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대선은 ‘정치 전쟁‘이었다
2022년 대선은 끝났다. 이 전쟁을 치렀던 양 진영은 ‘저들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쳐댔다. 상대편을 원수처럼 여기는 비난과 마타도어도난무했다. 이들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오직 반대편 죽이기에 혈안이되었다.
선거는 편 가르기에 근거한 진영 전쟁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며,늘 열정이 들끓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선 이후 사회적 갈등과 분열은 더욱 극심해질 거라는 것이다.
정치를 전쟁으로 만드는 것은 승자 독식이다. 그래서 대선은 열정의 수준을 넘어 목숨을 건 전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승자 독식은 이성과 소통과 타협을 가로막는다.
2022년 대선은 진보의 자해극이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인간은 그가 상상할수 있는 모든 인간을 집단으로 분류하려는 강한 욕구를 갖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갈등과 적대감만 낳는 게 현실이라면, 그건 자제해야 할 욕구로 분류하는 게 옳으리라. 사실 유권자들에겐 편 가르기보다는 통합을 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 - P9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하여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중립 기어 박고 보자." 2030세대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한쪽 주장만 보고 반대쪽을 욕하지 말고, 양측의 입장을 다 듣고 팩트가 무엇인지부터챙기자는 의미다. 당연하거니와 쉬울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특히 세대 차이가 크다. 이와 관련, 박원익과 조윤호는 3년 전출간한 [공정하지 않다.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성세대는 일단 ‘너는 누구 편이냐?‘ 하고 묻는 데 익숙한 세대들이다. 오늘날 50대가 된 과거 민주화 세대의 경우 젊은 시절에 오래된 보수 기득권 체제를 없애는 일이 공통의 사명이자 목적이었다. 그래서 때로 ‘우리 편‘이 잘못했을지라도 어느 편이 권력을 잡는지가 매우 중요한 세대였다.
49 대 51 의 싸움에 익숙해진 세대들이다. 그러나 과거 세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대한민국‘에서 자라난 20대는 정치적 입장을 먼저 정하고 내 편네 편으로 싸우기 보다 개별 사안을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파악하려는 자세를 더 좋은 태도‘로 인정한다." - P35
나는 이대남(20대 남성)의 반反페미니즘 성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좀 달라졌다. 한국적 실천이 아닌 이론으로서 페미니즘을 여전히 지지하긴 하지만, 그간 내가 반페미니즘에대해 보인 ‘꼰대스러운 태도‘를 성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과의 공정한(또는 남성에게 불리한) 경쟁 체제에서 살아온 이대남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제 불능의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여성을 향한 구조적 불이익과 차별에 대해 잘 알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구조의 문제를 외치지만, 이에 대한 이대남의 답은 간단하다.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 - P36
‘구조‘와 ‘개인의 화해는 가능하다
나는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말엔 공감하지만,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구조‘와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구조적인 성차별‘을 인정하면서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요청에도 응답하는 타협책은 없는 건가? 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구조‘와 ‘개인‘의 화해에 일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 P37
페미니즘에 대해 입으로만 화려하게 떠들 뿐 일상적 삶에선 가부장 독재의 화신처럼 구는 이른바 ‘남성 페미니스트‘가 좀 많은가?
