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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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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울증에 대해서 잘 모른다. 주위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도 없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질병’
과 같은 미디어에서 주워섬긴 말들은 증상의 낙차가 큰 질환으로 인식되었으며 약물치료로 다스릴 수 있다는 정도의 얕디얕은 정보뿐이었다.
책 <야생의 위로>를 읽으면서 우울증을 이렇게 잘 다스릴 수 있구나 싶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작가 ‘에마 미첼’은 25년간 우울증을 앓아왔다. 견디기 힘들 때는 의사를 만나야 하고, 약을 처방해서 먹기도 하지만 평소 그가 선택한 항우울제는 자연이다. 날마다 숲속을 산책하는 일은 그 어떤 상담치료나 의약품 못지않은 치유효과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야생의 위로>는 작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근처 숲을 주로 산책하면서 온 몸으로 느낀 자연을 텍스트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산책에는 늘 애견 애니가 동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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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보다 조금 더 먼 곳이나 예전에 살았던 곳, 숲이 아닌 도로나 바닷가에서 만난 자연도 이 책에 등장한다. 1년 동안의 기록을 월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나는 우울증 환자도 아니고 주위에 그런 사람도 없는데 우울증에 대한 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장담컨대 이 책은 그런 고민 하나도 할 필요 없이 누구나 읽으면 좋다. 대부분 콘크리트와 시멘트에 둘러싸여 살기에 흙을 밟을 일이 없고 풀이나 곤충 새를 마주할 기회도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읽어봐야 한다. 사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지하주차장에 주차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일상을 떠올려보면 앞의 말이 실감날 것이다. 물론 집에서 식물이나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생명체를 키우는 행복감으로 충분하다고 하겠지만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야생의 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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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책에서 변화하는 계절에 따른 자신의 상태와 자연의 상태를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자연과 만나면서 위로받고 치유받은 내용들을 사진과 그림으로 더해 자연이 항우울제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수 논문이나 저명한 학자들의 책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작가가 내놓은 이 책이다. 하루 종일 자연과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 누구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확인가능하다. 우울증 환자가 아니어도 영국의 야생을 통해 위로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래는 작가가 말하는 자연을 만났을 때의 효과이다.
- 녹지를 걷는 것은 체내 여러 계통에 직접적으로 이로운 작용을 한다. 자연 속에서, 특히 숲에서 시간을 보낸 연구대상자들은 혈압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코리티솔 수치가 감소했으며 불안이 가라앉고 맥박도 차분해졌다.
- 대부분의 식물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감염을 막아주는 휘발성 화합물과 기름을 생성하는데 이런 물질을 통칭하여 ‘피톤치드’라고 부른다. 피톤치드 흡입은 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면역계와 내분비계, 순환계와 신경계에도 일부 같은 작용을 한다.
- 세로토닌은 뇌 신경세포 간의 신호를 전달하는 화합물인데 우울증 환자의 경우 이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감소한다. 세로토닌과 인간의 기분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며 자연과의 접촉이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한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 피부나 망막이 햇빛에 자극을 받으면 세로토닌 분비가 촉진되는데 햇빛이 강한 날일수록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그래서 11월에서 3월 사이에 햇빛이 약해지면 어떤 이들은 겨울 우울증 혹은 계절성정서장애를 앓기도 한다.
- 인간이 미코박테륨백케이 같은 양성 토양 박테리아에 접촉하면 박테리아의 세포벽에서 나온 단백질이 특정 뇌세포 군집에서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잠시 잡초를 뽑으며 보내는 시간이 화단 주위에 심은 꽃에만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 산책과 같이 가벼운 운동을 하면 혈류 내에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엔도르핀은 통증을 감소시키며 온화한 황홀감과 은근한 자연적 도취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여기에 햇빛과 식물이 생성하는 화합물과 유익한 토양 박테리아의 효과까지 더한다면 정원이나 들판, 숲을 산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약상자에 손을 집어넣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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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가 직접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 자연을 보는 것도 충분히 좋았지만 작가의 텍스트가 더 마음에 들었다. 자연을 서술함에 있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쓰기도 했지만 비유나 묘사를 통해 마음 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영국의 풀들(혹은 야생초)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사진으로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나는 야생초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새이름 같은 경우는 들어본 적 있지만 생김새는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 역시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 어차피 전혀 모르는 대상인데 그림이나 사진보다는 텍스트로 읽으며 상상하는 맛이 있었기 때문에 작가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한 텍스트들을 골라 옮겨본다.
