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로켓 가우디 프로젝트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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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의 소설 <변두리 로켓> 1편의 목표는 로켓 쏘아올리기였다. 그것을 실현하려는 주인공은 변두리 중소기업 쓰쿠다 제작소의 사장 쓰쿠다이다.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는 로켓 발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밸브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꿈과 장인 정신이 있어도 대기업의 횡포와 자금압박, 아무리 중소기업이지만 회사를 잘 꾸려나가고 직원들을 독려해야하는 것 등등 헤쳐나가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독자로서 주인공이 성공하길 바라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다행인건 해피엔딩이라는 거~~ 쓰쿠다 제작소에 닥쳤던 일들이 하나하나 해결되고 드디어 로켓 발사의 꿈도 이루게 되면서 1편이 끝났다.

 

 

 

2가우디 프로젝트1편보다 더 복잡해졌다. 1편에선 로켓 핵심 부품을 완성하고 납품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직진했다면 가우디 프로젝트는 협업이다. 1편에서 회사를 떠났던 마노가 인공심장판막을 만드는 가우디 프로젝트로 쓰쿠다 제작소에 협업을 요청해 온다. 이번엔 로켓 기술로 생명을 구하는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이번 책이 복잡하다고 한 이유는 의료진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공심장판막을 수술하는 명의로 이치무라 교수가 나오고 선배이자 권위의식에 찌든 기후네 교수가 나오는데 라이벌 관계이다. 이 둘의 사이와 병원 내 권력 관계는 <하얀 거탑>을 연상시킨다. 쓰쿠다는 당연히 이치무라 교수쪽이다. ‘니혼클라인에서 납품받은 인공판막의 불량으로 의료사고가 발생하고 기후네 교수는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 그 사건은 내부고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의료와 협업을 하게 되니 쓰쿠다 제작소와 병원, 두 축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여기에 내부고발까지 더해지므로 1편보다는 복잡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1편에서 4년이 지난 시점이니 쓰쿠다 제작소가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진화했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대기업의 횡포에 속수무책이다. 1편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시작부터 대기업에게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기업 니혼클라인은 어디에 쓰일 부품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시제품을 만들라고 해놓고 단가 후려치기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경쟁 업체까지 등장하는데 시야마 제작소이다. 나사(NASA)출신의 시나라는 사람이 사장인데 쓰쿠다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보면 된다. 경쟁자이자 빌런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사출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쓰쿠다와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뒷구멍으로 못된 짓만 한다. 쓰쿠다의 인공판막 핵심 기술을 빼돌리기 위해 직원 나카자토를 스카웃 명목으로 데려온다. 대기업 로비는 물론 데이터 조작도 서슴지 않고 스쿠다를 이기기 위한 온갖 방법들을 동원한다. 이번에도 데이코쿠 중공업에 납품 건이 나오는데 자이젠 부장(데이코쿠에서 그나마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인물)외엔 또 모두 시야마 제작소 편이다

 

여전한 대기업의 횡포, 더해진 의료계 상황과 내부고발까지 1편에 비하면 상당히 복잡해진 구도이다. 여기서 또 빠지면 서운한 게 있다. 쓰쿠다 제작소의 투덜이들! 쓰쿠다는 꿈이 있는 우직한 사장이다. 츤데레까지는 아니지만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아낀다. 이 책 초반에 쓰쿠다에게 가우디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 마노는 1편에서 쓰쿠다의 방식에 반기를 들고 회사를 떠난 사람이다. 그랬던 옛 직원이 일과 관련된 제안을 떠난 회사의 사장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쓰쿠다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마노보다 더한 직원이 나오는데 시야마 제작소로 옮긴 나카자토이다.

 

나카자토가 쓰쿠다 제작소를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까놓고 말해 쓰쿠다 제작소의 앞날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요전에 니혼클라인과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기술력과 열정이 있으면 뭐합니까. 그걸 살리질 못하는데. 지금까지 이 회사를 믿고 열심히 해왔지만, 보답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계속 회유해도 소용이 없자 쓰쿠다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 나카자토, 어딜 가도 편하지만은 않아. 힘들 때가 반드시 찾아와. 그럴 때는 엇나가거나 달아나지마. 남 탓도 하지 말고. 그리고 …… 꿈을 가져. 내가 자네에게 해줄 말은 이 정도 뿐이군.”

