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황홀한 역사 -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바트 어만 지음, 허형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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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천국, 불신지옥!”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길에서, 지하철에서 들을 수 있는 외침이 있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겁박하던 그 사람들은 아직 교회를 잘 다니고 있을까?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이상한 목사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친구따라 여름성경학교나 성탄절 예배에 가서 뭔가를 얻어먹은 기억은 있지만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 그 때 전도를 위한 어떤 액션이 들어왔을텐데 지속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은 걸 보면 당시 그 교회의 전도력보다 엄마의 교회불신력이 더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버금가는 엄마의 슬로건은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연애당!”이었다. 엄마의 말에 세뇌당한건지, 내가 연애고자라서 그랬는진 모르겠으나 교회도 안 갔고 연애도 안 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워딩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을 잘 믿어야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거라는 협박은, 현재도 중요하지만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냐는 유혹의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며 그러려면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말로 연결된다. 나는 이 모든 말들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무신론자라면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죽은 후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은 당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창세기의 줄거리 정도는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가장 논쟁적인 성서학자로 불리는 바트 어만의 신간 <두렵고 황홀한 역사>의 홍보를 보게 되었다. 무신론자이지만 부제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보니 흥미가 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진짜 성경에 그렇게(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적혀있는 건지, 예수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직접 한 건지, 아니라면 누가 만들어 퍼트린건지? 사람들은 왜 저런 (내 상식으론)얼토당토않은 말을 믿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서평단에 신청해서 읽게 되었다.

 

저자 바트 어만은 기독교인인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자신이 의구심을 품었던 것에 점점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진보적 성향의 교파로 옮겨서 공부하면서도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후 세계 연구를 계속 하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영향력이 큰 종교로 자리 잡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그가 책의 제목을 <천국과 지옥 : 사후 세계의 역사(Heaven and Hell:A History of the Afterlifr)>로 정하자 주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거나 더러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천국과 지옥 자체가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을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해 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으라고도 믿지 말라고도 종용하지 않을 참이다. 대신 나는 그 개념들이 서구의 지배적 문화인 기독교 내부의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가 당시 세계의 이교 종교들 가운데, 구체적으로는 유대교에서 발생했기에 특히 더 흥미롭다. 나는 사후 세계관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수정되고 변모했는지, 어떻게 믿음으로 자리 잡고, 의심을 사고, 믿음을 잃었는지 알고 싶다.

 

 

저자는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연구했고, 그것을 이 책에서 하나하나 정리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과 신화와 역사서를 정말이지 꼼꼼하게 훑어나간다처음에 책을 받아 두께와 크기를 보고, ‘들어가는 말을 읽고, 걱정이 좀 되었다. 나는 성경도 아예 모르고, 배경지식이 없는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기우였다. 저자의 설명이 어렵지 않았고, 성경 내용은 어차피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인용을 했는지 잘 따라가면 됐다. 그리고 성경 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논증의 예시로 든다. 예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나처럼 무신론자이면서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 읽기엔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른바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읽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믿어온 것이 저자에 의해 부정당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책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얼음장 같았던 자신의 믿음에 도끼가 날아와도 기꺼이 맞을 각오를 하는 사람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도끼가 자신의 생각애 쨍!하고 균열을 낸다면, 제목처럼 두려워서 다가가기 힘들었던 것의 황홀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책 내용 전체를 요약하기는 힘들고, 목차의 순서대로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장 천국과 지옥으로의 여정  에서는 네 편의 사후 세계 일화를 옛이야기 하듯 들려준다. 이 일화들은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안내한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간다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믿음의 시작은 어디였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보다 앞선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장 두려운 죽음  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죽음에 관한 사유들을 설명한다. 저자가 찾아낸 공통점은 죽음을 겁에 질려 맞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3장 사후 세계 이전의 사후 세계 에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플라톤에 이르러 지옥과 천국의 개념이 대중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죽음 이후 심판관 앞에 서면, 악한 자는 대가를 치르고 옳은 이를 행한 자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

 

