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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 반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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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사)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이사

 

내란 정국이다. 시험공부는 잘했는지 모르지만 인성은 엉망진창인 ‘괴물’들이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도대체 이 괴물들은 어떻게 탄생했단 말인가?

오늘 소개할 책은 파울 페르하에어의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이다. 저자는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이다.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환경에 달려 있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환경에 살고 있는가?

저자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인간의 가장 나쁜 측면을 장려 한다’고 지적한다. 인류는 지속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어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지만 여전히 불평등은 해소되고 있지 못하며,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졌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이론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인 이데올로기’이며, 그 중심에는 ‘능력주의’가 놓여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사회진화론과 결합 된다. 이 둘의 목표는 ‘적자생존’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부를 물려받은 자와 빚을 물려받은 자’는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능력주의는 하류층에게도 받아들여진다. 페르하에어는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가 답게 ‘능력주의가 전형적인 남성적, 남근주의적 경쟁의식과 완벽하게 결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가부장적 문화가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을 혐오하게 만들고, 능력주의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고 무엇보다 교육을 통해서 인간 안에 내면시킨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연대감이라고 모르는 경쟁적인 개인주의자로 자란다면 이는 경쟁과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교육의 결과물’이라고 지적한다. 내란을 일으킨 괴물들과 이 괴물들을 추종, 후원하는 괴물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 있었다. 저자는 출세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갖춰야 할 특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말을 잘해야 하고, 자기 능력을 자랑해야 하고, 설득력 있게 거짓말을 잘해야 하고, 일이 잘못되면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꾸밀 수 있어야 하고, 때론 모험에도 뛰어들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저자는 묻는다. 이 목록은 어디서 나왔는가? 답은 사이코패스 핸드북이다. 헉! 정치인들의 거짓말, 기업인들의 거짓말, 심지어 학자, 법률가라는 자들의 곡학아세와 궤변이 난무하게 된 것은, 이런 사이코패스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게 만든 사회체제, 교육체제 때문이다.

최근 법원을 폭도들이 난입하여 테러를 자행하였다. 지난 박근혜 탄핵국면에서도 폭도들이 경찰버스를 전복시키는 등 폭력행위를 하였다. 왜 이렇게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벌이는 이들이 생겨났을까? 이 또한 신자유주의 경쟁교육, 즉 능력주의(시험능력주의)의 산물이다. 페르하에어는 ‘왕따는 더 이상 학교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으며, 거의 모든 일터에서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경쟁은 ‘심도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며, 사람들은 경쟁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 실패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겪으면서 자신보다 약자에게 이를 전가하는데, 이를 전위된 공격성’이라고 설명한다. 신자유주의는 비록 몸은 어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마치 ‘아이처럼 터져나오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남이 잘못되는 것을 고소해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미숙한 존재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가장 먼저 ‘만연한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끼면서 무기력하게 좌절하고, 무관심하게 된다. 저자는 ‘이기주의, 경재의식, 공격성이 인간 본성이듯이, 이타주의, 협력성, 연대감, 선한 의지’도 인간의 본성이기에 우리가 ‘어떤 환경을 만들어 내는가’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도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맞다. 존재방식이 의식을 규정한다.

다음 ‘소비자에 머물지 말고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가가 공익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공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제안하며, ‘우리 스스로 용기를 내 권력을 행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딥 프레임을 건드려 행동을 바꾸어야’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싶으면 가치를 팔아야 한다’는 광고심리학의 원리를 소개하면서, ‘특정한 메시지는 그것이 깊이 뿌리내린 감정과 가치를 건드릴 때 가슴에 가장 와 닿는다’고 지적한다. 이 뿌리가 바로 딥 프레임이다. 페르하에허는 ‘지속적인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며, 직관에서 나온다는 것’과 사람들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면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연대는 합리적인 논리로 강요될 수 없으며, 출발은 자기배려’이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는 이기심과는 다르다. ‘자기배려는 자신의 삶을 윤리적으로 살아가면서, 공익도 더불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란정국이 빨리 종식되길 수 많은 국민들이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내란 이후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문제의 근원이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라면 이를 종식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괴물을 만들어온 잘못된 시스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시민들의 손으로 교육대전환과 사회대전환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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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와 교육 - 우리의 세계에 새로움을 더하다, 2025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교육부 우수학술도서
모르데하이 고든 지음, 조나영 옮김 / 살림터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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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사)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상임이사

