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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인간 - 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손봉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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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철학은 삶의 가장 절실한 문제에 관한 한 사치품이 아닐 수 없다. (4면)




2. 놀랍게도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거리인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경험들과 비교해 볼 때 철학은 이제까지 매우 인색했다 할 수 있다. (10면)




3. 고통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생물학적 현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심리적이며 사회적이고 나아가서 정신적인 현상이란 사실이다. (13면)




4. ‘있는 것’ 일반에 대한 논리적 접근은 존재론이요, 따라서 이제까지의 서양철학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있는 것’들이 항상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철학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이런 고민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일상언어 철학자들에게도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있고, 요즈음 유행하는 탈현대철학의 급진적인 항의와 함께 더욱 강조되고 있다. (16, 17면)




5. 모든 과학적인 언어의 총체를 세계라고 표현한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문제들이 다 해답을 얻더라도 인생의 문제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17면)




6. 아직도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는 철학자들이 많이 회피하고 있다. 고통이 철학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8면)




7.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고통은 죽음 못지 않게, 혹은 오히려 죽음보다 더 심각함을 알 수 있다. (20면)




8.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유대인의 고통이 레비나스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존재론 중심의 철학을 비판하고 고통당하는 고아와 과부의 얼굴을 중요시하는 형이상학을 제창하게 하였다. 철학은 고통과 씨름함으로 스스로를 거듭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21면)




9.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는 ‘작용자의 언어’(language of agency)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주로 ‘마치 ... 것 같은’의 구조를 같는다고 한다. (25면)




10. 고통의 경험을 분명하게 다른 어떤 경험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도 없고,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지만, 모든 다른 경험과 구별되는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은 그 경험을 일으키는 원인으로부터 도피하도록 행동을 유발시키거나 그것이 가능하게 해 주기를 호소하는 것이다. (25면)




11. 우리말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서양어에서도 ‘괴로움’(고, suffering, Leid, souffrance)와 ‘아픔’(통, pain, Schmerz, douleur)을 구별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괴로움은 정신적인 것이고 아픔은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27면)




12.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아픔(통)과 괴로움(고)을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고, 고통이란 용어로 양자를 다 표현한다. (28면)




13. ‘아픔’과 ‘괴로움’의 엄격한 구별은 몸과 마음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의학과 구체적인 진료행위에 있어서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아픔과 괴로움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에서도 존중되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모리스는 아픔(pain)과 괴로움(suffering)의 구별을 ‘두 가지 고통의 신화’(Myth of Two Pains)라 부르며 비판하고 있다. (30면)




14. 그러나 우리가 보건대 사고하면서 존재하는 자신보다 더 확실하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아픔을 느끼는 자신이다. (34면)




15. “아픔을 느끼는 것은 확실성을 갖는 것이다.” (To have pain is to have certainty)...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Doleo ergo sum) (35면)




16. “쾌락이 좋고 고통이 나쁘다는 것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것을 느낀다.”고 파스칼이 말했다 한다. (38면)




17. 아리스토텔레스와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전적으로 대칭관계에 놓았다. ...고통과 쾌락이 대칭적일 수 없음을 포퍼는 잘 지적하였다. ... 그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통과 쾌락은 대칭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경험이 쾌락의 경험보다 더 근본적이고 원초적이고 독립적이라는 사실이다. (41, 42면)




18. “경험되는 세계에서 무의미한 고통의 지극히 작은 흔적이라도 동일철학이 거짓임을 드러낸다.”는 아도르노의 비판은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쉘링의 철학 못지않게 헤겔의 철학에게도 적용된다 하겠다. 긍정의 부정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경험이 부정을 인식하게 한다. (42면)




19. “고통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인류의 지배자다.” (슈바이처, 43면)




20. 쾌락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고통은 당하는 것이다. 쾌락은 적극적으로 추구하나 고통은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44면)




21. 고통은 본질상 우리의 행동을 요구한다. 사실 바로 여기에 고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다. (46면)




22. 불과 지척에 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은 저 하늘의 은하수보다 더 멀리 있다. (Elaine Scarry, 56면)




23. 고통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57면)




24. 고통은 그 자체가 외로울 뿐만 아리라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60면)




