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톨스토이 후반의 역작을 이제야 읽었다. 뛰어난 작품이다.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가 부인에 대해 가진 혐오감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톨스토이도 부인과 불화로 집을 나갔다가 폐렴으로 어느 기차역에서 죽었을 정도로 부인과 사이가 안 좋아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부인에게 생일선물로 주었을 때, 이것을 읽은 부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작품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뛰어난지 대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동시에 이 작품으로 들어올 인세를 생각하며 콧노래도 불렀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톨스토이를 질리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닮은 작품 속 이반 일리치 부인의 묘사를 보며 화라도 냈다면 톨스토이가 속이라도 시원했을텐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이 작품을 읽으며 계속 떠올랐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두고 자신들에게 돌아올 직위를 먼저 계산하고, 조문하는 날 밤에도 카드게임 인원수를 맞추는 데 더 열중하는 동료들. 남편이 죽은 뒤 국가로부터 받을 연금을 미리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었던 부인. 발병하고 난 뒤부터 주변의 거짓을 인식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이반 일리치의 갈등은 바로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다. 아니,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걸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젊을 때부터 이반 일리치는 고상한 생활을 유지하며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고상한 태도로 적당히 넘기며 살아왔다. 적절히 때를 노려 직장과 직급을 찾았고 또 능력과 경력에 맞는 승진을 하고, 그 승진에 따른 연봉 상승으로 적절하고 고상한 생활을 하며 잘 살아왔다고 확신했다. 아니,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도 부정하거나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죽음이 확연히 눈 앞에 오자 두려움과 함께 자신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얼마나 거짓인지를 인식한다. 특히 자신을 대하는 부인의 태도에 지긋지긋한 위선을 느끼며 증오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본다. 그는 고상하며 물질적으로 안락한 것에 덮여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에 경악한다. 오직 진심으로 자신을 간호해주는 씩씩하고 명랑하고 친절한 식당 하인 게라심에게서 평온을 얻는다. 게라심만이 아무 이익이나 계산없이 이반 일리치를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기고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당신은 죽어간다'고 말하며 진심으로 동정한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쉽게 죽음을 맞지도 못한다. 죽음 앞에서 극도로 고통스러워 하던 이반 일리치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던 부인과 가족을 불쌍하게 여기며 자신이 죽어야 그들이 편안해진다는 자기 희생을 받아들이이며 죽음이 사라진 빛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작품을 읽고 가난이라는 것을 다시 돌아본다. 물질의 풍요가 있다면 인간은 고상해지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고급스럽고 멋진 옷으로 자기 이미지를 만들고, 타인과 관계에서 훼손되지 않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다. 안전하고 따뜻하고 넓은 주거지에서는 여유와 안락함과 청결을 가진다. 오염물이 덜 섞인 유기농 식품을 골고루 먹어 영양가 높고 건강하며 청결과 편안함이 유지된다.

  하지만 가난은 구질구질하다. 일단 충족이 되지 않는다. 물질로 충족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주지 못하니 당연히 고상해질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말이다. 고상하다는 건 무언가. 무얼 고상하다고 하나. 풍요로움인가, 안정인가, 청결인가, 이미지 관리인가, 좋은 관계인가, 따뜻함인가, 건강함인가.

우리가 물질의 풍요에서 얻으려고 하는 건 도대체 무얼까?

  이 작품에서 이반은 물질의 풍요로 고상한 생활을 유지한다. 고급 양복점에서 비싼 옷을 해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사교계에 나가 똑똑하고 성격 좋은 여자와 결혼도 한다. 하지만 결혼한 뒤 이반은 성격 좋다던 그 여자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다. 또한 자신도 직위와 명예와 그에 걸맞는 권위와 연봉으로 집안을 호사스럽게 꾸미고 자식 키우며 나이를 먹지만, 평생 추구하던 고상함을 유지하며 살아왔건만,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 자신의 고상한 삶이 제대로 사는 삶이었는지 한 번도 돌아보거나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물질의 풍요가 이런 돌아봄을 덮어버렸다. 문제가 생겨도 고상한 태도로 적당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물질의 풍요는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왜? 물질이 받치고 있으면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으니까. 우리가 가난을 몸서리치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바닥으로 떨어지게 하는 데 있다. 가난을 우리를 그냥 바닥으로 떨어지게 한다. 물질이라는 완충장치 없이. 그 바닥이 내가 어디 놓여 있는지 직면하게 만든다. 가난은 우리을 돌아보게 하고 정면으로 보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다. 직면은 힘겨우니까. 가난은 우리를 날 것으로 만든다. 물질이라는 고상함으로 포장할래야 도저히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가난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늘 생긴다. 그럴 때 질문해본다. 내가 풍족한 돈으로 따뜻하고 안락하게 산다면 과연 고민이 없어질까? 대답은 글쎄 이다. 가난이 주는 고민은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어려움이 등장할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톨스토이가 권유한 대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되돌아봄음 없었지만 '최소한 거짓으로 포장하지는 말자'는 생각은 했다. 나에겐 이반 일리치같은 물질의 풍요가 없으니 뒤덮어 감출 게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애써 가난을 포장하는 것 아닐까? 이건 또 무슨 위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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