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
존 디디온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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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왜 이 책이 내 장바구니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기에 읽었다.

존 디디디온이라는 작가도 처음이고, 무슨 책인지도 모른 상태로 읽은 책.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사람의 생각에 의해 쓰여진 책이기에 사실 좀 어려웠다. 굉장히 감정적인 문체도, 스토리 없이 그저 생각의 흐름에 의해 쓰여진 내용이  혼란스러웠다.


하지지만 감정만으로 한권의 책으로 낼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도 했다. 그 감정이 누군가의 상실에 의한 슬픔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슬펐고...

 작가 존 디디온은 70대 중반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남편과 딸을 잃고서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슬픔과, 딸 퀸타나를 잃은 상실감에 대한 책이라.


책을 읽으며 문득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이의 죽음이 떠올랐다. 일상을 살며, 문득 어떤 사람을 보며, 장소를 지나가며, 시간을 떠올리며, 음식을 보며, 계절을 지내며, 매 순간 그사람이 떠올랐다. 

책을 읽으며, 그 감정이 다시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작가의 글은 그사람을 보내고 시시 때때로 몰려오는 감정에 슬픔을 느꼈던 나의 그 시절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철저하게 개인의 사색을 담고 있다는 감정의 이입이 있고서야 나는 그제서야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자식인데, 부모가 그 슬픔을 어떻게 쉬이 잊겠는가.


 가장 사랑했던 이와의 이별에 나는 어떤 위로도 감히 건낼 수가 없다. 그 위로가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하니까. 감히 그 감정을 이해하는 척조차 할 수가 없다. 시간이 해결해 줄 뿐이라는 위로조차. 어떤 이와의 이별은 시간조차 해결해주기 힘들기에.


그녀는 ”두려움은 상실되지 않는 것에 관한 것 p.259“ 이라고하지만, 그 상실이라는 말의 정의가 가장 사랑했던 이의 물리적 죽음이라는 것과 맞닿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다. 가장 가까운이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대한 죽음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알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나의 남은 온 생을 통해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가져옴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싫다. 내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슬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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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차별과 다양성 사이의 아이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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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재밌네..라는 생각에 읽었는데, 알고보니 꽤 유명한 책이였다. 책의 작가는 일본인이고, 그런 작가는 영국에서 공부를 했고, 아일랜드인 만나 결혼해 영국에서 살고있는 칼럼니스트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고, 그런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아들과 나눈 대화, 아들과 있었던 일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책의 부제는 “차별과 다양성 사이의 아이들” 이다.


 저자의 아들은 소위 명문 초등학교인 카톨릭 초등학교를 나왔으나. 본인의 선택으로 공립 중학교로 진학한다. 소위 ‘구 밑바닥 중학교’. 중학교 이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붙이 별칭이다. 공영주택지에 있는 학교로 하층민이 다니던 학교였는데, 그런 공여주택지가 민간에 분양되었고, 말그대로 학교의 수준이 올라가게 된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구 밑바닥 중학교’라고 말한다. 여기서 재밌던 점은, 영국에서는 백인들이 많은 학교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백인 노동자계급 아이들이 많은 학교’는 기피 대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인종적 다양성이 많은 학교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소위 ‘다양성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아들은 자신이 졸업한 명문학교인 카톨릭 초등학교에서 카톨릭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으나, ‘구 밑바닥 중학교’를 선택한다. 작가의 배우자는 아들이 카톨릭 중학교로 진학하길 원했으나, 아들의 선택을 지지한다. 책은 아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며, 배우고 자신의 부모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영국은 다문화에 대하여 꽤 다양한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는점을 알았다. 다문화에 대한 지식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p.84


엠퍼시가 무엇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대답에 아들이 답한 답이다. 엠퍼시. 우리가 공감으로 알고 있는 단어. 그 단어의 뜻이 뭘까.라는 말에 아들이 스스럼없이 답한답.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사실 좀 울컥했다. 누군가에 대한 동정이나 안쓰러움(심퍼시)는 감정이지만, 엠퍼시는 능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맞다. 누군가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은 우리가 실제로 하고자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아이도 스스럼없이 답하는 저 단어의 뜻을 우리는 왜 모르는 것일까.

