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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링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8
조규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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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힘든 게 뭐 있냐?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걸!”
요즘도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자주 들었다. 어른이 되면 신경 쓸 일, 걱정할 일이 수두룩하다. 학생일 때가 좋지, 뭐가 힘드냐, 공부만 하면 된다던 말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입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말로 치자면 ‘할많하않’이었고, 꾸역꾸역 올라오는 반박을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어야 했다.
청소년에게 따라 붙는 단어인 성적, 친구, 꿈, 미래 등등은 불안과 두려움을 기본값으로 깔고 있다. 희망이란 놈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에게만 있는 단어 같고 내게는 좀체 오지 않는다. 어른들이 살기 힘들다는 걸 아이들이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어른이니까, 아이들에게 좀 친절할 순 없을까. 어른보단 사는 게 쉽지 않냐고, 징징거리지 말라고 퉁박주기 보다 공감어린 한마디를 해주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어른들에게 대단히 거창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청소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어른이 되면 기억이 홀랑 사라지는 건지, 자신도 청소년기를 거쳐 왔으면서, 그 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기가 그렇게 힘든 건지... 결국 어른보다는 친구에게 위로를 받거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조규미 작가의 소설 <페어링>의 등장인물인 청소년들도 그랬다.
그저 그런 열일곱살 고수민은 신학기 첫날부터 찬란한 흑역사를 썼다. 교실에서 무선이어폰을 분실했고 담임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종례시간에 들어온 선생님은 이어폰을 찾는다며 아이들을 하교시키지 않고 1시간이 넘도록 책가방과 사물함까지 탈탈 털었지만 이어폰은 나오지 않았다. 수민은 ‘극혐 1호’로 등극했다. 반 친구들을 잠재적 도둑으로 만들어버린 수민은 극혐 타이틀을 쉬이 벗을 수 없었다. 반면 배치고사 전교1등으로 입학한 세진은 당연하게 반장이 되었다. 세진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며 다른 차원에서 살게 될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다차원’이라 불리는 특별 그룹의 멤버다.
다차원 멤버 네 명은 봉사활동과 프로젝트 활동은 물론 과외도 같이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세진이 수민에게 보육원 봉사활동에 같이 가자고 한다. 수민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동의하게 되었고, 프로젝트 활동도 같이 하게 된다. 다차원 멤버 중 1명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 세진이 수민을 끌어들인 것이다. 멤버로서 영입한 게 아니라 끌어들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부도 그렇고 그런 수민을 세진이 입맛대로 휘두르기 위함이었다. 보육원에 가서 수민은 적극 활동했으나 나머지 세 명은 얼굴만 삐죽 내비치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봉사는 수민이 혼자 했는데 멤버가 다 활동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얼떨결에 다차원에서 활동하게 된 수민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형국이 되고, 그 와중에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수민은 방송실에서 주인 없는 이어폰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청력이 남보다 뛰어난 수민이지만 어떻게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릴까. 이상한 일이었지만 수민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고민스러울 때마다 이어폰의 목소리는 수민의 말을 들어준다. 고민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건 아니지만 수민의 마음이 안정된다.
"방법이 있겠지, 잘 찾아봐."
"바보 같은 짓 한 거 아니야. 너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보 같은 거지. 너무 걱정하지마. 분명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야."
"네가 사람들 생각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잖아. 선입견 가지지 말고 생각해 봐. 있을 거야."
이 소설은 여느 고등학생들이 겪는 비슷비슷한 고민들에 더해 학교 방송반에 전해져오는 전설과 교내 시험문제 유출 비리, 그리고 말하는 이어폰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까지 넣었다. 말하는 이어폰은 수민의 고민을 들어주고, 세진과 수민이 가까워지는 기폭제이자 미스터리적인 역할은 물론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사건을 적극 해결하는 건 아니나 수민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수민이 여러 사건에 휘말렸을 때 이야기를 들어준 존재가 바로 이어폰이었다. 수민의 행동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남들에게 소설처럼 말하는 엄마에게 고민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그렇다고 절친이라 할 만한 친구도 없다. 그런 수민에게 이어폰은 선배였고 친구였다. 이 리뷰의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십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수민에게 이어폰이 그러했고, 수민은 세진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다.
마지막에 세진이 문제가 급 해결되는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 이어폰을 세진에게 넘겨주게 되는 상황은 자연스러웠다. 수민의 고민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순 없다.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말하는 이어폰이 이젠 세진에게 더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물론 등교 첫날 잃어버린 수민의 이어폰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중고등학생들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절실한 시기이니까.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