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링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8
조규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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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힘든 게 뭐 있냐?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걸!”

요즘도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자주 들었다. 어른이 되면 신경 쓸 일, 걱정할 일이 수두룩하다. 학생일 때가 좋지, 뭐가 힘드냐, 공부만 하면 된다던 말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입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말로 치자면 할많하않이었고, 꾸역꾸역 올라오는 반박을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어야 했다.


청소년에게 따라 붙는 단어인 성적, 친구, , 미래 등등은 불안과 두려움을 기본값으로 깔고 있다. 희망이란 놈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에게만 있는 단어 같고 내게는 좀체 오지 않는다. 어른들이 살기 힘들다는 걸 아이들이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어른이니까, 아이들에게 좀 친절할 순 없을까. 어른보단 사는 게 쉽지 않냐고, 징징거리지 말라고 퉁박주기 보다 공감어린 한마디를 해주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어른들에게 대단히 거창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청소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어른이 되면 기억이 홀랑 사라지는 건지, 자신도 청소년기를 거쳐 왔으면서, 그 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기가 그렇게 힘든 건지... 결국 어른보다는 친구에게 위로를 받거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조규미 작가의 소설 <페어링>의 등장인물인 청소년들도 그랬다.


그저 그런 열일곱살 고수민은 신학기 첫날부터 찬란한 흑역사를 썼다. 교실에서 무선이어폰을 분실했고 담임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종례시간에 들어온 선생님은 이어폰을 찾는다며 아이들을 하교시키지 않고 1시간이 넘도록 책가방과 사물함까지 탈탈 털었지만 이어폰은 나오지 않았다. 수민은 극혐 1로 등극했다. 반 친구들을 잠재적 도둑으로 만들어버린 수민은 극혐 타이틀을 쉬이 벗을 수 없었다. 반면 배치고사 전교1등으로 입학한 세진은 당연하게 반장이 되었다. 세진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며 다른 차원에서 살게 될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다차원이라 불리는 특별 그룹의 멤버다.


다차원 멤버 네 명은 봉사활동과 프로젝트 활동은 물론 과외도 같이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세진이 수민에게 보육원 봉사활동에 같이 가자고 한다. 수민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동의하게 되었고, 프로젝트 활동도 같이 하게 된다. 다차원 멤버 중 1명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 세진이 수민을 끌어들인 것이다. 멤버로서 영입한 게 아니라 끌어들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부도 그렇고 그런 수민을 세진이 입맛대로 휘두르기 위함이었다. 보육원에 가서 수민은 적극 활동했으나 나머지 세 명은 얼굴만 삐죽 내비치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봉사는 수민이 혼자 했는데 멤버가 다 활동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얼떨결에 다차원에서 활동하게 된 수민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형국이 되고, 그 와중에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수민은 방송실에서 주인 없는 이어폰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청력이 남보다 뛰어난 수민이지만 어떻게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릴까. 이상한 일이었지만 수민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고민스러울 때마다 이어폰의 목소리는 수민의 말을 들어준다. 고민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건 아니지만 수민의 마음이 안정된다.


"방법이 있겠지, 잘 찾아봐."

"바보 같은 짓 한 거 아니야. 너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보 같은 거지. 너무 걱정하지마. 분명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야."

"네가 사람들 생각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잖아. 선입견 가지지 말고 생각해 봐. 있을 거야."


이 소설은 여느 고등학생들이 겪는 비슷비슷한 고민들에 더해 학교 방송반에 전해져오는 전설과 교내 시험문제 유출 비리, 그리고 말하는 이어폰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까지 넣었다. 말하는 이어폰은 수민의 고민을 들어주고, 세진과 수민이 가까워지는 기폭제이자 미스터리적인 역할은 물론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사건을 적극 해결하는 건 아니나 수민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수민이 여러 사건에 휘말렸을 때 이야기를 들어준 존재가 바로 이어폰이었다. 수민의 행동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남들에게 소설처럼 말하는 엄마에게 고민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그렇다고 절친이라 할 만한 친구도 없다. 그런 수민에게 이어폰은 선배였고 친구였다. 이 리뷰의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십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수민에게 이어폰이 그러했고, 수민은 세진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다.


