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사례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원리

예외사례에 관해 부여된 권한을 명문화하는 일
(상호통제를 통해서든 시간적 제약을 통해서든, 
법치국가가 계엄상태를 규제할 때 하는 것처럼 
특별 권한의 나열을 통해서든)이 성공했을 경우, 
주권 문제는 심각하게 뒷걸음질치게 되지만 그렇다고 
제거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일상생활과 현재 생업 문제에 관심이 있는 
법률가는 주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그는 정상사례만을 알 뿐 다른 
모든 것은 그에게 ‘귀찮은 일‘에 다름 아니다. 
그는 극한사례와 마주하여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특별 권한, 경찰의 모든 긴급조치나 긴급명령 
각각이 반드시 예외상태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즉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이 상태가 되면 법은 후퇴하는 반면 국가는 계속 존립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예외상태란 그럼에도 무정부상태나 
혼란상태와 다른 무엇이기 때문에, 법질서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법학적 의미에서 하나의질서가 존속한다. 
여기서는 법규범의 유효성보다 국가의 실존이 이론의
여지없이 우월하다. 결정은 모든 규범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고유한 의미에서 절대화된다. 

예외사례에서 국가는 이른바 자기보존의 권리에 따라 
법을 효력정지시키는 것이다. ‘법질서‘라는 개념의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게 되며, 각각의 개념적 독립성을 
표명한다. 따라서 정상사례에서 결정의 독립적 계기가 
최대한 억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외사례에서는 
규범이 무화된다. 그럼에도 규범과 결정이라는 두 요소가 
법학의 틀 내에 머물러 있기에 예외사례는 여전히 법학적 
인식의 테두리안에 남아 있다.

만약 예외란 법학적으로는 의미가 없기에 ‘사회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학과 법학 사이의 
형식적 구분을 거칠게 적용한것이리라. 

예외는 어떤 상위 개념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파악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동시에 
법학에 고유한 형식요소, 즉결단을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 

그런데 예외사례가 절대적 형상으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조문이 유효한 상황이 창출되어야만 한다. 
모든 일반적 규범은 생활환경이 정상적인 형태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데, 일반적 규범이 복잡한 현실에 
적용되려면 이 형태가 필요하며, 그 규범은 이 형태를 
스스로의 규제 아래에 둔다.

규범은 균질적인 미디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립된 정상성은 법률가들이 무시할수 있는 
단순한 피상적 전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규범의
 내재적 유효성을 구성한다. 

혼란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 따위는 없다. 
법질서가 유의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질서가 
구축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정상적 상황이 
창출되어야만 하며, 주권자란 바로 이 정상적 상태가 
현실을실제로 지배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이다. 

따라서 모든 법은 ‘상황에 따른 법‘이다. 주권자는 상황을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게 만들어 내고 보장한다. 
그는 이 최종적 결정의 독점자이다. 

여기에 국가주권의 본질이 있는데, 그것은 강제나 지배의 
독점이 아니라 결정의독점으로 정확히 법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결정이라는 말은 보다 널리 발전될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예외사례는국가적 
권위의 본질을 최대한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결정은 법규범으로부터 분리되고, (역설적으로 
정식화하자면)국가의 권위는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외상태는 로크(John Locke)의 법치국가적 원리와 
합리주의적 18세기와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7세기 자연법에서 뚜렷한 의미를 가졌던 예외사례에 대한 생생한 의식은 비교적 안정적인 질서가지배했던 18세기 
들어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칸트(Immanuel Kant)에게 긴급권은 결코 법이 아니다. 
오늘날의 국가론은 긴급상황에 대한 합리주의적 무지와 
본질적으로 반법률적인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긴급상황에 
대한 관심이라는 두 가지의 경향이 동시에 상호대립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켈젠과 같은 신칸트학과 
법학자들이 예외상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법질서 자체가 예외사례를 예상하는 
것이며 ‘스스로 효력정지‘될 수 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합리주의자들도 흥미를 보일 것이다. 이러한 법학적 
합리주의 입장에 서면 규범이나 질서나 참조점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그림이 손쉽게 그려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체계적통일성과 질서가 어떻게 스스로를 효력정지시키는가 하는 물음은 구성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럼에도 이 물음은 예외상태가 법률적 
혼란상태나 어떤 임의의 무정부상태와 구분되는 한에서 
법학적인 문제이다. 예외상태를 가능한 한 세세하게 
규제하려는 법치국가적 경향은 법이 스스로를 
효력정지시키는 사례를 정확하게 법률에 기입하려는 
시도를 의미할뿐이다. 


