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을 내는 사장은 말투가 다르다 - 사업 성패의 80%는 사장의 말투에 달려 있다 CEO의 서재 29
요시다 유키히로 지음, 김정환 옮김 / 센시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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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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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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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샀다. 2년 전에 읽었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가 쓴 활자는 소리를 냈고 냄새를 풍겼다. 르포르타주니까 생생한 걸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건조하고 덤덤한 서술이 주는 사실성이 자극적 묘사보다 강렬하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은 후 동물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었으나 그만한 책은 못 봤다.

 

신간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의 부제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문구를 보니 이번 책으로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어릴 때 살았던 대구의 집들에서 시작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거쳐 온 서울의 원룸들, 상경 후 처음 제대로 된 아파트에 살았던 일산, 그리고 다시 서울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들이다. 서울에서는 동생과 몇 년 같이 살았고 일산에서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신혼집을 차렸다. 자신이 살아온 집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방에 대한 이야기였고 실은 여자의 방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살아온 집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책으로 낸 이유는? 작가의 목적, 아니 소망은 마지막에 나온다. 하지만 그걸 읽기 전에 나는 이미 저자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내가 지나온 집들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작가가 집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의 원형으로 대구 북성로의 집을 가지고 있듯 나도 그런 집이 있으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없다.

 

내 기억 속 첫 집은 부산에 이사 와서 처음 살게 된 가게 집이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우리 가족은 경북 안동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그 집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서움 때문이다. 바닷바람이 유난한 부산의 겨울 밤을 처음 맛 본 날이었다. 이사 온 첫날 밤, 가족 네 명이 신발가게에 딸린 조그만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으나 나는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리로 된 가게 문을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모른다. 만화에서 본건지 TV 애니메이션으로 본 화면에서 연상한건지 그 때 내 머릿속에 그려진 장면은, 유령의 모습을 한 바람이 밖에서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너무나 무서웠다. 몇 십년이 지났어도 그날 밤의 오싹함은 잊을 수가 없다.

 

더 잘 살아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해 왔는데 우리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갔다. 아버지가 벌이는 장사는 죄다 망했고 늘어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야만 했다. 급기야 우리는 함바 식당 옆의 천막에서 살게 됐고 엄마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살았다. 인테리어가 웬 말이며 수세식 화장실이 뭐란 말인가. 집 같지 않은 그 곳에서 나는 정말이지 탈출하고 싶었다.

 

내 유년의 집에 관한 기억은 아름답기는커녕 벗어나고픈 공간일 뿐이었다. 남들이 집이라 말하는 공간에서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가게에 딸린 작은 방이었고 그나마 내게 허락된 사치스런 공간은 허리를 90도로 구부려야 움직일 수 있는 다락이었다.

 

아, 리뷰를 쓰기 전 예감했던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는데 리뷰를 쓰면서도 내가 살았던 집들과 함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집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좋았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 철없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시절들...

 

그리고 공간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 엄연히 존재하는, 성역할 이데올로기!

 

p.136

여성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고 사생활이 자주 침범당하는 사회에서,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여성과 남성이 집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두 성별이 한 집에 살 때 집을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쪽은 거의 여자다. 여자에게 집은 소유의 대상이기 이전에 관리의 대상이다. 남성은 생계 부양자로, 여성은 가사 노동자로 성 역할을 이분화할 때 집은 양쪽에게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집에서도 성 역할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위 내용은 결혼 후 내가 겪었던 심정과 같았다나는 결혼하자마자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고 결혼 후 계속 아파트에서 살았으며 내가 주로 머문 공간은 주방이었고 식탁이었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사감선생의 탈을 쓴 남편은 퇴근 후 집 곳곳에서 먼지가 발견되는지 확인했다. 당시엔 먼지를 싫어하는 본인이 직접 청소하면 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집 청소는 여자 담당이라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몸은 매일 씻어도 변기와 욕실 청소는 하지 않고, 주방에서 나온 음식은 맛있게 먹어도 조리과정과 식후에 나오는 주방쓰레기는 치운 적이 없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에게서 작가의 글과 같은 글이 나올 수는 없다. 아름답지가 않잖은가! 이런 리뷰는 작가의 책 홍보를 오히려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밀려온다. 거의 안티수준이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작가의 말마지막 문단에서 용기를 얻었다.

