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법적 평등과 실질적(사실상의) 평등

가. 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의 긴장

법적으로는 평등하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혹은 사실상 
평등하지 않은 상황은 일상다반사이다. 실질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개인적, 사회적 요인은 무수히많고 복합적일 
것이다. 지적·육체적 조건이나 훈련, 근면성과 같은 
개인적 자질에서 비롯되는 결과의 차이를 수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고 실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불이익이 축적된 
집단들의 경우 법적 · 형식적 기회균등 보장만으로는 
하위집단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늘날 주로 문제되는 것은 
성, 인종, 장애, 경제력 등을 이유로 발생하는 불평등이다. - P335

일반적으로 헌법학에서는 평등규범을 곧바로 실질적 
평등까지 보장하는 원칙으로 이해하지는 않고 있다. 
헌법 제11조 제1항의 ‘법 앞에 평등‘에 대해, 자유 행사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능력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는 의미의 
‘기회균등‘으로 이해하고 이를 ‘법적 평등‘이라 표현하면서 
실질적(사실적) 평등을 여기서 배제하고 있다. - P335

예를 들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법적 취급의 
불평등의 금지를 의미하는 데 그치고, 현실로 사회에 
존재하는 경제적, 사회적 기타 여러 가지의 사실상 
불균등을 시정하여 그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어장애인 후보자와 
비장애인 후보자 사이의 실질상의 불균등이 있음에도 
동일하게 취급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이 사건법률조항을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헌재 2009. 2. 26. 2006헌마626). - P336

전면적인 실질적 평등의 달성은 유토피아적 목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실정헌법의 목표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 평등을 달성하려는조치는 관련자의 
법적 자유를 훼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실질적 
평등은 기본권을 통하여 법적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체계와 조화되기 어렵다고 한다.

실질적 평등은 평등원칙에서 곧바로 추구 ·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법원리나법 규범의 도움을 받아 
추구 · 실현되어야 한다고 하며, 그러한 것으로는 
사회국가원리나 사회적 기본권을 들고 있다. 

이렇게 보면 헌법 제11조 제1항은 이평제평
즉 평등(법적)의 이름으로 평등(실질적)을 제어하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여성할당제 등에 대해 
번번이 제기되는 역차별이라는 비판은 바로 이런 
논리에 근거한 것이다. - P336

사실이나 현실에서 비롯되는 요구를 그대로 법적 요구로 
전환하기 어렵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헌법규범의 개방성, 평등 개념의 복합성과 이념성은 평등규범에 대한 열린 논의를 가능하게 하며, 법적 평등만 
보장하여서는 평등의 내재적 본질이 훼손되거나, 기존의 
격차를 고착·확대시키는 반평등적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이 인식될 때, 실질적 평등을 평등규범의 내용으로일정하게 
받아들이거나 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 간의 갈등을 
조화적 보완관계로 구성하려는 입법론적, 법해석론적 
궁구와 모색이 이루어지게 된다. - P336

헌법에서 실질적 평등의 문제는 현재, 첫째, 차등처우 
요구를 평등규범의 내용으로 (얼마나) 인정할 것인지, 
둘째,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의 근거와 한계는 무엇인지, 
셋째, 간접차별에 대해 평등규범을 적용할 것인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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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인격들은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 
인격들이 서로 함께 하나의 자연적 종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우리가 ‘어떤 것‘ 과혹은 ‘어떤 사람‘과 관계하는지 알기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존재를 말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 즉, 한 인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그에게 고유한 지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할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P9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라고 한
보에티우스(Boethius)의 유명한 정의 이후, 철학은 
어떤 근거로 우리가 특정한 존재를 "인격"이라고 칭하는지 
그 특징을 세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노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보에티우스에게서 ‘이성적(rationabilis)‘ 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상세히 연구하는 방향이었다. 
무엇보다 로크부터 현대의 언어 분석에 이르는 영국의
사상은 인격들을 정의하는 일련의 서술어를 가려내 
작업을 하였다. 스트로슨(Strawson)은 인격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서술어를 동시에 이끄는 담지자, 
즉 데카르트의 의미로 "사유하는 사물" 만이 아니라는 
것이 본질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격 철학을 주관성 이론 혹은 의식 이론과 구별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그러나 "의식의 서술어"라는 표현이 
주관적 체험의 모든 종류를 표시한다면 스트로슨의 
정의는 너무 앞질러 갔다. 아마도 작은부리울새한테도 
"내면"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저자들은 인격의 특징을 의식, 기억, 자기 삶
전체에 대한 관계, 이 생애에 대한 관심 등 내면적인 것으로 규정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막스 셀러는 인격을 다양한 
유형의 지향적 활동을하는 주체로 정의하였다. - P9

인격 개념에 대한 이해의 또 다른 방향에서는 인격 존재의 
사회적 성격이 중심에 세워졌다. 인격들은 오직 복수로만 
있다. 인격들에게는 상호 인정의 관계가 본질을 이룬다. 