그렇다면 법은 이 힘을 어디서 길어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규범이 어떻게 해도 법률구성적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구체적 예외사례에 직면했을 때, 그래도 
그 규범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던지는 규칙(규범)이나 예외냐라는 
질문의 일반적 의미


예외는 무엇도 증명하지 않으며 오로지 정상상태만이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일관적 
합리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예외는 합리주의적 틀의 
통일성과 질서를 흐트러뜨린다.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국가론에서도 자주 비슷한 주장과 만난다. 

안슈츠(Gerhard Anschütz)는 예산법이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는 결코 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여기서는 법률, 즉 헌법조문에 결함이 있다기보다는 법에 
결함이 있는 것이며, 이 결함은 법학적 개념조작 따위로 
해결될 수 없다. 그저 국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에 대한 철학은 여기에 이르러 예외사례와 
극한사례를 앞에 두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는 안 되며 
이 사례들에 최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 철학에는 규칙보다도 예외가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이는 역설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진지한 통찰에서 비롯된 인식이며, 이 통찰은 언제나 
밋밋하게 반복을 일삼는 텅 빈 일반화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예외는 정상사례보다 흥미롭다.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지만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가 규칙을 보증할 뿐 아니라, 
규칙은 애당초 오로지 예외에 의해서만 존속한다.

예외 속에서 실제 삶의 힘은 되풀이됨으로써 굳어 버린 
기계장치의 껍데기를 깨부술 수 있다. 자신의 생명력 
넘치는 강렬함이 19세기에 신학적 성찰을 가능케 했음을 
증명한바 있는 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외는 일반적인 것을 설명하고, 자기 자신도 설명한다. 
그리고 만약 일반적인 것을 올바르게 연구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진정한 예외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된다. 모든 것이 
일반적인 것보다는 예외 속에서 백일하에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것을 놓고 끝없이 떠들어 대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예외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일반적인것 또한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열정 없이 그저 겉치레로 일반적인 것을 사유한다면 
결코 이 어려움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예외는 이에 
반해 일반적인 것을 뜨거운 열정으로 사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역사법학의 문제점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비니가 처음으로 지적한 이래, 
빠르게 일반의 승인을 받은 법과 언어 및 예술의 발전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단호하게 배척해야 한다. 

그것은 이론적 견해로서는 틀린 것이지만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다. 반면 그것을 정치적 원리로 생각하는경우에는 
가장 우려할 만한 잘못을 포함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반드시 행동해야 할 경우, 
즉 목적을완전하고도 명확하게 정하고 전력을 기울여 
행동해야만 하는 경우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도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법의 원천, 
즉 국민의 법적 확신으로부터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믿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비니와 그의 모든 제자는 입법의 개입에 
반대하고 푸흐타의 관습법론은 관습의 참된 의의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푸흐타가 말한 관습이란 법적 확신의 단순한 인식 수단에 
불과하다. 그 확신이 행동으로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 
행동함으로써 확신이 실제로 그 힘을 보여주고 생활을 
지배하는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 요컨대 법은 힘과 
결부된 개념이라는 명제가 관습법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 저 석학은 눈을 완전히 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흐타는 오로지 자기 시대의 조류에 
따랐다. 그것은 독일문학의 낭만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라는 개념을 법학에 적용해 문학과 법학의 
두 분야에서 유사한 경향을 비교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역사학과를 낭만주의학파라고 불러도 
좋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법이 들판의 초목과 같이 어떤 고통이나 노력이나 행동도 
하지 않고 형성된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즉 과거상태의 잘못된 이상화에 근거한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그 반대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의 단면, 즉 현재 거의 모든 점에서 여러 국민의 실력 투쟁을 보여주는 이 현실만이 그런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시대를 보아도 받는 인상에 
변함은 없다. 

