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의 정의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이 정의는 오로지 주권 개념을 한계개념으로 생각할 때만 
타당하다. 왜냐하면 한계개념은 대중문학에서 통용되는 
엉터리 용어법과 같은 혼란스러운 개념이 아니라 극한에 
다다른 개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정의가 정상사례가 
아니라 한계상황에 연관될 수 있음은 이러한 사실에
조용하는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예외상태는 일종의 
긴급명령이나 계엄상태 따위가 아니라 공법학의 
일반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함은 이제부터판명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예외상태야말로 주권에 대한 법학적 정의에 본래적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에는 체계적이고 법논리적인 
근거가 있다.

예외상태에 대한 결정은 그야말로 결정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정상시에 유효한 법조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일반적 규범은 절대적 예외를결코 파악하지 못하고, 
진정한 예외상황이냐 아니냐에 대한 결정도 완전하게 
근거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몰이 눈앞에 긴급상태가 벌어졌는지아닌지 가늠하는 
일은 법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로 두고 있었다. 즉 법적 의미에서 
결정은 규범의 내용으로부터 남김없이 도출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문제이다. 
몰이 밋밋하게 말한 것처럼 이는 법치국가적 자유주의의 
표현일 뿐이며, 그는 결단이 갖는 고유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다.

주권에 대한 정의 주권은 무엇인가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고의 지배력이다)로서 정립된 추상적 
틀을 인정하든 안 하든 커다란실천적 혹은 이론적 차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적어도 주권의 역사에서는일반적으로 
그 개념 자체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구체적인 적용을 둘러싸고, 즉 공공적 혹은 국가적 
이익, 공공의 안전과질서, 공공 후생 등이 관건이 되는 
갈등상황에서 누가 결정하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을 뿐이다. 현행 법질서에 규정되지 않은 사례인 예외사례는 
기껏해야 극도로 긴급한 사례라거나 국가의 존립이 위험에 처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규정될 뿐, 실제 사태에 맞게 
규정될 수는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런 사례야말로 
누가 주권의 주체냐는 물음을 시급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물음이 바로 주권 일반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긴급상황에 처한 것이 언제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명백한 
항목들을 제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한의 
긴급상황이 발생해 그것을 진압하는 일이 관건이 되었을 때, 무엇이 그런 상황 속에서 허용되는지 내용적으로 열거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권한의 전제조건과 내용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모른다. 
아니 법치국가의내적 논리에 따르면 이런 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헌법은 기껏해야 이런 경우에 누가 행동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는지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행동이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서로 제약하여 균형을 이루는 기관들로 
분할된 법치국가의 헌법 집행의 경우와 달리, 누가 
주권자인지는 더할나위 없이 명백한 일일 터이다. 
그는 극한적 긴급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평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 주권자는 통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바깥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속해 
있다. 따라서 헌법을 완전히효력정지시킬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모든 근대적 법치국가의 
발전 경향은 이런 의미에서의 주권자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래에서 살펴볼 크라베와 켈젠의 이념은 
이 흐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극한적 예외상황을 실제로 
이 세계로부터 제거할 수 있냐 아니냐는 법학적인 물음이
아니다.

그런 상황을 사실상 제거할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는 철학적인, 특히 역사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확신에 달려 있다.

주권 개념의 발전에 대해서는 몇몇의 역사적 서술들이 있다. 하지만 이서술들은 궁극적으로 추상적인 형식 구성으로 
만족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교과서적이고 시론적인 주권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주권 개념을 다룬 저명한 저자들이 
끝없이 되풀이했지만 철저히 공허할 따름인 주권이란
지고의 힘이라는 상투적 규정을 정확히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그누구도 해오지 않았다. 이 개념이 위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즉 예외사례에 기원을 둔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 장 보댕이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주 인용되는 
그의 정의, 즉 "주권은 공화국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이다" (La souveraineté est la puissance absolute et perpétuelle d‘uneRépublique)라는 정의보다는 
주권의 진정한 표식" (Vraies remarquesde souveraineté)"이라는 학설로 근대 국가론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개념을 수많은 실제적 사례를 통해 상세히 
논하는 가운데 다음과같은 물음으로 계속해서 되돌아온다. 즉 주권자는 어느 정도까지 법률에구속되어 있으며, 여러 
신분계층에 대해 어떤 의무를 가지는지의 물음으로, 
이 궁극적이고 각별히 중요한 질문에 보댕은 이렇게 답한다. 

곧 어떤약속을 지킬 의무는 자연법에 기초하므로 약속은 
구속력을 갖지만, 긴급상황에서 이 구속력은 일반적인 
자연법 원리에 따라 효력상실된다고 말이다. 따라서 군주의 약속이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이행되는만큼 
군주는 여러 신분계층이나 인민에 대해 의무를 가지지만, 
긴급사태의 경우 그는 결코 구속되지 않는다고 보댕은 
일반화하여 말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새로운 
테제가 아니다. 보댕의 논의에서 결정적인점은 그가 
군주와 여러 신분계층들의 관계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단순한 형태로 분석했다는 점이고, 나아가 긴급상황을 
언급함으로써 그랬다는 점이다. 

