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안 되지만 트리플 27
정해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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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작가의 소설을 좋아해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쫀쫀한 스토리텔링과 개연성, 반전의 맛으로 읽는데 작가는 모든 면을 만족시켜준다. 늘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나는 읽을 때마다 재미있었다고 화답했다. 작가가 내 감상을 읽지는 않겠지만...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트리플 시리즈스물일곱 번째로 정해연 작가의 소설집 <말은 안 되지만> 서평단을 뽑는다기에 얼른 신청했다. 그동안 장편만 읽었는데 단편은 어떨지 궁금했다. <말은 안 되지만>에는 단편 소설 세 편이 실렸는데 장르는 미스터리, 공포, 환상으로 각기 다르다. 한 편당 40여 쪽밖에 되지 않아 후루룩 읽었다. 소설의 분량은 짧지만 생각은 길어졌다.


첫 번째 소설 관심이 필요해의 주인공 중혁은 의사다. 그는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환자 영우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사한다. 영우를 구해야한다는 그의 일념이 시선을 한 쪽으로만 향하게 함으로써 다른 가능성은 차단한다. 중혁의 행동은 선입견에 갇히면 시야각이 얼마나 좁아지는지를, 자신이 본 것이 맞는다고 확신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소재로 했지만 돌봄의 범위를 묻는다. 아이 양육은 제대로 된 부모가 해야 한다는 인식은 돌봄의 주체를 오롯이 개인에게 둔다. 부모가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사회가 나누는 것이 복지다. 우리나라가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고 선전하지만 돌봄을 여전히 개인의 몫으로만 두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선진국이라는 구호는 있어도 복지국가는 요원하다.


두 번째 소설 드림 카는 귀신이 등장한다. 성공한 남자 인우가 드림 카 마이바흐를 몰고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세운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맨발로 흰 옷을 입고 선 여성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얼굴 한 구석은 함몰되었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나는 처음엔 교통사고 당한 귀신인가 했는데, 계속 나타나는 게 아무래도 인우에게 원한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스러움을 독자도 그대로 느끼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귀신으로 보이는 여성이 누구일지,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예측이 쉬워졌다.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숭앙하는 지경에 이른 인간의 최후를 보며 통쾌해야 하는데 씁쓸했다. 주인공 사내와 우리가 뭐 그렇게 다를까...


세 번째는 표제작인 말은 안 되지만이다. 인간이 돼지로 변한 세상에서 주인공만 말이 되었다. 사람이 돼지가 되고 말이 된다는 게 말이 안 되는상황이고, 말이 거부당하는 사회이니 말은 안 되는거다. 중의적인 제목이다.


가족들은 성형수술을 시도하나 실패했고 말이 된 주인공은 돼지 사회에서 배제당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라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마사회! 그 곳에는 소수의 말이 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경주마가 된 것이다. 말은 안 되는 사회에서 경주마가 된 것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야한다. 순위권 안에 들지 못하면 고기가 될 것이므로.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현실과 동일하게 펼쳐지는 상황은 아이러니다. 이 소설은 드림 카와 주제가 다른 것 같아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공포스럽다. 아무리 다른 세계가 펼쳐져도 지금 우리가 사는 현 세계의 트랙은 변함없을 거라는 작가의 목소리는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일등과 승리만을 추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세상이 지옥이 아니면 무언가.


작가의 단편은 이번 책으로 처음 읽었다. 장편을 이끌어가는 힘이 단편에서는 압축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힘으로 작동했다. 짧지만 묵직한 이야기는 읽은 후에도 생각거리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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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모네 -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스페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백석 지음, 클로드 모네 그림 / 저녁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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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클로드 모네의 콜라보레이션!

시화집 <백석과 모네>가 저녁달 출판사에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스페셜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불호의 격차 없이 다가선다. 반면 한국 시인임에도 백석은 덜 대중적이다. 그나마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윤동주의 서시나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비하면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북한에서 활동한 시인이라는 이유로 남한에서는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해금된 1987년 이후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된 이유도 있다.

