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 신경학자가 쓴 불가사의한 질병들에 관한 이야기
수잰 오설리번 지음, 서진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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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드라마에 걸핏하면 등장하는 해리성 기억상실증’, 심인성 장애로 인한 실어증에 걸리는 내용을 볼 때마다 참 손쉽게 써먹기 좋은 병인가보구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나 그렇지 실제로 몇 명이나 저럴까 싶었다. 인생이 어디 힘든 일 없이 꽃길만 걷을 수 있을까. 모두가 동일한 고통을 겪는 건 아니나 누구나 제 고통이 가장 힘들다고 여긴다. 나는 엄살을 부리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힘들어 죽겠다며 징징거리는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면서도 속으론 엄살이 심하구나 했더랬다.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이겨내는 이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도 있다. 나는 그러한 차이를 성격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인성 장애를 겪는 공동체를 직접 방문해 그 질병과 고통에 대한 의학적 통찰을 풀어낸 책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을 읽어보니 심인성 질환을 그리 단순화시켜버릴 게 아니었다. 영국 국립신경신경외과병원에서 신경학과와 임상신경 생리학과 전문의로 재직 중인 저자 수잰 오설리번은 스웨덴에서 쿠바, 카자흐스탄에서 콜롬비아까지 전 세계에서 심인성 장애(어떤 병이나 증상 따위가 정신적·심리적 원인으로 생기는 성질)를 경험한 공동체들을 찾아갔다. 신경 경로가 온전한데 다리가 마비된 환자. 집단적으로 틱 장애를 얻고, 환각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는 소녀들. 각종 검사 결과가 완벽히 정상인데도 고통과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만났다. 어떻게 마음이라는 형체도 없는 존재가 발작을 일으키고, 사지를 마비시키는 것일까? 이 책은 인간의 질병과 고통이 가진 낯선 측면을 탐구한 기록이자, 그것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시도이다.


저자는 모든 심인성 장애와 기능성 질환을 다룰 때 문화적 특수성을 지켜보며 사회적 요소들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 나오는 질병들은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 살펴봄으로써 환자가 어디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스웨덴 난민아이들에게 나타난 체념증후군과 콜롬비아 소녀들의 집단 발작과 백신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지역이나 상황의 특수성이 질환 발현의 큰 영향을 끼친 사례들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에 공감하면서 읽었다.


상심증후군은 스트레스가 심각한 심장기능상실을 일으키는데 이런 증상을 타코츠보 심근증이라고 한다. 갑자기 심장근육이 약해져 좌심실벽이 이완과 수축을 비정상적으로 하면서 모든 심실의 모양이 바뀌며 이는 심장이 혈액을 효과적으로 펌프질하지 못해 혈압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기존에 어떤 심장문제도 심장병 가족력도 없었던 캐린이란 여성의 사례인데 정리하자면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줄이지 않고 가족만 돌보느라 자신을 방치한 결과였다. 의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여실히 떠오르는 사례였다. 단순 디스크 진단을 받았는데 하체가 마비된 또 다른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공중보건은 전문가들이 관리하고 개인은 평소에 자신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돌봐야하는 것은 자신이다. 그 다음 가족도 있고 사회도 있다.


저자는 ADHD 진단 확산을 예로 들면서 미래세대를 걱정했다. 충분히 고려받지 못하는 진단의 가장자리인 회색지대에 있는 아이들이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꼬리표가 붙은 아이들은 사람들에게 뭔가 다르게 보이고 덜 똑똑하고 성공 가능성도 낮을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처럼 아이들을 새롭게 확장되고 만들어지는 진단 범주에 끊임없이 휘둘리게 놔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p.376