 

 

언제나 두려운 것은 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설익은 내가 말과 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봐,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자책할까 봐 두렵다. 나의 이야기를 인쇄될-박제될 글로 남기는 것은 그런 두려움을 무릅쓰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이토록 불완전한 내가 또 다른 불완전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여전히, 간절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나 같은 일천한 사람과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잖나! 그것도 간절하게! 작가가 살아온 집에 대한 기억을 읽으며 작가를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의 기억 덕분에 내 지난 시절을 돌아보았다. 그 시절에 내가 있었던 공간이 아름다웠다고 할 순 없지만 어쩌랴! 그 시절의 총합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작가가 살았던 집을 들여다보며 내가 살았던 집을 돌아보았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축적되어 지금 내가 이런 공간을 꾸미고 살게 된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다가, 유유자적하며 누웠다가 어슬렁거리다가 하는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리뷰를 쓰다가, 이 공간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지나온 시절들에 감사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건 하재영 작가이기에, 마지막 그의 말을 빌미삼아 감히 작가와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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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황홀한 역사 -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바트 어만 지음, 허형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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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천국, 불신지옥!”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길에서, 지하철에서 들을 수 있는 외침이 있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겁박하던 그 사람들은 아직 교회를 잘 다니고 있을까?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이상한 목사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친구따라 여름성경학교나 성탄절 예배에 가서 뭔가를 얻어먹은 기억은 있지만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 그 때 전도를 위한 어떤 액션이 들어왔을텐데 지속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은 걸 보면 당시 그 교회의 전도력보다 엄마의 교회불신력이 더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버금가는 엄마의 슬로건은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연애당!”이었다. 엄마의 말에 세뇌당한건지, 내가 연애고자라서 그랬는진 모르겠으나 교회도 안 갔고 연애도 안 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워딩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을 잘 믿어야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거라는 협박은, 현재도 중요하지만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냐는 유혹의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며 그러려면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말로 연결된다. 나는 이 모든 말들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무신론자라면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죽은 후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은 당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창세기의 줄거리 정도는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가장 논쟁적인 성서학자로 불리는 바트 어만의 신간 <두렵고 황홀한 역사>의 홍보를 보게 되었다. 무신론자이지만 부제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보니 흥미가 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진짜 성경에 그렇게(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적혀있는 건지, 예수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직접 한 건지, 아니라면 누가 만들어 퍼트린건지? 사람들은 왜 저런 (내 상식으론)얼토당토않은 말을 믿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서평단에 신청해서 읽게 되었다.

 

저자 바트 어만은 기독교인인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자신이 의구심을 품었던 것에 점점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진보적 성향의 교파로 옮겨서 공부하면서도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후 세계 연구를 계속 하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영향력이 큰 종교로 자리 잡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그가 책의 제목을 <천국과 지옥 : 사후 세계의 역사(Heaven and Hell:A History of the Afterlifr)>로 정하자 주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거나 더러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천국과 지옥 자체가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을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해 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으라고도 믿지 말라고도 종용하지 않을 참이다. 대신 나는 그 개념들이 서구의 지배적 문화인 기독교 내부의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가 당시 세계의 이교 종교들 가운데, 구체적으로는 유대교에서 발생했기에 특히 더 흥미롭다. 나는 사후 세계관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수정되고 변모했는지, 어떻게 믿음으로 자리 잡고, 의심을 사고, 믿음을 잃었는지 알고 싶다.

 

 

저자는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연구했고, 그것을 이 책에서 하나하나 정리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과 신화와 역사서를 정말이지 꼼꼼하게 훑어나간다처음에 책을 받아 두께와 크기를 보고, ‘들어가는 말을 읽고, 걱정이 좀 되었다. 나는 성경도 아예 모르고, 배경지식이 없는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기우였다. 저자의 설명이 어렵지 않았고, 성경 내용은 어차피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인용을 했는지 잘 따라가면 됐다. 그리고 성경 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논증의 예시로 든다. 예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나처럼 무신론자이면서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 읽기엔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른바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읽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믿어온 것이 저자에 의해 부정당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책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얼음장 같았던 자신의 믿음에 도끼가 날아와도 기꺼이 맞을 각오를 하는 사람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도끼가 자신의 생각애 쨍!하고 균열을 낸다면, 제목처럼 두려워서 다가가기 힘들었던 것의 황홀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책 내용 전체를 요약하기는 힘들고, 목차의 순서대로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장 천국과 지옥으로의 여정  에서는 네 편의 사후 세계 일화를 옛이야기 하듯 들려준다. 이 일화들은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안내한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간다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믿음의 시작은 어디였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보다 앞선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장 두려운 죽음  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죽음에 관한 사유들을 설명한다. 저자가 찾아낸 공통점은 죽음을 겁에 질려 맞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3장 사후 세계 이전의 사후 세계 에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플라톤에 이르러 지옥과 천국의 개념이 대중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죽음 이후 심판관 앞에 서면, 악한 자는 대가를 치르고 옳은 이를 행한 자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