 

나도 백석의 시를 접한 때는 2000년대 초반이었고 그의 삶과 시를 더 알고 싶어 책을 여러 권 구매했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늘 같은 페이지의 시집을 펼쳐보곤 했다. ‘통영2’는 첫눈에 반한 난()이라는 여성을 만나려고 통영을 드나들며 썼던 여러 편 중의 하나다. 그는 난을 만나지 못한 채 충렬사 계단에 앉아 시를 썼다는데, 나는 이 시를 소리내어 읽을 때면 시인의 옆에 앉아 한산도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짭짤한 바람 맛이 나고 뱃고동 소리가 뿡뿡 내 귀를 울린다. 모네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다. 특히 아르장퇴유에서 지내던 시절, 그곳의 자연과 아내 카미유와 아들의 모습이 담은 그림들을 좋아한다. 이 둘의 작품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는 책이라니 욕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석과 모네>에는 백석의 시 100편과 모네의 그림 125점이 실렸다. 처음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수련으로 시작하고 출발하는 시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다. 사모하던 여인 난과 절친 신현중의 결혼 소식을 듣고 썼다는 이 시에 배치한 그림은 ‘Peony Garden’이다. 정원가이기도 했던 모네가 직접 가꾼 지베르니 정원의 작약 꽃밭을 클로즈업한 듯한 장면과 백석이 봄밤을 거닐며 생각하던 그녀가 오버랩된다.

 


출판사는 백석의 시에 어울리는 모네의 그림을 신중히 선정하여 두 예술가의 작품이 서로 대화하듯 독자와 소통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시의 느낌과 그림의 조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고, 시에 얽힌 사연을 아는 독자라면 시의 감성과 그림이 결이 적절한지 판별하고 싶은 마음에 그 페이지에 오래 머물 것이다. 모네의 그림을 보고 싶어 이 책을 선택했다면 백석의 시를 발견하는 행운이 될 것이고, 백석의 시집이라 생각하고 골랐다면 그림과 함께 감상하며 만족스런 원플러스원이 될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을 읽은 지도 꽤 되었고 최근엔 백석 시집을 열어보지 못했다. 이번 책을 읽으며 (나에게만)새로운 시를 발견했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반찬 친구에게 전하는 글인 선우사라는 제목이다. 시인은 흰밥에 가재미 뿐인 상을 앞에 두고도 서럽거나 외로울 이유 하나 없다고 썼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고 했다. 나는 혼밥이 일상인데 밥상 앞에서 별 생각이 없었다. 실은 밥을 먹으면서도 늘상 무언가를 듣거나 읽는다. 반찬을 친구라 여긴 적도 없다. 어떤 대상을, 또는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때가 언제였던가... 단촐한 밥상으로 이런 심상을 펼쳐나간 시를 낭송해 보면서 시인의 시심을 따라가 보았다.

 

이 책에서 발견한 모네의 그림은 겨울 풍경이다. 그동안 꽃이 들어간 정원이나 연못 그림만 보았는데 겨울을 소재로 한 그림을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 ‘까치는 소복이 눈 내린 겨울 풍경이다. 햇빛에 반사된 눈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권의 책으로 시와 그림의 감성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이 책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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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넘어가 창비아동문고 337
강인송 지음, 오묘 그림 / 창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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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며 어른들이 할법한 말을 한다. 나도 정말 그렇다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같이 깔깔댄다. 우리는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내 감정을 들여다 볼 시간을 가질 여유 없이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아이들은 어떨까? 자신이 겪는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 줄 느낄 겨를도 없이 하루를 산다. 집과 학원을 숨가쁘게 오가는 사이사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을 휴식이라 여기는 듯 하다.


바쁜 와중에 책을 읽을 시간을 내는 아이들이 드물기는 하지만 추천하고 싶은 동화가 출간되었다. 강인송 작가의 동화집 <너에게 넘어가>에는 어린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서 겪는 미세한 감정을 절묘하게 포착한 동화 7편이 실렸다. 절대 공감할 사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또래의 이야기에 글 읽는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웹툰 작가 오묘의 삽화가 동화의 재미를 한껏 살려주었다.


굴러가, 사랑 : 전학 온 첫날부터 책상 위 물건들이 자꾸만 그 애 앞으로 떼구르르 굴러가는 것은 서현이 맘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일까?

오히려 좋아 : 처음 해보는 일들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어도, 오히려 좋아!

너에게 넘어가 : 팔씨름에서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미나가 남몰래 잘 우는 우태에게 져 주고 싶은 마음~

지유들 : 한 반에 지유가 셋! 선생님의 결정은 단발 지유, 안경 지유, 점 지유! 그러나 학급회에서 나온 결론은, 불리고 싶은 이름을 스스로 짓자! 지유들은 어떻게 불리고 싶을까?

기선을 제압하려거든 : 기선 제압의 타이밍을 계속 놓치던 전학생 장주이는 얼떨결에 축구하러 달려 나간다. 제일 좋아하는 축구를 마다할 리가~

마음이 뻥! : 학교에서 똥 누고 변기가 막히면? 그야말로 대참사! 래희와 이모의 변기 뚫기 대작전은 성공일까?