인격은 단지 종의 특성 때문에 인격인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하기에 인격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피히테와 헤겔을 이 사상의 대부로 인정하기 쉽다. 
그러나 헤겔은 이 지위를 종국에 가서 포괄하는 
이성적 보편자 안에서 다시 지양했기 때문에 이른바 
인격주의는 20세기 전반기 동안 헤겔로부터 이반하면서 
자기 고유한 모습을 획득했다.


- P10

인격 개념에 대한 사변적인 노력은 지금까지 이론적, 
학문적 관심에 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수년 동안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보에티우스 이후 ‘인격‘ 은 존엄한 이름으로, 즉 가치론적 
함축을 지닌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칸트 이후에 인격은 
인권을 근거 짓는데 있어서 중심 개념으로 작용했다. - P10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 인격의 기능은 반대가 되었다. 
인격 개념은 인간이 인격이기 때문에 다른 인격에 대해 
권리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의 해체 작업에서 
갑자기 열쇠 말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인격이라는 
한도에서만 그렇다. 

모든 인간이 인격이 아니며, 인간 생애의 모든 단계에서 
인격인 것도 아니고, 인간 의식의 모든 포착이 인격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이를 통해 비로소 인격이 되는 
인정공동체에서 처음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인격이 아니다. 또한 어떤 이들에게 우리가 일반적 
인격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부르는 특징들이 개체로서 
결여되어 있다면, 즉 그들이 이 특징들을 아직 더 이상, 
과도기적으로 혹은 온 생애 동안 갖추지 못하다면 
인격이 아니다. 

예컨대 유아ㆍ중증 정신박약인, 노인 치매 환자 등은 
인격이 아니다. 이 방향의 근본주의적 사상가인 
데이비드 파핏(David Parfit)에 따르면 잠자는 이와
잠정적인 의식 불명자도 인격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에 대한 청구권 같은 것을 허용할 어떤 근거도 없다. 
이것을 허용한다면 자기종에게 유리하게 하는 비도덕적 
당파성, 즉 호주의 동물 보호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 (Peter Singer)가 도발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종적 우월주의 (Speziesismus)"가 될 것이다.
- P11

종적 우월주의에서 발생한 충격 현상으로 인해, 이 테제에서 이론적난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태까지 어떤 설명도 필요해 보이지 않던 문화적 자명성이 갑자기 의문에 부쳐진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은 
이례적이지 않다. 놀라움에 대한 저항력은 그런 경우에 
필요한 첫 번째의 것이지만 이것으로 숙고를 대신할 수 없다.

자명한 것도 그것이 논쟁거리가 되면 장기적으로는 근거 
짓기가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적 생활방식의 해석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떤 이에게는 논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질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도전 
덕분에 직관적인 확실성에 대해 더 깊은 근거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자명한 것들은 그런 경우에 근거 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그러고 나면 그것의 
명성에 상처를 입게된다.
- P11

모든 사람이 인격인가? 이 물음에 긍정하는 대답에는
전제가 있다. 이 대답은 인격들이 비록 선험적으로 인정을 
기초로 하는 상호 관계 안에 있지만, 이 인정은 인격 
존재에게 있어서 그것의 조건으로 선행하는 것이라기보다 
누군가로부터 기인하는 요구에 답해서 나온 것이다.  - P12

생명은 존재자에게 경우에 따라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하는 특징 혹은 성질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살아있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생명체의 핵심"이다. 
인격은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인격들의 존재와정체성의 조건들은 각각 특정한 종에 
속한 살아 있는 존재의 그것이다.

우리는 인격들을 하나의 종 혹은 하나의 유로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리상으로는 어떤 유일한 종에 속한 것으로 
제한되지 않고, 그러나 이종에 속한 각자는 유일하고 
고유한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정의된 지위를 
획득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편입한다. 