반면 윤석열은 결혼 조건으로 밥 하는 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고 그걸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일상적 페미니즘을 보여준 바 있다. 이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해 나설 자격이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페미니즘의 실천과 확산을 위해 그렇게 유도해나갈 수 있음에도 윤석열을 이준석과 한쌍으로 묶어 무슨 갈라치기의 원흉이나 되는 것처럼 공격하고 말도 안 되는 공포 담론을 퍼뜨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일 망정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꼭 보고 싶다. - P51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섬너는 "미신의 전체 양은 크게 변하지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신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와 결합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이데올로기 미신‘을 지적한 것이다. - P55
"팬덤의 열광적 지지 이면에는 반대를 위한 선택이 남을 뿐이다.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비호감의 대상을 감정적으로 골라 배제하는 모양새다. 저쪽이 싫어서 하는 투표에는 저쪽만 아니면 된다는 기준만 적용된다. ‘너‘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 P62
"팬덤 정치의 폐해는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로 인해 증폭되었다. 선거 국면에선 이용률이 더 높아지는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는 ‘네거티브 천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대편에 대한 비난과 음모론이 흘러넘쳤으며, 기성 언론은 이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 P62
캠프 정치가 문재인 정권에 미친 최대의 악영향은 아무래도 ‘집단 사고groupthink‘가 아닌가 싶다. 이 용어를 만들어낸 미국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 사고‘를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성원들이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 호감과 단결심이 크면 클수록, 독립적인 비판적 사고가 집단 사고에 의해 대체될 위험성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 P75
‘전리품 정치‘에 기반한 캠프 정치는 정치를 이권 투쟁‘으로전락시킨다. 이게 바로 캠프 정치가 사라지기 어려운 결정적 이유다. 이권 앞에선 이성은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익을 추구하기 위한 선의와 진정성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그들마저 자리 사냥꾼‘으로 매도하는 자해 행위는 우리 모두 자제하는 게 좋겠다. - P79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우리 정치인들의 수준이다"고 했다. - P87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캘러헌은 [치팅컬처: 거짓과 편법을부추기는 문화]에서 "최고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갈수록 커지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한다"고 했다. 정치판의 승자독식이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거짓과 편법이 창궐하는 세상을 원치 않는다면, 이 승자 독식 체제를 깨부숴야 하지 않겠는가? - P106
"나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그 중간쯤 된다"거나 "보수나 진보라는 단어로 편을 가르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는 중도파는 우선적으로 편 가르기와 이에 따라붙는 뜨거운 열정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단합을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열정이 없거나 약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보다 중도 논쟁이 앞선ㅈ서양에서 중도를 가리켜 "열정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식의 담론이 많은 것도 그걸 잘 말해준다. - P124
이 점에선 중도 미신론‘이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투표 행위에 그런 열정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정당들이 단합된 조직력을기반으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부 강경파에 휘둘렸다가 선거를 망치는 사례들이 자주 나오듯이, 중도는 ‘선거의 보이지 않는 실세‘로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여론조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할 수도 있다. - P124
문제는 중도가 선거나 여론조사 이외엔 거대 양당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파괴력을 평소 실력의 형식으론 보여주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정치는 상당 부분 이익 투쟁이건만 중도는 이익 투쟁의 밖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 투쟁에 참여한다 하더라도이익을 쟁취할 확률이 낮아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어느 지식인이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 말에 그 이유가 잘담겨 있다. "중도는 설 땅이 없죠. 좋든 싫든한 진영을 선택해야 발언과 영향력, 자리와 계급을 보장받거든요." - P125
미국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의 태도가 바뀌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점을깨달은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은 자기계발의 주문처럼 남용되고있긴 하지만, 집단과 정치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 P187
신앙의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수많은 현인이 증언을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해준다. 그리고 그 신앙의 대가는 자신이 믿는 대로 보게된다는 것이다"고 했고, 허먼 멜빌은 "신앙은 자칼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무기력한 회의감으로부터 활기찬 희망을 끌어낸다"고 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이란 모든 것을 뛰어넘는 비약이다"고 했고, A. C. 그레일링은 "신앙은 이성의 부정이다. 이성은 증거를 찬찬히 조사한 뒤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균형 감각이다. 그와 달리 신앙은 반대 증거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 P217
신앙은 존중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구역은 지켜야 한다.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거나 교회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건 옳지 않다. 신앙에도 지켜야 할 규칙과 에티켓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신앙을 가졌건 신앙으로 대처해선 안 되는 구역도 있다. 정치와 행정은 이성의 영역이다. 탈신앙의 영역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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