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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ㅣ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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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는 체코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다. 체코 출신의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읽어봤지만 카렐 차페크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차페크가 ‘로봇’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란다. 1920년 자신의 형과 공동 작업한 <R.U.R.>이라는 희곡에서 ‘로봇’을 처음 사용했는데, ‘강제 노동’이라는 의미의 체코어 ‘로보타’에서 따왔다. 지금은 흔히 쓰는 단어를 차페크가 100년 전에 만들어냈으며 <R.U.R.>은 로봇이 권력을 잡고 인간을 말살한다는 내용이었다니 앞서간 인물이 아닌가.
이 작가의 에세이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스페인과 영국 여행에세이를 출간했다. <조금 미친 사람들>,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의 서평단 모집 글을 확인하다보니 스페인 편 <조금 미친 사람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나는 작년 여름에 스페인을 다녀왔는데, 100여 년 전 스페인의 모습과 작가의 감상은 어떨지 궁금했다.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
이 문장은 차페크가 화가 ‘엘 그레코’를 가리켜 한 말이지만 스페인의 예술가 모두에게, 아니 스페인 사람 전부에게 바치는 헌사 같다고 역자는 작품 해설에 썼다.
작년 스페인 여행에서 만난 가이드는 톨레도에서 엘 크레코의 생애와 그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미술 작품이나 화가에 관심이 많아서 가이드가 하는 설명에 집중하며 그림을 감상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은 물론이고, 미술이나 투우, 플라멩코 같이 그들의 예술적 감성이 도드라지는 소재는 자세히 썼다. 특히 작가가 직접 그린 백여 컷의 일러스트는 이 여행기를 생생하게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플라멩코와 투우는 실감나고 레이스 숄 ‘만틸라’를 쓴 세비야 여성들은 아름답다.
작가의 눈에 비친 스페인은 따사로우면서 열정적인 나라다. 그가 소개하는 스페인 곳곳의 풍경은 매력적이다. 100년 전 모습이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르겠지만 텍스트로 만나는 스페인에 독자의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제각기 다른 스페인이 펼쳐질 것이다. 아직 스페인 여행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 가이드북보다는 이 책을 추천하겠다. 사진을 찍기 위한 명소 정보보다 스페인을 더 가까이 느끼고 싶다면 더더욱. 어떤 것에 조금 미쳐있는 스페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마드리드에서 티센 미술관과 프라도 미술관을 스쳐지나듯 돌아보고 나온 게 가장 아쉬웠다. 특히 프라도 미술관은 작품도 사람도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직관, 하나만 남았다. 마드리드에서 오래 머물면서 미술관을 여유롭게 돌아볼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p.47
마드리드를 요약하자면, 궁중의 화려함과 변덕스러운 혁명의 도시라 말하겠다.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고개를 드는지 주목하라. 반은 과시에서고 반은 완고함에서다. 내게 도시와 사람을 이해하는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마드리드의 분위기에는 약간의 흥분을 야기하는 부드러운 긴장감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리라.
작가처럼 마드리드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이 고개를 드는 모습도 관찰하고, 분위기에 부드러운 긴장감이 있는지 보고 싶다.
작가의 눈에 비친 투우 장면에서는 관중의 함성을, 씩씩거리는 황소의 콧김을, 투우사의 절도있는 유연한 몸짓을 만났다. 그러나 끝내 마지막 숨을 쉬는 황소의 고통을 같이 보아야 해서 힘들었다.
p.150
스페인 사람들은 동물에게 잔인하지 않다. 투우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싸움으로 태곳적부터 있어왔다. 그것은 싸움의 모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고통 또한 가지고 있다. 아마도 스페인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과 투쟁을 너무나 완벽한 관점으로 볼 수 있기에 거기에 동반되는 잔인함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분명 눈으로 즐길 수 있는 것과, 탁월한 민첩성의 묘기와, 많은 위험과 멋진 용기를 제공하지만 내게 다음 투우는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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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실감나는 작가의 그림은 플라멩코였다. 작가의 그림과 묘사를 읽으며 스페인에서 직접 보며 찍은 플라멩코 영상을 보려고 했는데, 스페인에서 찍은 사진들만 얼마 전에 폰에서 몽땅 사라졌다. 카톡으로 공유 받은 사진은 있는데 직접 찍은 사진만 사라지다니, 누군가 삭제하지 않고야 어떻게 이런 일이...
p.164
스페인 춤은 애무부터 오르가슴에 이르는 온갖 관능적 감정을 포괄한다. 하지만 항상 가장 품위 잇는 교회 춤에서도 관능적 요소는 약간 도발적이다. 그것은 탱고에서 보이는 종류가 아니라 흥분시키고, 움츠러들게 하고, 유혹하고, 도전하고, 위협하며 약간 조롱하는 식이다. 악마적이고 애정이 가득한 춤인 동시에 자부심이라는 강철 같은 원동력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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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궁금한 점 하나! 작가는 이 글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쓴 걸까? 아니면 체코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된 것을 중역한걸까? 번역자가 내가 아는 분인데 영문 번역자이기 때문이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