25.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은 상징적 상호작용론(Symbolical Interactionism)으로 알려진 미드(G. H. Mead)의 사회심리학적 설명이다. 미드에 의하면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물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의식도 궁극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라고 한다. 즉 내가 나를 바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비로소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66, 67면)




26. 그러나 이렇게 의식된 자신은 목적격으로서의 자신(‘me')이지 주격으로서의 자신('I')이 아니다. ...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조직화되어 ’나(me)'를 구성하고, 그것에 대해서 주격으로서의 내가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67, 68면)




27. 기쁨은 자신을 잊게 만든다. ... 모든 형태의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로 파고 들고... (70면)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 비록 고통 그 자체를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다른 어떤 내면적인 필요나 욕구보다 더 강하게 고통은 언어를 요구한다. (75면)




29.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반성적 사고로 이끄는 매우 중요한 힘이다. (80면)




30.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의 불가피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어떤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81면)




31.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고통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불평이 그것을 보여 준다. (87면)




32.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것이 전제되어야 부정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나 실제의 경험에 있어서는 부정을 먼저 경험하고 그것을 전제로 긍정적인 것을 인식한다. (91면)




33. 헤겔과 마르크스의 영웅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합리한 운명에 항의하는 고대 그리스의 프로메데우스 신화가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현대인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역사철학과 아무 관계가 없다. (97면)




34. 어떤 부위에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가능한 한 빨리 그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적인 것으로 회복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 고통은 그것으로부터 피하라는 신호이며, 몸의 안전과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체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03면)




35.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매우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은 그것이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루이스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약 5분의 4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가해진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만든 사회제도 때문에도 당한다. (108, 109면)




36.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보다 더욱 강력한 것은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이다. ... 그러므로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보다는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이 윤리적 당위성의 근거가 되어야 하고, 이런 목적론적 윤리는 의무주의 이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데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의 기피일 것이기 때문이다. (112, 113면)




37. 만약 어떤 윤리이론이 실천적인 효율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이론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훌륭한 윤리학은 될 수 없다. (121면)




38.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벽한 윤리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고통론’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이론도 공리주의가 가진 약점, 즉 정의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인정하고, 롤즈가 제시한 ‘차등의 원칙’으로 보완해야 할 것이다. 즉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이쏙, 나의 어떤 행위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의 고통밖에 줄이거나 제거하지 못할 경우, 나는 그 둘 중 고통을 더 많이 당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려고 해야 하며, 사회 전체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정책도 고통을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고통의 감면이 이루어지도록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126면)




39. 재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론적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윤리이론이라 할지라도 그 이론이 행위자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고취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훌륭한 윤리이론이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의무론적 윤리이론들은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더라도 구체적인 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힘이 약하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옳기 때문에 혹은 좀더 나아가서 양심이 요구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들의 수는 불행하게도 그렇게 많지 못하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이론들은 여러 가지 이론적인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계속해서 윤리적 논의에서 거론되고 있고, 특히 공리주의는 국가정책 수립에 매우 설득력 있는 이유로 제시되는 힘을 행사하고 있다. 이론적 약점 대신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고취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목적론적 이론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실제로 추구하고 있는 쾌락이나 자기이익을 윤리적 행위의 미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7면)




40. 그리고 윤리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쾌락을 증가시키거나 자신들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비도덕적 행위를 하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128면)




41.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회에서 도덕적 타락이 커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통을 경험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감정이 많이 작용하는 친밀한 인간관계 중심의 사회(Gemeinschaft)에서 이해 타산의 비인격적 사회(Gesellschaft)로 변해 가는 것은 감정이입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동정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129면)




42. 어떤 학자들은 동정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자연적 의무이론(a theory of natural obligation)을 제시한다. ... 현대인에게 그런 이론은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그렇게 설득력이 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30면)




43. 현대사회에 요구되는 윤리적 자원은 역시 합리성이다. 그리고 합리적 윤리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Principle of Universalizability) 혹은 가역성의 원칙(Principle of Reversivility)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위치에 서 볼 수 있는(역지사지) 능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 (130면)




44. 하고 싶은 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하기 싫은 것이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은 고통을 피하려는 필요이기 때문이다. (133면)




