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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 “프로토콜
42가 발동한 이유는 다른 에어 프랑스 006이 당초의 예상
도착 시간인 16시 35분에 JFK 공항에 착륙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 시간도 더 전에 말입니다. 하지만 기종도 다르고 기장과 부기장도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저기 서 있는 비행기와 똑 같은 에어 프랑스 006 보잉
787기가 똑 같은 기체 손상을 입고, 동일한 기장과 부기장의
조종하에 동일한 승무원과 승객을 태운 일이 있습니다. 요컨대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여객기와 똑 같은
비행기가 JFK 공항에 도착했는데, 그것이 지난 3월 10일 17시 17분의 일이었습니다. 정확히 백육 일 전이지요.”
원탁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CIA 요원이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비행기가 두 번 착륙을 했다고요?” (p. 186~187) 】
동일한 비행기가 3월과 6월에 두 번 착륙했다. 동일한 승무원과 동일한 승객을 싣고.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일,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말았다.
소설은 초반부에 여러 사람들의 단편적인 일상과 삶을 들려주며 전개된다. 그다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짤막짤막 듣고 있으니 조금 지루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초중반부에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의 기이한 운명이 드러나면서부터, 앞선
이야기들은 이 비행기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것이라는 게 밝혀졌고, 그때부터 스토리가 매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비행기에서 내렸던 승객들은 당연하게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비행기의 승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또 다른 나와 함께 사이좋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가사의한
일 때문에 자신의 가족, 집, 커리어를 모두 포기한 채 또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는 3월 10일 착륙한 비행기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물론 3월 10일의 승객들은 그사이 늙었다.
오늘 저녁 시카고에서 생후 육 개월 축하 파티를 하는 아기는 격납고에서 응애응애 우는 생후 이 개월의 아기다. 두 비행기를 갈라 놓는 백육 일 사이, 이백삼십 명의 승객과 열세
명의 승무원 중 출산을 한 여성이 한 명, 사망한 남성이 두 명이다.
그러나 유전자로 따질 때 양측 탑승자들은 동일인이다. 】 (p. 201)
이해할 수 없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뚝 떨어진다면 어떨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릴까. 소설에서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
사람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보인다. 또 다른 나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함께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도 있다. 나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상상도 해 보았다.
완벽하게 동일한 나를 만나는 설정은 진정한 나란 무엇인지, ‘나’를 이루는 요소는 무엇이고,
세상으로부터 ‘나’라는 경계는 어떻게 그어지는지
생각해 보게끔 만들었다. 또한 이런 불가사의한 불행 앞에서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삶을 대하는 태도, 문제를 딛고 나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철학적 고민들을 해보도록 이끌었는데, 내게는
이 부분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아노말리>는 뒤로 갈수록 더욱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었고, 읽을수록 마음에
복잡한 안개를 씌워주는 작품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 의미가 있었다. 흥미롭고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마구 던져주는 장편 소설을
찾는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