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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 기시미 이치로의 방구석 1열 인생 상담
기시미 이치로 지음, 이환미 옮김 / 부키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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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초대박 히트를 친 <미움받을 용기>를 쓴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이번 신간은 그동안 일본에서 출간된 번역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독자를 위해 기획하여 나온 책이라 의미가 깊다. ‘기시미 이치로’는 <미움받을 용기>의 과분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워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공부를 하던 이환미(이 책의 번역자)씨가 그의 한국어 선생이었고, 한국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책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를 같이 기획하게 되었다. 이환미씨가 책을 번역했지만 어찌보면 이 책의 공저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시미 이치로’와 같이 한국 영화를 보며 한국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열 아홉편의 영화를 같이 보았고 이 책에서는 등장인물 스물 세명을 소환해서 철학자와 상담하는 형식으로 꾸몄다.
이전 책처럼 철학자와 내담자가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다. 또한 모두 한국영화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소개된 영화 19편을 모두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특별해 보이지만 독자들 자신의 고민과 유사하다고 여길 법한 것들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상담책이나 심리서를 읽는 이유다. 특별함 속에 깃든 보편성을 찾을 때 감정이입이 쉬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책의 목차는 전체 5관으로 나누었고 각 관의 주제는 이렇게 정했다.
1관 우리도 사랑일까 연인과 부부에 대하여
2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가족과 부모에 대하여
3관 행복을 찾아서 나와 인생에 대하여
4관 내일을 위한 시간 세상에 대하여
5관 타인은 지옥이다 사회 속 인간관계에 대하여
책의 제목이 “나쁜 기억을 지워드린다”고 했기 때문에 어떻게 나쁜 기억을 지워줄 수 있다는 건지 그 해답을 얼른 찾고 싶어 하는 독자를 위해 저자는 서문에서 미리 답을 다 해주고 있다.
"과거의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미래에 초점을 맞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그런 뜻에서 과거는 이미 없습니다."
"‘지금’의 나 자신이 바뀌는 것으로도 과거의 기억이 나쁜 것이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따로 떼어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서문에서 나쁜 기억을 지우는 법을 다 알려주고 끝?
그럼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말?
물론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더 자세히 풀어내고 있다. 내용을 읽으며 영화를 본 독자들이라면 자신이 의문을 품었던 부분을 해소할 수 있고, 영화를 보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의 차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때만 되면 떠오르는,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선택할 것인데, 영화 속 인물이 한 상담을 통해 자신의 나쁜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된다면 금상첨화이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자신의 과거를 조금은 편안하게 여기게 된다면 그것 역시 수확이 될 터이다.
2관에서 다룬 영화 “수상한 그녀” 두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 말순 할머니의 며느리 애자씨와의 상담이다. 시어머니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요양원에 보내려고 했던 애자씨와의 상담 후 철학자가 덧붙인 내용은 이러하다.
p.122
과거에 시어머니와 있었던 불화를 아무리 이야기한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상담사는 처음부터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
“과거는 더 이상 없습니다.”
실제로 과거 일 때문에 현재 관계가 원만하지 않더라도 그때로 돌아가 원인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지난 일을 따져봤자 앞으로 관계가 좋아질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러니 관계를 원만히 하고 싶다면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위 사례는 단순히 고부관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옛날에 부모가 내게 했던 일이 상처가 되어 잊히지 않는다며 걸핏하면 옛 기억을 소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과거는 더 이상 없습니다.”는 일침을 놓을 워딩이다. 지난 일을 소환한다고 그 일이 바뀌지도 않으며 관계가 좋아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저자의 충고처럼 과거보다는 미래를 이야기 해야한다.
그 다음 장, 영화 “마더”의 주인공 엄마와 철학자와의 대화에서는 나쁜 기억을 지우는 법을 이야기한다. 아들이 자신을 용서해준다면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냐는 엄마의 질문에 철학자는 이렇게 답한다.
p.133
자신의 기억이든 남의 기억이든 지우고 싶다는 건 그것이 ‘나쁜’ 기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과거 일을 제대로 마주한다면 이는 머지않아 ‘나쁜’기억이 아니게 됩니다.
과거의 일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 상담내용에서는 ‘자립’이라는 키워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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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담의 뒤에 덧붙인 글에서 철학자는, 자식을 자립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부모들의 행동에 대해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p. 135~137
부모가 아이를 대신해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은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부모는 애초부터 자식을 신뢰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부모가 대신 문제를 해결하면 아이는 의존적인 성향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부모로부터 자립하고자하는 아이라면 부모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도움을 줘도 되는지 아이의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 아이가 이에 찬성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것 중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일에 한해서 도와주면 된다.
아이가 뭔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부모가 나서서 사과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스스로 사과할 필요를 느꼈을 때 그렇게 하게끔 해야 한다. 아이에게는 이유도 묻지 않고 부모가 먼저 행동하는 것은 아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 편이 아니라 세상의 편에 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역시 부모가 자식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이 저지른 일에 사과하는 것은 언뜻 보기엔 아이를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보호 때문이다.
자녀의 자립을 위한 기본은 부모의 신뢰라고 말하고 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고 저자의 말처럼 아이를 객체로 인정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잘 안 되는 일이다. 대개의 부모는 자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기 있기 때문이다.
자립과 연결되는 상담은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주인공 지소와의 대화이다. 상담후 덧붙인 글에서 저자는 아들러의 <인간이해>에서 이 말을 인용한다.
“처음으로 일어선 아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게 되며, 그 순간 왠지 적대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P. 194~195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 어려움을 느낀 아이는 세계가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고, 타자를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아들러는 다른 저서 <삶의 과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경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니라 거기에 맞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아이가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과제에는 대인관계도 포함된다. 부모에게 있어 아이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다. 부모는 아이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으로 자식을 사랑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자신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모른다.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깨달으면 틀림없이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다가 지인이 가출한 아들 때문에 애태우는 게 생각났다. 친구를 때리고, 친구의 폰을 빼앗아 팔아먹고 집을 나갔으며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그 아이가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해서 아빠가 아이를 혼자 키우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새엄마가 들어왔다. 그런데 10년 넘도록 연락하지 않고 살던 친엄마가 작년 여름에 집으로 찾아왔고 친엄마와 다시 교류하게 되었다는 얘기까지 들었었다. 그런데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가출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 아이도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아이를 보수적이고 억압적으로 대한다고 했다. 물론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빠의 그런 표현방식이 아들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온다면 화내고 윽박지르지 말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해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건 남의 집 속사정도 모르면서 하는 선무당 사람 잡는 짓이 될까봐 조용히 넣어두었다.
이 책은 '나쁜 기억'에 관한 내용만 있는 건 아니다. 부모와 자식관계를 포함한 인간관계, 성공과 행복, 고통, 자존감 등 웬만한 심리상담서적에 등장하는 것들을 다루고 있어서 독자가 고민하고 있는 내용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건진, 내게 딱 와닿은 내용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p.314
개성적인 사람이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장점이나 가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개성이란 둘도 없는, 다른 누군가와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자기다움’인 것이다.
‘자존감’은 ‘스스로 사물을 만드는 것에 의해’ 생긴다. 미키 기요시는 “인간은 사물을 만드는 것에 의해 자기를 만들고, 그리하여 개성이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하면 개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벤의 이야기에서 당신이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