따라서 사비니의 학설이 적용되는 것은 어떤 사료도 없는 
선사시대뿐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선사시대가 민족의 확신에서 비롯된 무사 
평온한 법형성의 무대였다고 본 사비니의 추측과는 
정반대로 보고 싶다. 내 추측은 적어도 유사 이래 법 
발전으로부터의 유추에 근거하는 것이고, 사건에 따르면 
이러한 소급적 유추의 방법은 인간 심리의 연속성으로부터 옳은 결론으로 이끌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원시시대가 후대에 비해 쉽게 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상정은 더 이상 믿기 어렵다. 내 생각으로는 원시시대에 
법을 확보하기위해 지불해야 했던 노력 쪽이 훨씬 더 컸다.

가령 자신의 물건을점유자로부터 뺏는 소유자의 권능, 
지불불능한 채무자를 타인에게 노예로 매각하는 채권자의 권능에 대한 초기 로마법의 법명제와 같은 가장 단순한 
법명제도, 어려운 투쟁으로 얻어진 뒤에 비로소 투쟁의 
여지가 없이 일반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문서 사료의 출현 이래의 역사가 법의 생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점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법의 
탄생은 인간의 탄생과마찬가지로 통상 격렬한 진통을 
수반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다고 개탄만 해야 하는가? 
여러 국민이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법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법을 추구해 고심하고 다투고 싸우고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각각 국민과 그 법 사이에는 생명의 위험을 
수반하는 출산을 통해 모자간에 생기는 것과 같은 두터운
유대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어떤 노력도 하지않고 
확보하는 법은 황새가 물어온 아이의 처지와 같은 것이다.

북유럽 전설에 따르면, 창조의 바다에서 떠다니는 태아를 
황새가 발견해 사람에게전해주었다고 한다. 출생을 뜻하는 
‘Birth‘라는 말의 어원은 ‘나르다‘라는 의미의 고대영어 
‘Beran‘인데 이 말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로부터 출생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황새가 물어서 날라다 주었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여우나 독수리가 다시 채갈지도 모른다. 
반면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아기를 빼앗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피를 흘릴 정도의 노고를 통해 법과 제도를 
쟁취해야 했던 국민은 이를 빼앗기지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어떤 국민이 자신의 법에 힘을 쏟고 
자신의 법을 관철하기 위해 뒷받침하는 애정의 힘은,
그 법을 얻기 위해 쏟은 노력과 노고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국민과그 사이의 가장 튼튼한 유대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그것에 지불된 희생이다.

그리고 신이 어떤 국민을 선택한다고 해도 신은 국민이 
필요로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고 국민의 노고를 경감해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신은 그것을 더욱 무겁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한다. 
법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투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민사소송은 권리를 위한 투쟁


눈을 돌려 주관적 내지 구체적 레히트, 즉 권리를 위한 
투쟁을 살펴보자. 이 투쟁은 권리가 침해되거나 빼앗긴 
채로 있는 경우에 시작된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권리자의 이익에 대해, 이를 무시하려는 자의 이익이 
언제나 대립하는 이상, 개인의 권리이든, 국민의 권리이든 
침해의 위험을 면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어떤 법 분야에서도, 즉 아래로는 사법에서 
위로는 헌법과 국제법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반복된다.


