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기원은 투쟁
법과 권리의 목적은 평화이고, 평화에 이르는 수단은 투쟁이다. 법과 권리가 불법적인 침해를 예상해 이에 대항해야 하는 한(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그 필요는 없어지지 않는다) 법과 권리는 이러한 투쟁을 피할 수 없다. 법과 권리의 생명은 투쟁이다. 한 국민의투쟁, 국가권력의 투쟁, 여러 계급의 투쟁, 여러 개인의 투쟁이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투쟁으로 생겨났다. 모든 중요한 법명제는무엇보다도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쟁취되어야 했다. 그리고 모든 법적 권리는 그것이 국민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간에, 언제나 그것을 주장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법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 법을 가늠하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 법을 실행하기 위한 칼을 쥐고 있다. 저울이 없는 칼은 발가벗은 폭력에 불과하고,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할 뿐이다.
저울과 칼은 표리일체다. 법의 완전한 상태란, 정의의 여신이 칼을사용하는 힘과 저울을 다루는 재주가 균형을 이루는 경우에만 나타난다.
법은 끊임없는 행동이다. 그것은 단지 국가권력의 행동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행동이다. 법의 모든 생애를 개관해보면,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생산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국민의 활동이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투쟁과 행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법적 권리를 관찰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개인은 누구나 이러한 전 국민적 행동에 참여하고, 나아가 법의 이념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각각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개인의 생활은, 미리 부설된 법의 궤도 위를 무사 평온하게 나아간다.
그들에게 "법은 투쟁이다"라고 말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법은 평화와 질서의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전적으로 옳다. 이는 마치 아무런 수고 없이 타인의 노동 결실을 받은 부유한 상속인이 "재산은 노동이다"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 양자의착각은 재산과 법에 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자의적으로 분리되어, 어떤 이는 향유와 평화의 면만을, 다른 이는 노동과 투쟁의 면만을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법과 같이 재산도 양면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 머리와 같다. 어떤 이에게는 하나의 면만을 다른 이에게는 다른 면만을 보여주므로 양쪽이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르게 된다. 법에 관련한 이러한 사정은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시대의 삶은 전쟁이고, 다른 시대의 삶은 평화다. 그리고 국민의 차원에서도 양자에 대한 주관적 분리의 차이에 따라 개인의 경우와 같은 착각에 빠진다. 최초의 포성이 아름다운 꿈을 깨뜨릴때까지, 오랜 평화의 시대 그리고 영원한 평화에 대한 믿음이 찬란하게 피어 있다. 노고 없이 평화를 누린 세대를 대신한 다른 세대가나타나 전쟁이라는 고역으로 다시 평화의 세대를 찾아야 한다.
재산의 경우도, 법의 경우도 노동과 향유는 이렇게 나뉘어 있는것으로 향유를 누리며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는 사람을 위해 다른사람들은 노동을 하고 투쟁을 해야 한다. 투쟁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 노동을 수반하지 않는 향유는 단지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당하기 전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 뒤의 역사에서는 평화와 향유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투쟁이야말로 법의 노동이고, 투쟁이 실제로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투쟁이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도 법의 경우와 재산의경우가 다른 점이 없다는 생각을 이제부터 상세히 논하도록 하자.
이는 결코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학문 (법철학만이 아니라 실정법학까지도)이 범하고 있는 태만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법학이 정의의 칼보다도 도리어 정의의 저울에 몰두했음이 명백하다. 법학은 오로지 학문적인 관점에서 법을 고찰해왔다. 요약하자면 그 관점이란 법을 현실적 측면에서 힘의 개념으로보지 않고, 논리적 측면에서 추상적인 법명제의 체계로 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일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법의 거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법관념이 버젓이 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비난에 근거가 있음은 앞으로의 설명으로 증명될 것이다.
알려져 있듯이 독일어 Recht는 이중적 의미를 포함한다. 즉객관적인 의미의 법과 주관적인 의미의 권리로 사용된다. 객관적인 의미의 법은 국가가 운용하는 여러 법원칙의 총체, 즉 법률에 따른 생활 질서를 말한다.