 

한나 아렌트라는 이름은 정치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정신의 삶] 등 아렌트의 저작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아렌트는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졌을까? 모르데하이 고든을 포함한 9명이 쓴 논문을 모은 『한나 아렌트와 교육: 우리의 세계에 새로움을 더하다』는 이에 대해 답하고 있다. 논문 중 주목을 끈 것은 아렌트의 보수주의적 교육관과 협동학습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를 간략히 소개해 본다.

모르데하이 고든은 보수주의를 ‘과거에 성공적으로 확립된 관습, 가치, 그리고 제도를 보존하려는 태도’로 규정하고, 아렌트가 보수주의와 접점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아렌트는 ‘첫째 권위의 역할이 부정적이고 제한적이기 보다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라고 보았으며, 둘째 권위는 전통과 종교 모두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고, 셋째, 권위가 정치 구조에 지속성, 연속성, 그리고 영속성을 부여하는 원칙이라 주장했으며, 넷째, 권위는 설득과 합리적 토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에서의 권위와 교육적 보수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논의와 연결된다. 아렌트는 「교육의 위기」라는 저작에서 195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교육적 권위의 위기가 미국만의 특수함이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핵심은 권위와 자격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교육자의 권위와 교사의 자격은 같지 않다. 자격의 기준이 권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최고의 자격은 결코 그 자체로 권위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교사의 자격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데 있지만, 교사의 권위는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데 달려 있다.”

한마디로 교사 자격을 가진다고 해서 교육자로의 권위가 자동적으로 부여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는 정말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권위는 어떻게 부여될 수 있을까? 핵심은 책임이다. 아렌트는 ‘어른과 아이가 동등하게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는 어른들이 잘못된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때이다. 모르데하이 고든은 미국사회에서 마약과 알코올을 남용하는 어른들을 지목하였지만, 나는 한국사회에서는 입시경쟁교육과 시험능력주의에 포획된 어른들, 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 남용을 허용하는 어른들 그리고 교사의 정치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아 온 역대 정부와 거대 양당의 문제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렌트의 권위 개념은 교육과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독특한 접근으로 이어진다. 아렌트에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아이들의 새로움과 혁신적인 것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위한 안정된 공간으로 세계를 구할 것인가?’라는 것으로, 이는 전통에 대한 태도와 연결된다. 아렌트는 전통을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하고 인류 문명에 통일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이음새로 보지 않고, 전통을 그 자체로 단절과 균열 그리고 발명품과 같은 혁신’으로 여겼다. 아렌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여 교육자는 학생들이 ‘과거의 심연으로 내려가 결정화된 유물을 찾는 진주조개 채취 잠수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전통은 ‘우리가 현재를 비판하고, 새로운 시작을 창출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학교를 본다면 ‘학교의 기능은 아이들에게 세계란 어떤 곳인지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지 단지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곳이 아니게’ 된다. 또한 ‘권위라는 개념을 통해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것은 아이를 어른으로 대할 수 없으며,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어야 함’을 의미한다. 아렌트에게 교육은 ‘해로운 것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그들이 새로움을 실현할 가능성을 보전하기 위해 세계와 아이들 모두를 책임지는 일’이다.

권위에 대한 아렌트의 견해는 자칫 보수적인 교육관을 옹호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민주주의를 곧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민주주의가 질서 없는 혼란의 도가니를 의미하지 않듯이, 교실과 학교 그리고 사회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 권위가 자격증이나 지위로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교사가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질 때 형성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교사의 정치기본권의 보장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이다. 정치기본권이 없는데 어찌 온전한 교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귄위와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태도는 협동학습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협동학습을 비판한다니 아연실색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학생 또래 간의 협동이 발달에 중요하다고 배우고 실천해온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아렌트는 어떤 맥락에서 협동학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것일까?

에두아르도 두아르테는 협동학습이 20세기 후반 미국의 미네소타대학교와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파생되었음을 추적하면서, 협동학습의 전제가 인간 상호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즉 ‘다른 이들이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협동학습 이론가들이 그것이 왜 쉽고 명확하게 드러나는가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하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협동학습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실패에 대해 회피하게 된다.