전쟁이라고 하는 형태의 권리침해에 대한 국제법상의 
주장,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나 헌법 위반에 대한 
봉기와 반란과 혁명과같은 형태의 국민의 반항, 
중세의 소위 린치법Lynchgesetz이나 권리실현을 
위한 자력구제권Faustrecht, 그리고 그것의 현대 유물인 
결투Fehidereche라는 형태의 사적 권리의 거친 실현, 
정당방위라는 형태의 자위권, 민사소송이라는 규제된 
형태의 권리주장은 모두 분쟁 목적물이나 투입된 힘, 
투쟁의 형태나 차원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모두 하나인 것의 여러 형태와 
장면이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형태 중에서 가장 냉정하게 
행해지는 것, 즉 소송이라는 형태를 취한, 사적 권리를
위한 법적 투쟁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는 법률가인 나에게 익숙해서가 아니라, 민사소송의 
실상이 법률가에게도 일반인에게도 매우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경우에는 실상이 분명하므로 
커다란 힘을 투입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목적물이 
다투어지고 있다는 점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양보하지
않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법상의 다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쟁의 목적이 되는 이익(보통은 소유권)의 가치는 
비교적 근소하다. 그러한 문제의 처리에 관련된 
무미건조한 법률론을 보면, 이러한 종류의 분쟁은 
오로지 냉철한 타산과 인생관의 분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사분쟁이 처리되는 형식도, 
그 형식의 기계적 성격도, 당사자의 자유롭고 
강력한 자기주장의 금지도, 민사소송의 차가운 
인상을 도리어 강렬하게 만들 것이다. 

본래 민사소송에서도 당사자자신이 심판의 장에서 
주역을 연기한 시대, 그 덕분에 분쟁 투쟁Kampf의 
참된 의의가 분명했던 시대가 존재했다. 
아직 검으로 소유분쟁을 해결하고, 중세의 기사가 
상대에게 결투요구서를 보낸 시대에는 제3자라고 해도, 
이러한 분쟁 = 투쟁이 단순히 물건의 가치를 둘러싼 것, 
즉 금전적 손실의 방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물건과 관련되어 당사자의 인격, 그 권리와 명예가 
다투어지고 주장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형태는 다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그것과 
같은 현재문제의 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 없으므로 
오늘날에 와서까지 과거의 상태를 상기할 필요는 없다. 
현재 생활의 여러 가지 현상을 일별하고, 우리 자신의 
심리에 대해 자기 관찰을 시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권리를 침해당하면 권리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권리를 주장하며 침해자에게 저항하는 것, 
즉 싸움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 
권리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해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결단은
희생을 수반한다. 

권리를 희생해 평화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선택해 권리를 희생할 것인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들면 다음과 같다. 즉 사실관계와 당사자의 구체적 사정에 따라 무엇을 희생하는 쪽이 참기 쉬운가? 부자는 평화를 위해 자신에게는 근소한 소송액을 희생하지만, 같은 액수를 크다고 생각하는 빈민은 그것을 위해 평화를 희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문제는 
순수한 계산문제가 되고 만다. 이 계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 각자가 이해득실을 비교 형량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일상적으로 알 수 있듯이 예상되는 노고와 정신적 소모, 
비용의 크기에비해 소송물의 액이 부족한 소송은 
얼마든지 있다.

물속에 떨어진1탈러를 줍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2달러를 지불할 사람은있을 수 없다. 이 경우에 
얼마까지라면 지불할 것이라는 문제는 오로지 계산문제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사람들은 소송의 경우에도 같은 
계산을 하지 않을까? 원고는 재판에 이긴다고 믿고, 
비용을 피고에게 부담시킬 작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법률가가 잘 알고 있듯이, 
이기기 위해 방대한 비용이 필요한 것이 분명한데도 
소송을 포기하지 않는 당사자가 상당수 있다. 
사건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소송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변호사를 향해 아무리 돈이 들어도 소송을 하겠다고 
말하는 의뢰인도 얼마나 많은가?

합리적인 이해타산의 견지에서 본다면 비상식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자주 듣는 답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소송중독증이나 권리주장증이라고 하는 혐오스러운 병이라든가, 철저한 싸움 취향이라든가, 상대방과 같은 
정도의 희생,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보다도 큰 희생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여하튼 상대방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충동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개인 간의 분쟁에서 벗어나 두 국민 사이의 분쟁을 
먼저 생각해보자. 한 국가의 국민이 다른 국가의 국민에게서 1제곱마 일의 무가치한 황무지를 위법하게 빼앗았다고 
가정하자. 피해국은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가? 