 

4장 정의의 실현: 사후 상벌 개념의 부상 에서 저자는 플라톤의 사후 상벌 개념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천국과 지옥 개념을 낳게 한 것은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설명이다. 철학조차 사회시간에 짧게 주입식 교육으로 받은 내 머릿속엔 에피쿠로스=쾌락주의자라는 등식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쾌락이 육체적 쾌락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등식은 에피쿠로스의 견지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에피쿠로스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강렬한 쾌락은 고통을 야기할 뿐이며 이는 인간의 경험이 충분히 증명해준다고 부연했다. 그러므로 소박한 쾌락, 이를테면 적당한 음식과 술, 마음 맞는 친구들, 중대하고 흥미를 끄는 주제로 나누는 지적 토론 등을 장려했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문장들을 정리하자면 죽음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고, 자신이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물 가운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비문이라고 하면서 감동받았다는 비문을 소개한다. 오늘날 “R.I.P.(Rest In Peace:고이 잠드소서)”라는 뜻으로 고대에서 쓰인 라틴어 약어다. “n.f.f.n.s.n.c.” 해석하면 “non fui, fui, non sum, non curo.: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이제 없다. 개의치 않는다

 

마지막, ‘개의치 않는다에서 조르바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렵지도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랐던 카잔차키스의 묘비명과 함께

 

5장 히브리 성경과 죽음 후의 죽음

6장 되살아난 시체들: 고대 이스라엘의 부활 개념

7장 왜 부활을 기다리는가: 죽음 직후의 사후 세계

8장 예수와 사후 세계

 

5장부터 8장까지는 유대교의 사후세계관에서 시작해 성경과 예수의 사후세계관을 다룬다. 8장의 마지막 챕터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논쟁적 화두를 던질 내용이 나온다. 누가복음 16, 요한복음 3장과 11장을 왜 빼놓고 말하느냐는 비판을 저자는 예상했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며 초창기 예수의 말을 후대 기독교도들이 지어냈을 확률이 높다고 강조한다.

 

9장 예수 사후의 사후 세계관: 사도 바울

10장 수정된 예수의 사후 세계관: 후대의 복음서들

11장 요한계시록과 사후 세계의 신비

12장 육신으로 사는 영생

13장 기독교 사후 세계의 황홀경과 고문

 

9장부터 13장에서 다루는 성경은 모두 처음 듣는 내용이라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13장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도 처음 듣는 책!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우러르면 영원한 지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다.

 

14장 연옥, 윤회,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구원 에서는 연옥이라는 어원 시작과 기독교에서 윤회 사상, 그리고 모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다는 내용이다.

아래 나가는 말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가 사후 세계에 대한 특정 믿음(예를 들면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불)을 워낙에 자주 접하며 자라서, 그런 상벌의 장소가 아예 지당하다고 느낀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장소들이 존재하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다고 느낄 정도다. 이러한 믿음은 감정, 특히 그 어떤 감정보다 더 강력한 희망과 두려움으로 더욱 강화된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합리적인 사람 몇몇은 만족스럽고 충만한, 심지어 기쁨이 넘치는 사후 세계를 맞기를 희망하며, 영원히 지옥 같은 고문을 당할 가능성을 떠올리면 두려움에 미간을 접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런 관점을 원시적이고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관점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특히 지배적인데) 구약성경이나 역사적 인물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후대에 생긴 관점들이라 그렇다. 그러나 그런 관점들이 어째서 서구 문화를 1900년 남짓 지속적으로 지배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내 추측은 우리가 각자 영위한 삶의 질에 따라, 혹은 각자의 신앙적 헌신에 따라 개별적으로 상과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 인간의 매우 뿌리 깊은 요구와 염원을 충족시켰기에 그렇다는 거다. 도덕적 존재인 우리는 이 세상이 말이 된다고, 결국에는 정의가 이루어지며 선이 궁극에는 악을 이길 거라고 믿으며, 그렇게 믿어야만 하고, 또한 그렇게 믿고자 한다

