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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평점 :
<뉴요커>에서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캐스린 슐츠는 책 <상실과 발견>에서 잃어버리고 찾아내는 평범한 일상 속 경이로움을 언어로 승화해냈다. 아버지의 투병을 곁에서 지켜보다 종국엔 상실을 겪는 일련의 과정 동안 생의 반려를 만났다. 작가에게 가장 큰 존재였던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동시에 그 공허를 채워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행운이다.
현대인은 외롭다는 말을 자주 한다.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바쁘다면서 제 안 어딘가 자리 잡고 있던 외로움이 범위를 넓힐라치면 곁에 누군가 함께 하길 갈망한다. 사람이 여의치 않으면 동물이라도. 요즘은 휴대폰이 친구라고 말하는 이도 많다. 그러나 유튜브 속, SNS 속 사람들은 허상이다. 직접 만나는 사람을 통해 얻는 충만감에 비할 바 못 된다.
이 책을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우리의 생은 결국 사랑을 찾는 일’이라 하겠다. 조금 더하자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는 있으나 이전 것과는 동일하지 않을 것이며 일련의 과정 속에서 경이를 찾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작가는 유려한 문체로 풀어내고 있다. 일상 속 물건 분실의 경험과 지극히 소소한 것들의 발견을 역사와 지리, 과학, 고대 문헌과 철학, 문학으로 연결하는 능청스러움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상실과 발견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이토록 폭넓게 확장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누군가의 평범한 개인사를 책으로 읽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라 수긍하며 재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기는 일기장에나 쓰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은 일상을 소재로 했으나 확장된 주제로 나아가지 못한 경우다. 캐스린 슐츠는 자신의 경험에 비범성이라는 옷을 입히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다. 그의 글을 읽는 독자를 자연스레 유사한 자신의 경험 속 상황으로 곧장 들어가게 만든다. 잃어버린 그 물건을 찾았던가, 못찾았던가 다시 기억 창고를 더듬거리게 만들고, 떠나보낸 사랑하는 이를 추억하게 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보통 기억의 오류나 왜곡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우리 집에서 발생한 분실물은 남편의 운전면허증과 바지다. 남편이 면허증을 넣어둔 바지를 찾을 때 나는 그 바지를 마지막으로 본 기억을 떠올렸다. 세탁 바구니에 있던 남편의 바지를 평소처럼 세탁기에 돌린 후 널었다. 그 후로는 기억이 없다. 남편의 바지와 면허증도 없다는 사실! 루틴대로 보자면 늘 같은 곳에 널었던 바지를 걷어 남편의 옷장에 걸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곳은 물론 집안의 모든 옷장과 옷걸이를 뒤졌으나 없었다. 우리 집에 사는 사람은 둘 뿐, 남편의 바지를 입을 다른 사람이 없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는 기껏 ‘귀신이 곡할 노릇 뿐’이다. 작가는 ‘잃어버린 물건들의 계곡’이라는 말을 소환하고 그것이 실린 책과 작가 뿐 아니라 영화도 소개한다. 잃어버린 물건들의 계곡의 매력적인 측면과 우울감을 이야기했다. 평소라면 그녀의 필력을 부러워했겠지만 이번엔 감히 그럴 수조차 없이 방대한 그녀의 지식 체계에 기립박수를 칠 뿐이었다.
작가가 연인 C와의 만남과 데이트, 결혼을 술회한 내용도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개인사일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배우자가 동성이고 그들의 관계를 말할 때 인용한 것들은 "상실"파트 만큼이나 특별했고 인상적이었다. 사랑에 대한 글을 읽을 때 공감할 독자가 얼마나 될까. 사랑에 회의적이라면 심드렁할 것이고 어떤 이는 현재 자신이 딱 그 상태라며 격하게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발견" 파트의 글은 인연과 일상을 다양한 문학 속 문장들 사이 사이에 배치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게 만든다.
이윽고 "그리고" 파트에 도달하면 '그리고'라는 단어의 어원과 쓰임, 느낌, 나아가 작가가 기어이 하고 싶었던 말의 궁극과 만나게 된다.
p. 258
어떤 것을 상실하거나 발견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한히 결합할 수 있다는 특성은 이 세계가 한없이 거대한 데 비해 그 안에 깃든 우리 공간은 간데없이 작게 보이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이는 원시적인 지식의 상상된 형태를 모방한다. 그 형태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앞에 무계획적으로 던져져 있으며 어떤 관계가(관계가 있긴 하다면) 그것들을 통제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p. 294
많은 이들이 고난을 겪거나 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게 자주 하는 말처럼, 삶이 계속된다는 건 진실이다. 나는 늘 진부할지라도 이 표현이 좋았다. 손쉬운 위로를 거부하기에. 이 표현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 때문에. 이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없다." 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처럼 고통이 끝난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표현처럼 명명백백한 함의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이런저런 일이건, 딱히 서로 구분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뜻이다.
p. 300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것과 이미 사라진 것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이 책은 에세이이면서 소설스러운 지식 정보 책 같다. 독자의 현재 관심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책으로 읽힐지는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면서 나와 연결된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볼 눈 또한 가지게 될 것이다.
**이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