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나’라는 드라마를 보고 나서 원작이 궁금해져 읽게 된 책이다. 드라마는 매우 흥미진진했지만 전개 속도가 너무 빨라 아쉬웠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읽어 봄으로써 생략된 내용도 알고 싶었고, 캐릭터를 더 자세히 이해해 보고도 싶었다. 영상화된 작품을 먼저 보고 책을 읽을 때 흔히 그렇듯, 이 작품 또한 유미라는 캐릭터가 드라마에서 같은 캐릭터를 맡았던 배우 수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있음에도 소설은 매우 재미있게 읽혔다. 비슷한 듯 다른 소설의 설정을 발견하는 것도, 드라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만나는 것도 숨은 스토리를 발견하는 것처럼 느껴져 재미있었다.


아버지와 엄마. 나는 그들과 한집에서 이십 년간 함께 살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평범하게 걷고 있는 길 위의 풍경처럼 그들의 결혼생활도 그랬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p. 133)


유미의 주변인들은 유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제대로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유미처럼 큼직한 거짓말들을 내어놓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은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순도 100퍼센트로 솔직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소설 밖 우리의 관계도 어느 정도는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내 가족, 친구들, 가까운 사람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모습은 진짜 그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내게 얼마나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주었을까. 나는 또 그들에게 얼마나 나를 보여주었던가.


대학생은 아니지만 S 여대의 인기 기자가 된 유미. 피아노 전공자는 아니지만 피아노 학원에서 인정받는 강사가 된 유미. 대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이어 전공 강의까지 맡으며 인기 있는 교수가 된 유미.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거짓 위에서 시작했지만, 주변인들은 그녀의 능력을 칭찬했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으며, 그녀를 당연하게도 진짜라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리 쉽게 유미를 진짜라고 믿었을까. 그 이유는 그녀가 가짜와 진짜 사이의 간극을 메운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들이 진짜에게서 바랬던 모습이지만 찾기 어려웠던 것들을 유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더욱 진짜로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글쎄요, 그 대답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소설을 쓰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너무 가볍고 환해요. 소설가로서 문장을 만들며 이십 년을 살아왔지만, 저는 한 번도 그런 종류의 기쁨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행복은커녕 늘 불안함과 회의감에 젖어온 세월이었어요. 삶은 늘 곤궁했고, 그럴듯한 성취도 없었고, 애를 쓴 만큼의 반도 보상받지 못했죠. 그런데도 왜 이 짓을 계속하고 있느냐. 그건 제가 이 일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결국 세계 속에서 그 무기력함, 무능함을 자각한 사람이 아니고는 평생 작가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입니다. (p. 198)


문인 협회의 한 소설가는 가짜 소설가 행세를 했던 유미에게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물었고, 유미는 대답하길 꺼리다 소설을 쓸 때 자신이 누구보다 행복하기 때문’(p.198) 이라고 대답한다. 소설가는 유미의 대답을 듣고는 진실되지 않다고 느꼈다며 위의 말을 이어서 늘어놓았다.


삶 역시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찰나의 순간 잠깐씩 맛보는 것일 뿐, 대다수의 시간은 이처럼 불안하기도 회의감이 들기도 하면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것 아닐까. 삶은 원래 이런 것인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나만 행복하지 않다 여기며 내 손안에 없는 행복을 좇았던 것이 유미의 문제였던 건 아닐까.