이 지위를 받은 자는 ‘어떤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 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 ‘인격‘ 에 관한 말이 발생했는가?
인격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무엇을 내포하며, 
무엇을 배제하는가?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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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와 교육

정신생활과 국민교육에 관한 원칙들이 혁명적인 헌법의 
소산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물을 비정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권력을 대립물로서 생각하곤 
하는데, 그들에 대해서 이것은 이상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실러의 말이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정신을 형성하는 
자에게 반드시 최후에는 지배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회적 투쟁에서 해방된정신적 발전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은, 특히 어려운 상황 아래서
정당 간의 타협에 의해서 성립한 바로 이들 헌법규정들에 
불과하다. 중세에는 거의 전적으로 교회에 의해서 
담당되고 지배되고 있던 교육과 교육조직은 르네상스 
국가의 성립이나 인문주의의 성장, 그리고 시민문화의 
발전과 함께 점차로 세속적인 것, 도시, 무엇보다도
종파동권으로서 교회들 위에 서는 국가의 영향 아래 
두어지게 되었다.  - P41

정신적 인격성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이념은 여기서 
두 개의 주요한 전선, 즉 교회와국가에 대해서 투쟁한다. 
교회가 학문이나 교육에 영향을 미쳐야할 것인가의 여부, 
어떠한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의 
주권국가에서는 국가와 교회와의 대립문제이며, 그리하여 전술한 정교분리 문제의 일환이다. 국가는 교회로부터 
우선 교육과 학교에 관한 그 이전부터의 의무를 면하고 
최종적으로는 그 사회적인 권리도 박탈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국가 자신이 그 모양에 따라서 학교는 정치적 
조직에 대해서도 그 자유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권을 
그 정신적 자립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 P42

자유주의적 이념뿐만 아니라 민주적 • 국민적 그리고 
사회적 이념도 학교의 형태나 독일적 학교교육의 정신을 
라이히 헌법 속에서 구현화하여 왔다. 그 구체화의 
자유주의적인 중심사상은 세속성이다. 즉 교회에 대한 
학교의 독립성, 자립성이며, 또한 국가의 편협한
개입으로부터의 학교의 자유이다. 또한 교육권한자의 
지도적인 영향력도 그러한 중심사상이다. 

민주적인 원칙은 일반적 취학의무와 만인에게 공통의 
의무교육 기초과정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사회적 이념에 
대응하여 국가는 이들 민주적 제도들을 자력이 결여된 
자도 향수할 수 있도록, 물질적 부조를 급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 국민성의 정신 속에서청년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 P42

제142조 제143조. 제142조는 국가기관 측에시의 
적법하지 아니한 개입에 대해서 예술· 학문 그리고 
교육활동의 자유를 보상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 자유의 한계는 초등학교의 교사에 
관해서도 대학교수에 관해서도 국가의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제142조는 이러한 활동들에 대한 보호나, 
아울러 그러한 활동에의 국가의 장려도 약속하고 있다.
청소년교육에의 배려는 세속의 공동조직의 사항에 
속한다(오늘날 이것은 라이히에 속하는데 이전에는 
전적으로 란트와 지방자치에 속하였다). - P42

교사의 육성은 장래에는 라이히의 학문에 관한 
원칙들에 따라서 통일적으로 규율되도록되어 있다. 
공립학교의 교사가 일률적으로 국가공무원인가의 
여부는, 그들이 대부분 국가에 직접 고용된 공무원인가 
간접적인 형태에서의 국가공무원인가(그 권리와 
의무만을 가지는것은 아니며)에 대해서는 학설과 판례 
모두 다툼이 있으며, 제143조 제3항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는 않는다. 유력설에 의하면, 국가에 직접 
고용된 공무원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 P42

제145조. 지금까지의 취학의무 (이것은 초등교육학교에의 통학이나 개인수업에 의해서도충족될 수 있으며, 따라서 
원래는 교수하는 의무였으나, 만인에게 공통의 의무교육 
기초과정,즉 공립 초등학교 4년차까지의 원칙적
통학의무로 바뀐 것은 민주적 이념에 합치한다.

1920년 4월 28일의 라이히 법률에 의하면, 
관계 관할관청은 예외적으로 특수한 경우에만이 
만인에게 공통의 의무교육 기초과정 대신에 
개인수업을 인정한다.