 

 

 

 

이 책은 새로운 지식과 만나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논쟁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라면 종교와 무관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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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영화로 세상을 논하다 - 비판적 시각을 길러주는 우리 영화 읽기
이임정 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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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영화로 세상을 논하다>는 영화로 논술하기!라는 부제가 딱 어울린다. 책 읽기 힘들어하는 십대와 영화를 보고 토의 토론을 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영화 및 독서토론 관련 전문가 4명이 공동 집필했으므로 학부모나 교사들이 영화 논술 지침서로 사용하기에 좋을 것이다. 영화를 본 후 좋다! 아이들과 토론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막상 질문이나 논제를 만들려고 하면 막막해지는 경험을 해본 어른들이 이 책을 본다면, 땡큐! 할 것 같다.

 

책의 구성과 사용법을 당부한 프롤로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이 책은 영화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에세이와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는 활동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세이는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을 소개하고 그 장면에 담긴 가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활동지는 중 고등학교의 핵심 교육 가치를 중심으로 청소년 시기에 반드시 고민해야 할 가치들을 제시했습니다. 책에 선정된 다양한 영화를 통해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가치관을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고 나아가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 내용을 확인해보자.

 

맨 처음에 나오는 영화는 <우리들>이다. 줄거리와 함께 몇몇 장면에 담긴 해석을 정리해 준다. 그 다음에 나오는 꼭지는 ‘함께 보면 더 좋은 추천 영화’이다. <우리들> 뒤에는 <우아한 거짓말>과 <방과 후 옥상>이 추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질문지이다. ‘우리 영화와 함께하는 토론 논술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질문 및 토의 토론 논제를 제공하고 있다. 난이도 수준을 별 개수로 정했으며 ‘중등 도덕’, ‘고등 사회’처럼 학년과 과목도 구분해 두었다. <우리들>로 토론할 논제는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1부의 제목은 “어른들은 모르는 우리들만의 비밀”로 청소년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다루었다. <우리들> <4등> <벌새> <영주>까지 4편이다. 왕따, 성적지상주의, 자아정체성, 가난문제 등, 십대들이 겪는 현실적 문제와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친구 중 누군가는 겪을만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이다. 책으로 하는 논술 수업 사이사이에 이렇게 영화를 본 후 토의 토론을 한다면 지겹지 않게 활동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같은 경우 초등 고학년이라면 충분히 토론해볼 수 있는 내용의 논제들이다. 그러나 <벌새>는 주인공이 중학교 2학년이지만 난이도 높은 논제들이 있어서 고등학생까지 사용해 볼 만하다.

 

이 책은 1부에서 5부까지 각각 주제별로 4편씩 20편의 한국 영화를 선별해두었으므로 매주 한 편씩 한다면 다섯 달이 걸릴 것이고 2주에 한 번이라면 10개월이니 넉넉하게 1년간 할 수 있는 활동지를 득템한 셈이다. 교사나 학부모 입장에서 영화를 고르고 논제를 뽑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물론 토론수업을 하지 않는 학생이 읽어도 무방하다. 자신이 본 영화부터 골라 읽어보고 혼자 보았을 때 하지 못했던 생각을 배울 수 있다. 안 본 영화라면 책으로 미리 읽어본 후 영화를 보며 저자들의 생각 힌트를 토대로 비판적 사고를 하는 데에 도움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학생이나 수업에 활용할 어른들만 읽으라는 뜻인가? 당연히 아니다! 일반 어른 독자들, 특히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른이라고해서 청소년들보다 영화독해능력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를 다 보고도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는다.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지만 원하는 답은 얻을 수 없고 허무맹랑한 해석들이 난무하는 글들을 하릴없이 좇다가 시간낭비만 하기도 한다. 그럴 때 이런 책이 도움 된다. 이 책 한 권에 모든 영화를 다 다룰 순 없다. 그러나 보편적이면서도 시의적절한 문제작들 위주로 선정되어 있고, 같이 보면 좋을 추천 영화까지 소개하고 있다.