경계선의 2, 3피트 안까지 이웃이 경작해서피해를 본 
농민이나 이웃이 모은 밭의 돌을 자기 밭으로 던져 피해를 
본 농민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소송중독증이라고 보는 
것처럼, 이 국제분쟁을 고찰해보도록 하자. 

수천 명의 사람이 죽고 신분에 상관없이 비탄과 곤궁이 
초래되며,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고 국가의 존립조차 
위협당하는 전쟁에 비하면 1제곱마일의 황무지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만큼의 전과를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예로 든 농민과 국가를 동일 척도로 본다면 위와 같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 농민에게 소송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사람이라도, 국가에 대해서 같은 
조언을 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권리침해를 묵인하는 
국민은 자신에대한 사형 판결에 서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웃 나라에게 제곱마일의 영토를 뺏기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라는 그밖의 영토도 빼앗기에 되고, 
마침내 영토를 전부 상실한 국가로 존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 국민은 그런 운명에 처할 수 밖에없다.


그러나 더욱더 생각해보면, 어떤 국민이 1제곱마일의 
영토를 위해 그 가치의 대소에 관계없이 싸워야 한다고 
하면, 왜 농민에 대해서도 약간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주피터에게 허용된 것도 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격언에 따라 농민을 포기시켜야 하는가? 

사실 국민이 단지 1제곱마일의 영토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즉 자신의 명예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농부가 자기 권리를 무례하게 무시당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하는 소송도 근소한 가치밖에 없는 소송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념적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격 자체와 그 권리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보면 소송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희생과 불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권리자는 생각한다. 
목적 때문에 수단을 다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압박해 소송을 제기하게 하는 것은 냉정하게 
숙고된 금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가해진 불법에 대한 
윤리적 불쾌감이다. 피해자에게 소중한것은 소송물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이러한 종류의 소송에서 소를 
제기한 참된 동기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행해지듯이, 
원고가 배상금을 구빈시설에 기부하도록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도리어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그에게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무가치한 소송물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명예와 권리감각과 긍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 소송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로부터 
품격의 문제로, 즉 인격을 주장하는가, 아니면 포기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동일한 
상황에서정반대의 결심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힘들게 주장해야 하는 권리보다도 평화 쪽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생각하면 좋을까? 
그것은 각자의 취미와 기질의 문제로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권리는
 권리를 주장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권리자의 선택에 맡기고 있으므로 권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싸움도 좋고 싸우지 않
는 것도 좋다고 말해 끝내야 하는가?

알다시피 그런 의견을 실생활에서 종종 듣게 되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고 권리의 
궁극적인 성질을 오해한것이라고 본다. 
그런 잘못된 생각이 지배적이 된다고 한다면 권리자체가 
부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의 존립을 위해서는 불법대한 용감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앞서 본 잘못된 
생각은불법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태도를 장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견해와 맞서는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인격 자체에 도전하는 무례한 불법, 권리를 무시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형태의권리침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의무다. 그것은 먼저 권리자 자기자신에 대한 의무다. 
그리고 또한 국가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권리침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ㅣ 문예 인문클래식
루돌프 폰 예링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존 법학의 개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당시로서도
매우 진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새로운 법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으며, 21세기 현재에도 참신한
자극제일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투쟁에서 너의 법과 권리를 찾아라.

법의 기원은 투쟁

법과 권리의 목적은 평화이고, 평화에 이르는 수단은 
투쟁이다. 법과 권리가 불법적인 침해를 예상해 이에 
대항해야 하는 한(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그 필요는 
없어지지 않는다) 법과 권리는 이러한 투쟁을 피할 수 없다. 법과 권리의 생명은 투쟁이다. 한 국민의투쟁, 국가권력의 
투쟁, 여러 계급의 투쟁, 여러 개인의 투쟁이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투쟁으로 생겨났다. 모든 중요한 
법명제는무엇보다도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쟁취되어야 했다. 그리고 모든 법적 권리는 
그것이 국민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간에, 언제나 그것을
주장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법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 법을 가늠하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 법을 실행하기 위한 칼을 
쥐고 있다. 저울이 없는 칼은 발가벗은 폭력에 불과하고,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할 뿐이다.