이러한 진단 범주는 아이들에게 학습과 사회화, 신체에 장애가 있다며 그들의 약점을 설명하려 들 것이다. 이 병명들은 진실하지 못한 확신에 따라 제공된다. 의료 업계의 심각한 과잉 의료화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내리는 진단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는데, 부모들은 그 사실을 알못한다.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그런 진단명이 심리적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가 알겠는가? ‘악마는 왔다 가면 그만이지만, 자폐증, ADHD, 우울증, PoTS 같은 진단은 영원히 남는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한 모든 이야기들 중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맺은 사연들은 의사의 진료나 심리학 치료가 아니었다. 대부분 문제시된 원인으로부터 떠났다. 그러나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고립되는 게 아니라 집단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해결한 경우도 있다. 에필로그 마지막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의사라면 자기 환자가 질병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만약 의학적인 패러다임과 작업 순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한발 뒤로 물러나서 환자의 증상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장 우아한 해결이 가능해지는 건 의사와 환자가 공통점을 발견할 때다. 또한, 회복의 가장 좋은 기회는 스스로 공동체에 둘러써야 모든 환자와 의사가 그런 공통점을 발견할 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판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공동체, 지원해주는 공동체, 결함과 실패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기득권은 제쳐두는 겸손한 공동체, 건강에 대해 전체적인 시각을 지닐 수 있는 공동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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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든 아이 곰곰그림책
안나 회그룬드 지음, 최선경 옮김 / 곰곰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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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든 아이>는 아이가 거인을 무찌르고 아빠를 구해내는 이야기다. 겨우 작은 칼과 거울을 들고서. 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아이가! 스웨덴의 작가 안나 회글룬드는 내 안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 독자들에게 두려워 할 것 없다고, 밖으로 나가라고, 나가서 부딪쳐 보라고 말한다. 아이는 아빠를 구하러 길을 나섰다가 캄캄한 밤중에 불빛이 반짝이는 할머니 집에 들어가 하룻밤 머문다. 다음 날 할머니에게서 받은 우산으로 거인의 공격을 막아낸 뒤 거울로 거인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자 돌로 변한 아빠와 사람들이 살아났다. 아이는 아빠와 집으로 돌아온다.





이 책은 글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림은 흔히 보는 귀여운 느낌과 달리 조금 어둡다. 여자아이라고 해서 마냥 예쁘게만 그리지 않았다. 자주 등장하는 파랑새가 있다. 여자아이를 직접적으로 돕거나 의미있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아이 주위에 있다. 역자 최선경씨는 파랑새를 두 가지 관점으로 보고 있다. 아이를 걱정하는 아빠의 분신이거나 아이 자신이거나. 독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아빠가 세상의 전부라 여기는 딸이 이 책을 읽는다면 파랑새는 늘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아빠 같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아빠는 딸에게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크면 아빠랑 결혼할거라고 다짐을 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한 번씩 말씀하신다. 퇴근해 들어오는 아빠 품으로 쏘옥 뛰어 들어와 얼굴에 마구마구 뽀뽀를 해댔다고. 그러던 때가 엊그제 같다고... 나는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신이 나의 이상형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4학년 때인가 아버지께서 1년 정도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셨을 때 많이 그리워했던 기억은 난다. 그 당시, 아빠가 안 계셔도 우리랑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주문 같은 자위는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기에 역부족이었다.


어른의 입장으로 이 책을 읽으니 파랑새는 여자아이의 자아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집에는 엄마가 없다. 엄마도 없는데 아빠는 아이를 혼자 두고 떠났다. 그러니까 걱정스런 마음에 파랑새로 아이 곁을 지키는 거라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아이는 그저 기다리기보다 아빠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할머니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자신이 가진 거울을 이용해 거인을 돌로 만들어 버렸다. 거인의 눈을 보면 돌로 변한다는 것을 역이용했다.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하도록 곁에서 맴돌며 지켜주던 파랑새는 아이 자신이다.


어릴 때는 부모가 날 사랑하고 지켜주고 이해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뿐이라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잘 모르겠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건 동의를 구하고 싶거나 변명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그림 속 파랑새는 언제나 아이 가까이에 있지만 아무런 대사가 없다. 텍스트 속에서 언급도 되지 않는다. 어린이 독자 중에 파랑새를 아이 자신이라 생각하는 독자라면 파랑새의 대사를 직접 써보도록 해보자. 아이를 격려하고 용기 내어 행동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파랑새의 대사를 쓰면서 자신 안에 있는 파랑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를 100% 믿어주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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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내견이야 - 2025년 전국 기적의 도서관 선정도서 한울림 장애공감 그림책
표영민 지음, 조원희 그림 / 한울림스페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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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견이 하는 일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모르면 무섭잖아요. 이 책으로 안내견에 대해 잘 알고 어디선가 만난다면 환하게 웃어주세요~ 그림이 단순하나 안내견의 표정은 살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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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내견이야 - 2025년 전국 기적의 도서관 선정도서 한울림 장애공감 그림책
표영민 지음, 조원희 그림 / 한울림스페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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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내견이야>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개선 인식을 다룬 그림책입니다.