사랑은 소울을 타고 : 선생님과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가 김민의 귀에도 꽂혔다. 어른과 아이도 옛날 노래로 공감할 수 있다는~




요즘 애어른 할 것 없이 호흡이 긴 글을 읽지 못한다. 영상도 예외는 아니라 쇼츠가 인기 있는 이유다. <너에게 넘어가>에 실린 동화 7편은 각각 20여 쪽 정도라서 장편동화를 읽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딱 좋은 분량이다. 아이들이 솔깃한 소재에 동화마다 예쁜 삽화가 들어있어 영상 못지않은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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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와 한준이의 재미있고 신나는 경제 교실 - 키워드로 읽는 경제
김인철 지음, 안혜란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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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경제동화 <서연이와 한준이의 재미있고 신나는 경제 교실>이 청어람 주니어에서 출간되었다. 저자 김인철씨는 KDI(한국개발연구원)의 경제정보센터 부소장을 지냈으며 여러 권의 경제 서적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서연이와 한준이네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경제 전반에 대한 내용을 초등학생이 이해하기 쉽도록 대화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밥상머리 교육하듯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부모가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1부 경제 원리에는 36꼭지를, 2부 시사 경제에서는 30꼭지를 다룬다. 초등학생이 읽기에 내용이 좀 많은 듯하고 270쪽이나 되기 때문에 한 번에 읽기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각 꼭지가 4~5쪽 내외의 분량이라 하루에 두 세 꼭지 정도 읽는다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귀여운 삽화가 배치되어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도록 도와준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경제 개념 66가지를 잘 이해한다면 6학년 사회 시간에 배울 정치, 경제를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경제 관련 시사 뉴스나 사회 문제를 접할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질 것이다. 각 꼭지마다 교과 연계되는 단원명을 첨부해 두었다.


고학년이 된 자녀가 하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 어려울 때가 간혹 있는데 경제 관련 질문의 경우 더욱 그러할 것이다. 부모도 학창 시절에 경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전문적인 내용이라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럴 때 이 책을 부모가 먼저 읽어보고 아이에게 건네거나 같이 읽으면서 이야기 나눠보면 좋다.


청어람 주니어 블로그에 들어가면 활동지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활동지를 아이에게 그냥 건네면 그저 문제집 푸는 숙제를 하나 더 내는 꼴 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책을 같이 읽은 다음 자녀와 같이 활동지를 풀어보자. 부모도 답지 없이는 틀릴 수 있을 것이다. 낱말 퍼즐과 빙고 놀이를 게임처럼 같이 하고,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독서 퀴즈를 풀어보면 된다. ‘생각 펼치기에서는 토의 토론도 해볼 수 있다.




초등 고학년과 경제 책으로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이 너무나 세상 물정을 모른다. 영어 단어를 많이 알고 고난이도의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내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제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학용품 하나를 살 때도 나는 세금을 내고 있으며, 곧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예정인 우리나라의 노인 문제가 세금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같은 것들이 초등학생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책을 부모와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세상을 이해하는 눈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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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진민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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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단어의 어원을 따져가며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어떤 작가가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독일어 사전을 들고 가겠다고 하기에 궁금했었다. 한동안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져서 관련 책을 찾아 읽곤 했다. 그래서 독일어를 소재로 쓴 책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에 관심이 갔다. 별 상관없어 보이는 내 관심사들이 이 책으로 이끌었다.


저자 이진민씨는 어려서부터 낯선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미국에서 10년을 살다가 독일에서 산지는 7년 차에 접어들었고 어른이 되어 배우는 외국어의 느낌은 다르더라고. 저자는 외국어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확장으로 가는 계단이고 다른 세계로 난 창문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음미하고 싶은 단어들에 관한 책이며, 한국에 전하고 싶은 독일어 단어들을 골라 실었다고 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을 집필하면서 독일어와 독일 사회에 관한 이해가 아주 조금 깊어진 것 같다며 독자들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동안 다른 나라를 소개하는 책들을 여럿 읽었는데 단어를 가지고 그 나라와 우리를 비교하는 책은 처음이었다. 독일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차이부터 사고방식의 차이를 단어를 통해 알게 해주어 내내 탄식하며 읽었다. 저자의 타고난 언어적 감수성과 전공이 정치철학이라서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다른 세계를 대하는 열린 태도가 이 책의 단단한 토양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처음 접하는 독일어를 이렇게 의미 있는 책으로 만나게 되어 기쁘다.