어른도 토론 활동지의 내용을 읽고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며 마냥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땐 혼자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같이 하는 것도 괜찮다. 독서모임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임에서 책 대신 영화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직지코드>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삽질>로 4대강 사업에 대한 토론을 해 볼 수 있고, <엑시트>로 인명구조에서 현장에서 만나는 딜레마 상황을, <나의 특별한 형제>로는 모성애에 대해 이야기 해볼 수 있다. 부록에는 '한국독서문화연구소 우리 영화 연구팀이 선정한 도서 50선'이 실려있어서 앞에서 소개한 영화와 연결되는 책읽기에 활용하기에 좋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책은 누구나 읽고 활용하기에 좋은 책! 되시겠다. 부모가 먼저 읽고 자녀와 같이 영화를 본 후 토론이라는 형식적인 활동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다. 그러다가 쟁점이 되는 사안으로 연결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개인적인 느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그런 활동을 자녀와 한다면 아마 가장 바람직한 활동이 될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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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
백운희 지음 / 책구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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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서

"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

라고 묻는다.

나는 대답이 궁금했다.

애가 물었을 것이고, 엄마는 답했을 것이다.

이 책을 고른 독자들도 공통적으로 궁금해 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1. 엄마가 등반가인가?

2. 애를 놔두고 히말라야까지 갔단 말인가?

남녀 불문하고 위 둘과 유사한 의문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두 질문은 결이 다른 듯하지만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름에 한계성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첫 질문에는 여성 등반가는 낯설다는 뜻과 함께 여자는 험한 산을 등반하기 힘들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두 번째는 애를 두고 등반을 떠나는 엄마의 모성애에 대한 의문이다. 즉 '엄마가 아이 옆에 늘 붙어있어야지 혼자 여행을 가다니!'라는 생각이다.

제목에서 단순한 히말라야 여행기가 아닐 것임을 예감했지만, 더 궁금했던 것은 왜 히말라야에 갔는지 였다. 아이가 궁금해 한 것처럼 독자도 궁금하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저자 소개부터!

저자 백운희씨는 대전일보 기자 출신으로 ‘정치하는 엄마들’의 공동대표를 했던 이력이 있다.

 "사회적 돌봄의 중요성을 공감하며 그간 목소리 내지 못했던 엄마들과 함께 서고 싶다. 당사자의 힘으로 바뀌어 가는 세상을 위해, 더디지만 계속 걸으려는 의지와 글쓰기는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힘이자 욕심이다."

 

2017년, 백운희씨는 7살 딸과 남편은 두고 혼자 여성포터들과 함께하는 히말라야 트래킹에 신청했다. 남편의 업무가 출장이 잦아서 딸을 지방에 있는 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남편은 호기롭게 잘 준비하라고 말했지만, 여행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가 포기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순서대로 진행했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저자는 네팔을 ‘눈 맑은 이들이 사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이, 심지어 길거리 개들까지 맑은 눈을 가진 것 같단다. 그럼에도 역사는 파란만장했고 2006년이 되어서야 오랜 내전이 종식되었다.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네팔은 다민족 국가이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무려 126개 민족이 공용어 네팔어를 제외한 103개 언어를 사용한단다. 내전이 길 수밖에 없었겠다. 종전이 되었다 해도 갈등들은 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2017년 당시 네팔은 여성 대통령, 여성 대법원장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전반적인 네팔 여성들의 삶과 권익보장은 열악한 상황다.

      

                                                       

 

저자가 여성 포터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여행을 했기 때문에 독자로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었고, 한국이든 네팔이든 맞벌이 여성이 짊어진 돌봄 노동의 무게감이 내 어깨에도 느껴졌다. 어린 자녀를 보육시설에 맡기고 일을 하고,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가사와 돌봄 노동의 과중함을 당연하게, 마치 전투 치르듯 살아냈던 그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자도 그랬다. 어느 추웠던 날, 아침 일찍 아이를 깨우던 날이었다. 만 세 살이 겨우 지난 아이가 하는 “엄마, 조금만 더 자면 안 돼요?” 라는 말에 저자는 이 작고 어린 자식을 잠조차 충분히 재우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는 나서서 말하고 글을 썼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된다고 강조하면서 엄마가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만드는 이 모순된 상황에 대해서!