두아르테는 협동학습 이론가들이 비고츠키의 이론에서 근거를 찾아 ‘반성적 사고를 내면화된 사회적 대화로 이해하여, 사회적인 언어 능력을 우선시’하게 되고, ‘내적 발화(말)은 의사 소통이나 사회적 발화(말)을 통해 발달하니, 진정한 학습이란 학생들이 공동으로 작업하고 함께 참여하는 활동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두아르테가 지적하는 것은 내적 발화가 사회적 발화를 통해 발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발화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즉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도록 하여 그들을 발달의 초기단계에 머물게 하는 학습형태’이다. 이는 사유하는 능력의 발달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렌트가 사유와 행위를 구분한 것과 관련된다. 두아르테는 아렌트는 1972년 민주주의 이론가 맥퍼슨과의 토론에서 “사유는 행위가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행위와 반대로, 참여하고, 수행하는 것에서 상당 부분 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한 것을 소개한다. 아렌트는 혼자서 사유하는 것과 여럿이 행위 하는 것이 같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는 관조적 삶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채, 관조적 삶의 관점으로 여전히 전통에서 활동적 삶이라고 불리는 것에 주목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두아르테는 아렌트가 [정신의 삶]에서 ‘사유는 물러남을 통해 일어나며, 활동적인 삶이 중단되는 순간에 시작된다’는 점을 소크라테스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것에 주목한다. 아렌트는 ‘사람이 가장 덜 외로운 순간은 홀로 있을 때이며, 사유의 장소로 물러났을 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를 교육에 적용한다면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위해 사유하고 관조하는 습관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그런데 ‘협동합습의 또래-매개 모델은 구조적으로 학생들이 무리에서 물러나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두아르테가 아렌트의 행위와 사유를 구분하고 행동적 삶만이 아닌 관조적 삶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에 기초하여 협동학습에 대해 비판적인 고찰을 한 것은 향후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대학서열체제와 입시경쟁교육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협동학습은 생각처럼 효과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습자 간의 소외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둠이 다른 모둠보다 더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모둠 내에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들을 배제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는 일이 실제로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경쟁과 협력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함께 갖게 되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을 조성하는 가이다. 만일 우리가 야만적인 경쟁교육체제를 바꿀 수 있다면, 혹은 마을학교나 대안학교처럼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이라면 협동학습도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사유하는 능력을 가지려면 때론 반복된 무의미한 행위로부터 때론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특히 문제풀이 훈련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시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좀 더 교육과 사회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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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세대 -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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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사)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이사

 

지난해 여성가족부의 ‘2024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10대 청소년의 40.1%는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며, 중고등학생의 30%는 평상시에도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으며, 26.6%는 우울감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청소년 사망원인의 1위는 여전히 자살이며, 세이브더칠드런의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나, OECD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 결과에서 한국은 늘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청소년들의 우울감과 자살위험이 급증한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나, 최근 주목되는 것이 인터넷 중독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세대』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며 정책 제안을 하고 있다.

하이트의 주장은 아주 명쾌하다.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누구나 인터넷을 상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어린이·청소년의 불안과 우울과 같은 정신장애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학자답게 실증적인 데이터를 빼곡히 내놓으면서 스마트폰 중독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사회적 박탈이다. 스마트폰 사용시간이 늘어나면서 친구와의 대면활동 시간이 급감하였는데 이는 코로나 이전부터 발생한 현상이다. 둘째, 수면박탈이다. 늦은 시간까지 스마트폰 사용으로 수면의 양과 질 모두 떨어졌다. 셋째, 주의 분산이다. 하루에도 수백건씩 울리는 알람 신호로 집중력을 기르기 어렵다. 넷째, 중독이다. 게임과 소셜 미디어 앱 설계자들은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행동주의 심리학 기술을 악용하여 청소년들은 과잉 사용자로 만들었다.