앞서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유미의 대답은 그동안 왜 거짓말을 해왔는지에 대한 대답과도 연결된다고 느꼈다. 유미의 지난 행적들을 보면 그녀는 거짓말을 통해 특별히 높은 지위를 얻으려 했던 것도, 많은 돈을 얻으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행복을 잡으려고 매 순간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그것이 진실위에 놓인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것이라 해도 말이다. 어쩌면 유미는 소설가처럼 자신이 이 일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들이 꾸는 헛된 꿈, 허무맹랑한 욕망이 내 것처럼 달콤하고 쓰렸다. 나는 그들을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착각, 혹은 간극 속에서 이야기를 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p. 254, 『작가의 말』 중에서)


드라마로 먼저 만나고 소설을 읽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우 재미있게 읽혔다. 두 작품은 유미라는 주인공이 같고 일부 비슷한 흐름이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드라마보다 소설이 더 씁쓸한 느낌도 들고,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느껴져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 두 작품은 결말도 전혀 다르니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원작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플로라 콘웨이는 그녀의 딸 캐리와 함께 브루클린의 아파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중 딸을 잃어버리게 된다. 집 밖으로 나간 흔적은 전혀 없었지만 집안 어디에도 캐리는 없었다. 아이의 흔적이라곤 캐리가 신고 있었던 연분홍색 벨벳 실내화 한 짝뿐이었다.


집 안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중 아이를 잃어버리다니. 정말 기이한 사건이었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딸은 돌아오지 못했고, 플로라는 점점 심신이 피폐해져갔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출판사 대표 팡틴은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여러 작가들을 예로 들며 딸을 잃은 고통에 공감과 위로는커녕 글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거기다 팡틴이 다녀간 뒤로 플로라는 이상한 경험을 겪게 되고, 팡틴의 의심스러운 행적까지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플로라가 겪고 있던 끔찍한 일은 사실 누군가가 쓰고 있던 소설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플로라는 소설 속 주인공이었고, 그녀가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살아냈던 그녀의 삶은 사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대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창조물임을 깨달은 플로라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 그녀는 잃어버린 딸 캐리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며 예전에 보았던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과 앞 부분만 잠깐 보다가 말았던 드라마 <w>가 떠올랐다. 비슷한 소재나 설정을 여러 번 접해보았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스토리임에는 분명했다. 흡입력 있는 소설이라서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책을 펼쳐 읽었음에도 마치 한 번에 이어서 읽듯이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소설가와 그가 창조해낸 캐릭터 사이의 대화를 들려주는 장면에선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소설가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기욤 뮈소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소설에 녹여 들려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설정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 자유의지를 빗대어 보여준다고 느껴지기도 했고, 내가 누군가의 소설 속 인물이라면 어떨까 하는 공상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었다. 이러한 이야기구나 짐작하는 순간 스토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읽는 내내 새로움을 주었고 결국 전혀 생각지도 못한 종착지에 다다랐다. 흥미롭게 흘러가는 소설을 찾는 이에게 권해보고픈 책이다. 반전을 좋아한다면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시인의 하루 : 꼬르륵 배가 고파! 어린이 지식 시리즈 1
돤장취이 스튜디오 지음, 김영미 옮김 / 서울문화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시인의 하루>는 원시인들의 생활 모습에 대해 재미있게 알아보는 그림책이다. 얼마전 아이가 태블릿 학습지에서 구석기, 신석기에 관한 책과 영상을 본 이후로 원시인들의 삶에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마침 아이의 관심사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만나보았다.


책 띠지에서는 시리즈로 4편까지 출간 계획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온라인 서점에서는 1권만 구매할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책도 1꼬르륵 배가 고파!’ 편이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원시인의 삶 중에서도 먹는 것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다. 그들이 어떻게 을 구해서 마셨는지부터 시작해 채집사냥, 낚시 방법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조리했던 방법과 농사, 목축 방법까지 설명해 준다.