종래와 같이수업만이 아니라 장래에는 수업의 수단도 
이에 대한 의무를 부담하는 지방자치체에의해서 
초등학교나(초등학교의 과정 졸업생을 위한) 
실업학교에서 무료로 마련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양친의 경제적 및 사회적 지위가 
특정한 학교에의 자녀의 입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적 수단을 통하여 
자산이 결여된 사람들에게도 중고등교육도
가능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43

제147조. 학교민주화의 원칙과 절대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것은 이른바 초등교육학교이며, 이것은(공적으로나 
사적으로도) 1920년 4월 28일의 라이히 법률 제2조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이 원리와 상대적으로 양립하지 
않지만, 제146조 제2항에 의해서 또는 교육행정의 
교육상의 권익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명백한
사립 초등학교는 양친의 자산상태에 따른 학생의 선별을 
조장해서는 안 되며, 교사진의 충분한 훈련과 사회적 
지위의 보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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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대선은 ‘정치 전쟁‘이었다

2022년 대선은 끝났다. 이 전쟁을 치렀던 양 진영은 
‘저들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쳐댔다. 
상대편을 원수처럼 여기는 비난과 마타도어도난무했다. 
이들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오직 반대편 죽이기에 
혈안이되었다. 

선거는 편 가르기에 근거한 진영 전쟁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며,늘 열정이 들끓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선 이후 사회적 갈등과 분열은 더욱 
극심해질 거라는 것이다. 

정치를 전쟁으로 만드는 것은 승자 독식이다. 
그래서 대선은 열정의 수준을 넘어 목숨을 건 전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승자 독식은 이성과 소통과 
타협을 가로막는다.

2022년 대선은 진보의 자해극이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인간은 그가 
상상할수 있는 모든 인간을 집단으로 분류하려는 강한 
욕구를 갖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갈등과 
적대감만 낳는 게 현실이라면, 그건 자제해야 할 욕구로 
분류하는 게 옳으리라. 사실 유권자들에겐 편 가르기보다는 통합을 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 - P9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하여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중립 기어 박고 보자." 2030세대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한쪽 
주장만 보고 반대쪽을 욕하지 말고, 양측의 입장을 다 듣고 팩트가 무엇인지부터챙기자는 의미다. 당연하거니와 쉬울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특히 세대 차이가 크다. 
이와 관련, 박원익과 조윤호는 3년 전출간한 [공정하지 않다.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성세대는 일단 ‘너는 누구 편이냐?‘ 하고 묻는 데 익숙한 세대들이다. 오늘날 50대가 된 과거 민주화 세대의 경우 
젊은 시절에 오래된 보수 기득권 체제를 없애는 일이 공통의 사명이자 목적이었다. 그래서 때로 ‘우리 편‘이 잘못했을지라도 어느 편이 권력을 잡는지가 매우 중요한 세대였다. 

49 대 51 의 싸움에 익숙해진 세대들이다. 그러나 과거 
세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대한민국‘에서 자라난 
20대는 정치적 입장을 먼저 정하고 내 편네 편으로 싸우기
보다 개별 사안을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파악하려는 자세를 더 좋은 태도‘로 인정한다." - P35

나는 이대남(20대 남성)의 반反페미니즘 성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좀 달라졌다. 한국적 실천이 아닌 이론으로서 페미니즘을 여전히 지지하긴 하지만, 
그간 내가 반페미니즘에대해 보인 ‘꼰대스러운 태도‘를 
성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과의 
공정한(또는 남성에게 불리한) 경쟁 체제에서 살아온
 이대남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제 불능의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여성을 향한 구조적 불이익과 차별에 대해 
잘 알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구조의 문제를 외치지만, 
이에 대한 이대남의 답은 간단하다.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 - P36

‘구조‘와 ‘개인의 화해는 가능하다

나는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말엔 공감하지만,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구조‘와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구조적인 성차별‘을 인정하면서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는 요청에도 응답하는 타협책은 없는 건가? 
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구조‘와 ‘개인‘의 
화해에 일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 P37

페미니즘에 대해 입으로만 화려하게 떠들 뿐 일상적 
삶에선 가부장 독재의 화신처럼 구는 이른바 
‘남성 페미니스트‘가 좀 많은가? 

반면 윤석열은 결혼 조건으로 밥 하는 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고 그걸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일상적 페미니즘을 보여준 바 있다. 이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해 
나설 자격이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페미니즘의 실천과 확산을 위해 그렇게 유도해나갈 수 
있음에도 윤석열을 이준석과 한쌍으로 묶어 
무슨 갈라치기의 원흉이나 되는 것처럼 공격하고 
말도 안 되는 공포 담론을 퍼뜨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일
망정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꼭 보고 싶다. - P51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섬너는 "미신의 전체 양은 크게 
변하지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신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와 결합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이데올로기 미신‘을 지적한 것이다.  - P55

