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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 -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현대 예술의 거장
제임스 개빈 지음, 김현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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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극도로 양면적인 사람이다.
10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괴로웠다. 쳇 베이커의 탄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그린 이 책에서 마약이 9할 이상의 분량을 차지했다. 세 명의 아내가 있었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아이들이 있음에도 그들에게 소홀했다. 전혀 아빠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에서 마약이 빠지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과 외모도 마약으로 잃었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마약을 끊지 못했다. 말년의 그는 마약을 하기 위해 음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약으로 인해 교도소도 들락날락했고, 주사할 자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중독자였다. 그는 정말 인복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과분할 정도로. 그러나 그런 그들마저도 마약 하는 데 이용했다.
책을 읽으면서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들었다. 텍스트에서는 악인으로 그려지는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달콤하게 들려왔다. 읽을수록, 들을수록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쳇 베이커의 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건 아니었다. 대중들은 그의 음악을 사랑했으나 음악인들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재즈를 잘 모르는 내 귀에는 그저 좋게만 들려서, 이게 악마의 재능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의 주변에 그토록 많은 조력자가 있었다는 건 그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 매력이 마약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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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쳇 베이커가 저지른 ‘극악무도하고 흥미진진한’ 악행을 일일이 책에 옮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새삼 궁금했다. 무릇 역사란 사람 사는 이야기고, 그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를 반추하게 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닐 것이다. 철수와 영희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하는 얘기보다 슬프고 일그러진 비운의 사 랑 노래가 더 큰 감홍을 남기듯, 삶과 음악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마주친 모순 속에 재즈와 예술의 본질이 숨어 있지 않겠느냐는 화두를 저자는 넌지시 던지고 있다.

⠀⠀⠀⠀⠀⠀⠀⠀⠀⠀⠀⠀⠀⠀⠀⠀⠀⠀⠀⠀⠀⠀ 「옮긴이의 글(초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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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베이커 #재즈 #재즈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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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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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다가의 막내딸 아나가 토막 나고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30년 전에.
그 사건에는 여러 인물이 얽혀 있었다. 아나의 가족들, 아나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던 친구, 사건을 담당했던 법의학자⋯.
이 소설은 그 인물들의 시점에서 서술한 아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첫 서술자로 등장하는 아나의 둘째 언니 리아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서두를 시작한다. 리아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된 건 30년 전 사건이 벌어진 이후였다.
대학생 때 <종교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나라는 종교가 없다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해외에 나가서 ‘무신론자’라고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거라고.
리아 역시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떠났다.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아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리아에게 마테오가 찾아온다. 마테오는 훌리안과 아나의 첫째 언니인 카르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할아버지(그러니까 아나의 아버지)인 알프레도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리아를 찾아온다. 그 편지 안에는 알프레도가 알아낸 ’진실‘이 들어 있다.
진실은 추악했다. 범인이 행한 행위는 명백히 범죄이다.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하느님의 뜻”이라는 변명을 갖다 붙였다. 교묘한 방관과 조종 속에서 열일곱 살 아나는 서서히 죽어 갔다.

“종의 진화라든가 유전적 부동”을 “논란이 될 만한 개념”이라고 서술하는, 종교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가.
그 믿음조차 사실 그다지 순수하진 않아 보인다. 소설 속에서 믿음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의 수단이나 도구 쯤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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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각자가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진실까지만 도달한다고 믿는단다. (415쪽)
알프레도는 자신이 기술한 편지 속 문장처럼 되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너머는 리아와 메테오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믿지 않을 용기를 가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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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죽인여자들 #스릴러소설 #미스터리소설 #추리소설 #신을죽인여자들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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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2 벽 SF 보다 2
듀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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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설의 화자에 따르면 만리장성은 북방 이민족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 그렇다. 벽은 나누고 막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7쪽)

그러나 벽은 반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중략)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모험 사이에는 언제나 (비록 문지방처럼 야트막할지라도) 벽이 세워져 있고, 이를 넘는 행위는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의미한다. 문지방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 주인공을 필요로 하는 낯선 우주가 기다리고 있다. (8-9쪽)

