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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 초 단위의 동물 ㅣ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2
김병운 외 지음, 민가경 해설 / 열림원 / 2023년 10월
평점 :
#도서협찬
‘숲’의 뜻을 더라는 접미사이자 이전에 없던 명사라는 ‘LIM’의 소설들은 대체로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사랑하고 제법 많이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날것이었다.
날것이라는 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던 어떤 틀을 구태여 지키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전공 수업에서 이렇게 썼다면 교수님한테 지적 받았을 텐데, 싶은 글과 문장들이 제법 많았다. 뒤집어 말하면 교수님께 제출했던 소설들은 어쩔 수 없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학우들이 다양한 의견을 들려줬다고 해도 강의실 안에서 절대적 권력자는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강의실에서 벗어난 지 오래고,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약간 꼰대 같기도 하다.
전에 모 소설가의 소설은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인터넷에 떠도는 썰 같다고 말한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읽기 쉬운 글은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웹소설 독자들의 문해력이 갈수록 낮아져서 작가들이 쉬운 문장으로만 쓰게 된다는 글도 스치듯 봤다. 물론 정말 문해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과 변화하는 플랫폼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웹진의 영향력과 그것으로 넘어가는 흐름은 분명하게 보인다. 꼭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지 않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이런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거기에 탑승하는 사람이 젊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웹진에서 연재한 글들을 책으로 묶어서 그런가, 이 소설집은 보통의 종이책과는 편집 방식이 다른 듯했다. 모바일에서 보던 화면의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한 걸까. 개인적으로 그걸 가장 잘 살린 게 서이제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표제작인 이유를 대번에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초 단위의 동물」이라는 소설 자체가 가장 내 취향이었다. 웃긴데 정말 현실적이라 슬픈 양가 감정을 너무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판타지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차용해 전달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잘 만들어 낸 것 같다. 그의 어떤 소설보다도 이 소설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웠다.
당연하지만, 다른 소설은 별로였다는 게 아니다. 다른 소설들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특히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가 그랬다. 이 작품은 일부 문장만 떼어놓고 보는 것보다 전문을 통째로 읽을 때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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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한국이 빠른가. 그렇다면 어째서 코리안 타임이 있는 걸까. 모든 게 빠른데 제때를 맞추지 못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살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성공하고 싶으면 시간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11:53
서양인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킨다는 말도 지겹게 들었다. 특히 스위스인은 시간 약속에 아주 철저하다고 했다. 역시 파텍필립과 롤렉스의 나라답다고 생각했다. (46쪽)
그때는 하루가 길었다. 하루도 길고 1년도 길어서 도대체 나는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54쪽)
정신 차려, 너 이제 달팽이야. 나는 내 몸을, 꾸물거리는 내 몸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조이는 조금 쉬다보면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될 거라고 했는데, 혹시 이게 내 일인가.
(중략)
꾸물거리며, 온종일 이끼와 곰팡이를 찾아다녔다. 그러자 그것들을 찾아 먹어 치우는 일이 내 일이 되었다. (68쪽)
이곳에서는 그저 논과 밭의 풍경이 바뀌는 걸 지켜보면서, 농작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날씨가 변하는 걸 느끼면서, 시간을 체험할 뿐이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 그런 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확히 알 필요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때를 맞췄으니까. 때가 되면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자랐다. 때가 되면 동물과 벌레들이 몰려들어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나 또한 때가 되면 잠을 자고 때가 되면 일어났으며 때가 되면 꾸물거렸다. 이곳에서는 나를 문제 삼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니 부모님이 나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비로소 내 몸에 딱 맞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싶었다. (74쪽)
서이제 「초 단위의 동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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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시작한 지 세 달쯤 되던 어느 날 새벽, 나는 되게 넘어졌다. (183쪽)
“아무튼 뭔가 기준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생각 자체가 거지 같고 허접한데요? 그게 고등한 생물들의 생각이에요?”
목소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너무했나 싶어 나도 말을 멈추고 도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내 얘기 같아서, 정말 내 얘기 같아서 과하게 몰입한 것 같다는 창피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모르지, 어쩌면 내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돈 많고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이었다면 다르게 말했을지도. 안 그래도 북적이고 지저분한 이 지구에 꼭 이 모든 사람이 전부 필요하냐고, 사실 어떤 사람들은 없어도 되지 않느냐고. 그러니 내가 이렇게 분개하는 건 그냥 이 세계에선 내가 가장 먼저 떨려나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창피하고 비참해서 나도 묵묵히 무릎만 쳐다보고 있었다. (191-192쪽)
달린다는 것은 뭐랄까, 몇 초 전의 나를 끊임없이 뒤에 두고 오는 일 같았다. (198쪽)
이유리 「달리는 무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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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들 때마다 영원의 꿈을 꿨다. 정확히는 영원이 진주에게 준 물건들이 나왔다. 영원에게서 빌린 『중력과 은총』은 진주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주는 그런 확신이 없었다. 그건 영원과의 관계가 문장형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원은 진주가 준 모든 것을 버렸을까? 영원은 관계가 끝난 사람과의 물건은 모두 버린다고 했다. 물건은 죄가 없잖아, 진주는 언제든 돌려줄 수 있도록 영원이 진주에게 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215쪽)
진주는 영원이 접어놓은 페이지들만 읽었다. 영원은 왜 그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두었을까. 영원과 대화할 수 없는 진주는 영원의 귀퉁이들의 맥락을 읽었다. 질문만 있는 질의응답을 작성하면서 대답이 없어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231쪽)
최추영 「무심과 영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