저자는 단어에 들어있는 큰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독일어 16개를 골랐다. 한결같이 흥미롭게 읽혔지만 때론 웃겼다가 진지해지기도 했다. 단어 하나에서 시작해 파생되는 다른 단어들, 그 안에서 독일 사람들의 모습과 독일 사회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RAUSWURF : 내던져진 존재들


Rauswurf(라우스부르프)던짐을 뜻하는 명사 Wurf바깥쪽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 raus가 붙은 말이다. 원래는 퇴출이나 제명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지만, 유치원에서는 졸업하는 아이를 밖으로 던져주는 세리머니로 쓴다.


저자는 독일 유치원에서 하는 행사인 Rauswurf(라우스부르프)라는 단어로 하이데거의 피투성기투성을 연결했다. 피투성은 필연이고 수동이지만 기투성은 가능성이고 능동이다. 세상에 오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내던져져서 어느 정도 자라면 자유의지대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에는 내던져진 존재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중간에 혹여 굴러떨어지더라도 보호 장치의 역할을 하는 버퍼 존(buffer zone)이 있다. 유아반에서 유치반으로 올라갈 때는 상급반에서 익숙해질 시간을 따로 두어 적응하도록 하고, 초등학교 입학전에는 포어슐레라는 학교 예비반 제도가 있다. 또 고등학교 졸업 후 관심 분야에서 직접 일해보는 인턴십 프로그램이 제도화 되어있다.


Rauswurf(라우스부르프)와 상응하는 한국어는 이소(離巢)와 포란(抱卵)으로 이소는 독립, 포란은 품어줌으로 연결했다. 진정한 독립은 음식을 해 먹고 옷을 빨아 입고 청소를 하고 필요한 돈을 벌어 살림을 꾸릴 수 있는 능력, 세상에서 구르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다. 나 역시 이렇게 생각하며 아들 둘을 양육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아이들이 구를 세상과 거리가 있더라도 저자는 최선을 다해 매트리스를 깔아보겠단다. 자신의 아이만을 위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도 깔아주겠다고. 무력하게 던져진 존재를 품어줌으로써 자신도 따뜻하게 데워지며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MELDEN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Melden(멜덴)알리다, 보고하다, 신청하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수업 중에 학생이 뭔가 말하고 싶을 때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드는 행위도 멜덴이라고 한다.


독일 사회에서 멜덴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서 공동 생활에서의 규칙이다. “제가 이걸 해도 되나요?”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 단순히 허락을 구하는 의사표시만은 아니다. 학교에서 멜덴은 발표에 관한 규칙이다. 한국에서 발표를 잘한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감 있고 똘똘하게 적극 참여하는 것이지만, 독일 교실에서 멜덴을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남을 배려하고 규칙을 잘 지킨다는 말이다. 다른 친구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손을 들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멜덴에는 배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이 골고루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


저자는 멜덴이라는 단어에서 함께 하는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배웠다. 무려 정치학 박사가 초등 공동체에서 말이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우리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당연한 듯 말하면서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말로만 외치고,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다.


SICHERHEIT : 독일을 독일답게 하는 단어


Sicherheit(지허하이트)안전, 안전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영어로 security, safety, reliability, certainty, guarantee 등의 의미가 모두 포함된 넓은 개념이다.


독일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으면서 뭔가를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편이고, 속도와 효율보다는 지속성과 안전성을 중시한다. 날림공사로 공기를 단축해 공사 도중인 아파트가 무너지는 우리나라와는 정확하게 반대다. 이런 일이 아파트 공사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더 문제다...


독일 교육 과정에서 저자가 가장 고마워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독일의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은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탈 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때 생존 수영을 의무적으로 배우는데 멋진 폼으로 빠른 기록을 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둔다. 자전거도 면허를 따야 한다.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도 자전거가 도로에서 타기 적합한지 최종 검사를 받아야 한다.


저자의 아이가 사고 리포트 작성하는 법을 배우고 시험을 본 에피소드에서 저자는 신선했다고 표현했는데 나는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다. 사고 기록 보고서는 사고 당시의 상황을 있는 사실대로 기록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을 적으면 감점 요소가 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누구나 목격자가 될 수 있으니 이런 글쓰기 교육이야말로 독후감이나 논설문 보다 더 중요하다.


저자는 독일 사람들이 자기들이 쓰는 언어와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독일어는 규칙적인 언어이며 발음도 정직하고 예외가 별로 없는 편이다. 독일 사람들은 예외를 두는 일에 엄격하고 규칙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 문제에는 고지식할 만큼 깐깐한 독일인의 태도가 독일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직접 가보지 못한 나라를 책으로 만날 때, 그곳의 느낌은 물론 객관적이라 할 정보까지도 저자의 시선을 거쳐서 내게 당도한다.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처럼 저자의 시각이 깃든 독일 이야기라면 기꺼이 환영이다. 동양 북스에서 시리즈 형식으로 낸 영어, 일어 책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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