책은 어릴 적 학습만화에서 본 것 같은 그림체로 원시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두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보기에 딱 적당한 수준이지만, 어른인 내가 보아도 유익하고 재미있어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더 큰 아이들이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물을 구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동물들이 흔히 그러하듯 물가에 가서 물을 마셨겠거니 생각했지만, 원시인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수분을 섭취했었다. 식물의 열매나 잎을 먹음으로써 그 속에 있는 물을 섭취하기도 했고, 덩굴줄기를 잘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빨아 마시기도 했으며, 짐승의 가죽을 나무에 걸어 두고 빗물을 모아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리법 또한 예상외로 매우 다양했다. 이 또한 나는 막연하게 불에다가 직접 구워 먹었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직화 외에도 진흙구이, 나뭇잎 구이, 대나무 통구이, 구운 돌 조리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원시인들의 식생활은 한편으론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에서도 이를 의도한 듯 야생 생존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곤충을 따라가면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지, 게의 집게발에 물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에 붙은 거머리를 어떻게 떼어내는지 등의 방법을 알려주는데 이 역시 알아 두면 좋은 것들이라 유익했고(언젠가 써먹을 날이 올 수도 있으니…), 한때 극한의 생존법을 보여주는 베어 그릴스에 심취했던 아이에게는 또 하나의 취향 저격 포인트가 되어 만족스러웠다.  


<원시인의 하루>는 아이가 매우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후속작이 출간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참고로 2탄은 어떻게 도구를 만들까?’, 3탄은 오늘은 어디서 잘까?’, 4탄은 오들오들 너무 추워!’라고 한다.) 원시인의 생활상이 궁금한 아이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아이가 교과 과목에서 관련 내용을 배우고 있다면, 엄마가 센스 있게 먼저 이 책을 권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은 책과 콩나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토콜 42가 발동한 이유는 다른 에어 프랑스 006이 당초의 예상 도착 시간인 1635분에 JFK 공항에 착륙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 시간도 더 전에 말입니다. 하지만 기종도 다르고 기장과 부기장도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저기 서 있는 비행기와 똑 같은 에어 프랑스 006 보잉 787기가 똑 같은 기체 손상을 입고, 동일한 기장과 부기장의 조종하에 동일한 승무원과 승객을 태운 일이 있습니다. 요컨대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여객기와 똑 같은 비행기가 JFK 공항에 도착했는데, 그것이 지난 3101717분의 일이었습니다. 정확히 백육 일 전이지요.”

원탁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CIA 요원이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비행기가 두 번 착륙을 했다고요?” (p. 186~187)


동일한 비행기가 3월과 6월에 두 번 착륙했다. 동일한 승무원과 동일한 승객을 싣고.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일,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말았다.


소설은 초반부에 여러 사람들의 단편적인 일상과 삶을 들려주며 전개된다. 그다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짤막짤막 듣고 있으니 조금 지루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초중반부에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의 기이한 운명이 드러나면서부터, 앞선 이야기들은 이 비행기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것이라는 게 밝혀졌고, 그때부터 스토리가 매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비행기에서 내렸던 승객들은 당연하게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비행기의 승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또 다른 나와 함께 사이좋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가사의한 일 때문에 자신의 가족, , 커리어를 모두 포기한 채 또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는 310일 착륙한 비행기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물론 310일의 승객들은 그사이 늙었다. 오늘 저녁 시카고에서 생후 육 개월 축하 파티를 하는 아기는 격납고에서 응애응애 우는 생후 이 개월의 아기다. 두 비행기를 갈라 놓는 백육 일 사이, 이백삼십 명의 승객과 열세 명의 승무원 중 출산을 한 여성이 한 명, 사망한 남성이 두 명이다. 그러나 유전자로 따질 때 양측 탑승자들은 동일인이다. (p. 201)


이해할 수 없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뚝 떨어진다면 어떨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릴까. 소설에서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 사람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보인다. 또 다른 나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함께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도 있다. 나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상상도 해 보았다.