 

쓰쿠다에서는 희망이 없다며 시야마로 간 나카자토는 그 곳의 더러운 민낯을 보게 된다. 당장 그곳을 버리고 떠나거나 비굴하게 쓰쿠다에게 다시 받아달라고 돌아올 것 같았지만 나카자토는 그러지 않는다. 위에 쓰쿠다가 했던 말처럼 그는 책임있는 행동을 한다. 어쩌면 쓰쿠다의 바보같은 믿음이 내편 네편을 떠나 한 인간을 성장시킨 셈이다.

 

쓰쿠다의 아래 대사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카자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선택한 거야. 우리 기술을 빼돌린다거나 그런 악랄한 짓을 할 녀석은 아니야. 만약 그런 것도 모르는 녀석이라면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내 생각은 그래.”

 

그후 나카자토가 한 짓이 밝혀졌지만 쓰쿠다는 그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 떠날 때 했던 말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헤쳐나가길 빌어준다.

 

쓰쿠다의 인생 철학을 따르는 직원들은 그의 마인드에 동화되었다. 직원 야마자키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는 벽이 수없이 많아. 편하게 잘 풀리는 일은 드물지. 그렇다고 도망치면 실적이고 평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쓰쿠다 고헤이라는 사람이야.”

 

사장으로서 쓰쿠다는 직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한다. 기계의 부품처럼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늘 하는 말,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이번 책에서 직원들을 통해 실현된다. 가우디 프로젝트를 실현시켜야 하는 이유, 인공판막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2권에서 그들의 꿈은 생명을 살리는 것! 로켓 발사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이라는 꿈이었다면 가우디 프로젝트는 내 옆에서 죽어가는 생명, 아이들에게 미래를 선물하는 것이다. 그런 꿈을 실현하는데 부실한 공정과 데이터 조작은 있을 수 없다. 장인 정신의 쓰쿠다 제작소에서 만든 제품이 명의 이치무라의 손에 의해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밝혀주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초반부에 촤르륵 펼쳐놓은 고난들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

그러나 쓰쿠다는 1편에 닥쳤던 난관들 그대로~ 받고! 2편에서는 거의 따따블로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게 콜을 외쳤다! 그리고 하나씩 도장깨기 들어간다. 그럴 줄 알았지만 나가떨어지는 인간들 보니 통쾌했다.!ㅎㅎ 400쪽이 넘는 분량이 순삭이었다. 쓰쿠다가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가우디 프로젝트가 어떻게 성공할지, 숨죽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일본에서 드라마로도 인기를 끌었다는데 한번 보고 싶다. 일드 거의 안보지만 2권까지 읽고 보니 쓰쿠다 사장 역할을 누가 했을지 궁금하다. 읽을수록 쓰쿠다라는 인물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꿈을 향해 멈추지 않는 그의 도전이 아름답다!

 

품질 하면 쓰쿠다, 쓰쿠다 프라이드

위 구호처럼 쓰쿠다에게는 그 어떤 프로젝트가 맡겨져도 다 해낼 거지만 말이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엉킨 실타래에서 한 가닥 뽑아내어 새로운 작품을 한땀한땀 직조해내는 작가의 실력을 보고 있으면 독자로서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변두리 로켓:가우디 프로젝트>는 이번 편 단독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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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
홍성남 지음 / 아니무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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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을 쓴 홍성남 신부님은 자신을 대놓고 꼰대라고 한다. 일단 본인을 자빠뜨리고 가는 유머는 재밌다. 스스로 낮추기에 듣는 사람 맘을 해제시키는 거다. 반대로 스스로를 높이고(거의 자뻑 수준으로) 다른 신부나 교인을 까는데 나는 이게 더 재미있었다.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시대에 이런 유머 책으로 한 번 웃어보자!

 

이상한 신부내용 일부를 맛보기로 한 번 보시라~~

 

어떤 자매가 상담을 청해서 긴 시간 상담해 주었더니

그년과 무슨 관계냐고 수군댄다.