"팬덤의 열광적 지지 이면에는 반대를 위한 선택이
남을 뿐이다.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비호감의 대상을 감정적으로 골라 배제하는 모양새다. 
저쪽이 싫어서 하는 투표에는 저쪽만 아니면 된다는 
기준만 적용된다. ‘너‘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 P62

"팬덤 정치의 폐해는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로 인해 
증폭되었다. 선거 국면에선 이용률이 더 높아지는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는 ‘네거티브 천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대편에 대한 비난과 음모론이 
흘러넘쳤으며, 기성 언론은 이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 P62

캠프 정치가 문재인 정권에 미친 최대의 악영향은 아무래도
‘집단 사고groupthink‘가 아닌가 싶다. 이 용어를 만들어낸 미국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 사고‘를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성원들이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 호감과 
단결심이 크면 클수록, 독립적인 비판적 사고가
집단 사고에 의해 대체될 위험성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 P75

‘전리품 정치‘에 기반한 캠프 정치는 정치를 이권 투쟁‘으로전락시킨다. 이게 바로 캠프 정치가 사라지기 어려운 결정적 이유다. 이권 앞에선 이성은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익을 추구하기 위한 선의와 진정성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그들마저 자리 
사냥꾼‘으로 매도하는 자해 행위는 우리 모두 자제하는 게 
좋겠다. - P79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우리 정치인들의 수준이다"고 했다.  - P87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캘러헌은 
[치팅컬처: 거짓과 편법을부추기는 문화]에서 "최고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갈수록 커지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한다"고 했다. 정치판의 승자독식이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거짓과 
편법이 창궐하는 세상을 원치 않는다면, 이 승자 독식 체제를 깨부숴야 하지 않겠는가? - P106

"나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그 중간쯤 된다"거나 
"보수나 진보라는 단어로 편을 가르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는 중도파는 우선적으로 편 가르기와 이에 따라붙는 
뜨거운 열정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단합을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열정이 없거나 
약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보다 중도 논쟁이 앞선ㅈ서양에서 
중도를 가리켜 "열정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식의 담론이 많은 것도 그걸 잘 말해준다. - P124

이 점에선 중도 미신론‘이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투표 행위에 그런 열정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정당들이 단합된 조직력을기반으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부 강경파에 휘둘렸다가 선거를 망치는 
사례들이 자주 나오듯이, 중도는 ‘선거의 보이지 
않는 실세‘로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여론조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할 수도 있다. - P124

문제는 중도가 선거나 여론조사 이외엔 거대 양당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파괴력을 평소 실력의 형식으론 
보여주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정치는 상당 부분 이익 
투쟁이건만 중도는 이익 투쟁의 밖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 투쟁에 참여한다 하더라도이익을 쟁취할 
확률이 낮아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어느 지식인이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 말에 그 이유가 
잘담겨 있다. "중도는 설 땅이 없죠. 좋든 싫든한 진영을 
선택해야 발언과 영향력, 자리와 계급을 보장받거든요." - P125

미국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의 태도가 
바뀌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점을깨달은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은 자기계발의 주문처럼 남용되고있긴 하지만, 
집단과 정치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 P187

신앙의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수많은 현인이 증언을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해준다. 그리고 그 신앙의 대가는 자신이 믿는 대로 
보게된다는 것이다"고 했고, 허먼 멜빌은 "신앙은 자칼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무기력한 회의감으로부터 
활기찬 희망을 끌어낸다"고 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이란 모든 것을 뛰어넘는 비약이다"고 했고, A. C. 그레일링은
 "신앙은 이성의 부정이다. 이성은 증거를 찬찬히 조사한 뒤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균형 감각이다. 그와 달리 
신앙은 반대 증거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 P217

신앙은 존중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구역은 지켜야 한다.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거나 교회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건 옳지 않다. 
신앙에도 지켜야 할 규칙과 에티켓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신앙을 가졌건 신앙으로 대처해선 안 되는
구역도 있다. 정치와 행정은 이성의 영역이다. 
탈신앙의 영역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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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실증주의의 법 개념으로 주류적인 것이 영국의 
오스틴과 벤담의 법명령설이다. 즉 법은 주권자의 
일반적 명령이다. 그러나 법이 권리나 권한을 
부여하는 수권규범이나 허용규범이 존재한다는 
점과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법은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법명령은 법철학적 허무주의라는 비판이 있다. 