45. 과학적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내세와 최후 심판자를 인간사회에서 몰아낸 계몽주의가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도덕적 질서를 어떻게 유지하는가였다. 그것이 칸트철학의 고민이기도 했고, “신이 실재하지 않으면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볼테르의 문제이기도 했다. (134면)




46. 쉘러는 로크 등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결핍(Beduerfnis)으로만 설명하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인간에게는 결핍과 관계없이 풍족으로부터 넘쳐흐르는 힘에서 솟아나는 유희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문화창조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Scheler, 139면)




47.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구체적인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가해지는 경우가 적지않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구체적인 개인보다는 제도, 구조, 법률, 집단 등 비인격적인 힘이 고통을 가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140면)




48. 자본주의 구조 때문에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고 온갖 종류의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밝혀 낸 마르크스의 사회분석이 없었다면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자본주의 구조의 수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조의 윤리성을 문제삼는 사회윤리가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 때문에 생겨났다는 주장까지 있다. (143면)




49. 고통의 강도는 그 제거의 절박성에 비례한다. (152면)




50. 고통이 문화창조의 유일한 자극이나 원동력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우리가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인간에게 고통이란 경험이 없었더라면 아예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거나 적어도 지금과 같은 문화는 창조되거나 발달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생존본능은 고통보다 더 기본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능이 고통이란 경험으로 표현되지 않았더라면 문화창조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53, 154면)




51.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C.A. van Peurson)은 콩트가 인간의 사고가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마침내 실증적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 것을 원용하면서 그 대신 신화적 단계, 존재론적 단계, 기능적 단계로 문화분석모형을 제시한다. (199면)




52. 반 퍼슨에 의하면 현대에 지배적인 것은 기능적 태도인데 이는 존재론적 사고에서 인간(주체)은 대상(세계)과 거리를 두고 자신은 세계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과 세계가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이다. (200면)




53. 이런 존재론적 단계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인간 이해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200면)




54. 고통당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고아와 과부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203면)




55. 의미로서의 고통은 아프지 않다. (204면)




56. 우리의 윤리적 의무는 고통당하는 고아와 과부의 얼굴 앞에서 생겨날 수 있다. (205면)




57. 고통은 많은 사람을 고상하게 만든다. (206면)




58. 측은지심이 인간을 확실하게 도덕적이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 접했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의무감이 유지되고 효과 있는 결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것이 윤리적 규범으로, 법으로 제도화되지 않을 수 없다. 윤리적, 법적 규범은 궁극적으로 약자에 가해지는 강자의 부당한 고통을 제도적으로 막고 벌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7면)




59. 고통을 당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그런 상황은 동시에 사람을 정신적으로 가난하게 만들고 비인간적이게 한다. 인간의 고통이 가진 그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생생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많은 현대인을 피상적으로 만들고 비인간적으로 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2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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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 의학적 철학적 치유적 관점에서 본 고통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음, 공병혜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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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냐하면 모든 의학적인 인식들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증의 중심은 바로 당사자인 환자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환자를 경시한 채 손상된 대상을 대하는 듯한 기계적인 행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 별로 확실한 근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환자가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하며 약물치료나 수술, 외과적 또는 심리적 조치 등 어떤 방법을 취하든 간에 환자에게 치료에 대한 이해를 일깨워주어야 한다. 오직 이해만이 환자 자신의 통증을 치료함에 있어 환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참이야말로 치료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본적인 기반이다. (15면)




2. 통증은 만성화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성화는 통증으로 예민해진 신체를 지닌 환자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기술은 바로 신체적, 심리적 질병의 발생이 만성화되는 과정에 대항하기 위해 제공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로부터 치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6면)




3. 그(가다머)는 고통은 의학에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질문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당사자 자신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17면)




4. 그(가다머)는 의료인의 자료를 새롭게 자리매김하면서, 치료자는 환자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면)




5. 환자는 의학을 통해서 도구화되지 않아야 하며 통증을 겪고 있는 주체로서 있는 것이다. (이상 마르쿠스 쉴텐볼프의 서문, 18면)