하이트는 스마트폰 중독 현상도 남학생들은 여학생들 간에 양태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남학생들은 과도하게 안전을 강조하는 흐름이 확대되면서 현실 세계에서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놀이활동, 모험활동, 탐험활동이 줄어들자 가상세계로 이동하면서 게임과 포르노에 빠지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이에 비해 여학생들은 소셜미디어에 중독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로 하이트는 네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첫째,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하여 시각적 비교에 민감하다고 한다. 둘째, 공격성의 경우 남학생들이 신체적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여학생들은 다른 여학생의 관계와 평판을 해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셋째,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이 남학생보다 발달하여 다른 여학생의 불안이나 우울한 감정이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넷째, 인터넷을 악용하는 남성과 남학생들에 의해 성적 공격의 대상이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하이트는 인간이 다른 포유류에 비해서 매우 긴 아동기와 사춘기를 갖는 것에 주목한다. 그는 아동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적응으로 이때 필요한 것은 ‘자유놀이’라고 강조한다. 놀이를 통해서 아동은 문화를 습득하고 사회성을 발달시킨다. 특히 인간은 권위를 갖는 사람을 따르는 권위편향, 또래와 집단의 다수의 행동을 따라 하는 동조편향을 갖는데 이는 모방을 통한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통한 상호 유대를 공고히 하게 한다. 문제는 스마트폰 사용은 이런 발달적 특징에 반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춘기는 뇌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인 동시에 성적 성숙이 시작되는 단계이며 성인기로 이어지는 과도기로, 인지, 신체, 정서 발달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다양한 모험과 탐구활동이 꼭 필요하다. 이는 인류의 긴 진화과정에서 각 문화권마다 고유한 통과의례로 나타났는데, 최근 청소년들의 손에 스마트폰이 무차별적으로 쥐어지면서 사춘기 발달을 위한 이런 고유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트는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첫째, 정부가 청소년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둘째, 인터넷 사용 연령을 적어도 16세 이상으로 높여야 하며, 셋째, 인터넷 접속 시 나이 확인을 엄격히 해야 하며, 넷째, 학교에서의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하이트는 ‘현실세계의 과잉보호와 가상세계의 과소보호’를 비판하면서 어린이·청소년들이 발달과정에 맞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정책을 제안하였다. ‘첫째, 아동들이 보호자 없이도 현실 세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방임으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 둘째, 학교에서 더 많은 놀이를 장려하는 것. 셋째, 공공장소를 설계하고 조성할 때 어린이를 고려하는 것. 넷째, 직업교육과 수습 과정,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 등이다.

하이트의 제안은 최근 유럽과 북미권에서 인터넷 접속 연령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한국의 청소년들은 대학서열체제와 입시경쟁교육으로 일상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 틈을 비집고 행동심리학을 악용한 소셜 미디어와 게임 등이 청소년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 위험에서도 계급 간 격차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부유층들은 자녀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여건을 갖는다. 이들은 문화자본도 풍부하다. 이들 자녀들 중에는 인터넷 접속이 제한적인 구형 핸드폰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방과후 시간과 방학에는 해외여행을 포함하여 다양한 문화생활의 경험을 갖는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 중독의 위험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빈곤층과 중하위층의 경우 그야말로 먹고 살기도 바쁘기에 자녀들을 잘 돌보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주말과 방학에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경우도 허다하다. 이들 계층의 자녀들은 마땅히 다른 놀이활동, 체험활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스마트폰 중독에 쉽게 빠지게 된다.

중독은 사회적인 문제이다. 담배중독, 알콜중독, 마약중독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중독물질에 쉽게 노출되는 사회구조가 문제이다. 중독과 관련한 실험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은 중독물질을 차단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다른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나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자유놀이활동, 문화예술활동, 체육활동 등에 언제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은 인간의 전인적인 발달을 목적으로 한다. 전인적 발달은 신체, 인지, 정서가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지금 어린이·청소년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스마트폰 중독이라면 우리는 이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동시에 어린이·청소년의 발달에 맞는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한 보다 과감한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교육대전환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이 교육대전환을 만들어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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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대안교육 - 미래를 위한 교육적 대안의 전망과 가능성 ㅣ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번역 총서 13
넬 나딩스.헬렌 리즈 엮음, 심성보 외 옮김 / 살림터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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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사)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이사

 

정의롭지 못한 세상, 불평등한 세상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부정의와 불평등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 원인은 다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에 주저하기 때문이다.