주권을 분할 불가능한 통일체로 파악하고 국가권력에대한 물음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그의 정의에 고유한 탁월함은 
바로 여기에있었다. 또한 그의 학문적 업적과 성공의 
토대는 그가 결정을 주권 개념속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오늘날 상례적인 보댕의 인용이 없는 주권 개념에 
대한 논구는 거의 없다. 그러나 [국가론] 중 저 장의 
핵심내용이 인용된 것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군주가 여러 신분계층이나 인민에게 한 약속이 그의 
주권을 폐지시킬 수 있는 것인지 보댕은 묻는다. 
이에 대해 그는 상황, 시간, 개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런 
약속을 어기거나 법률을 바꾸거나 아예 폐지해 버리는 
사례를 언급하면서 답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군주가 미리 원로나 인민에게 의견을 
구해야만 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민들에 의해 폐위당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하지만 보댕이 보기에 이것은 바보스러운 
일에 다름 아니었다. 왜냐하면 보댕이 보기에는 여러 
신분계층 또한 법률의 주인이 아니므로 그들도 군주에 
의해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으며, 이런 경우에 주권은 군주와 여러 신분계층사이에서 빙빙 돌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즉 어떤 때는 인민이 어떤 때는 군주가 주인이 되며, 이는 
모든 이성과 법에 반하는 사태인 것이다. 따라서 유효한 
법률을 폐지하는 권한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든 특정한 
상황에서든 주권에 고유한 표식이며, 보댕은 이로부터 
주권의 다른 모든 특징(선전포고와 강화조약, 관리의 임명, 최종재판권, 사면권 등)을 추출하려고 한 것이다.

독재에 관한 책에서 나는 역사적 서술들에서 전승된 틀에 
반대하면서 17세기의 자연법 사상가들 또한 주권의 문제를 예외사례에 관한 결정의 문제로서 이해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푸펜도르프가 그랬다. 그리고모든 법사상가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동의했다. 즉 하나의 국가 안에서 
대립이 발생하면 모든 당파들은 자연스럽게 일반적 선(善)
여기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성립한다 을 추구하며, 
이런 갈등이 발생했음을 결정하는 데에, 곧 무엇이 공공의 
질서이며 안전인가, 그리고 언제 그것이 위기에 처했는가 
등을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데에 주권과 국가자체의 존립이 달려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공공의
질서와 안전은 언제 이 질서와 안전이 존립하며, 언제 
위협을 당해 위기에 처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군사조직이나 상업적 정신에 지배된 자치 조직이냐, 혹은 급진적 당파조직이나 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왜냐하면 모든 질서는 하나의 결정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며, 전혀 숙고되지 않은 채 자명하게 통용되는 법질서 개념 또한 법학의 상이한두 가지 요소(결정과 규범의 대립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질서와 마찬가지로 법질서는 규범이 
아니라 결정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오로지 신만이 주권적이라고 할 때, 지상에서 반대의 
여지없이 신의대리인으로 행동하는 자, 황제, 지방영주, 
인민, 반론의 여지없이 자신을인민과 동일시해도 되는 자 등 그 누구이든 문제는 언제나 주권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즉 구체적인 사태 속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는 데에 있다.

16세기부터 법학자들은 주권 문제를 논의할 때 주권의 
권한을 열거하는 데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주권에 
필수불가결한 표식을 나열하여 정리한것이자 본질적으로 
보댕의 자주 인용된 논의로 환원되는 것이다. 

주권자란이 권한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낡은 독일제국의 
불분명한 법적 관계속에서 공법학적 논쟁은 수많은 표식들 중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표식이 존재했으리라는 
사실로부터 여타의 불분명한 표식들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해야 했으리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논쟁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점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즉 언제 항복하느냐와 같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사안에 관한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문제,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도 권한을 갖지 않는 
사례에 관한 권한을 누가 가지느냐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말이다. 잘 알려진 표현법을 따르자면 누가 제한 없는 
권력을 가진 자로 생각되느냐는 물음이었던 셈이다. 

이는 예외사례, 즉 극한적 긴급사태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군주제 원리에 관한 논의에서 동일한 법리적 
구조가 반복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누가 헌법적 잣대로는 규정된 바 
없는권한에 관해 판단할 것인지를 놓고, 즉 권한에 관한 
물음에 법질서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을 때 누구에게 
권한이 있는지를 놓고 물음이 제기된다. 

1871년 헌법에서는 독일 내의 각 영방(領)이 주권적이었냐 아니나를 둘러싼 논쟁은 매우 사소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도 동일한 논쟁 구도가 되풀이됨을 
알 수 있다. 자이델이 각 영방이 주권적이었다고 주장했을 때, 그 논거의 요점은 각 영방에 아직 남아 있는 권리의 연역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독일제국의 
권한이 헌법에 명시되었다는 주장, 즉 각 영방의 권한이 
원칙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반면 독일제국의 권한은 
제한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여전히 유효한 1919년의 독일 
헌법에서는 제48조에 따라 대통령이 예외상태를 선언할 수 있지만, 의회가 스스로의 통제하에 언제나 그것의 해제를 
요구할 수 있다. 이 규제는 법치국가적 발전 및 실천과 
일치하는 것인데, 이 발전과 실천은 여러 권한의 분할과 
상호통제를 통해 주권 문제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법치국가적 경향은 단지 예외적 권한이라는 
전제를 규제하는 것이지 제48조의 내용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조항은 오히려 무제한의 전권을 수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런 통제 없이 어떤 결정이 내려져야 할 때, 1815년 헌장 제14조의 예외적 권한이 군주를 주권자로 만든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통령에게 주권을 부여한다. 
제48조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따라 각 영방이 예외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국가가아니다. 독일의 각 영방들이 국가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의 핵심은 제48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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