6. 실제로 강연할 때 나는 청중들에게 대화를 건네려 하며, 그 대화는 누군가 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의 짧은 강연의 마지막에는 당연히 활발한 토론이 있을 것이며, 이 토론은 자신의 고유한 지평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다. 모든 대화는 자신의 고유한 경계를 일깨우게 하기 때문에 매우 값진 것이다.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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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불확실성 -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찾아서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희석 옮김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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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란 무엇인가? 현실에서 과거는 현재의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분명히 어떤 실재의 과거는 있지만, 과거에 적용하기를 바라는 어떤 렌즈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에서만 그 과거를 알 수 있을 뿐이다. (6면)




2. 그러나 지난 20년간 과학은 과학자들이 신학, 철학, 민중적 지혜에 오랫동안 가한 것과 똑같은 형태의 공격을 받았다. 이제는 과학도 이데올로기적이고 주관적이고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받는다. (14면)




3. 사회과학들은 또한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이라는 세 부분으로 분할된 지식이 공격당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 하나는 이른바 (자연과학에서 연유한) ‘복잡성 연구’이며, 다른 하나는 (인문학에서 기원한) ‘문화연구’이다. (28면)




4. 시간적 대칭이 아니라 시간의 화살이며, 인식론적 가정은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며, 과학의 궁극적 산물은 단순성이 아니라 복잡성에 관한 설명이다. (29면)




5. 문화연구도 복잡성 과학자들이 공격한 바로 그 결정론 및 보편주의를 공격했다. 문화연구는 특히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사회현실에 대한 주장은 사실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근거를 들어 보편주의를 비판했다. ... 문화연구는 텍스트란 특정한 맥락에서 창조되어 특정한 맥락에서 읽히거나 평가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29, 30면)




6. 그러나 철학자들은 진리를 공표하는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근대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주요한 문화적 메씨지이고... (45면)




7. 한 마디로 말해서 불확실한 사회적 실재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방법론적 로드맵이다. (53면)




8. 지난 25년간 힘을 얻은 두 지식운동은 과학과 철학의 분리에 직접 도전했다. 그 중 하나는 복잡성 과학이다. (64면)




9. ‘시간의 화살’이라는 깃발을 높이 쳐듦으로써, 가장 작은 물질 단위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궤적이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프리드진은 역사적이지 않은 사회분석은 없다고 끊임없이 주장해온 사회과학자들의 입지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사회과학 인식론 지형의 한가운데에 옮겨 놓았다. (65면)




10. 결국 지식은 선택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혁신과 상상력,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것이어야 마땅하다. (68면)




11. 현실이 불확실하면, 선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선택을 피할 수 없다면, 분석과정에서 가치에 대한 분석자의 동의, 선호, 전제가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69면)




12. 결국 사회과학은 존재하는 가장 복잡한 체제들에 대한 연구이며, 그러므로 체계적 분석으로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분야이다. (68면)




13. 현실이 불확실하면, 선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선택을 피할 수 없다면, 분석과정에서 가치에 대한 분석자의 동의, 선호, 전제가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69면)




14.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동시에 말이다. ... 학문간 연계(interdisciplinarity)는 인접한 두 분과학문의 합법적인 결혼이다. 나 자신은 전체적인 난혼을 지지한다. (브로델, 77면)




15. 그들은 결정론, 선형성, 시간가역성, 평형으로의 영원한 회귀 등을 거부한다. 그들은 인간만이 아니라 원자와 은하계도 ‘시간의 화살’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고, 따라서 모든 물질은 창조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84면)




16. 한편으로 그들은 인문학 내부에서 많은 학자들이 개진한 훌륭한 취향의 정전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으며, 따라서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중심적인 정전들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은 근대세계체계의 불평등한 위계구조의 한 산물이며, 이 체제의 권력자들을 유지시키는 데 복무했음을 증명했다. (85면)




17. 그들은 과학에 엄청나게 투자했으며 대부분 인문학을 거의 용인하지 않았다. ... 철학이 중세 말기에 진리진술의 토대로 신학을 대체했듯이, 과학은 18세기 말에 철학을 대신했다. (89면)




18. 실재에 대해 의미심장한 이해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내가 배제되지 않은 중도라고 부르는 -시간과 지속, 특수와 보편이 동시적으로 양쪽을 겸하면서도 어느 것도 아닌- 그런 곳에 서 있어야만 한다. (95면)