한편 주관적인 의미의 권리는 추상적인 준칙이 사람의 구체적 권능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 두 가지 방향에서 법과 권리는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즉 투쟁해서 자기의 존재로부터 취득해 관철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을 주된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만, 투쟁이 법과 권리의 본질에 속한다고 하는 내주장이 옳다는 것을 법을 위한 투쟁과 관련해 증명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법의 생성을 위한 투쟁
법을 위한 투쟁이라는 문제 중에서, 국가가 행하는 법의 실현이 투쟁을 수반하는 점에 의문의 여지는 없으므로 여기서 상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다. 즉 국가에 의한 법질서의 유지는 법질서를 침해하는 무법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의 생성과 관련짓는 경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역사가 시작할 때의 원초적 생성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 눈앞에서 매일반복되는 법의 개정, 기존 법제도의 폐지, 기존 법명제를 새로운 법명제로 대체하는 현상, 즉 법의 발전에 관해서도 내 주장은 아직 자명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법의 생성도 법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투쟁의 법칙에 복종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다른 견해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현재의 로마법학에서 여전히 널리 승인되고 있는견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로마법학의 대표적인 두 학자의 이름에 따라 법생성에 관한 사비니-푸흐타 이론이라고이름짓고자 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법의 형성은 언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고통도 없이 진행하는 것으로, 쟁탈이나 투쟁도, 심지어 추구의 노력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리가 갖는 온유한 작용의 힘이 강인한 노력 없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길을가는 것이고, 법적 확신이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어 사람들의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새로운 법명제란 언어 법칙과 마찬가지로 무리 없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가령 고대 로마법에는 채권자가 지불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로마 밖의 외국에서 노예로 매각할 수 있다든가, 물건의 소유자는 불법 행동자로부터 자력으로 자신의 물건을 뺏을 수 있다고 하는 법명제가 있었는데, 위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법명제는 고대 로마에서 cum‘이라는 격 지배 전치사에 이어지는 명사가 종격으로 사용되는 언어 법칙과 거의 같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과거에 나 자신이 대학에서 배운 법의 생성에 관한 생각으로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오랫동안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히법이 언어와 꼭 마찬가지로 의도적이지도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은(주 사용되는 용어를 빌리면, 유기적인) 내부에서의 자연적발전을 겪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으로서는 거래에서 자주적으로, 언제나 마찬가지 형태로 체결된 법률행위에서생긴 모든 법명제, 나아가 학설이 현존하는 여러 가지 법의 분석에서 도출한 모든 추상적 개념, 추론, 준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거래와 학설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갖는 힘은 한정된 것으로, 기존 궤도 위의 운동을 제어하고 촉진할 수는 있지만, 흐름을 방해하는 둑을 무너뜨려 새로운 방향을 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법률의 제정뿐이다. 즉 일정한 목표를 향한국가권력의 의도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송제도와 실체법의 모든 발본적인 개혁이 법률의 제정으로 행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법의 본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필연인 것이다.
물론 법률을 통해 기존의 법을 변경하는 경우에도 가능한 현행법의 틀 속에서 새로운 원칙을 정하는 것에 그치고, 종래의 법에 근거해 형성된 구체적 생활 관계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망가진 나사못이나 롤러만을 새것으로 교체해서 법적 장치를 고치는 것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매우 많은 경우 법의 개정은 현존하는 여러 권리나 사적이익에 대한 최대한의 개입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오랜세월 동안 무수한 개인이나 모든 계급의 이익이 기존의 법과 굳게결부되어, 이러한 이익을 현저히 침해하지 않고 기존의 법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법명제나 제도를 문제로 삼는다는 것은, 그 모든 이익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무수한 촉수로단단히 들러붙은 해파리를 제거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위협에 폭로된 여러 이익의 자연스러운 자기보존 본능에 따른 엄청난 저항을 유발하고, 불가피하게 투쟁을 초래한다. 다른 모든 투쟁에서와 같이 이 투쟁에서도 중요한 것은 논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대립하는 두 세력의 힘 관계다.
마치 힘의 합성과 같이 최초의 방향이 아니라,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달리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론에 따라 이미 폐기된 제도가 그 뒤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많다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제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역사의 관성의 힘 vis inertiae이 아니라, 각각 현상을 지킨다고 하는 여러이익이 보여주는 저항력이다.
생성된 것은 모두없어지기에 가치가 있다.
따라서 법은 역사적 발전 속에서 움직이는 가운데 추구하고 쟁취하고 투쟁하는 모습으로, 즉 힘겨운 노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정신이 무의식중에 언어를 만들어가는 경우에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고 끝나고, 예술도 자신의 과거, 즉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양식을 극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여러 가지 목적, 노력, 이익의 중앙에 놓인 목적 개념으로서의 법은 옳은 길을 찾기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추구해야만 하며, 바른 길을 발견한 뒤에는 방해가 되는 저항을 타파해가야 한다.
이러한 발전이 예술이나 언어의 발전과 같은 법칙적인 것으로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임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법 발전의 모습과 형태는 역시 언어와 예술의 경우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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