아이는 저 단어를 단순히 단어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배워간다. 누군가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선의로 받아들이고자하는 노력. 그리고, 다름과 틀림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계속해서 다가가며, 그것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노력. 그리고 자신에 대한 차별이나 멸시를 알고 부당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 노력을 말이다. 또한 자신과 같은 다문화 친구들에 대한 걱정을 ’걱정이라는 이름의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으려는 노력을 말이다.


그런 아들을 비롯 아이들의 마음을 저자는 ‘선의 마음을 지닌 아나키스트 p.192’라고 말한다. 그런 아이들이 사회를 배워갈수록 이런저런 틀에 갖혀 생각의 자유로움과 명랑함을 잃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과연 우리는 하고 있는가. 아이들만이 갖는 수백만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하나로 정형화 시켜가고 있는 현실이 자꾸 떠오르는 것에 씁쓸함은 어쩔수가 없었다. 


책은 엄마와 아이의 대화이기에 생각해보면 주제는 무겁지만 그 주제를 다루는 두 사람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생그럽다고 해야 할까.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지식뿐 아니라 마음으로 배워가는 아이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자니, 각종 편견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한다. 


 책의 제목은 아이의 정체성과 감정을 담고 있지만, 책의 말미에 보여지는 지금은 '그린'이라는 단어는 방긋 웃음짓게 한다.


진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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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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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를 다 읽었다. 1권을 읽고, 2권을 멈출수가 없었다. 

선자가, 그리고 노아가, 모자수가 어떤 삶을 펼쳐나갈지, 그들의 삶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 학교를 다녔지만, 여전히 외국인 취급을 받는 노아와 모자수. 차별받고  멸시받는 조선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와세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자신의 출생을 알고서 떠나는 노아. 반대로 형과는 달리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던 모자수는 고노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파친코에서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떠났던 노아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고 파친코에 취직해, 아내 리사를 만나 결혼을 하지만, 끝끝내 자신이 조선인임을 그녀에게 조차 말하지 못한다.

반면 모자수는 아내 유미를 만나 솔로몬을 낳았지만, 유미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에쓰코라는 일본인 여자를 만나 사랑하지만, 결혼하지는 않는다. 에쓰코가 더이상 자식들에게 미안해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조선인과 결혼한 엄마라는 말을 듣게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모자수와 유미의 아들 솔로몬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피비를 만나 사랑한다. 피비는 미국에서 낳고 자란 미국계 한국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취직한 솔로몬을 따라온 피비는 일본에서 낳았고 자란 솔로몬이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취급받는 것, 누구보다 뛰어난 인재임에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것 등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일본에서 솔로몬이 일본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회사에서 쫒겨났음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그를 영영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와 헤어진다.


이 책은 살던 고국을 떠나 어쩔수 없이 자리잡게 된 타국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일대기이다. 고국으로 돌아 올수도 없었기에 결국 타지인 일본에서 살 수 밖에 없던 선자와 경희, 그곳에서 자란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그곳에서 낳고 자란 솔로몬. 그들 모두 그들의 고향인 조선에서도 일평생을 살았던 일본에서도 그저 외국인으로 취급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버텨냈고, 살아서 또 다른 삶을 이어갔다. 너무나 약해서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이들의 삶이였지만, 그들은 그 고난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이 이야기에서 나는 눈을 뗄수가 없었다.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일수 없었고,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결코 일본인이 될수 없었던 이들은 그들의 뿌리를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 딜레마를 이겨내지 못한 이도 안타까웠고, 잘 살아내어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자식에게 자신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이의 마음도 아팠다. 


1권을 마칠 때만해도 제목이 파친코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2권을 덮으며 조금을 알 수 있었다. 파친코에 들어와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그 마음이 이들의 삶 같았으니까. 불안했지만 잘 살아내면 성공할 수 있을것 같았지만, 그것은 허상이다. 아니, 반대였을까. 파친코는 허상을 이용해 돈을 버는 곳이니까, 허상을 가지지 말라고, 현실을 눈 똑바로 뜨고 직시하고 살으라는 의미였을까.