마지막에 세진이 문제가 급 해결되는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 이어폰을 세진에게 넘겨주게 되는 상황은 자연스러웠다. 수민의 고민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순 없다.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말하는 이어폰이 이젠 세진에게 더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물론 등교 첫날 잃어버린 수민의 이어폰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중고등학생들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절실한 시기이니까.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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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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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넘쳐나는 시대다. 오래오래 사용하고 고이고이 간직하는 건 물자 부족시대의 미덕이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에 발맞춰 끊임없이 소비하는 게 미덕이다. 아이들은 교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나 지우개를 줍지 않고, 어른들은 2년 마다 새 스마트폰을 구입한다.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아끼는 물건이 있는가?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철학자 한병철의 신간 제목 <사물의 소멸>을 보고 이렇게 예상했다. ‘사물이 너무 넘쳐나서 아낄 줄 모르니 그 가치가 소멸되었다는 뜻일까?’ 책을 읽어보니 역시, 철학자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디지털화한 세상에서 넘쳐나는 정보들이 사물을 소멸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부제가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아무런 비판 의식없이 갈수록 편리한 사회가 얼마나 좋으냐며 누리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코로나 이후 더 온라인 세상에 갇혀 살게 되었다고 자조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가 짚어내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에 독자들은 공감하고 성찰하게 될 것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생경한 철학자의 인용이 제법 있고, 단문이나 아포리즘적 성격의 문장들이 있어 읽기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실린 두 건의 인터뷰는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p.41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 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사물은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신뢰한다. 반면에 스마트폰은 정보기계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사용자를 감시하는 매우 효과적인 정보원이다. 스마트폰 내부의 알고리즘들에 귀의한 사람이 스마트폰에 의해 추적당한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조종하고 프로그래밍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우리를 사용한다. 참된 행위자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이 디지털정보원에게 내맡겨지고, 스마트폰의 표면 너머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우리를 조종한다.


내가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접속하고, 정보를 읽고, 물건을 소비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이다. 스마트폰 안에서 행해지는 이 행위의 주인이 과연 나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자발적로 말이다. 스마트폰 속 세상이 실재인 양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저장해놓은 정보를 다시 보지 않고, 보시하듯 좋아요를 누르며 SNS를 떠다니지만 실제로 만나는 친구는 없고,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다보니 사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물 과잉 세상에서 무분별한 소비를 지양하자고, 지구를 위해 자꾸 사고 버리는 행동은 그만하자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스쳐지나가고 손에 잡히지 않는 반사물인 정보보다 사물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은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다. ‘주크박스에 관한 여담에 나오는 아래 내용을 읽으며 어느 정도 오해는 풀었다.


p.139~140


디지털화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는 모든 물질 의식을 상실했다. 세계의 재낭만화는 세계의 재물질화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이토록 야만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우리가 물질을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땅을 자원으로 격하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성'만으로는 우리가 지구를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고치기에 충분하지 않다. 땅과 물질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 철학자 제인 베넷은 저서 생동하는 물질 Vibrant Matter>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의 이미지가 인간의 오만과 지구를 파괴하는 우리의 정복환상 및 소비환상을 키운다."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존재론, 물질을 생동하는 놈으로 경험하는 존재론이 생태학에 선행해야 한다.



<아트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현재에, 순간에 초점을 맞추는 디지털 시대는 시간의 향기를 몰아낸다. 실재의 정보화는 공간 및 시간의 상실로 이어진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로 사물의 소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이 애장하는 사물에는 시간의 더께가 쌓여있다. 물건을 소장하기보다 스쳐지나가는 정보로만 취급하는 시대에 시간의 향기를 품은 사물이란 있을 리 없고 그것을 두는 공간 역시 없는 것이다. 저자가 어느날 우연히 만나 손에 넣은 주크박스로 쌓은 히스토리를 읽으며 또, ‘역시 철학자 답구나!’ 했다.