.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심해 화병 든 며느리에게

화병 나으려면 베개에 시어머니 이름 써놓고 욕하라라고 했더니

이상한 신부라고 도망갔다.

 

남편이 외도해서 속상하다는 자매의 하소연에

버리고 새것으로 교환하라라고 했더니 사람이 물건이냐며 지랄한다.

그럼 왜 물어보는겨?

 

 

좀 읽다가 '이 신부님 진짜 웃기네, 어떻게 생기셨대?' 하면서 유튜브에서 찾아봤더니, 역시 강독 영상이 있었다. , 내 취향이다! 저음의 중후한 목소리~~ 이렇게 영성특강 하시면서 책에는 신자들과 다른 신부들 욕한다. 물론 유머지만~ 아무래도 종교인이 하니까 모순되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 같다

 

 

"인생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게 신부님 소신이라고 하면서 심오한 것들과 거리 두고 화투멤버들과 동고동락중이라 한다. 종교를 음식이라고도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왜 맛없어 하는지 고민 없이 불량 식품을 비판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게으름이요, 세상은 달라져 가는데 구버전으로 연명하려는 구태의연함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유머책이 꽤 인기있었다. 참새시리즈, 최불암시리즈등등 유머시리즈가 책으로 나왔고 그것을 읽으며 재미있어 했고 자랑하듯이 친구들 앞에서 얘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개그콘서트 같은 TV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유머책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언제부턴가 예전 유머시리즈를 읊는 사람들더러 아재개그 한다고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라붙는 단어, 꼰대! 그런데 홍성남 신부님은 용감하게 두 가지를 다 하신다. 레트로 열풍을 타고 유머시리즈를 부활시키려는 빅픽처이신 듯하다!

 

하지만 신부님이기에 마냥 허무개그로 끝나지는 않는다. 내용을 읽다보면 누구에게나 해당될 법한 내용들이 있는데 내 얘기하는 것 같아 찔리기도 했다. “새 신부에게 조언에서 뒷말 무성하게 지어내는 사람들을 돌려까기 한다.

 

조언3

자매님들이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하거든 무조건 반가운 얼굴 하거라. 자칫 새 신부란 넘이 예쁜 년들만 좋아한다고 소문난다.

 

조언7

옷 사주고 싶다는 사람을 조심해라. 자기가 좋아하는 거 사다 주고 입었나 안 입었나 항상 감시하느니라. 왕 피곤이다.

 

조언10

만남은 반드시 약속하라. 누군가가 자유로이 사제관을 드나들면 필시 사달이 나느니라.

남녀 불문 작은 권력을 행사하려 드나니. 극 조심.

 

 

영성특강의 내용처럼 말과 행동, 나아가 자신의 생각까지 반성하도록 하는 내용들도 있다. 그래서 제목에 처방전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 같다.

열등감이 만든 괴물읽으면서는 뜨끔했다. 열등감은 자기 비하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밑바닥에는 자기에 대한 과한 기대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난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은 눌러 놓은 분노가 많고, 무리수로 자기 입지를 높이려 하며 심지어 사이비 교주나 정치 사기꾼, 경제 사범 등이 되는 것이다.

 

열등감 식히는 방법으로 기도를 권하면서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자세가 마음을 진정으로 겸허하게 해 준다고 하셨다. ... 나는 교인이 아니라서 그렇게까지는 못 할 것 같고, 신부님 말씀을 읽으며 감화받는 것으로 대신해야겠다.

 

**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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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내는 사장은 말투가 다르다 - 사업 성패의 80%는 사장의 말투에 달려 있다 CEO의 서재 29
요시다 유키히로 지음, 김정환 옮김 / 센시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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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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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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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샀다. 2년 전에 읽었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가 쓴 활자는 소리를 냈고 냄새를 풍겼다. 르포르타주니까 생생한 걸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건조하고 덤덤한 서술이 주는 사실성이 자극적 묘사보다 강렬하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은 후 동물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었으나 그만한 책은 못 봤다.