시각장애인 안내견 입장을 거부한 식당이나 마트의 직원, 입마개를 안 했다고 소리친 버스기사 뉴스를 심심찮게 보아왔지요. 안내견은 법적으로 제한 없이 공공장소에 출입할 수 있고,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해서는 안 된답니다. 그렇지만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림책 <나는 안내견이야>는 안내견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안내견의 시점으로 그려냈습니다.



 

단순한 그림체에 3~5개의 색만 사용하였고, 군더더기 없이 짧은 텍스트는 이 책의 성격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안내견은 배운 대로,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에만 집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언니와 늘 함께 있어야하는데 떨어져 있어야 하고, 시각장애인 안내를 위한 점자블록이 광고시설물에 침범당해 있고...

언니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일은 정말 힘이 듭니다.




 

... 겨우 집에 도착했어요.



 

 

이 그림책에 나온 것처럼 어린 아이들이 안내견을 보고 놀랄 수 있어요. 그러나 안내견은 훈련 받은 개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구요, 대형견이라해도 입마개를 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전국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보급해서 아이들이 먼저 알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직접 못 읽어도 이렇게 리뷰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을 주위에 널리 퍼트리면 그것도 좋겠어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안내견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과 장애인 복지법에 의거 정당한 사유 없이 안내견의 출입을 금지하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사실!


, 최근 자신의 반려견에 노란 조끼를 입혀서 식당에 들어가려는 얌체족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아래 안내견 표지를 참고하면 구분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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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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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소설의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씨이며 이 작품이 그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소개를 보고 궁금증이 일었다. 1918년부터 1964까지 격동의 역사를 이 젊은 소설가가 어떻게 그려내었을지 확인하고 싶어서 가제본 서평단에 신청했다.


도입부 호랑이와 사냥꾼의 대치 장면에서 일본 군인들이 조선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장면을 읽으며 박훈정 감독의 영화 <대호>를 떠올렸다. 그 영화가 호랑이 CG와 어울리지 않는 동화적 결말 때문에 혹평을 받긴 했지만 나는 좋게 보았다. 일제가 수탈해 간 것 중에 호랑이도 있었다는 사실! 이 땅에 호랑이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는 역사를 알게 해준 영화였다


<대호>에서 일본 군인들이 호랑이를 사냥하려고 설산에서 매복 중이던 장면과 야마다 겐조가 쓰러진 남경수를 구해주고남경수가 일본군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쫓아준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야마다는 죽을 뻔 했던 남경수를 살렸고남경수는 일본군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그리고 야마다는 남경수에게 담배갑을 선물한다소설의 제목이 <작은 땅의 야수들>이어서 남경수의 아들 남정호도 호랑이 사냥꾼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서사의 중심은 여성이었다.



기생 은실의 딸 월향과 연화, 기방에 팔려온 옥희, 이 셋을 거둔 예단까지 네 명의 여성이 주 등장인물이다. 구한말 기생으로 살아야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그건 일부분이었다. 네 여성의 기구한 삶은 맞지만 단순히 기생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격동기 여성들의 일과 사랑이 중심축이었다. 예단의 남자라 할 수 있는 김성수와 이명보는 친일파와 민족주의자를 대변하고, 옥희의 남자 한철과 정호는 격동기에 생존을 위해 투쟁적으로 살았던 그 시대 남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누구는 부역을 하고 누구는 독립투쟁을 하고, 누구는 그들을 돕기 위해 자금을 대고, 누구는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어느 시절이건 배곯는 사람 있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떵떵 거리는 이들이 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예전에 우리 민족이 억압받고 힘들었던 시절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땐,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애잔한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젠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다들 그러고 살아가는 거지 하는 심정이다. 대통령 잘못 뽑아서 미중일의 호구가 된 요즘이나 일본에 나라 갖다 바친 저 때나 뭐 그리 다를까 싶기도 하다.