범인인 나는 소비에 동반하는 죄책감을 느끼며 산다. 여전히 너무 많은 책을 그러모으고, 몇 년 만에 다시 출근하게 되면서 또 옷을 사들이고 있다. 매일 인스타그램의 서평단 모집 피드에 자동인형처럼 반응한다.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최신간의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자발적 의무감은 신청서를 쓰게 만든다. <사물의 소멸>을 읽다가 내가 아끼는 물건이 뭐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내 왼쪽 옆에 고양이 루키가 엎드려 있고 책상 위와 오른쪽 벽은 온통 책이다. 내 소유물 중 가장 많은 게 책인데 시간의 향기가 든 것이 있나 생각해봤다. 책은 사용한다기보다 한 번 읽고 덮어두니 마음에 들 수는 있어도 히스토리를 쌓아갈 순 없다. 게다가 나는 신간 위주로 읽으니 더 하다. 책 외에도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그 중에 애정하는 물건이 있나 생각해 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내가 가진 사물들도 소멸중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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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모락 - 우리들은 자라서
차홍 지음, 키미앤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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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나와 함께 한 것이면서일정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나는 것인데 그것이 그리도 나를 애틋하게 여길 수가 있을까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알고 있고내 맘을 나보다 더 잘 알 때가 있는 그 존재를 그동안 무심하게 떠나보냈다.


24.

너는 지금 시간이 없나봐파인애플 꼭지처럼 머리를 질끈 묶어버렸어엄마는 아침도 거르고 급하게 나가는 너에게 면접을 잘 보고 오라고 했지세상에그런데 너는 소리를 지르네.

머리 때문에 다 망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47.

요즘 넌 세상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네.

인간관계를세상살이를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야너무 다 알면 살아가는 게 재미없지 않을까그런데 정작 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네너는 요즘 너를 잘 알지도 보살피지도 못하는 것 같아.

세상 걱정보다 네 걱정을 먼저 하는 건 어떨까?



저자가 누군지 모르고 받은 책 <모락모락>의 화자는 머리카락이다머리카락이 제 주인에게 말한다머리카락과 나는 별개인가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본다등교혹은 출근하기 전 거울을 보며 얼굴만 살피는 게 아니라 머리도 같이 본다외모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게 헤어스타일일 것이다그것의 기본인 머리카락이 자신에게 조근조근 말한다머리카락이 나를 이렇게 바라보다니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그저 놀라웠다.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이름을 맞혀보라고 했다책을 읽으며 헤어디자이너일 거라는 예상은 했고 분명 유명인일 것 같았으나 전혀 알 수가 없었다며칠 전 공개된 저자의 이름은 차홍이었다찾아보니 업계에선 꽤 유명한 사람이다헤어스타일러로서 그는 아예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그의 스타일에 반했다사람의 일생을 머리카락의 관점으로 그려내다니 대단하다


1인칭 같은 2인칭 시점이다정감있게 조근조근 말하는 그 목소리는 내면이 내는 것 같기도 하고한 발자국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 같기도 하다애정을 담뿍 담고서 말이다이 책의 머리카락이 하는 말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떠올라 뭉클했다내 아이의 모습이 생각나 맘이 몽글몽글해졌고미래 어느 시점의 내 모습일 것 같은 장면은 친정엄마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14.

너도 꼭 그렇잖아신기하지나무도 너도 어느 순간 쑥 자라버린다는 게 말야그리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너는 그대로인데 몸만 어른이 되려고 한다니 말이야.


49.

옷을 살 때는 먼저 가족의 옷을 구입하고 장을 볼 때도 가족이 좋아하는 재료를 먼저 고르고 있지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 같아.

너는 바빠서 잘 모르지만가끔 무언가를 잃어버린 표정을 짓고 있어.


72.

