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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ㅣ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평점 :

‘페미니즘 테마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새벽의 방문자들>은 여섯 작가들의 단편소설집이다. 그 작가와 제목은 다음과 같다. 장류진의 “새벽의 방문자들”, 하유지의 “룰루와 랄라”, 정지향의 “베이비 그루피”, 박민정의 “예의 바른 악당”, 김현의 “유미의 기분”, 김현진의 “누구세요?”이다.
이 책은 타이틀을 ‘페미니즘 테마소설’이라고 달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남성 독자들이 볼 지는 의문이다. 몇 년 전부터 격세지감이라 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 일어난 큰 변화는 “미투 운동”이란 단어로 대표된다. 이러한 이름으로 네이밍된 사회의 변화는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내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부정적인 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상 참 좋아졌지, 어디 지 잘못을 당당하게 드러내나?”
“무서워서 이젠 여자에게 이쁘다는 말도 함부로 못하는 세상이 됐네.”
“여권 차암 많이 신장됐다.”
같은 비아냥거림들이 많았다.
어쩜 당신 주위엔 남성우월주의자들만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일수록 미디어에 회자되는 긍정적 변화보다는 항간에 떠도는 말들이 현실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럼 당신도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소재로 사용된 사례들이 내게는 없었던가? 유사한 상황을 겪으며 어땠는지 회상해보게 되었다.
먼저 “베이비 그루피”나 “유미의 기분”에서처럼 고등학교 시절 남선생들의 무례한 행동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지금은 감히 내뱉기 어려운 모멸감을 주는 언어적 표현은 일상다반사였다. 그것은 폭력적이기도 했고 색드립에 가깝기도 했다. 슬그머니 접촉하는 행위는 지금으로 보자면 추행이었다. 그런 시절을 아무런 저항 없이 지나왔다. 그런 짓거리들은 무례함을 넘어 여성, 어린 여자를 깔보는 비인간적인 언행이었다. 물론 모든 남교사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친했던 내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좋아했던 남선생에게 당했던 성폭행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고백했었다. 당시 그 말을 듣고 내가 무어라 응대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임신한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틈을 타 친구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그런 짓을 했다고 했다. 친구가 그의 행동은 사랑도 뭣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못된 짓이었다는 것을 어슴프레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고, 경찰에 알리려는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다. 여성이 이런 식으로 남성에게 당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을지 예상조차 힘들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룰루와 랄라”의 남편과 “누구세요?”의 남자친구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얼마나 빡씬지(‘빡씨다’는 이 단어만이 그 험난함의 최고급 표현이라 생각됨)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다. 남편과 남친의 대표격으로 대변되는 그들은 몹시 이기적이다. “룰루와 랄라”의 남편은 일견 대화도 통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비치지만 아니다. 대화를 이어가다 더 이상 말하기 귀찮아지면 “또, 또, 쓸데없는 디테일 물고 늘어지네. 싸우자고 덤비지 좀 말고, 좀! 넌 밖에선 안 그러면서 나한테만 그러더라.”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 대화의 앞부분에 남편이 아내에게 회사 당장 관두라고 말할 때부터 감정이 상했던 거였다. 그 대답에 아내가, “관두고 뭐하냐? 너 바나나나 잘라주면서 사냐?”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내로부터 사소한 배려? 아니 대접을 받아오던 것을 비꼰다고 여겼던 것이다. “누구세요?”의 남친은 더 가관이다. 세상 약삭빠르고 자아도취에 빠진 인물의 대명사이다. 이런 인간들은 특히 여자에게 더 그렇다!
나도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해오면서 저 소설들과 유사한 상황과 대화가 없지 않았다. 동일 상황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온도차는 몹시도 크고 대처법도 다르다. 이런 차이를 견뎌낸 나의 방식은 체념이었다. 그리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길게 말한다고 가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배우자에게 내 감정을 동의받으려는 시도는 포기했다. 결과적으로는 싸우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겉으로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남편 스스로 자신은 200점짜리라 여기는 황당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오래 살다보니 말이 좀 많은 다른 여성들과의 대화가 거북스럽고 그런 이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게 되는 단점 또한 있다. 그나마 결과론적으로 장점이 있다면 읽고 쓰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결혼 초에는 육아에 몰두했고,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이나 이상형을 찾기 위해 10여 년 간은 읽기만 했고, 작년부터는 매일 글쓰기를 시작해서 1년이 넘어가고 있다. 어디에 가닿을지 알 수는 없지만 넘치는 언어와 감정의 배설을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다. 어쩌다보니 이 소설집 리뷰가 내 인생에 남자라고는 한 명 뿐인 사람과의 생활 톺아보기가 되어버렸다.
서두에도 밝혔듯 이 소설집을 남성들이 많이 읽지 않을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여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남성들이 꼭 읽어보면 좋겠다. 동성 친구들간에 시시덕거리며 소비되는 이야기로, 혹은 인터넷의 신빙성 없고 자극적이기만 한 글들로, 유튜브의 검증되지 않은 가짜 정보들로 여성 일반에 대한 인식을 쌓는 것을 피하길 바란다.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카페의 집회에 직접 가보고 그들이 주장하는 게 무엇인지 듣고 알려고 노력하는 남성은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다보니 신문이나 방송 기사로 접하는 것들을 믿게 되는데 그것들도 팩트만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소설이 현실반영률이 높다. 이 소설집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우리 사회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극단으로 치닫는 남녀갈등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