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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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학시절에 이 책의 독일어 본을 구입해서 귀국 직후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읽었다(따라서 이 책의 번역이 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자가 이미 지라르 책을 몇 권 번역한 분이므로 잘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일단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이미 지라르 책을 읽어 본 사람이더라도, 별 무리 없이 그가 새로이 펼쳐 놓는 이야기 보따리에 빠져 든다.

이 책에서 지라르는 마침내 이전 그의 책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였던 하나의 주제를 전면으로 내세운다. 기독교 호교론이 바로 그것이다. 즉 모든 신화는 기원적 폭력을 감추고 있는 텍스트라는 것, 신화의 신적인 존재들은 실제로는 아무 이유 없이 모방적 욕망의 결과 발생한 갈등의 희생양으로 타살당한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망의 결과 신화적인 숭고함이 발생한다는 것, 그러나 바로 오로지 성서만이 그러한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므로 신화와 폭력의 세계는 오로지 성서를 통하여만 접근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폭력 없는 인류의 미래는 오로지 기독교의 윤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는 것. 이 책에서 지라르는 이렇게 이미 여러차례 주장한 성서의 우선성을 극단까지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호교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나는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지라르가 깔고 있는 이론적 전제 및 그 결론을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역자는 역자후기에서 지라르 이론을 과거와 현재의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상찬하면서 우리가 전유하여야 할 성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라르 이론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설득력이 없다. 지라르 이론은 사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 내가 보기에는 공허한 이론이다.

지라르는 어떤 텍스트가 자신이 신화의 특징으로 지적하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면(이 요소들은 이미 [희생양]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자신의 이론이 확증되었다고 믿는다. 반면 어떤 텍스트에 그러한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이는 폭력을 감추기 위하여 텍스트가 변형되었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설명방법은 사실상 모든 텍스트를 자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텍스트가 자기 이론에 부합하면 부합하기 때문에 이론의 올바름이 입증되고, 부합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모방적 욕망 및 폭력의 은밀함'을 반증하는 증거이다. 피고인이 자백을 하면 이로써 유죄가 입증되겠지만, 그가 죄를 다툰다고 하여도 바로 이사실이 그가 유죄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폭력을 단죄하는 이론이 스스로 설명하여야 할 사태에는 이렇게 폭력적인 자세로 접근한다. (아마도 이 사태는 지라르가 염려하는 희생양과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판단당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러한 지라르 이론의 난점은 그가 자신의 이론에 잘 부합하지 않는 텍스트를 분석할 때나(예를 들어 [희생양]에서 어린 제우스 신화 분석) 신화 텍스트를 단장취의하는 경우(예를 들어 [사탄]에서 누가 23:12의 해석)에도 잘 나타나지만, 그가 외면하는 텍스트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 좋다, 단군이 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을 지라르 적인 의미로 단군이 억울하게 타살당했다고 해석해 보자. 그렇다면 보고되지 않은 그 아비 환웅의 죽음은 무엇인가? 혁거세의 몸이 조각나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지라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남해왕과 탈해왕의 자연사는 무엇인가?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어떤 의미에서 기원적 폭력에 죽음을 당하여 신화적 존재가 되었는가? 黃帝의 승천은 지라르적인 죽임일 수 있다고 해도, 禹와 舜은 어떠한가?

여기서 호교론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종교로 눈을 돌려 보자. 지라르가 지적하듯이 악마의 존재는 신화적으로 모방적 욕망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불교 경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전 대장경의 상응부 경전에 보면 악마(마라)가 계속 부처와 불제자들을 유혹하는 편이 있다. 여기서 마라가 제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모방욕망들이지만, 부처와 불제자들은 여기에 굴하지 아니한다. 실제로 예수가 악마에게 받은 시험에서 지라르가 자신의 모방욕망 이론을 검증해 보고자 한다면, 이는 마라의 부처에 대한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성서에 부여되는 유일한 의미는 무엇인가? 부처도 모방욕망을 벗어나 폭력의 사슬을 끊지 않는가? 심지어 여기서는 인간에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한 폭력이 금지되지 않는가?

여기서 지라르 이론의 본색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보편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서구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서양중심주의, 즉 이전의 이교적 전통과 이후의 이단적 전통(지라르는 [사탄]에서 좌파적 운동 전체를 '적그리스도'로 단정한다)을 배척하는 근본적 형태의 기독교적 서구중심주의이다. 이전의 유럽의 보편사 이론이 그 보편성으로 자신을 특권화했듯이, 이 보편적 희생양 이론은 자신의 보편성으로 유대-기독교 전통을 특권화한다. 이 이론이 헤겔식의 보편주의와 다른 점은, 헤겔의 변증법이 타자를 부정의 형태로나마 포함하고 있음에 반하여 그러한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을 그 수사의 현란함에 현혹되지 않으며 그 맥락을 읽어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책 읽기의 핵심일 것이다. 오로지 그에 의하여서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지라르의 책들은 이에 가장 적절한 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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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심도있는 멋진 서평 잘봤습니다~ 이 책을 사놓기만 했지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당장 읽고 싶군요~ 이런 서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꿈속의꿈 2010-08-15 15: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조금이나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