심헌섭 교수는 법 개념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법명령을 
지지하면서도 금지에 대한 자유 내지 허용의 독자성에 
주목하고, 명령보다는 더 널리 ‘지시(Directive)‘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며, 이는 관습법이나 판례법도 포괄할 수
있다고 한다(심헌섭, 법철학 1, 53면 이하). 

그는 법 개념은 법이념에 대하여개방적이지만, 법이념은 
법의 개념 징표가 아니고, 오히려 법의 평가기준이라고 
하여 기본적으로 법실증주의의 입장에 선다. - P31

법이 명령이든 지시이든 법의 이름으로 그 어느 사항이든지 명령할 수 있는지, 즉 명령의 대상 문제도 제기된다. 법의 
명령으로 윤리적 사항을 명하게나 반대로 비윤리적 사항을 명하여도 법이 되는지, 불가능하거나 준수하기 어려운 
것을 법의 이름으로 명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가 있고, 
그러한 점에서 명령설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 P31

어떻든 기본적으로 법실증주의에서 법은 실정법이다. 
대륙법계에서는 국가적 설정에 의한 법률 등의 형식으로 
법이 나타난다. 따라서 법은 국가적 입법과 승인을 통하여, 즉 헌법이 예정한 국가기관인 의회나 법원 등에 의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법규범이 창출된다. 

물론 의회 등 법설정기관의 입법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법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 
법률은 단지 책속의 법이고 살아 있는 법, 구체적 법은 
사법에 의하여 발견되고 형성된다. 또한 관습이나 학설 등 
비구속적인 법인식원이사법의 승인에 의하여 구속적인 
법규범이 된다. 이러한 사법의 승인에 의하여 형성되는 
판례법 또는 사법입법 등과 같은 대체입법은 권력분립의 
한계를 동요시킬 수 있다. 

물론 법원의 판결은 민주주의 하에서 기본적으로 법률의 
우위나 입법자 우선(Primat des Gesetzgebers)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빠르게 변화하고 분화, 전문화된 사회에서, 법률 자체에 흠결이있거나 의회 입법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나올 수 있고, 기술의 발전
등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의회가 
너무 늦기 때문에 사법이 법률의 흠결을 보충하거나 
현실에 부응하는 법을 형성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현행 법률문언을 넘어서는 법을 창출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 점에 관하여는 방법론상 논란이 있다
(제10장 참조). - P31

그런데 국가 이외에 다른 법공동체에도 실질적인 법설정 
기능이 부여되고있다. 교회법이나 단체법(정관, 회칙 등), 
약관, 단체협약 등과 같은 사적 입법은 국가의 법설정 
독점을 흔들어 놓았다. 

다만 이러한 사적 입법은국가적으로 규범통제를 통하여 
승인되고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법이 된다는 것이 
법실증주의의 입장이다. 그리고 관습법 등의 법외적 
규범도 법률을해석 적용하는 법원에 의한 사법적인 
심사와 규범통제를 통하여 법규범으로 승인되고 
확정된다(승인설). 

이는 법원, 그중에서도 최종심이 법으로 선언한 것이 
법이라는 영미 판례법 국가의 법현실주의의 관념에 
연결되고, 대륙에서는 판결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판례법의 중요성이 승인된다. 오늘날성문법주의 하에서도 실정법의 법규범은 판례에서 형성되고, 법학시험이나
법실무에서 판례는 정답이나 신앙으로 고착되어 가고 있다. - P32

한편 제도적 규범질서로서의 법 개념도 주장되고 있다. 
제도적 법이론에서제도는 결혼이나 소유권, 계약, 회사 
등과 같이 법규범들에 의한 사회적 사실의 형성이 중요하고, 규범 자체가 아니라 그에 의해 형성된 사실인 제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실증주의적이다. 

제도로서 효력 있는 법규범의두 가지 징표는 국가적으로 
규율되고 승인된 절차 내에서 특정 국가기관들의 협력에 
의하여 성립되고, 규범준수가 필요한 경우 국가의 강제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것이다. - P32

그러나 실증주의적이고 국가적 설정과 집행에 의하여 
제도화되는 법 개념은한계와 흠결이 있다. 즉 법과 정의의 
관련성 문제나 전법적, 법외적, 초법적법명제가 있다는 
것과 법의 효력이 최종적으로 국민 의사의 승인에 의한다는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 P33

생각건대 기본적으로 법실증주의적인 법 개념이 더 현실에 부합하고, 정의문제는 일단 법 개념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정의나 도덕의 문제는 국가적 불법이나 시민에 의한 법의 
승인과 준수 및 법의 실효성의 문제와 관련되고, 
이는 법 효력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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