아, 이 책이 여행에세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에게 이 리뷰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겠다. 이 책은 저자의 히말라야 트래킹 여행기가 맞다. 트래킹 여정과 고산병, 공정여행이란 허울아래 행해지는 낯부끄런 여행객들의 태도, 일행들의 지나친 배려에 대한 부담스러움, 여행을 통해 얻는 통찰 등. 히말라야 여행기에 해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저자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반, 그리고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불편함, 부당함, 그것들 중 자신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겼던 이야기들까지 더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독자에 따라 부각되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히말라야 여행기인줄 알고 읽었는데 그 외의 다른 내용의 분량이 많아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저자의 상황과 생각에 격하게 공감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책을 읽기 전 이 리뷰를 먼저 읽는 이들을 위해 책 내용 중 몇 부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p.56

세계적인 오지 탐험가 텔만은 랑탕을 “세계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평했다. 나는 자연의 위대함에 순응하는 이에게만 고유의 매력을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를 체득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p.95

사실 트래킹은 ‘침잠’에 적당하지 않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트래커라면 더욱더 그렇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에 몰입하기보다 당장 눈앞에 놓인 바위부터 무엇을 밟아야 안전할지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집중을 놓치는 순간 다칠 수도 있다. 오가는 발길에 밟히다 못해 바위처럼 굳어 버린 나무뿌리를 뛰어넘을지, 앞서간 이들의 발걸음처럼 뿌리 위에 발을 내딛을지조차 고민해야 했다. 여러 갈래 길 가운데 어디를 따라야 할지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마주하는 과정. 몸 상태를 기민하게 점검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p.248

여행은 짧고 다시 마주한 일상은 길다. 남은 여행 기간 내가 할 일은 일상을 버틸 힘을 찾는 것이다.

p.141

젠더 감수성과 다양성에 취약한 언론 환경은 복잡하고 파편화된 사회와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오히려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 시각을 담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커버링의 압력에 놓인다. 사회가 정한 특과 기대에 녹아들며 주류에 동화되기를 강요받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대놓고 차별하진 않더라도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 생리나 임신, 출산 등을 티 내지 말 것을 명시적이고 암묵적으로 요구받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p.146

다양한 측면에서 경험이 쌓이면 세상을 바라보는 질감이 달라진다. 그간 깨닫지 못한 영역에서 소외의 대상이 된 이들을 바라보려는 시각이 생겼다. 공감과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p.232

나아가 돌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싶었다. 아이들은 일정 기간 돌봄이 필수적이다. 노인과 장애인 등 사회 약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돌봄을 개인적인 문제나 그림자처럼 뒤로 남겨야 하는 일로만 치부해왔다. 돌봄 노동은 하찭게 여겨졌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고충을 사적으로 감당하라고 말했다. 스스로 권리를 확보하기 힘든 이들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최소한의 정치적 무기, ‘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서기로 했다. 약하고 소외당하는 존재를 돌보는 것은 ‘모두의 책임’이고 ‘모두가 엄마다’는 마음으로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윗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행기로 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아랫 부분은 여성과 돌봄에 대한 내용을 더 관심있게 읽을 독자들을 위해 인용했다.

위 인용이 이 책을 사기 전 참고할 읽을 거리로 적당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제목, 백운희씨의 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써야하는데 나는 고민을 좀 했다.

“책을 직접 읽으면 답이 있습니다!”라고 끝내버리면 리뷰로서 무책임한 것 같고, 저자의 대답을 그대로 옮기면 독자가 직접 읽는 맛을 뺏는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나 혼자 타협점을 찾았다. 저자가 히말라야에 두 번이나 다녀온 직접적 이유는 쓰지 않고 아래 문장을 인용한다.

해원, 원통함을 덜어내는 행위라지만 내게는 죄책감을 덜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저자가 히말라야에 갔던 이유와 이 책에서 풀어놓은 우리 사회의 여성 문제들이 직접적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이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 만큼이나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일 거라는 심규혁씨의 말은 의미있는 해석이다. 나도 동의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가 있어서 다행이다.

저자는 걷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의 발걸음과 글걸음의 흔적을 앞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응원한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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