저울과 칼은 표리일체다. 법의 완전한 상태란, 정의의 
여신이 칼을사용하는 힘과 저울을 다루는 재주가 균형을 
이루는 경우에만 나타난다.

법은 끊임없는 행동이다. 그것은 단지 국가권력의 
행동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행동이다. 법의 모든 
생애를 개관해보면,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생산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국민의 활동이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투쟁과 행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법적 권리를 관찰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개인은 
누구나 이러한 전 국민적 행동에 참여하고, 나아가 법의 
이념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각각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개인의 생활은, 미리 부설된 법의 
궤도 위를 무사 평온하게 나아간다. 

그들에게 "법은 투쟁이다"라고 말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법은 평화와 질서의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전적으로 옳다.
이는 마치 아무런 수고 없이 타인의 노동 결실을 받은 
부유한 상속인이 "재산은 노동이다"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 양자의착각은 재산과 법에 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자의적으로 분리되어, 어떤 이는 향유와 평화의 
면만을, 다른 이는 노동과 투쟁의 면만을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법과 같이 재산도 양면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 머리와 같다. 어떤 이에게는 하나의 면만을 다른 이에게는 다른 면만을 
보여주므로 양쪽이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르게 된다. 
법에 관련한 이러한 사정은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시대의 삶은 전쟁이고, 다른 시대의 삶은 평화다. 그리고 국민의 차원에서도 
양자에 대한 주관적 분리의 차이에 따라 개인의 경우와 
같은 착각에 빠진다. 최초의 포성이 아름다운 꿈을
깨뜨릴때까지, 오랜 평화의 시대 그리고 영원한 평화에 
대한 믿음이 찬란하게 피어 있다. 노고 없이 평화를 누린 
세대를 대신한 다른 세대가나타나 전쟁이라는 고역으로 
다시 평화의 세대를 찾아야 한다.


재산의 경우도, 법의 경우도 노동과 향유는 이렇게 나뉘어 
있는것으로 향유를 누리며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는 사람을 위해 다른사람들은 노동을 하고 투쟁을 해야 한다. 
투쟁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 노동을 수반하지 않는 향유는 
단지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당하기 전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 뒤의 역사에서는 평화와 향유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투쟁이야말로 법의 노동이고, 투쟁이 실제로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투쟁이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도 법의 
경우와 재산의경우가 다른 점이 없다는 생각을 이제부터 
상세히 논하도록 하자.

이는 결코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학문
(법철학만이 아니라 실정법학까지도)이 범하고 있는 
태만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법학이 정의의 칼보다도 도리어 정의의 저울에 
몰두했음이 명백하다. 법학은 오로지 학문적인 관점에서 
법을 고찰해왔다. 요약하자면 그 관점이란 법을 현실적 
측면에서 힘의 개념으로보지 않고, 논리적 측면에서 
추상적인 법명제의 체계로 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일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법의 거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법관념이 버젓이 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비난에 근거가 있음은 앞으로의 
설명으로 증명될 것이다.

알려져 있듯이 독일어 Recht는 이중적 의미를 포함한다. 
즉객관적인 의미의 법과 주관적인 의미의 권리로 사용된다. 객관적인 의미의 법은 국가가 운용하는 여러 법원칙의 
총체, 즉 법률에 따른 생활 질서를 말한다. 

한편 주관적인 의미의 권리는 추상적인 준칙이 사람의 
구체적 권능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 두 가지 방향에서 법과 권리는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즉 투쟁해서 자기의 
존재로부터 취득해 관철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을 주된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만, 투쟁이 법과 
권리의 본질에 속한다고 하는 내주장이 옳다는 것을 법을 
위한 투쟁과 관련해 증명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법의 생성을 위한 투쟁