완벽하게 동일한 나를 만나는 설정은 진정한 나란 무엇인지, ‘를 이루는 요소는 무엇이고, 세상으로부터라는 경계는 어떻게 그어지는지 생각해 보게끔 만들었다. 또한 이런 불가사의한 불행 앞에서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삶을 대하는 태도, 문제를 딛고 나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철학적 고민들을 해보도록 이끌었는데, 내게는 이 부분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아노말리>는 뒤로 갈수록 더욱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었고, 읽을수록 마음에 복잡한 안개를 씌워주는 작품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 의미가 있었다. 흥미롭고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마구 던져주는 장편 소설을 찾는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70년대 뉴욕 상류층의 이야기다. 주인공 뉴랜드 아처는 누가 봐도 일등 신붓감인 메이 웰랜드와 약혼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이혼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메이의 사촌 엘렌(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등장 때문에 위기에 휩싸인다. 예쁘고 순수한 처녀 메이와 자유분방한 예비 돌싱 엘렌은 사촌 관계임에도 매우 상반된 개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당시 관습에 얽매인 뉴욕 상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너무나 도드라지게 튀었던 엘렌. 그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동시에 공감이 갔던 아처는 약혼녀의 사촌에게 점점 끌리게 되는데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약혼을 발표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었을 때 잠시 판단을 미루고 상황을 지켜봤더라면. 일이 꼬이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고백했더라면성급함, 경솔함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를 안고 오는 것 같다. 물론 아처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로 조건이 잘 맞는다고 하여 좋은 한 쌍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어떤 이성이 나와 잘 맞는지는 머릿속으로 따지고 재는 것보다 관계를 이어가며 쌓이는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많으니 처음과 다르게 마음이 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이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라 해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로맨스 소설로만 바라보자면 답답한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또 다른 메시지로도 다가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지켜오던 것을 그대로 순응하고 따르는 것과 자유롭게 선택하고자 하는 욕구.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춰 똑같은 삶을 살아내는 것과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생각하는 삶. 메이와 엘렌을 두고 벌어진 삼각관계는 앞서 말한 두 가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시대가 변해도 언제나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치정 문제에 이것을 엮어 놓으니 더욱 몰입해서 읽게 된다. 또한 메이와 엘렌 두 상반된 캐릭터가 성장 배경의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성격이 만들어진 점이나 아처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메이가 그다지 어리숙하지 않았던 모습에서 그 당시 뉴욕 상류 여성들에게 씌어진 굴레의 무게가 느껴져 페미니즘적인 요소가 녹여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려 했던 인습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회의 여러 기준들 또한 영원히 그 가치를 보존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을 심어주어 의미 있게 읽혔다.



안들어도 뻔해. , 밍고트 가 족속들이란······. 하나같이 똑같아! 태어날 때부터 판에 박힌 듯해서 자네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고. 내가 이 집을 지었을 때 다들 내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려는 줄 알았지! 아무도 40번가 위쪽에 집을 지은 적이 없었으니까. (···중략···) 그들 중 누구도 남과 다르게 되고 싶지 않은 거라고. 남보다 튀는 걸 천연두만큼이나 무서워해.” (p. 193)


난 이제 외롭지 않을 거예요. 전에는 외로웠어요. 두려웠지요. 하지만 공허함과 어둠은 사라졌어요. 이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니 한밤중에도 항상 밝게 불이 켜져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에요.” (p. 218)


이제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관습 속으로 얼마나 깊이 가라앉아 버렸는가를 절감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그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세대 사람들은 그랬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직과 부정직, 존경할 만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그어져 있어서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 존재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 너무나 쉽게 길들여져 있던 상상력이 갑자기 평범한 일상을 뚫고 솟아올라 널따랗게 펼쳐진 운명을 조망하는 순간이 있다. 아처는 거기에 매달려서 의아해했다······. (p. 430~431)



이 작품은 1921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미국의 건전한 생활 분위기와 미국인들의 예의범절 및 남성적 미덕의 가장 높은 기준을 표현했다”(p. 445)고 평하며 수상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의 공감할 수 없는 순수한 심사평에 놀라웠고, 이디스 워튼 본인 또한 제목의 역설적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심사위원들에게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영화 같은 분위기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내 예상과는 다른 결말이라 의외였지만,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주제를 더 강조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1870년대 뉴욕 상류사회의 모습을 자세히 잘 표현했다고 하니 당시의 모습이 궁금한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막장 드라마 같은 설정의 고전 로맨스 소설이지만 그 속에 다양한 비유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고픈 이에게도 권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