"에쓰코는 이 중요한 면에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이길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어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 p.254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라는 책의 소개가 너무나 깊이 와서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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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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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슨 의미일까. Beloved를 한글로 표현한 제목. "가장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흑인노예제에 대한 소설이고, 본 책의 저자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여성 작가라는 소개와함께 어디선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나 읽었다.

쉽게 읽힐 책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읽으면서 꽤나 힘들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용자체의 참혹함때문에. 상상했던것보다 더 했던 당시의 노예제의 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주인공 세서는 딸 덴버와 함께 마을 외곽의 124번지에서 살아간다. 꼬마 유령과 함께. 그런 그 집에 세서와 그리고 그녀의 남편 핼리를 알고 있는 폴디가 찾아온다. 그들은 "스위트홈"이라는 농장에서 함께 노예생활을 했었고, 세서는 그 중 핼리를 만나 결혼했었다. 그 당시 세서를 좋아했던 폴디는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가 사는 124번지를 찾아와 같이 살기 시작한다.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던 두 모녀는 폴디의 출현으로 사람들과 조금씩 어울리는 등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 무렵 이 집에 빌러비드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빌러비드. 아무도 그녀가 어디서 왜 왔는지조차 모르지만, 어느덧 이집에 함께 살게된 그녀. 덴버는 언니로 그녀를 따르기시작하고, 묘하게 집착한다. 그러나 빌러비드는 오로지 세서만 쳐다보고, 세서만 따라다니는데.

폴디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가 세서를 망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기에.

점차 빌러비드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는 세서. 반대로 세서의 집착이 심해질수록 덴버는 그녀로인해 망가져가는 엄마를 구해내려 노력하는데, 

이 무렵 폴디는 세서의 과거를 알고서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점차 미쳐가는 세서.


세서의 과거는 실제 있었던 '마거릿 가너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마거릿 가너 사건은 당시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가 임신한 몸으로 자식 넷을 데리고 도망치다가 잡힐 위기가 쳐해지나 당시 두살된 딸을 죽이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다가 미수에 그친채 잡힌다. 그리고 재판에 넘겨지는데, 딸을 죽인 살인죄로 사형을 쳐야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재판이 길어졌다고한다. 결국은 그녀는 살인죄를 저지른 '인간'이 아니라 재산의 일부로 취급당했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책에서 가너는 세서와 같은데, 단순히 외부에서 노예냐 재산이냐를 판단했던 것이 주 사건이라면 책은 세서의 내면과 그녀가 왜 미쳐갈수 밖에 없었는지를 한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그래서 마거릿 가너 사건을 책의 말미에서 알았을 때, 이 책의 내용이 더 끔찍했다. 외부에서 그것도 현재에서 바라보는 역사로 보는 시점이기에 어느정도 예상은 했으나, 철저하게 사람이였던 한 인간을 이토록 철저하게 사물로 다룰수 있었던 그 현실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였기에 너무나도 끔찍했다. 뭐랄까 덩어리로 보는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사건이였기에 그랬달까.


 비교적 인간다운 대우를 했던 이들조차, 말그대로 인간"다운"대우였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도망칠수밖에 없었고, 잡혀야 했을 때,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하고 싶지 않았던 부모는 자식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였으니까. 책을 읽으며 이 마음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가 더 소름끼쳤다. 그저 텍스트로만 읽으면서도, 저 처참함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


하지만 다시 대면한 딸을 보며, 과거에 매여버린 세서. 그 과거를 그녀는 딛고 일어설 힘이 없었다. 

그렇게 망가져가는 세서이지만, 세서의 현재인 덴버, 그녀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던 폴디가 나타났다. 그녀는 빌러비드에 매여버린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세서가 과거에 매여버려야했던 그 과거의 사회를 어떻게 개인이 이겨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임에도 충분히 사랑해줄수 없었고, 그렇기에 내가 낳고도 내가 그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죽음 뿐이였던 그런 사회였는데... 세서의 등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라는 것이 가죽채찍으로 맞은 상흔이였다는 점, 나와 나의 자식이 그저 수십달러에 값어치를 가진 그저 물건이였을 뿐인데..