기생으로 출발했지만 당시의 수요에 따라 옥희는 배우가 되고 연화는 가수가 된다. 그렇게 직업여성으로 멋들어진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연화는 극장주의 세컨드가 된 후 아들을 낳지 못해 구박받다 아편중독자가 된다. 월향은 미혼모가 되었지만 미 영사관의 비서로 취직했다가 미국으로 떠나 새로운 인생을 산다. 옥희는 배우로 승승장구했으나 전쟁 막바지 일제의 총동원령과 자원 수탈로 경성 시내는 흉흉해지고 예단의 병구완으로 고달파진다. 결국 예단의 마지막과 기방을 지킨 것은 옥희였다. 그렇게 옥희는 한철과의 사랑을 이루어지지 못했고, 친구라 생각했던 정호와도 소원해지고 만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사랑도 빠질 수 없다. 그런데 남성들의 태도, 특히 한철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우로 일하면서 한철을 대학공부 시켜 번듯한 인간으로 만들어낸 건 옥희였지만 둘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생 출신이라는 현실의 벽은 높았다. 작가도 100여 년 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여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겠지만, 한철이 처가와 뒤늦게 찾은 본가의 재산을 모두 거머쥐게 만든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었으면서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옥희가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는데도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은 인간이 한철이었다. 반면 정호는 예단의 병구완을 하는 동안 옥희에게 어렵게 곡식과 과일을 구해주었어도 옥희에게 정호는 사랑은 아니었다. 해방 후 정호가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잡혀갔을 때 옥희가 한철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은, 당신의 재력으로 권력에 손을 좀 써달라고 했으나 결국 정호는 처단 당했다. 옥희를 향한 정호의 사랑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들다니 씁쓸했다.


굶어죽을 뻔 했던 옥희를 구원해준 이는 이토였다. 옥희의 남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구애를 했던 일본군인 이토가 보낸 돈으로 연화를 매음굴에서 구해냈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토가 일본인이 아니었다 해도 옥희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 같다. 옥희의 사랑은 한철에게만 향했으나 정호와 이토의 사랑은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정호는 옥희를 향한 사랑을 평생 이어갔고 이토는 조선을 떠나기 전까지 옥희를 챙겼으니까.


마지막 옥희의 제주도행이 뜬금없다 싶었는데어릴 때 정호가 준 푸른 돌을 간직하고 있었듯 옥희는 정호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마음 속에 품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옥희가 처음 딴 전복에서 나온 진주를 보며 했던 생각을 읽으니 더 이해되었다.


"껍데기에서 전복을 빼내려는데, 칼날이 말캉말캉한 살 속에 감춰져 있던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은은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완벽한 구체, 내 손바닥 위에 놓은 그것은,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 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잇을 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그리고 옥희는 생각한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역사영화는 스포일러 그득하니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하지만 아는 사실이라 해도 팩트의 빈 공간을 채우는 픽션에 감동받고 싶기 때문에 영화를 본다팩트와 픽션이 날실과 씨실로 촘촘히 엮어져 하나의 작품이 되는 영화에 감동한다마찬가지 이유로 역사소설을 읽는다영상이 주는 감동과는 차원이 다른 텍스트 서사는 독자를 위한 공간을 확보해 두고 있다독자는 등장인물의 외양 묘사말과 행동을 읽으면서 그간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 속 유사 인물을 찾아내어 매칭해보기 바쁘다장편의 경우 작가의 스타일에 동화되어가면서 서사의 톤을 각성하게 되고 독자는 감독이 된다소설 속 세계와는 다른 독자만의 세상을 머릿속에서 구현해낸다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많이 알고 있고 다양한 미디어적 배경지식까지 있다면 독자의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일제 강점기와 해방그 이후 20여 년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들을 만나며 공감하다 탄식하고슬퍼하다 응원하게 될 것이다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면 어땠을까나는 과연 저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이 부질없을지 몰라도 장면장면마다 떠오르게 했다그리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역사소설을 읽으며 그 시절에 푹 빠졌다가도 현실로 돌아오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본다이것이 역사소설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격동기를 헤쳐 온 우리 앞 세대의 삶을 이 소설로 한 발짝 가까이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 이 리뷰는 가제본 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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