문학이 무엇인지, 장르와 SF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끝없이 벽을 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아닐까? 사람과 방과 계단과 궁전을 넘어, 누군가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그리는 일. 우리에게 메타포가, 비유와 우화가, 문학이 그런 것처럼. 이야기는 벽이 되고 문이 되고 세계가 된다. 책은 벽돌이다. (13쪽)

도입부에 있는 문지혁 소설가의 글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전까지 내게 벽이란 7쪽의 설명에 해당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단행본에 수록되어 있는 소설들 속에서 벽은 그렇게 단순한 기능만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인물들이 그렇게 되도록 행동하지 않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시공간이라는 벽을 넘는다. 주체는 사람일 때도 있고 토끼일 때도 있다. 사람은 넘지 못하는 벽을 토끼가 넘기도 한다. ‘방패’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벽을 넘음으로써 진실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 허물어진 벽을 다시 쌓았으나 문을 따고 들어온 외부인에 의해 무너지는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벽에 그린 그림을 통해 대대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벽을, 무언가를 막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스스로 벽을 넘으려고 한다. 벽 뒤에 숨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벽 너머의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기어이 넘는다. 벽을 뛰어넘었을 때 마주할 어떤 미지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
그 움직임이 지독히도 문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벽을 넘는 행위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 이야기를 따라 넘어올 무언가를 기다리며, 오늘도 읽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벽의 첫 벽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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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보다 #SF보다_벽 #SF보다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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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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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대개 유람 목적으로 떠나는 것을 여행이라 일컫는다. 사람들이 여행을 원하는 이유는 ‘떠나는’ 행위 자체에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과 자유를 만끽하곤 한다.

『하이네 여행기』는 내가 생각한 여행기와는 많이 달랐다. 통상적으로 ‘여행기’라 하면 여행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펼쳐질 거라고 예상하지 않나. 그러나 내가 주로 읽게 된 텍스트는 하이네의 견해였다.
이 책은 연작시인 「북해」 1부와 2부, 산문인 「북해」 3부와 「이념—르그랑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뒤로 갈수록 여행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나마 시에서 여행지 풍경의 아름다움을 가장 많이 읽을 수 있었고 「북해」 3부에서도 관련 묘사가 등장하긴 했다. 여행 이야기는 10 정도, 거기에서 파생된 하이네의 만담이 90인 것 같았지만. ‘마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념—르그랑의 책」는 솔직히 여행과의 관련성을 딱히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제목에 충실한, 하이네의 이념으로 점철된 산문이었다.

책 소개에 이런 문구가 있다.
‘더불어 하이네는 아이러니를 잘 활용한 풍자의 대가로 불리는데, 이 책에서도 신조어나 다의어를 이용한 언어유희가 두드러진다.’
하이네식 풍자는 산문에서 돋보였다. 하지만 그 시대(19세기) 사람이거나 독일인, 최소 유럽인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주석에 친절히 설명이 되어 있어 그걸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순 있었으나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그리고 생각보다 강한 어휘가 사용되었고 어투에도 풍자가 묻어 있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아이러니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내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잘해서 원문으로 읽었다면 상당히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번역하기 정말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
⠀ ⠀ ⠀ ⠀ ⠀ ⠀ ⠀ ⠀ ⠀ ⠀ ⠀ ⠀*

꿈꾸는 내 머리가 기대고 있는
배의 판자벽에 파도가,
거친 파도가 부딪혀 부서지네.
철석이는 파도가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네.
“얼빠진 친구야!
자네의 팔은 짧고 하늘은 넓지,
저 위의 별은 황금 못으로
단단히 박혀 있지—
동경도 탄식도 헛될 뿐,
잠이나 자는 게 좋을 걸세.“

⠀ ⠀ ⠀ ⠀ ⠀ ⠀ ⠀ ⠀ ⠀ ⠀ ⠀ ⠀ *

흰 눈으로 뒤덮인 고요한
광막한 황야를 꿈꾸었지.
하얀 눈 아래 묻힌 나는 외롭고
서늘함 죽음의 잠을 잤지.