요즘 너를 관찰하면 신기한 게 참 많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배우러 다니는데 이별에 복수에 외로움과 슬픔이 가득한 가사를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합창해그리고 건강에 좋다며 손을 크게 앞뒤로 휘저으며 뒤로 걸어다니기도 하지나는 도통 모르겠고 무섭기도 하지만네가 활기차게 지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나는 예전에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지나온 시간을 역순으로 되짚어 주요 사건을 정리해보곤 했다어느 순간부터 잠이 왈칵 쏟아질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 보니 인생 톺아보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도 내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기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작년 이맘 때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아니 당장 오늘 낮에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데 과연 가능할까...


가만 생각해보면 충격적 사건이 없는 이상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대부분 사진에 의존하고 있다초등학교 입학 전 기억은 거의 없는데도 일곱 살 무렵 아버지께서 하시던 중국집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보고 있으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그 때 중국집에서 왜 찹쌀 도넛을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이 가득한 큰 솥이 기억난다동글동글한 도넛 반죽을 솥에 집어넣으면 잠시 가라앉았다가 이내 버글버글 떠올랐다갈색 빛을 띤 노릇한 도넛은 이른바 겉바속촉이었다.



이 책의 그림 저자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림 대신 오랜 사진첩을 열어보아야겠다내 인생 숫자는 아마 7부터 시작될 것 같다부모님의 기억에서 1부터 6까지 다 얻어내긴 어려울 것 같지만 뭐 어떠랴나는 머리카락 시점 대신, “다 큰 내가 그 때의 나에게 한 마디!” 정도로 하면 될 것 같다사진 속 내게 애틋함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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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인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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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을 쓴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신작 장편소설 <지구별 인간>이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 18년째 편의점에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이력을 <편의점 인간>에 녹여내 단숨에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이 작품에서 정상의 삶이 무엇인가 질문했다. 성인이 되면 아르바이트가 아닌 정직원이 되어 회사를 다녀야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하자있는 인간이다. <편의점 인간> 속 세계관이 현재 우리의 모습과 다른가?


내가 만나는 초등학생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으로 살길 바라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강요나 협박성일 경우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강도는 어떨까? 무라타 사야카의 책에서 만난 세계가 아이들이 압박받는 정신 세계와 유사한 경우를 목격했다. 공부, 꿈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3학년 남자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취직도 못하고 평생 편의점에서 알바만 하게 될 거라면서 걱정을 했는데 눈물을 글썽였다. 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겁을 준걸까. 뭐라고 말 해줘야 할까 망설이다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넌 공부 잘 할거고,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도 다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아이는 “정말 그럴까요?” 라며 간절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물론!”이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며 겁박하고, 정작 그 아이의 마음은 들여다 보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 <지구별 인간>의 주인공 나쓰키의 부모가 그러하다. 나쓰키는 특별한 사유 없이 언니와 차별대우를 받고, 학원선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다. 어린 나쓰키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마법소녀라고 믿는다. 지구별 인간이 아니라 포하피핀포보피아 별에서 온 마법소녀라는 비밀을 사촌 유우에게 말했고, 유우도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했다.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서도 정서적 공감을 받지 못한 나쓰키는 사촌 유우와는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둘은 어릴 때부터 나가노의 할아버지 댁에서 1년에 한 번씩 하는 가족행사에서 만났고 연인이 되기로 한다. 지구별에서 외계인인 그들의 행동 지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이다. 


5학년 성교육울 받을 때 나쓰키는 확인했다. 지구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내 자궁은 이 공장의 부품이며, 마찬가지로 부품은 누군가의 정소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할 것이다. 암컷과 수컷은 공장의 부품을 몸 안에 감춘 채 너 나 할 것 없이 둥지에서 꿈틀거린다."