법을 위한 투쟁이라는 문제 중에서, 국가가 행하는 법의 
실현이 투쟁을 수반하는 점에 의문의 여지는 없으므로 
여기서 상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다. 
즉 국가에 의한 법질서의 유지는 법질서를 침해하는 
무법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의 생성과 관련짓는 경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역사가 시작할 때의 원초적 생성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 
눈앞에서 매일반복되는 법의 개정, 기존 법제도의 폐지, 
기존 법명제를 새로운 법명제로 대체하는 현상, 
즉 법의 발전에 관해서도 내 주장은 아직 자명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법의 생성도 법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투쟁의 법칙에 복종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다른 견해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현재의 로마법학에서 여전히 널리 승인되고 있는견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로마법학의 대표적인 
두 학자의 이름에 따라 법생성에 관한 사비니-푸흐타 이론이라고이름짓고자 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법의 형성은 언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고통도 없이 진행하는 것으로, 
쟁탈이나 투쟁도, 심지어 추구의 노력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리가 갖는 온유한 작용의 힘이 강인한 노력 없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길을가는 것이고, 법적 확신이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어 사람들의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새로운 법명제란 언어 법칙과 마찬가지로 무리 
없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가령 고대 로마법에는 
채권자가 지불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로마 밖의 외국에서 
노예로 매각할 수 있다든가, 물건의 소유자는 불법 
행동자로부터 자력으로 자신의 물건을 뺏을 수 있다고 
하는 법명제가 있었는데, 위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법명제는 고대 로마에서 cum‘이라는 격 지배 전치사에 
이어지는 명사가 종격으로 사용되는 언어 법칙과 거의 
같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과거에 나 자신이 대학에서 배운 법의 생성에 관한 
생각으로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오랫동안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히법이 언어와 꼭 마찬가지로 의도적이지도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은(주 사용되는 용어를 빌리면, 유기적인) 내부에서의 자연적발전을 겪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으로서는 거래에서 자주적으로, 언제나 마찬가지 형태로 체결된 법률행위에서생긴 모든 법명제, 나아가 
학설이 현존하는 여러 가지 법의 분석에서 도출한 모든 
추상적 개념, 추론, 준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거래와 학설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갖는 
힘은 한정된 것으로, 기존 궤도 위의 운동을 제어하고 
촉진할 수는 있지만, 흐름을 방해하는 둑을 무너뜨려 
새로운 방향을 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법률의 제정뿐이다. 즉 일정한 목표를 향한국가권력의 의도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송제도와 실체법의 
모든 발본적인 개혁이 법률의 제정으로 행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법의 본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필연인 것이다.

물론 법률을 통해 기존의 법을 변경하는 경우에도 가능한 
현행법의 틀 속에서 새로운 원칙을 정하는 것에 그치고, 
종래의 법에 근거해 형성된 구체적 생활 관계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망가진 나사못이나 롤러만을 
새것으로 교체해서 법적 장치를 고치는 것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매우 많은 경우 법의 개정은 현존하는 여러 권리나 
사적이익에 대한 최대한의 개입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오랜세월 동안 무수한 개인이나 모든 계급의 이익이 
기존의 법과 굳게결부되어, 이러한 이익을 현저히 침해하지 않고 기존의 법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법명제나 제도를 문제로 삼는다는 것은, 그 모든 이익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무수한 촉수로단단히 들러붙은 해파리를 
제거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위협에 폭로된 여러 이익의 
자연스러운 자기보존 본능에 따른 엄청난 저항을 유발하고, 불가피하게 투쟁을 초래한다. 다른 모든 투쟁에서와 같이 
이 투쟁에서도 중요한 것은 논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대립하는 두 세력의 힘 관계다.

마치 힘의 합성과 같이 최초의 방향이 아니라,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달리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론에 따라 이미 폐기된 제도가 그 뒤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많다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제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역사의 관성의 힘
vis inertiae이 아니라, 각각 현상을 지킨다고 하는 
여러이익이 보여주는 저항력이다.

생성된 것은 모두없어지기에 가치가 있다. 