왜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유지하려 하고, 낯선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경로의존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결과 구래의 낡은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낯설고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이들이 소수이지만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역사 속에서 이런 이들은 배척당하고, 심지어 잔혹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코 진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화를 꾀하려 한다면 기존의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창조의 원리이다. 교육이 다수 민중에게 가난의 대물림의 사슬이 되고, 소수 기득권 세력에게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도구가 된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바꾸려면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한 중요한 영감을 제시하는 책이 번역되었다. 존 듀이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넬 나딩스가, 헬렌 리즈와 함께 엮은 『세계의 대안교육』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무려 30개의 논문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번역자도 11명이나 참여하였다. 이 중 필자의 관심을 끈 두개의 논문을 중심으로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소개할 논문은 클래런스 졸더스마의 ‘대안교육을 위한 신경과학의 가능성과 위험’이다. 최근 뇌과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가 늘어나면서 신경과학의 성과를 교육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이 가능성과 위험 모두를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이란 무엇일까? 대표적인 것이 ‘마음 챙김’이다. 마음 챙김에 대한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전반적 웰빙의 증가, 두려움에 대한 통제, 더 나은 실행 통제, 스트레스 감소 및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관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

이번에는 위험성을 살펴보자. 저자는 ‘과학적 발견을 구체적인 교육적 실천에 적용함에 있어서 둘 사이의 간격이 매우 넓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성급하고 상업적인 시도, 과학적 증거에 기반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경계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졸더스마는 이른바 ‘신경 신화’를 경고하는데 여기에는 ‘우리는 뇌의 10%만 사용한다는 설, 우뇌와 좌뇌는 분리된 사고를 한다는 설, 뚜렷하게 다른 학습 스타일이 있다는 주장, 단순한 신체움직임이 학습의 향상을 향상 시킨다는 것, 모차르트가 IQ를 높인다는 것’등이 포함된다. 이런 사이비과학은 한국에도 널리 퍼져있으며 사교육시장을 통해 부모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교육에 적용되는 것을 지적한다. 특히 ‘증거 기반 강의와 표준화된 성취 테스트를 옹호하는 것’에서처럼 ‘신경과학을 포함한 과학적 연구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과학과 과학자는 사회와 분리될 수 없기에, ‘남성적 편견을 포함하는 구조적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ADHD인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고용가능성의 차이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생물학적 문제로 치환시키는’ 오류를 일반화한다. 이는 인간을 오로지 ‘뉴런적 관점에서 보게 하고, 웰빙을 생산적으로 일하고, 경제에 기여하는 능력으로 정의’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교육의 의료화’이다. 대표적으로 ‘ADHD를 뇌 질환으로 분류하고, 많은 학생들이 그 질환을 보인다고 진단하는 것은 순전히 의학적인 것’이 아니며, 이 배후에는 ‘고부담 시험과 학교 운영의 경영 책임성,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때문에 저자는 교육자들은 ‘교육을 신경과학자들에게 양도해서는 안 되며, 교육을 오로지 학습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중독, 범죄 행동, 경솔함, 우울함을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보면서, 이런 현상을 만다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을 은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졸더스마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신경과학의 성과를 과도하게 신봉하는 경향과 심지어 사이비과학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자, 청소년들의 성장과 발달 그리고 인격적 성숙의 책임을 신경과학을 빌미로 개인의 영역으로 떠 넘기고 그 책무성을 회피하려는 자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논문은 헬레나 싱어의 ‘브라질의 혁신교육운동: 홀리스틱 교육경험’이다. 싱어는 브라질 교육부의 특별 고문으로 2007년부터 2015년까지 ‘학습하는 학교도시’의 감독을 맡았던 경험을 가진 실천적인 이론가이다. 이 논문은 파울로 프레이리도 관여했던 브라질 상파울루시의 교육혁신이 브라질 전체로 확산 될 수 있었던 요인을 분석한 것이다.