 

신간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의 부제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문구를 보니 이번 책으로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어릴 때 살았던 대구의 집들에서 시작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거쳐 온 서울의 원룸들, 상경 후 처음 제대로 된 아파트에 살았던 일산, 그리고 다시 서울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들이다. 서울에서는 동생과 몇 년 같이 살았고 일산에서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신혼집을 차렸다. 자신이 살아온 집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방에 대한 이야기였고 실은 여자의 방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살아온 집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책으로 낸 이유는? 작가의 목적, 아니 소망은 마지막에 나온다. 하지만 그걸 읽기 전에 나는 이미 저자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내가 지나온 집들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작가가 집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의 원형으로 대구 북성로의 집을 가지고 있듯 나도 그런 집이 있으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없다.

 

내 기억 속 첫 집은 부산에 이사 와서 처음 살게 된 가게 집이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우리 가족은 경북 안동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그 집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서움 때문이다. 바닷바람이 유난한 부산의 겨울 밤을 처음 맛 본 날이었다. 이사 온 첫날 밤, 가족 네 명이 신발가게에 딸린 조그만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으나 나는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리로 된 가게 문을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모른다. 만화에서 본건지 TV 애니메이션으로 본 화면에서 연상한건지 그 때 내 머릿속에 그려진 장면은, 유령의 모습을 한 바람이 밖에서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너무나 무서웠다. 몇 십년이 지났어도 그날 밤의 오싹함은 잊을 수가 없다.

 

더 잘 살아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해 왔는데 우리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갔다. 아버지가 벌이는 장사는 죄다 망했고 늘어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야만 했다. 급기야 우리는 함바 식당 옆의 천막에서 살게 됐고 엄마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살았다. 인테리어가 웬 말이며 수세식 화장실이 뭐란 말인가. 집 같지 않은 그 곳에서 나는 정말이지 탈출하고 싶었다.

 

내 유년의 집에 관한 기억은 아름답기는커녕 벗어나고픈 공간일 뿐이었다. 남들이 집이라 말하는 공간에서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가게에 딸린 작은 방이었고 그나마 내게 허락된 사치스런 공간은 허리를 90도로 구부려야 움직일 수 있는 다락이었다.

 

아, 리뷰를 쓰기 전 예감했던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는데 리뷰를 쓰면서도 내가 살았던 집들과 함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집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좋았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 철없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시절들...

 

그리고 공간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 엄연히 존재하는, 성역할 이데올로기!

 

p.136

여성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고 사생활이 자주 침범당하는 사회에서,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여성과 남성이 집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두 성별이 한 집에 살 때 집을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쪽은 거의 여자다. 여자에게 집은 소유의 대상이기 이전에 관리의 대상이다. 남성은 생계 부양자로, 여성은 가사 노동자로 성 역할을 이분화할 때 집은 양쪽에게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집에서도 성 역할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위 내용은 결혼 후 내가 겪었던 심정과 같았다나는 결혼하자마자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고 결혼 후 계속 아파트에서 살았으며 내가 주로 머문 공간은 주방이었고 식탁이었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사감선생의 탈을 쓴 남편은 퇴근 후 집 곳곳에서 먼지가 발견되는지 확인했다. 당시엔 먼지를 싫어하는 본인이 직접 청소하면 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집 청소는 여자 담당이라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몸은 매일 씻어도 변기와 욕실 청소는 하지 않고, 주방에서 나온 음식은 맛있게 먹어도 조리과정과 식후에 나오는 주방쓰레기는 치운 적이 없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에게서 작가의 글과 같은 글이 나올 수는 없다. 아름답지가 않잖은가! 이런 리뷰는 작가의 책 홍보를 오히려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밀려온다. 거의 안티수준이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작가의 말마지막 문단에서 용기를 얻었다.

 

 