- 활짝 핀 등나무꽃과 햇살에 잠긴 꽃이 만발한 정원을 묘사한 단락이 내 마음에 향기로운 연고처럼 작용한다. 나는 멜랑콜리에 빠진 고슴도치처럼 아주 오랜 시간 잠을 잔다.
-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높이 자란 산울타리가 통로를 이루고, 마침내 눈앞이 활짝 트이자 흐린 잿빛과 갈색, 겨울철의 맥빠진 녹색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거칠고 헤진 군복을 꿰매어 만든 조각보 같다.
- 제비가 정원 위로 솟구쳐 오른다. 마치 허공에서 파도를 타는 흑청색 돌고래 같다. 각다귀와 날벌레들이 모여드는 울타리 가장자리를 따라 헛간 지붕을 스치듯 날아오르더니 능금나무에 이르러 휙 급강하하여 작은 정원 끄트머리에 있는 낡은 텔레비전 안테나에 앉아서 쉰다.
- 노란구륜앵초의 색은 매우 강렬하다. 마치 진한 게란 노른자 안에 오렌지색 점 다섯 개가 찍혀 있는 것 같다. 꽃받침에서 불쑥 나와 줄기를 빙 둘러싼 조그만 꽃송이에 하트 모양의 꽃잎 다섯 장이 주름 장식처럼 달려있다.
- 이 새의 울음소리에는 일련의 순서가 있다.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물소리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감미롭게 반복되는 떨림 섞인 고음, 반음계 아래 엔진의 울림처럼 나지막한 저음까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을 때면 다른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다. 청각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새의 울음소리에 반응하여 머릿속의 뇌세포가 폭발적인 환희에 빠진다.
- 애기풀의 키는 7센티미터 정도이며 참제비고깔처럼 푸르고 카리브해 상공처럼 맑은 외꽃잎 안에 흰 공작새 꼬리털처럼 가느다란 술 모양의 내꽃잎이 있다.
- 쏙독새는 정말로 매혹적인 조류다. 특이하게도 땅바닥에 둥지를 틀며, 깃털에는 나무껍질과 이끼를 쏙 빼닮은 섬세한 얼룩무늬가 있어서 낮 동안 나뭇가지에 앉아 쉬어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넓죽한 분홍색 주둥이 때문에 두꺼비와 닮아 보이는 쏙독새는 6,7월의 황혼이면 거대한 나방처럼 황야와 삼림지대의 공터를 날아다니며 매혹적인 짝짓기 춤을 추고 기계적인 느낌의 진동음으로 서로를 부른다.
- 나를 에워싼 야생식물과 곤충들로부터 느끼는 이 절대적 환희를 병에 담아두었다가 우울증으로 쓰러져 집을 나설 기운이 없을 때 열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4월에 거실 창밖으로 새를 관찰한 것은 우울증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건 말하자면 이부프로펜 한 알로 부러진 다리의 통증을 가라앉히려는 것과 같았다. 그에 비교하면 페르민 숲의 효력은 아편이나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우울증 환자가 아니더라도 더 자주 산책하고 더 많이 자연을 가까이 하면 좋겠다. 흙을 밟으며 새소리를 듣고 피어나는 새순과 꽃을 보며 코로나 때문에 우울해진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2년 전 주택으로 이사한 후 아파트에 살 때보다 당연히 식물과 가까이 있고 흙을 더 많이 밟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고 살았다. 관심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습관이 된게 아닌가 싶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작가처럼 새나 곤충, 야생초들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천한 실력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까봐 사진찍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자연의 모습에 촉을 세우며 살아간다면, 우울증 환자는 항우울제의 효과를, 아닌 사람은 우울증 예방 백신을 맞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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