브라질은 25년간의 군사독재 이후 1988년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브라질 헌법을 만들었다. 이어 1996년 [교육 가이드라인 및 재단법]이 통과되었다. 이를 통해 ‘무학년 학교 조직, 포괄적인 평가 도구의 채택, 공원·광장·영화관·도서관 등 새로운 학습공간의 사용’이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 ‘모든 학교가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1987년 민주화를 이루었고, 1987년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1995년 매우 한계적이었지만 문민정부가 5.31 교육개혁안을 발표했고,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브라질은 한국과는 달리 조금 더 진보적인 교육개혁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파울로 프레이리가 상파울로시의 교육감이 되면서 시작된 변화였다. 그 중심에는 홀리스틱 교육이 있다. 싱어는 홀리스틱 교육은 ‘개인의 총체적인 발전- 개인의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 사회적, 윤리적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독립적인 공간과 주체간의 협력’에 기반하며, ‘학교는 가족, 지역사회, 다른 교육기관과의 연결을 위한 민주적 학교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민주적 학교의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첫째, ‘도시의 중산층 지역에 있는 공립학교’에서의 변화였다. 이들은 ‘교실을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 큰 홀을 만들었으며, 커리큘럼은 이전에 과외 활동이었던 것들을 그 자체로 통합’하였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운영을 위한 ‘기금은 연방정부, 주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시민사회단체와 체결한 협약을 통해 지원’하는 구조였다.

둘째, ‘지역 변혁을 위해 주민단체와 제휴한 공립학교’의 사례이다. 빈민가에 위치한 학교에서는 ‘교육학적 관점이 반영된 강력한 학교 평의회와 조직화된 길드 및 위원회’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 공화국이라도 불리는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선출된 학생들과, 교사, 교직원이 참여하며, 구성원간의 공존, 존중을 목표로 하였다’고한다.

셋째, ‘지역사회 학교’로, ‘저소득층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예술과 스포츠활동을 지원하는 앵커 프로젝트’이다. ‘학생들은 튜터와 함께 로드맵을 수립하며, 앵커의 넓고 넉넉한 공간에서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사회적·환경적·문화적 지역 문제에 접근하기에 지역사회를 교육과정으로 참여시키게’ 된다. 이를 통해 ‘교육 실천이 학교 벽을 넘어 지역사회에 대한 관여로 이어지며, 지역사회를 생태적으로 재창조하는데 기여 하게’ 된다.

넷째, ‘지역사회와 학교를 지원하고 정부의 개발 지원을 받는 교육 이웃 공동체와 이를 장려하는 시민사회 단체’의 경험이다. 브라질 민주화의 성과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졌는데 그중 1997년 결성된 ‘학교도시 협회’가 있다. 이들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구분을 깨기 위한 의사소통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학습하는 동네’라는 방법론을 적용하였는데, 그 핵심은 ‘학교와 지역사회의 간의 협력을 촉진하는 지역사회 교사의 역할 창출, 지역의 교육 기회 도식화와 이에 필요한 파트너십의 구축’이었다. 이들은 ‘교사들을 위한 연수를 실시 하고, 지역사회 지도자와 문화 활동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학교 내 문화공간의 창조, 학교와 지역사회를 위한 학생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였다.

홀리스틱 교육은 ‘학교와 지역사회를 하나로 묶어’내었는데, 이는 ‘연합교육센터’의 설치로 이어졌다. 상파울로시는 ‘3개의 학교를 묶는 연합교육센터를 설치하여 무려 54개의 연합교육센터를 설치했는데, 이 센터는 교육, 문화, 스포츠를 목적으로 하는 공공시설’로 그 목표는 ‘어린이·청소년의 전인적 발달, 커뮤니티 개발, 새로운 교육 경험을 위한 혁신’이다.

브라질의 홀리스틱 교육은 한국에서 2010년 교육감직선제 이후 본격화된 혁신학교, 혁신교육지구와 2014년 이후 확산된 마을교육공동체운동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브라질은 전인적 발달과 성장을 위하여 학교와 지역의 협력, 학생들의 자치활동, 학교 민주화, 그리고 연합교육센터와 같은 공간의 창출을 우리보다 먼저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를 통해 성장한 학생들은 브라질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에서 혁신학교,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성장한 세대들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의 뿌리는 매우 깊다. 브라질에서는 지방정부를 노동당이 집권하고 2003년 노동당 후보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많은 진보적 변화를 이끌어 냈지만, 2018년 검찰의 세탁작전으로 룰라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군인 출신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이 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은바 있다. 극적으로 지난 202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지만, 보우소나루와 그 지자들은 결과에 불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다행히도 최근 2025년 3월 26일 브라질 법원은 만장일치로 보우소나루와 일당 8명을 쿠테타 음모 혐의로 재판을 하기로 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 25년간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룬 브라질에서 도살자 혹은 제2의 트럼프로 불리는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한국 또한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를 1987년 민주화로 종식시켰지만 윤석렬과 그 일당들이 벌인 내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다. 그만큼 독재의 뿌리는 깊다. 파시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복해 있었을 뿐이다.