언제나 두려운 것은 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설익은 내가 말과 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봐,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자책할까 봐 두렵다. 나의 이야기를 인쇄될-박제될 글로 남기는 것은 그런 두려움을 무릅쓰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이토록 불완전한 내가 또 다른 불완전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간절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나 같은 일천한 사람과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잖나! 그것도 간절하게! 작가가 살아온 집에 대한 기억을 읽으며 작가를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의 기억 덕분에 내 지난 시절을 돌아보았다. 그 시절에 내가 있었던 공간이 아름다웠다고 할 순 없지만 어쩌랴! 그 시절의 총합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작가가 살았던 집을 들여다보며 내가 살았던 집을 돌아보았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축적되어 지금 내가 이런 공간을 꾸미고 살게 된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다가, 유유자적하며 누웠다가 어슬렁거리다가 하는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리뷰를 쓰다가, 이 공간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지나온 시절들에 감사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건 하재영 작가이기에, 마지막 그의 말을 빌미삼아 감히 작가와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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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황홀한 역사 -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바트 어만 지음, 허형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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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천국, 불신지옥!”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길에서, 지하철에서 들을 수 있는 외침이 있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겁박하던 그 사람들은 아직 교회를 잘 다니고 있을까?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이상한 목사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친구따라 여름성경학교나 성탄절 예배에 가서 뭔가를 얻어먹은 기억은 있지만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 그 때 전도를 위한 어떤 액션이 들어왔을텐데 지속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은 걸 보면 당시 그 교회의 전도력보다 엄마의 교회불신력이 더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버금가는 엄마의 슬로건은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연애당!”이었다. 엄마의 말에 세뇌당한건지, 내가 연애고자라서 그랬는진 모르겠으나 교회도 안 갔고 연애도 안 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워딩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을 잘 믿어야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거라는 협박은, 현재도 중요하지만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냐는 유혹의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며 그러려면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말로 연결된다. 나는 이 모든 말들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무신론자라면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죽은 후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은 당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창세기의 줄거리 정도는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가장 논쟁적인 성서학자로 불리는 바트 어만의 신간 <두렵고 황홀한 역사>의 홍보를 보게 되었다. 무신론자이지만 부제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보니 흥미가 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진짜 성경에 그렇게(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적혀있는 건지, 예수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직접 한 건지, 아니라면 누가 만들어 퍼트린건지? 사람들은 왜 저런 (내 상식으론)얼토당토않은 말을 믿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서평단에 신청해서 읽게 되었다.

 

저자 바트 어만은 기독교인인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자신이 의구심을 품었던 것에 점점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진보적 성향의 교파로 옮겨서 공부하면서도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후 세계 연구를 계속 하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영향력이 큰 종교로 자리 잡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그가 책의 제목을 <천국과 지옥 : 사후 세계의 역사(Heaven and Hell:A History of the Afterlifr)>로 정하자 주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거나 더러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천국과 지옥 자체가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을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해 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으라고도 믿지 말라고도 종용하지 않을 참이다. 대신 나는 그 개념들이 서구의 지배적 문화인 기독교 내부의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가 당시 세계의 이교 종교들 가운데, 구체적으로는 유대교에서 발생했기에 특히 더 흥미롭다. 나는 사후 세계관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수정되고 변모했는지, 어떻게 믿음으로 자리 잡고, 의심을 사고, 믿음을 잃었는지 알고 싶다.

 

 

저자는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연구했고, 그것을 이 책에서 하나하나 정리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과 신화와 역사서를 정말이지 꼼꼼하게 훑어나간다처음에 책을 받아 두께와 크기를 보고, ‘들어가는 말을 읽고, 걱정이 좀 되었다. 나는 성경도 아예 모르고, 배경지식이 없는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기우였다. 저자의 설명이 어렵지 않았고, 성경 내용은 어차피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인용을 했는지 잘 따라가면 됐다. 그리고 성경 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논증의 예시로 든다. 예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나처럼 무신론자이면서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 읽기엔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른바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읽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믿어온 것이 저자에 의해 부정당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책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얼음장 같았던 자신의 믿음에 도끼가 날아와도 기꺼이 맞을 각오를 하는 사람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도끼가 자신의 생각애 쨍!하고 균열을 낸다면, 제목처럼 두려워서 다가가기 힘들었던 것의 황홀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책 내용 전체를 요약하기는 힘들고, 목차의 순서대로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장 천국과 지옥으로의 여정  에서는 네 편의 사후 세계 일화를 옛이야기 하듯 들려준다. 이 일화들은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안내한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간다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믿음의 시작은 어디였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보다 앞선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장 두려운 죽음  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죽음에 관한 사유들을 설명한다. 저자가 찾아낸 공통점은 죽음을 겁에 질려 맞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3장 사후 세계 이전의 사후 세계 에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플라톤에 이르러 지옥과 천국의 개념이 대중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죽음 이후 심판관 앞에 서면, 악한 자는 대가를 치르고 옳은 이를 행한 자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

