 동석하라고 초대한다. 자리는 비어 있지만 식기는 계속 놓여 있다. (135-136쪽)
저항은 그저 희망일 뿐이다. 오늘 밤 구석구석 꽉 채운 만월이 되어, 내일이면 시편詩篇들이 지나가는 길 위의 비전이 될, 히프노스의 달처럼. (145쪽)
“이 땅에서, 우리는 조금 이기고, 많이 져요. 시대의 명령은 되돌릴 수 없어요. 사실상 그 점이, 천둥처럼 나를 뒤흔드는 삶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나를 평온하게 만들어 줘요.” (162쪽)
그는 내게 말들의 밤 위로 날아오르는 법, 닻을 내린 배들의 몽롱한 마비로부터 아득히 멀리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빙하가 아니라 영원한 빙하를 가능케 해 주는 것, 빙하의 고독한 개연성이었다. (212쪽)
해바라기를 믿는 사람은 집 안에서 궁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 생각이 그의 생각이 될 것이다. (214쪽)
우리는 섬광 속에 살지만, 그 섬광이 영원의 심장이다. (218쪽)
도시의 거리에 내 사랑이 있다. 분기分岐된 시간 속에서 내 사랑이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내 사랑은 더 이상 내 사랑이 아니고, 모두가 내 사랑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내 사랑은 이제 기억하지도 못한다. 정확히 누가 자기를 사랑했고, 자기가 넘어지지 않도록 누가 멀리서 불빛을 비춰 주는지. (240-241쪽)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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