4장 정의의 실현: 사후 상벌 개념의 부상 에서 저자는 플라톤의 사후 상벌 개념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천국과 지옥 개념을 낳게 한 것은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설명이다. 철학조차 사회시간에 짧게 주입식 교육으로 받은 내 머릿속엔 에피쿠로스=쾌락주의자라는 등식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쾌락이 육체적 쾌락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등식은 에피쿠로스의 견지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에피쿠로스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강렬한 쾌락은 고통을 야기할 뿐이며 이는 인간의 경험이 충분히 증명해준다고 부연했다. 그러므로 소박한 쾌락, 이를테면 적당한 음식과 술, 마음 맞는 친구들, 중대하고 흥미를 끄는 주제로 나누는 지적 토론 등을 장려했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문장들을 정리하자면 죽음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고, 자신이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물 가운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비문이라고 하면서 감동받았다는 비문을 소개한다. 오늘날 “R.I.P.(Rest In Peace:고이 잠드소서)”라는 뜻으로 고대에서 쓰인 라틴어 약어다. “n.f.f.n.s.n.c.” 해석하면 “non fui, fui, non sum, non curo.: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이제 없다. 개의치 않는다

 

마지막, ‘개의치 않는다에서 조르바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렵지도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랐던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함께

 

5장 히브리 성경과 죽음 후의 죽음

6장 되살아난 시체들: 고대 이스라엘의 부활 개념

7장 왜 부활을 기다리는가: 죽음 직후의 사후 세계

8장 예수와 사후 세계

 

5장부터 8장까지는 유대교의 사후세계관에서 시작해 성경과 예수의 사후세계관을 다룬다. 8장의 마지막 챕터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논쟁적 화두를 던질 내용이 나온다. 누가복음 16, 요한복음 3장과 11장을 왜 빼놓고 말하느냐는 비판을 저자는 예상했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며 초창기 예수의 말을 후대 기독교도들이 지어냈을 확률이 높다고 강조한다.

 

9장 예수 사후의 사후 세계관: 사도 바울

10장 수정된 예수의 사후 세계관: 후대의 복음서들

11장 요한계시록과 사후 세계의 신비

12장 육신으로 사는 영생

13장 기독교 사후 세계의 황홀경과 고문

 

9장부터 13장에서 다루는 성경은 모두 처음 듣는 내용이라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13장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도 처음 듣는 책!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우러르면 영원한 지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다.

 

14장 연옥, 윤회,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구원 에서는 연옥이라는 어원 시작과 기독교에서 윤회 사상, 그리고 모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다는 내용이다.

아래 나가는 말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가 사후 세계에 대한 특정 믿음(예를 들면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불)을 워낙에 자주 접하며 자라서, 그런 상벌의 장소가 아예 지당하다고 느낀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장소들이 존재하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다고 느낄 정도다. 이러한 믿음은 감정, 특히 그 어떤 감정보다 더 강력한 희망과 두려움으로 더욱 강화된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합리적인 사람 몇몇은 만족스럽고 충만한, 심지어 기쁨이 넘치는 사후 세계를 맞기를 희망하며, 영원히 지옥 같은 고문을 당할 가능성을 떠올리면 두려움에 미간을 접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런 관점을 원시적이고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관점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특히 지배적인데) 구약성경이나 역사적 인물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후대에 생긴 관점들이라 그렇다. 그러나 그런 관점들이 어째서 서구 문화를 1900년 남짓 지속적으로 지배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내 추측은 우리가 각자 영위한 삶의 질에 따라, 혹은 각자의 신앙적 헌신에 따라 개별적으로 상과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 인간의 매우 뿌리 깊은 요구와 염원을 충족시켰기에 그렇다는 거다. 도덕적 존재인 우리는 이 세상이 말이 된다고, 결국에는 정의가 이루어지며 선이 궁극에는 악을 이길 거라고 믿으며, 그렇게 믿어야만 하고, 또한 그렇게 믿고자 한다

 

 

 

 

이 책은 새로운 지식과 만나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논쟁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라면 종교와 무관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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