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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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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넘쳐나는 시대다. 오래오래 사용하고 고이고이 간직하는 건 물자 부족시대의 미덕이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에 발맞춰 끊임없이 소비하는 게 미덕이다. 아이들은 교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나 지우개를 줍지 않고, 어른들은 2년 마다 새 스마트폰을 구입한다.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아끼는 물건이 있는가?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철학자 한병철의 신간 제목 <사물의 소멸>을 보고 이렇게 예상했다. ‘사물이 너무 넘쳐나서 아낄 줄 모르니 그 가치가 소멸되었다는 뜻일까?’ 책을 읽어보니 역시, 철학자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디지털화한 세상에서 넘쳐나는 정보들이 사물을 소멸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부제가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아무런 비판 의식없이 갈수록 편리한 사회가 얼마나 좋으냐며 누리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코로나 이후 더 온라인 세상에 갇혀 살게 되었다고 자조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가 짚어내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에 독자들은 공감하고 성찰하게 될 것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생경한 철학자의 인용이 제법 있고, 단문이나 아포리즘적 성격의 문장들이 있어 읽기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실린 두 건의 인터뷰는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p.41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 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사물은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신뢰한다. 반면에 스마트폰은 정보기계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사용자를 감시하는 매우 효과적인 정보원이다. 스마트폰 내부의 알고리즘들에 귀의한 사람이 스마트폰에 의해 추적당한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조종하고 프로그래밍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우리를 사용한다. 참된 행위자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이 디지털정보원에게 내맡겨지고, 스마트폰의 표면 너머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우리를 조종한다.
내가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접속하고, 정보를 읽고, 물건을 소비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이다. 스마트폰 안에서 행해지는 이 행위의 주인이 과연 나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자발적로 말이다. 스마트폰 속 세상이 실재인 양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저장해놓은 정보를 다시 보지 않고, 보시하듯 ‘좋아요’를 누르며 SNS를 떠다니지만 실제로 만나는 친구는 없고,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다보니 사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물 과잉 세상에서 무분별한 소비를 지양하자고, 지구를 위해 자꾸 사고 버리는 행동은 그만하자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스쳐지나가고 손에 잡히지 않는 반사물인 정보보다 사물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은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다. ‘주크박스에 관한 여담’에 나오는 아래 내용을 읽으며 어느 정도 오해는 풀었다.
p.139~140
디지털화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는 모든 물질 의식을 상실했다. 세계의 재낭만화는 세계의 재물질화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이토록 야만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우리가 물질을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땅을 자원으로 격하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성'만으로는 우리가 지구를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고치기에 충분하지 않다. 땅과 물질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 철학자 제인 베넷은 저서 《생동하는 물질 Vibrant Matter>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의 이미지가 인간의 오만과 지구를 파괴하는 우리의 정복환상 및 소비환상을 키운다."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존재론, 물질을 생동하는 놈으로 경험하는 존재론이 생태학에 선행해야 한다.
<아트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현재에, 순간에 초점을 맞추는 디지털 시대는 시간의 향기를 몰아낸다. 실재의 정보화는 공간 및 시간의 상실로 이어진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로 사물의 소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이 애장하는 사물에는 시간의 더께가 쌓여있다. 물건을 소장하기보다 스쳐지나가는 정보로만 취급하는 시대에 시간의 향기를 품은 사물이란 있을 리 없고 그것을 두는 공간 역시 없는 것이다. 저자가 어느날 우연히 만나 손에 넣은 주크박스로 쌓은 히스토리를 읽으며 또, ‘역시 철학자 답구나!’ 했다.
범인인 나는 소비에 동반하는 죄책감을 느끼며 산다. 여전히 너무 많은 책을 그러모으고, 몇 년 만에 다시 출근하게 되면서 또 옷을 사들이고 있다. 매일 인스타그램의 서평단 모집 피드에 자동인형처럼 반응한다.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최신간의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자발적 의무감은 신청서를 쓰게 만든다. <사물의 소멸>을 읽다가 내가 아끼는 물건이 뭐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내 왼쪽 옆에 고양이 루키가 엎드려 있고 책상 위와 오른쪽 벽은 온통 책이다. 내 소유물 중 가장 많은 게 책인데 시간의 향기가 든 것이 있나 생각해봤다. 책은 사용한다기보다 한 번 읽고 덮어두니 마음에 들 수는 있어도 히스토리를 쌓아갈 순 없다. 게다가 나는 신간 위주로 읽으니 더 하다. 책 외에도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그 중에 애정하는 물건이 있나 생각해 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내가 가진 사물들도 소멸중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