작가는 <편의점 인간> 출간 후 일 년만에 <지구별 인간>을 완성했는데 이번 소설은 전작에 비해 강렬하다. <편의점 인간>에서 게이코는 편의점에 계속 있으려면 점원이 될 수밖에 없고 보통사람이라는 거죽을 쓰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구별 인간>에서 나쓰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이 공장의 정상적인 부품이 될 수 없으리라 예감했다. 자신은 자궁이 있으니 누군가의 정소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하는 것이 역할이라는 것을 5학년 성교육을 받을 때 알게 되었지만 그 역할을 해내기 불가능할 것임을. 성인이 되어 ‘탈출닷컴’이라는 싸이트를 통해 ‘성행위는 없음’이라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편의점 인간>과는 달리 판타지적 요소가 더해졌고, 더 황당한 설정에 당황스러웠는 한편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떤 결말을 끌어낼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쓰키와 남편 도모오미와 유우, 세 명은 동거를 시작하고 셋의 생활은 가히 엽기적이었다. 소위 폴리아모리를 연상할 법한데 그건 아니다. 그들은 문명을 배제한 생활을 시작한다. 외부와 접촉하는 문명의 이기를 끊고 생식을 한다. 수입이 없으므로 먹을 것을 훔쳐온다. 자신들은 외계인이기 때문에 지구별이 요구하는 정상 인간의 행동을 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행동들이 다른 인물들 눈에는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그건 독자가 보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너무 큰 스포일러가 되므로 리뷰에 쓸 수가 없다.


작가가 두 편의 소설을 통해 천착해 온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원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 던져지듯 태어났고, 지구의 질서가 요구하는 트랙에 올라 경주하게 되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되기 위해서. 달리고 있는 이 레이스가 내가 원했던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는 순간이 오면 여기서 내려와야 할지 계속 달려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허나 고민한다고 해서 섣불리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트랙 위를 달리는 인간이 대부분이다. 계속 달리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며 자위한다. 이 안에서 행복을 찾으면 된다고. 너무 힘들면 좀 천천히 걷자며, 나름의 조절 방안을 찾는다.


<지구별 인간>에서 작가가 선택한 결말은 작가다운 발상인 것 같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다들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상적이라 불리는 삶을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어슷비슷한 모습을 갖추려 노력하고 어느 정도 유사하게 되면 자족한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는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이럴 수도 있지 않냐는, 몸부림으로 읽힌다. 독자로서 뒷맛이 깔끔하진 않았지만 작가의 상상력엔 박수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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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고양이 가출소동
임수진 지음, 서영은(미날) 그림 / 모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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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고양이 가출소동>은 고양이를 의인화한 동화책입니다. 집고양이 앤지는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그렇게 심심할 수가 없습니다. 바깥이 너무나 궁금합니다. 앤지는 밖에서 지내는 길고양이들은 행복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탈출을 감행하지요. 과연 집 밖으로 나간 앤지는 자유를 누리게 될까요? 행복할까요? 아마 처음 겪는 일투성이라 고생문이 훤히 열릴걸요.




이 책은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아이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것입니다. 고양이 앤지의 입장이 되어 길에서 같이 뛰어놀고, 처음 만난 길고양이와 친구가 되어보고, 어쩌면 가족이 보고 싶어 훌쩍일지도 모릅니다.


, 고양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길고양이들은 밖에서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나도 집 나가고 싶었던 적 있었는데 가출하면 안 되겠다.’

 

같은 생각들을 하겠지요.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아이들 역시 재미있게 읽을 겁니다. 고양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해 했던 아이들은 공감할 것이고, 우리집 고양이가 가출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동화책은 고양이 앤지의 가출소동이 귀여운 삽화와 함께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림들이 동화 내용을 더욱 실감나게 살려주고 있고요. 집사든 집사가 아니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즐겁게 읽을 것입니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는 이 책의 모르는 단어 알고 가기라는 코너를 두었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다가 엄마에게 모르는 단어를 물어볼 때 주저없이 대답해주기 쉽지 않을 때 활용하기 좋습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고양이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길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해보는 게 어떨까요? 집고양이의 수명은 10년이 넘지만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의 평균수명은 3년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집 근처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챙겨주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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