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진민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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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단어의 어원을 따져가며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어떤 작가가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독일어 사전을 들고 가겠다고 하기에 궁금했었다. 한동안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져서 관련 책을 찾아 읽곤 했다. 그래서 독일어를 소재로 쓴 책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에 관심이 갔다. 별 상관없어 보이는 내 관심사들이 이 책으로 이끌었다.


저자 이진민씨는 어려서부터 낯선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미국에서 10년을 살다가 독일에서 산지는 7년 차에 접어들었고 어른이 되어 배우는 외국어의 느낌은 다르더라고. 저자는 외국어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확장으로 가는 계단이고 다른 세계로 난 창문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음미하고 싶은 단어들에 관한 책이며, 한국에 전하고 싶은 독일어 단어들을 골라 실었다고 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을 집필하면서 독일어와 독일 사회에 관한 이해가 아주 조금 깊어진 것 같다며 독자들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동안 다른 나라를 소개하는 책들을 여럿 읽었는데 단어를 가지고 그 나라와 우리를 비교하는 책은 처음이었다. 독일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차이부터 사고방식의 차이를 단어를 통해 알게 해주어 내내 탄식하며 읽었다. 저자의 타고난 언어적 감수성과 전공이 정치철학이라서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다른 세계를 대하는 열린 태도가 이 책의 단단한 토양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처음 접하는 독일어를 이렇게 의미 있는 책으로 만나게 되어 기쁘다.


저자는 단어에 들어있는 큰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독일어 16개를 골랐다. 한결같이 흥미롭게 읽혔지만 때론 웃겼다가 진지해지기도 했다. 단어 하나에서 시작해 파생되는 다른 단어들, 그 안에서 독일 사람들의 모습과 독일 사회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RAUSWURF : 내던져진 존재들


Rauswurf(라우스부르프)던짐을 뜻하는 명사 Wurf바깥쪽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 raus가 붙은 말이다. 원래는 퇴출이나 제명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지만, 유치원에서는 졸업하는 아이를 밖으로 던져주는 세리머니로 쓴다.


저자는 독일 유치원에서 하는 행사인 Rauswurf(라우스부르프)라는 단어로 하이데거의 피투성기투성을 연결했다. 피투성은 필연이고 수동이지만 기투성은 가능성이고 능동이다. 세상에 오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내던져져서 어느 정도 자라면 자유의지대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에는 내던져진 존재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중간에 혹여 굴러떨어지더라도 보호 장치의 역할을 하는 버퍼 존(buffer zone)이 있다. 유아반에서 유치반으로 올라갈 때는 상급반에서 익숙해질 시간을 따로 두어 적응하도록 하고, 초등학교 입학전에는 포어슐레라는 학교 예비반 제도가 있다. 또 고등학교 졸업 후 관심 분야에서 직접 일해보는 인턴십 프로그램이 제도화 되어있다.


Rauswurf(라우스부르프)와 상응하는 한국어는 이소(離巢)와 포란(抱卵)으로 이소는 독립, 포란은 품어줌으로 연결했다. 진정한 독립은 음식을 해 먹고 옷을 빨아 입고 청소를 하고 필요한 돈을 벌어 살림을 꾸릴 수 있는 능력, 세상에서 구르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다. 나 역시 이렇게 생각하며 아들 둘을 양육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아이들이 구를 세상과 거리가 있더라도 저자는 최선을 다해 매트리스를 깔아보겠단다. 자신의 아이만을 위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도 깔아주겠다고. 무력하게 던져진 존재를 품어줌으로써 자신도 따뜻하게 데워지며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MELDEN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Melden(멜덴)알리다, 보고하다, 신청하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수업 중에 학생이 뭔가 말하고 싶을 때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드는 행위도 멜덴이라고 한다.


독일 사회에서 멜덴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서 공동 생활에서의 규칙이다. “제가 이걸 해도 되나요?”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 단순히 허락을 구하는 의사표시만은 아니다. 학교에서 멜덴은 발표에 관한 규칙이다. 한국에서 발표를 잘한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감 있고 똘똘하게 적극 참여하는 것이지만, 독일 교실에서 멜덴을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남을 배려하고 규칙을 잘 지킨다는 말이다. 다른 친구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손을 들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멜덴에는 배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이 골고루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


저자는 멜덴이라는 단어에서 함께 하는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배웠다. 무려 정치학 박사가 초등 공동체에서 말이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우리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당연한 듯 말하면서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말로만 외치고,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다.


SICHERHEIT : 독일을 독일답게 하는 단어


Sicherheit(지허하이트)안전, 안전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영어로 security, safety, reliability, certainty, guarantee 등의 의미가 모두 포함된 넓은 개념이다.


독일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으면서 뭔가를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편이고, 속도와 효율보다는 지속성과 안전성을 중시한다. 날림공사로 공기를 단축해 공사 도중인 아파트가 무너지는 우리나라와는 정확하게 반대다. 이런 일이 아파트 공사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더 문제다...


독일 교육 과정에서 저자가 가장 고마워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독일의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은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탈 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때 생존 수영을 의무적으로 배우는데 멋진 폼으로 빠른 기록을 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둔다. 자전거도 면허를 따야 한다.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도 자전거가 도로에서 타기 적합한지 최종 검사를 받아야 한다.


저자의 아이가 사고 리포트 작성하는 법을 배우고 시험을 본 에피소드에서 저자는 신선했다고 표현했는데 나는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다. 사고 기록 보고서는 사고 당시의 상황을 있는 사실대로 기록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을 적으면 감점 요소가 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누구나 목격자가 될 수 있으니 이런 글쓰기 교육이야말로 독후감이나 논설문 보다 더 중요하다.


저자는 독일 사람들이 자기들이 쓰는 언어와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독일어는 규칙적인 언어이며 발음도 정직하고 예외가 별로 없는 편이다. 독일 사람들은 예외를 두는 일에 엄격하고 규칙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 문제에는 고지식할 만큼 깐깐한 독일인의 태도가 독일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직접 가보지 못한 나라를 책으로 만날 때, 그곳의 느낌은 물론 객관적이라 할 정보까지도 저자의 시선을 거쳐서 내게 당도한다.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처럼 저자의 시각이 깃든 독일 이야기라면 기꺼이 환영이다. 동양 북스에서 시리즈 형식으로 낸 영어, 일어 책도 읽어보고 싶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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