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락모락 - 우리들은 자라서
차홍 지음, 키미앤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평생 나와 함께 한 것이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나는 것인데 그것이 그리도 나를 애틋하게 여길 수가 있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알고 있고, 내 맘을 나보다 더 잘 알 때가 있는 그 존재를 그동안 무심하게 떠나보냈다.
24.
너는 지금 시간이 없나봐. 파인애플 꼭지처럼 머리를 질끈 묶어버렸어. 엄마는 아침도 거르고 급하게 나가는 너에게 면접을 잘 보고 오라고 했지. 세상에, 그런데 너는 소리를 지르네.
“머리 때문에 다 망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47.
요즘 넌 세상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네.
인간관계를, 세상살이를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야. 너무 다 알면 살아가는 게 재미없지 않을까? 그런데 정작 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네. 너는 요즘 너를 잘 알지도 보살피지도 못하는 것 같아.
세상 걱정보다 네 걱정을 먼저 하는 건 어떨까?
저자가 누군지 모르고 받은 책 <모락모락>의 화자는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이 제 주인에게 말한다. 머리카락과 나는 별개인가?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본다. 등교, 혹은 출근하기 전 거울을 보며 얼굴만 살피는 게 아니라 머리도 같이 본다. 외모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게 헤어스타일일 것이다. 그것의 기본인 머리카락이 자신에게 조근조근 말한다. 머리카락이 나를 이렇게 바라보다니!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놀라웠다.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이름을 맞혀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며 헤어디자이너일 거라는 예상은 했고 분명 유명인일 것 같았으나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 공개된 저자의 이름은 ‘차홍’이었다. 찾아보니 업계에선 꽤 유명한 사람이다. 헤어스타일러로서 그는 아예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그의 스타일에 반했다. 사람의 일생을 머리카락의 관점으로 그려내다니 대단하다.
1인칭 같은 2인칭 시점이다. 정감있게 조근조근 말하는 그 목소리는 내면이 내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발자국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 같기도 하다. 애정을 담뿍 담고서 말이다. 이 책의 머리카락이 하는 말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떠올라 뭉클했다. 내 아이의 모습이 생각나 맘이 몽글몽글해졌고, 미래 어느 시점의 내 모습일 것 같은 장면은 친정엄마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14.
너도 꼭 그렇잖아. 신기하지, 나무도 너도 어느 순간 쑥 자라버린다는 게 말야. 그리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너는 그대로인데 몸만 어른이 되려고 한다니 말이야.
49.
옷을 살 때는 먼저 가족의 옷을 구입하고 장을 볼 때도 가족이 좋아하는 재료를 먼저 고르고 있지.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 같아.
너는 바빠서 잘 모르지만, 가끔 무언가를 잃어버린 표정을 짓고 있어.
72.
요즘 너를 관찰하면 신기한 게 참 많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배우러 다니는데 이별에 복수에 외로움과 슬픔이 가득한 가사를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합창해. 그리고 건강에 좋다며 손을 크게 앞뒤로 휘저으며 뒤로 걸어다니기도 하지. 나는 도통 모르겠고 무섭기도 하지만, 네가 활기차게 지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나는 예전에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지나온 시간을 역순으로 되짚어 주요 사건을 정리해보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잠이 왈칵 쏟아질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 보니 인생 톺아보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도 내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기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이맘 때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아니 당장 오늘 낮에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데 과연 가능할까...
가만 생각해보면 충격적 사건이 없는 이상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대부분 사진에 의존하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 기억은 거의 없는데도 일곱 살 무렵 아버지께서 하시던 중국집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보고 있으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 때 중국집에서 왜 찹쌀 도넛을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이 가득한 큰 솥이 기억난다. 동글동글한 도넛 반죽을 솥에 집어넣으면 잠시 가라앉았다가 이내 버글버글 떠올랐다. 갈색 빛을 띤 노릇한 도넛은 이른바 겉바속촉이었다.

이 책의 그림 저자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 대신 오랜 사진첩을 열어보아야겠다. 내 인생 숫자는 아마 7부터 시작될 것 같다. 부모님의 기억에서 1부터 6까지 다 얻어내긴 어려울 것 같지만 뭐 어떠랴! 나는 머리카락 시점 대신, “다 큰 내가 그 때의 나에게 한 마디!” 정도로 하면 될 것 같다. 사진 속 내게 애틋함을 담아서~
**위 리뷰는 문학동네 사전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