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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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앤파커스 출판사의 신간 <나의 기억을 보라>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의 보스턴대학교 강의를 텍스트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저자 아리엘 버거는 엘리 위젤의 제자이자 조교로서 그와 25년간 인연을 이어왔으며 이 책은 조교로 5년간 함께한 엘리 위젤의 수업을 정리한 것이다.

<나의 기억을 보라>는 엘리 위젤 교수의 수업 내용을 7개의 키워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고, 그 안에 저자가 평생을 위젤 교수와 어떻게 영적 교류를 해왔는지도 들어있다. 책을 읽다보면 위젤 교수의 심도 깊은 강의 내용을 듣는 것 같다가 한편 저자의 에세이를 읽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공부, 결혼, 직장 등 인생의 주요 문제를 위젤 교수와 의논하고 도움 받은 것을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그래서 묵직한 주제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수업의 부담은 누군가의 인생을 살짝 엿보며 그 무거움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제 연로하여 하나 둘 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 그 야만의 시기를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지면 그들의 육성은 점점 듣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들의 경험은 책이나 영상물로 만나게 될 것이고 현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도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했던 악몽같은 시간들을 우리는 책이나 영화로 만나볼 수 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우리는 직접보다는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살긴 하지만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족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을 책으로 읽는다한들 당사자에게 몇 %나 공감할 수 있을까? 역사의 증언을 책으로 읽으면서 우리는 당시의 고통을 간접 경험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고 살아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다잡게 된다.

 

위젤 교수의 수업을 이젠 직접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책은 그의 강의실 한쪽 책상에 앉아 있는 체험을 하게 해준다. 거의 15여 년 전의 강의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지금 읽어도 미래에 읽어도 가치롭게 다가온다.

 

특히 위젤 교수는 교사로서의 긍지가 가장 크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학생들에게 배움에 대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에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만난 모든 학생에게 배움에 대한 애정을 가르치려고 애썼습니다. 배우고 또 배우는 겁니다. 우리는 오직 배움을 통해서만 윤리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위젤 교수가 죽기 불과 몇 주 전에 저자와 한 대화 내용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교수는 계속 말한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 비로소 학생들도 가르치는 사람을 동등하게 바라보고 그를 통해 뭔가를 느끼게 됩니다.”

 

위젤 교수의 답을 읽다보면, 교사가 학생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 학생이 공부를 생각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위젤 교수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교사의 역할은 학생들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고 어두운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그리고 친구의 역할도 중요하지요. 감상주의를 떨쳐버리고 세상의 광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함께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요소가 하나 더 있지요. 바로 웃음입니다. 웃음이 유용한 건 독재자의 언동과 거짓말을 지적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절망이라는 유혹에 흔들릴 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지요.” - p.204

 

저자는 위젤 교수와 평생을 이어온 일들을 이 책에서 밝히면서 꽤 담담한 어조로 두 당사자의 대화조차도 관찰자적으로 서술했다. 위의 웃음 부분을 읽으면서는 위젤 교수가 직접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꽤 유머러스했을 것 같은데 둘의 대화는 늘상 진지하고 거리감이 있어보였다. 이런 책을 직접 쓸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는데 분명 조크나 유머가 오가는 싱거운 대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책에 실려 있지 않다. 강의 내용의 분위기상 그런 개인적이고 가벼운 내용은 배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지만 한편 둘이 책 뒤편에선 얼마나 껄껄대며 웃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의 은사님이 떠올랐다. 2월 말에 안부차 선생님 자부에게 연락했는데 2월 초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른다. 작년 여름 선생님 댁에 방문했을 때 거동은 힘들어도 지팡이 짚고 거실까지 걸어 나오셨고 심심할 땐 스토쿠를 한다며 책자를 보여주고 웃으시던 그 얼굴이 눈에 선한데 몇 달만에 세상을 버리시다니...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 달라고 당부했는데 연락 안 해줘서 뒤늦게 알게 되니 원망스러웠다. 제자로서 은사님 마지막 가는 길 배웅할 기회를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책의 저자는 위젤 교수가 살아생전 의미 있는 인터뷰도 하고 마지막도 배웅할 수 있었던 걸 보니 부러웠다. 책에 다 싣지 않은 둘의 더 친밀한 관계도, 저런 은사님을 두게 되어 이런 책을 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부러웠다.

 

이 책은 위젤 교수의 인권활동가로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의 강연 내용에 무게 중심이 있지만 그의 강의를 다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질문을 한 학생이 있다.

 

상대적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 학생들이 정말로 교수님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도 못 하면서 교수님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p. 63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학생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위젤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려면 먼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목격자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우리 모두 목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p. 65

 

위 문답 후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 한다.

학생이 목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을 기르는 교육을 받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리뷰의 서두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점점 더 공감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위젤 교수의 충고대로 먼저 경험한 목격자의 기억을 경청하면 모두가 목격자가 된다!를 명심하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7개의 키워드로 나눈 강의 내용보다 교육의 힘과 교사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위젤 교수와 제자 아리엘 버거의 관계도 관심 있게 읽었다. 홀로코스트 이후 자신을 지탱해준 것이 배움이었다고 말한 위젤 교수. 배움이 자신을 구했듯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교육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책을 선생님들이 많이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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