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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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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샀다. 2년 전에 읽었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가 쓴 활자는 소리를 냈고 냄새를 풍겼다. 르포르타주니까 생생한 걸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건조하고 덤덤한 서술이 주는 사실성이 자극적 묘사보다 강렬하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은 후 동물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었으나 그만한 책은 못 봤다.
신간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의 부제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문구를 보니 이번 책으로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어릴 때 살았던 대구의 집들에서 시작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거쳐 온 서울의 원룸들, 상경 후 처음 제대로 된 아파트에 살았던 일산, 그리고 다시 서울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들이다. 서울에서는 동생과 몇 년 같이 살았고 일산에서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신혼집을 차렸다. 자신이 살아온 집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방에 대한 이야기였고 실은 여자의 방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살아온 집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책으로 낸 이유는? 작가의 목적, 아니 소망은 마지막에 나온다. 하지만 그걸 읽기 전에 나는 이미 저자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내가 지나온 집들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작가가 집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의 원형으로 대구 북성로의 집을 가지고 있듯 나도 그런 집이 있으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없다.
내 기억 속 첫 집은 부산에 이사 와서 처음 살게 된 가게 집이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우리 가족은 경북 안동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그 집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서움 때문이다. 바닷바람이 유난한 부산의 겨울 밤을 처음 맛 본 날이었다. 이사 온 첫날 밤, 가족 네 명이 신발가게에 딸린 조그만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으나 나는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리로 된 가게 문을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모른다. 만화에서 본건지 TV 애니메이션으로 본 화면에서 연상한건지 그 때 내 머릿속에 그려진 장면은, 유령의 모습을 한 바람이 밖에서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너무나 무서웠다. 몇 십년이 지났어도 그날 밤의 오싹함은 잊을 수가 없다.
더 잘 살아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해 왔는데 우리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갔다. 아버지가 벌이는 장사는 죄다 망했고 늘어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야만 했다. 급기야 우리는 함바 식당 옆의 천막에서 살게 됐고 엄마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살았다. 인테리어가 웬 말이며 수세식 화장실이 뭐란 말인가. 집 같지 않은 그 곳에서 나는 정말이지 탈출하고 싶었다.
내 유년의 집에 관한 기억은 아름답기는커녕 벗어나고픈 공간일 뿐이었다. 남들이 집이라 말하는 공간에서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가게에 딸린 작은 방이었고 그나마 내게 허락된 사치스런 공간은 허리를 90도로 구부려야 움직일 수 있는 다락이었다.
아, 리뷰를 쓰기 전 예감했던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는데 리뷰를 쓰면서도 내가 살았던 집들과 함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집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좋았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 철없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시절들...
그리고 공간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 엄연히 존재하는, 성역할 이데올로기!
p.136
‘여성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고 사생활이 자주 침범당하는 사회에서,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여성과 남성이 집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두 성별이 한 집에 살 때 집을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쪽은 거의 여자다. 여자에게 집은 소유의 대상이기 이전에 관리의 대상이다. 남성은 생계 부양자로, 여성은 가사 노동자로 성 역할을 이분화할 때 집은 양쪽에게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집에서도 성 역할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위 내용은 결혼 후 내가 겪었던 심정과 같았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고 결혼 후 계속 아파트에서 살았으며 내가 주로 머문 공간은 주방이었고 식탁이었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사감선생의 탈을 쓴 남편은 퇴근 후 집 곳곳에서 먼지가 발견되는지 확인했다. 당시엔 ‘먼지를 싫어하는 본인이 직접 청소하면 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집 청소는 여자 담당이라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몸은 매일 씻어도 변기와 욕실 청소는 하지 않고, 주방에서 나온 음식은 맛있게 먹어도 조리과정과 식후에 나오는 주방쓰레기는 치운 적이 없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에게서 작가의 글과 같은 글이 나올 수는 없다. 아름답지가 않잖은가! 이런 리뷰는 작가의 책 홍보를 오히려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밀려온다. 거의 안티수준이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작가의 말’ 마지막 문단에서 용기를 얻었다.
언제나 두려운 것은 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설익은 내가 말과 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봐,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자책할까 봐 두렵다. 나의 이야기를 인쇄될-박제될 글로 남기는 것은 그런 두려움을 무릅쓰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이토록 불완전한 내가 또 다른 불완전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간절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나 같은 일천한 사람과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잖나! 그것도 간절하게! 작가가 살아온 집에 대한 기억을 읽으며 작가를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의 기억 덕분에 내 지난 시절을 돌아보았다. 그 시절에 내가 있었던 공간이 아름다웠다고 할 순 없지만 어쩌랴! 그 시절의 총합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작가가 살았던 집을 들여다보며 내가 살았던 집을 돌아보았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축적되어 지금 내가 이런 공간을 꾸미고 살게 된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다가, 유유자적하며 누웠다가 어슬렁거리다가 하는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리뷰를 쓰다가, 이 공간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지나온 시절들에 감사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건 하재영 작가이기에, 마지막 그의 말을 빌미삼아 감히 작가와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에게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