따라서 법은 역사적 발전 속에서 움직이는 가운데 
추구하고 쟁취하고 투쟁하는 모습으로, 즉 힘겨운 노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정신이 무의식중에 언어를 만들어가는 경우에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고 끝나고, 예술도 자신의 과거, 
즉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양식을 극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여러 가지 목적, 노력, 이익의 중앙에 놓인 
목적 개념으로서의 법은 옳은 길을 찾기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추구해야만 하며, 바른 길을 발견한 뒤에는 
방해가 되는 저항을 타파해가야 한다. 

이러한 발전이 예술이나 언어의 발전과 같은 법칙적인 
것으로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임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법 발전의 모습과 형태는 역시 언어와 
예술의 경우와는 다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우리계약법
진홍기 지음 / 법문사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럼 계약의 성립으로 채무가 발생하면 채무를 지는 
자(채무자)는 그 채무를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채무자가 계약에서 정해진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계약위반 또는 채무불이행이라고 한다)다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검토하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먼저 채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둔다. 원칙은 단순하다. 채무의 내용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매계약에서 매수인은 
4월 1일 오후 3시까지 대금 10만 원을 지급한다는 것을 
계약으로 정한것이라고 한다면, 매수인은 계약에서 
정한 그대로 매매대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1시간 늦어도 단돈 1,000원이 부족해도 채무불이행이 
된다.

이것이 원칙이지만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가? 예를 들어 약속한시간보다 10분 늦었다. 약속한 금액에 
10원이 부족하다는 경우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채무는 
확실히 계약대로는 이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만으로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소란피울 정도의 
것인가. 극히 작은 지연이나 부족의 경우에는 이것을 
새삼스럽게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에 합치하는 
것이 아닌가. 채권자에는 그 정도의 관용은 기대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어쩌면 상식이
아닌지 모르겠다.

매매계약에서 미세한 대금이 지급되지 않았을 때에도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가에 관해, 대법원은 P가 
위 매매계약의 가장 핵심적인 해제사유로 주장한 D가 
그 계약에 따라 1967.2.13 까지에 P에게 지급하여야 할
매매대금 중 금 11,670,000원만을 지급하였을 뿐 
나머지 금액은 P의 수차에 걸친최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급지 않았다는 주장에 관하여 총 매매대금이 
2,000만원인 부동산의 매매대금 중 미지급액이 불과 
105,000원일 뿐 아니라 그 미지급액에대하여 월 5분의 
지연이자를 지급하기로 약정한 사안에서 위와 같은 
미지급액이있다는 이유만으로 위 매매계약을 해제한다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된다(71다352,353,354)고 했다. 

또한 예를 들어 4월 1일로만 정해져 있는 경우 역으로 
채무자는 그날의 밤 11시 55분경에 채권자의 집의 
문을 두드리 대금을 지급한다고 말해도 되는가. 
조금 더 상식적인 기간에 지급한다는 배려가 채무자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일본 상법에는 관련규정을 두고 있다(상 520조 참조).
이같이 계약이행(채무의 이행)에 유연함을 가져오자는 
사고방식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으로 1920년대 
의용민법 적용시대에 학설 · 판례에 의해 제창되어
그 후 전후의 일본 민법 개정 때에 1조 2항에 규정이 
두어졌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법률관계의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하여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추상적 규범이다
(91다3502).

판례는 권리남용이라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으로 
그 권리행사의 목적이 오직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려는 데 있을 뿐 행사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경우이어야 하고, 객관적으로는 
그 권리행사가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97다42823)고 했다.

구체적인 예로, 판례는 송금의뢰인이 착오송금임을 
이유로 거래은행을 통하여혹은 수취은행에 직접 
송금액의 반환을 요청하고 수취인도 송금의뢰인의 
착오송금에 의하여 수취인의 계좌에 금원이 입금된 
사실을 인정하고 수취은행에 그 반환을 승낙하고 
있는 경우, 수취은행이 수취인에 대한 대출채권 등을 
자동채권으로하여 수취인의 계좌에 착오로 입금된 
금원 상당의 예금채권과 상계하는 것은 송금의뢰인에 
대한 관계에서 신의칙에 반하거나 상계에 관한 권리를 
남용(2007다66066)하는 것이라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