하지만 저 위 캄캄한 하늘에선
별들의 눈동자가 내 무덤을 내려다보았지,
달콤한 눈동자! 눈동자는 반짝였지, 의기양양하게,
소리 없이 즐겁게, 그러나 사랑을 듬뿍 담고서.

⠀ ⠀ ⠀ ⠀ ⠀ ⠀ ⠀ ⠀ ⠀ ⠀ ⠀ ⠀ ⠀ ⠀ ⠀ ⠀ ⠀ ⠀ ⠀ 「선실의 밤」 中

들판의 밀처럼
생각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일렁인다.
그러나 시인의 섬세한 생각은
그 틈에서 즐겁게 피어나는
빨간 꽃과 파란 꽃들이다.

⠀ ⠀ ⠀ ⠀ ⠀ ⠀ ⠀ ⠀ ⠀ ⠀ ⠀ ⠀ ⠀ ⠀ ⠀ ⠀ ⠀ ⠀ ⠀ ⠀「에필로그」 中

-
그러나 정신은 영원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교회법으로 제한할 수 없으며 교회 종소리로도 잠재울 수 없다. (105쪽)

정신의 작품은 영원히 고정되지만 비평은 가변성이 있다. 비평은 특정 시대의 견해에서 생겨나 그 시대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슐레겔의 비평처럼 비평이 그 자체로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경우, 시간이 지나면 무덤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는 시대는 새로운 눈도 가지게 되고, 이 눈으로 기존의 정신적인 작품에서도 새로운 것을 많이 보게 된다. (116-117쪽)

「북해」 3부에서 일부 문장들을 발췌한 것이다. 사실 하이네의 글을 읽으며 시대가 바뀌었음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성에 관한 문장들에서 그렇게 느꼈다. 불편한 마음이 들 때면 ‘비평은 가변성이 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하이네의 산문들은 작품보다는 비평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창작자들의 작품을 거론하고, 심지어 일부 작품들은 대놓고 풍자하기 때문이다. 하이네는 본인의 말이 본인의 글에도 적용될 거라는 걸 예상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내 안에선 의도치 않게 깨어 있는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마치 ‘열린 교회 닫힘’ 같은 사람 같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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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학 #시집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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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 초 단위의 동물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2
김병운 외 지음, 민가경 해설 / 열림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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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숲’의 뜻을 더라는 접미사이자 이전에 없던 명사라는 ‘LIM’의 소설들은 대체로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사랑하고 제법 많이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날것이었다.
날것이라는 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던 어떤 틀을 구태여 지키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전공 수업에서 이렇게 썼다면 교수님한테 지적 받았을 텐데, 싶은 글과 문장들이 제법 많았다. 뒤집어 말하면 교수님께 제출했던 소설들은 어쩔 수 없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학우들이 다양한 의견을 들려줬다고 해도 강의실 안에서 절대적 권력자는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강의실에서 벗어난 지 오래고,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약간 꼰대 같기도 하다.

전에 모 소설가의 소설은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인터넷에 떠도는 썰 같다고 말한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읽기 쉬운 글은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웹소설 독자들의 문해력이 갈수록 낮아져서 작가들이 쉬운 문장으로만 쓰게 된다는 글도 스치듯 봤다. 물론 정말 문해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과 변화하는 플랫폼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웹진의 영향력과 그것으로 넘어가는 흐름은 분명하게 보인다. 꼭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지 않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이런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거기에 탑승하는 사람이 젊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웹진에서 연재한 글들을 책으로 묶어서 그런가, 이 소설집은 보통의 종이책과는 편집 방식이 다른 듯했다. 모바일에서 보던 화면의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한 걸까. 개인적으로 그걸 가장 잘 살린 게 서이제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표제작인 이유를 대번에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초 단위의 동물」이라는 소설 자체가 가장 내 취향이었다. 웃긴데 정말 현실적이라 슬픈 양가 감정을 너무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판타지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차용해 전달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잘 만들어 낸 것 같다. 그의 어떤 소설보다도 이 소설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웠다.
당연하지만, 다른 소설은 별로였다는 게 아니다. 다른 소설들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특히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가 그랬다. 이 작품은 일부 문장만 떼어놓고 보는 것보다 전문을 통째로 읽을 때 더 좋았다.