어떤 인간이 그런 사회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한편 이 책을 읽으며, 모든 인간에게 인간답게 살아갈 평등이라는 것이 이제는 존재하는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인간을 "물건"취급하는 세상은 아니라지만, 정말 그럴까? 그냥 형태만 바뀐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라는 말로 변질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지급한 돈만큼의 값어치로 따지는 세상이 과연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예제에 대한 역사는 생각했던것보다 끔찍했다. 현실은 더 했겠지.

​​​​​​​슬프다. 하지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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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번의 생사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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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번의 생사>라는 제목에 끌렸다. 계속 죽다가 살아나는 소설인가.. SF야? 하면서 읽은책.

책의 저자가 유명하다는 것은 책을 다 읽고나서 알았다. 

 책은 표제작인 <오천 번의 생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은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그 내용의 전반엔 죽음이 깔려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의 죽음. 어머니이면서, 고작 열흘이였지만 일터에서 만났던 이, 어쩌면 하루저녁 신세를 졌던 이의 입에서 나오는 죽음. 친구의 죽음. 나의 죽음은 두렵지만, 타인의 죽음은 두려움과 슬픔이 공존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죽음에 대한 감정의 결론을 내리는것이 아니라 짙은 여운을 남겨 책을 읽는 이로하여금 그 생각과 감정을 계속해서 생각케하는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 보다는 첫 작품인 <토마토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대체 왜 그 남자는 나에게 먹지도 않을 토마토를 사다달라고 했을까. 그리고 그 남자가 내게 요청했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을까. 누군가의 간곡한 요청을 지나칠수 없었던 '나'가 남자의 부탁으로 사다준 토마토. 하지만 그 남자가 정착 중요히 요청했던 편지를 잃어버린 '나'는 남자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토마토를 보고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밤새 찾았지만 잃어버린 편지를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이후로 토마토를 먹지 않았다. '나'에게 토마토는 남자에 대한 잃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면서, 그 남자에 대한 죄책감이다. 이 편이 인상적이였던 이유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그저 가십거리로 넘기지 않은 주인공의 마음씀이 타인의 죽음을 앞에두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음으로써 가십으로 소비되는 요즘의 모습과 많이 달라서 였는지도.


그리고 언제나 통쾌한 단어 <복수>. 나를 위해 타인에게 행하는 고통은 결국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교사에게 당한 폭행으로 세 친구는 각기 다른 길을 갔지만, 복수를 위해 다시 만나고, 성공한다! 아. 이 짜릿함. 역시 복수는 통쾌하다. (이 작품만 다른 편과 결이 다르지만, 중간에 껴든 통쾌함은 각 이야기에 깔려있는 죽음에 대한 묵직함을 덜어준다.)


그리고 <쿤밍. 원통사 거리> 목전에 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친구를 계속해서 떠올리지만,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동시에 반대로 그 마지막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속에서 방황하면서도 친구에 대한 기억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그대로 느끼게 한다. 그 마음에 백분 공감했다. 마지막 시간과 그 시간을 맞딱드리고 싶은 않은 감정의 모순.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은 늘 남겨진 이에게 가슴아프고 두려운 시간이니까.


처음 읽은 작가의 책이였지만, 작가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나를 펑펑울게 하진 않았지만, 한편 한편 읽으며 자꾸 나의 감정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현재 진행형이 아닌 기억. 누군가를 과거로만 기억해야하는 그 기억은 나의 현재를 함께 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부제로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속에서 그로인해 내가 행복했음을 알게하기도 한다. 


재밌다. 먹먹하지만. 따뜻한 책.


"나는 하루에 오천 번쯤 죽고 싶어지고 또 살고 싶어져. 형도 의사도 그게 내 병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다들 그렇지 않나? 넌 어때?"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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