 

4장 정의의 실현: 사후 상벌 개념의 부상 에서 저자는 플라톤의 사후 상벌 개념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천국과 지옥 개념을 낳게 한 것은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설명이다. 철학조차 사회시간에 짧게 주입식 교육으로 받은 내 머릿속엔 에피쿠로스=쾌락주의자라는 등식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쾌락이 육체적 쾌락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등식은 에피쿠로스의 견지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에피쿠로스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강렬한 쾌락은 고통을 야기할 뿐이며 이는 인간의 경험이 충분히 증명해준다고 부연했다. 그러므로 소박한 쾌락, 이를테면 적당한 음식과 술, 마음 맞는 친구들, 중대하고 흥미를 끄는 주제로 나누는 지적 토론 등을 장려했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문장들을 정리하자면 죽음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고, 자신이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물 가운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비문이라고 하면서 감동받았다는 비문을 소개한다. 오늘날 “R.I.P.(Rest In Peace:고이 잠드소서)”라는 뜻으로 고대에서 쓰인 라틴어 약어다. “n.f.f.n.s.n.c.” 해석하면 “non fui, fui, non sum, non curo.: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이제 없다. 개의치 않는다

 

마지막, ‘개의치 않는다에서 조르바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렵지도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랐던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함께

 

5장 히브리 성경과 죽음 후의 죽음

6장 되살아난 시체들: 고대 이스라엘의 부활 개념

7장 왜 부활을 기다리는가: 죽음 직후의 사후 세계

8장 예수와 사후 세계

 

5장부터 8장까지는 유대교의 사후세계관에서 시작해 성경과 예수의 사후세계관을 다룬다. 8장의 마지막 챕터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논쟁적 화두를 던질 내용이 나온다. 누가복음 16, 요한복음 3장과 11장을 왜 빼놓고 말하느냐는 비판을 저자는 예상했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며 초창기 예수의 말을 후대 기독교도들이 지어냈을 확률이 높다고 강조한다.

 

9장 예수 사후의 사후 세계관: 사도 바울

10장 수정된 예수의 사후 세계관: 후대의 복음서들

11장 요한계시록과 사후 세계의 신비

12장 육신으로 사는 영생

13장 기독교 사후 세계의 황홀경과 고문

 

9장부터 13장에서 다루는 성경은 모두 처음 듣는 내용이라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13장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도 처음 듣는 책!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우러르면 영원한 지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다.

 

14장 연옥, 윤회,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구원 에서는 연옥이라는 어원 시작과 기독교에서 윤회 사상, 그리고 모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다는 내용이다.

아래 나가는 말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가 사후 세계에 대한 특정 믿음(예를 들면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불)을 워낙에 자주 접하며 자라서, 그런 상벌의 장소가 아예 지당하다고 느낀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장소들이 존재하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다고 느낄 정도다. 이러한 믿음은 감정, 특히 그 어떤 감정보다 더 강력한 희망과 두려움으로 더욱 강화된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합리적인 사람 몇몇은 만족스럽고 충만한, 심지어 기쁨이 넘치는 사후 세계를 맞기를 희망하며, 영원히 지옥 같은 고문을 당할 가능성을 떠올리면 두려움에 미간을 접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런 관점을 원시적이고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관점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특히 지배적인데) 구약성경이나 역사적 인물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후대에 생긴 관점들이라 그렇다. 그러나 그런 관점들이 어째서 서구 문화를 1900년 남짓 지속적으로 지배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내 추측은 우리가 각자 영위한 삶의 질에 따라, 혹은 각자의 신앙적 헌신에 따라 개별적으로 상과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 인간의 매우 뿌리 깊은 요구와 염원을 충족시켰기에 그렇다는 거다. 도덕적 존재인 우리는 이 세상이 말이 된다고, 결국에는 정의가 이루어지며 선이 궁극에는 악을 이길 거라고 믿으며, 그렇게 믿어야만 하고, 또한 그렇게 믿고자 한다

 

 

 

 

이 책은 새로운 지식과 만나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논쟁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라면 종교와 무관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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