-
정말로 한국이 빠른가. 그렇다면 어째서 코리안 타임이 있는 걸까. 모든 게 빠른데 제때를 맞추지 못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살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성공하고 싶으면 시간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11:53
서양인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킨다는 말도 지겹게 들었다. 특히 스위스인은 시간 약속에 아주 철저하다고 했다. 역시 파텍필립과 롤렉스의 나라답다고 생각했다. (46쪽)

그때는 하루가 길었다. 하루도 길고 1년도 길어서 도대체 나는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54쪽)

정신 차려, 너 이제 달팽이야. 나는 내 몸을, 꾸물거리는 내 몸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조이는 조금 쉬다보면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될 거라고 했는데, 혹시 이게 내 일인가.
(중략)
꾸물거리며, 온종일 이끼와 곰팡이를 찾아다녔다. 그러자 그것들을 찾아 먹어 치우는 일이 내 일이 되었다. (68쪽)

이곳에서는 그저 논과 밭의 풍경이 바뀌는 걸 지켜보면서, 농작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날씨가 변하는 걸 느끼면서, 시간을 체험할 뿐이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 그런 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확히 알 필요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때를 맞췄으니까. 때가 되면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자랐다. 때가 되면 동물과 벌레들이 몰려들어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나 또한 때가 되면 잠을 자고 때가 되면 일어났으며 때가 되면 꾸물거렸다. 이곳에서는 나를 문제 삼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니 부모님이 나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비로소 내 몸에 딱 맞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싶었다. (74쪽)

서이제 「초 단위의 동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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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시작한 지 세 달쯤 되던 어느 날 새벽, 나는 되게 넘어졌다. (183쪽)

“아무튼 뭔가 기준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생각 자체가 거지 같고 허접한데요? 그게 고등한 생물들의 생각이에요?”
목소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너무했나 싶어 나도 말을 멈추고 도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내 얘기 같아서, 정말 내 얘기 같아서 과하게 몰입한 것 같다는 창피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모르지, 어쩌면 내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돈 많고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이었다면 다르게 말했을지도. 안 그래도 북적이고 지저분한 이 지구에 꼭 이 모든 사람이 전부 필요하냐고, 사실 어떤 사람들은 없어도 되지 않느냐고. 그러니 내가 이렇게 분개하는 건 그냥 이 세계에선 내가 가장 먼저 떨려나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창피하고 비참해서 나도 묵묵히 무릎만 쳐다보고 있었다. (191-192쪽)

달린다는 것은 뭐랄까, 몇 초 전의 나를 끊임없이 뒤에 두고 오는 일 같았다. (198쪽)

이유리 「달리는 무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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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들 때마다 영원의 꿈을 꿨다. 정확히는 영원이 진주에게 준 물건들이 나왔다. 영원에게서 빌린 『중력과 은총』은 진주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주는 그런 확신이 없었다. 그건 영원과의 관계가 문장형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원은 진주가 준 모든 것을 버렸을까? 영원은 관계가 끝난 사람과의 물건은 모두 버린다고 했다. 물건은 죄가 없잖아, 진주는 언제든 돌려줄 수 있도록 영원이 진주에게 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215쪽)

진주는 영원이 접어놓은 페이지들만 읽었다. 영원은 왜 그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두었을까. 영원과 대화할 수 없는 진주는 영원의 귀퉁이들의 맥락을 읽었다. 질문만 있는 질의응답을 작성하면서 대답이 없어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231쪽)

최추영 「무심과 영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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