교육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교육만 바뀌어서는 세상이 바뀔 수 없다. 하지만 교육을 바꾸지 않고는 세상을 결코 바꿀 수 없다. 대안교육은 대안교육기관의 교육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면 안된다. 대안교육은 교육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barometer)이다. 대안은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통해서 마련된다. 그리고 이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실천하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세계의 대안교육』 이라는 책이 이를 위한 소중한 영감을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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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청년의 심리적 탄생 - 누가 그들의 마음속 분노, 좌절, 박탈감을 원한과 복수로 키워 극우가 되게 하는가
김현수 지음 / 클라우드나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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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사태와 이로 인한 조기 대통령선거를 경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란세력을 옹호하는 청년들의 존재였다.

극우세력에게 경도되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문제는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극우적 성향을 청년들이 등장하고 늘어나고 있다. 국가는 다르지만 이들 극우 청년들은 이미 청소년 시기부터 온라인을 통해 극우 선동에 경도되기 시작했음이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정신분석이라는 관점에서 청소년과 청년의 극우 경도 현상을 다루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신과 의사이자,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교육자인 김현수 교수가 최근에 [극우청년의 심리적 탄생]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극우 청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이론으로 크게 세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지위 위협이론이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들이 트럼프와 같은 극우 선동가들에게 휘둘리는 심리적 배경에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누려왔던 백인으로서의 지위 상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으로 누렸던 지위상실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는데, 한국의 젊은 남성들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의 청년 남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여성들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버지 세대의 가부장적 사회로의 회귀를 원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원한과 약한 남성 이론이다. 끝없는 경쟁과 낙오자를 포용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는 청년들로 하여금 소수의 성공한 엘리트들을 증오하게 만들며,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약한 남성을 패배자로 몰아가며 이들은 깊은 원한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남자 청소년들의 이런 심리를 잘 보여준다.

셋째는 억압과 동일시 이론이다. 그는 아도르노가 정신분석학자들과 함께 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자아가 약한 사람은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갖게 되고 파시스트가 됨을 지적한다. 아이들은 힘이 없기에 권위주의적인 부모와 교사들에게 저항하지 못한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데, 이때 이들의 분노를 조작하는 극우선동가(정치인,사이비종교인,유투버 등)를 통해 일시적 해방감을 얻으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피해자가 자신을 공격한 공격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협력하는 심리 기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년의 극우화는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이루어진다. 그 원인은 경쟁과 격차이다. 김현수는 경쟁교육은 중학교시절부터 성별 갈등을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게다가 수저사회론으로 표현되는 사회불평등은 청소년들을 불안하게 하고 타자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왜 극우선동에 경도되는지 사회심리적 서사를 이해해야 하며, 청소년들이 강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친절하고 다정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진짜 아버지의 역할, 불안을 치유하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준동을 시작했을 때 칼 만하임은 세대문제를 다루면서 연령이 젊다고 해서 반드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세대는 생물학적 연령적 동질성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경험을 공유하였는가에 달라짐을 지적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청소년과 청년을 극우로 경도하게 만들고 있다. 김현수는 돌봄의 부재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극우화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들이 극우 선동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교육과 돌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제도교육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마을교육공동체가 그래서 중요하다.

경쟁은 낙오자나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불평등은 원한과 분노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교육을 여전히 계층상승의 수단으로 보는 한, 교육을 여전히 기업과 국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보는 시각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육정책을 좌지우지 해 왔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경쟁교육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청소년과 청년의 극우화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였으나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 이유는 낡았을 뿐만 아니라 해악적인 것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대전환시켜야 하는데 이는 교육대전환 없이 불가능하다. 교육대전환운동이 앞으로도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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