19. 브로델은 전통 역사학이 지속에 대해 시간을(어떤 특정한 시간을) 우위에 두는 것으로 보고, 사회과학을 위한 인식론의 핵심적인 도구로서 장기지속을 복권시키려고 했다. 프리고진은 전통 물리학이 시간에 대해 지속을(어떤 특정한 지속을) 우위에 두는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을 위한 인식론의 핵심적인 도구로서 시간의 화살을 복권시켜려고 했다. (95, 96면)




20. 브로델은 구조, 즉 지속을 무시한 역사학의 지배적인 관점과 싸워야만 했다. 프리고진은 비평형 상태와 초기조건의 특이성의 결과, 즉 시간을 무시한 물리학의 지배적인 관점과 싸워야만 했다. 따라서 브로델은 장기지속의 중요성에 대해, 프리고진은 시간의 화살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브로델이 사건사라는 프라이팬에서 아주 긴 장기지속이라는 불 속으로 뛰어드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중도에 머물기를 고집한 것처럼, 프리고진은 가역적 시간을 포기하고 질서와 설명의 불가능성이라는 불로 뛰어들기를 원치 않았다. (99면)




21. 그것은 분명히 중도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새로움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결정주의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모든 것이 부조리하고 원인이 없고 불가해한,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이 다스리는 세계, 즉 소외로 이끄는 이 두 개념들 사이에 난 좁은 길이다.” (1997, 187-188) (100면)




22. 심각하게 공격받고 있는 것은 뉴튼의 과학이다. 심각하게 공격당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문화라는 개념, 과학과 인문학은 양립할 수 없다는 개념이다. (102면)




23. 브로델과 나는 세계경제들이 삶, 즉 시작과 끝이 있는 유기적인 구조라고 믿었다. 따라서 인류역사에서 복수의 세계경제들이 (그리고 물론 세계제국들도) 있었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세계체제 분석이 아니라 세계체제들의 분석을 논했다. (111면)




24. 단기는 사건사, 중기는 국면사, 장기는 구조사이다. 아주 긴 시간대에 대해 그는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자의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 그(브로델)은 그것을 사회적 실재의 영원한 진리(매우 긴 시간)만을 보려는 사람들과 모든 것은 특수하며 따라서 반복 불가능하다고(단기간) 생각한 사람들 사이의 분열로 간주했다. 브로델은 핵심적인 사회적 시간대는 사실은 나머지 두 가지이며, 무엇보다 세 가지 특징적인 구조적 제약을 품고 있는 장기 지속을 주장하려고 했다. 즉 그것은 언제나 즉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오래 지속되며, 매우 천천히 변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112, 113면)




25. 브로델의 이름을 붙인 것은 장기지속, 다시 말해 장기간 거대 규모의 사회변화에 대한 연구에 우리가 매진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121면)




26. 프리고진은 실재는 ‘결정주의적 혼돈’의 양식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질서는 항상 잠시 존재하지만, 곡선이 ‘분기점’에(즉 방정식들에 대해 두 개의 똑같이 타당한 해법이 있는 지점에) 도달할 때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해체하고, 분기점에서 실제로 행한 선택은 본질적으로 미리 결정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선지의 불확실성의 문제이다. 이후 나는 프리고진의 입장이 ‘배제되지 않는 중도’(결정된질서와 설명할 수 없는 혼돈)에 대한 요청이며, 이런 견지에서 특수주의와 영원한 보편주의라는 배타적인 대립항으로서의 두 극단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필연적으로 해체하고 어떤 종점을 향해 가는 질서(구조적 시간)를 주장한 브로델의 입장과 완전히 같은 방향임을 주장했다. (127, 128면)




27. 브로델과 프리고진을 따라 그런 체제들에게는 삶, 즉 시작과 정상적인 발전, 말기의 위기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말기 위기의 경우, 사회적 행위는 정상적인 발전의 시기보다 훨씬 큰 영향을 끼친다. (129면)




28. 그(프리고진)은 아서 에딩톤의 잊힌 용어인 ‘시간의 화살’을 받아들여... (130면)




29. 신화에 대한 불신은 근대적 세계관의 우월성을 내세우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Lambropoulos, 137면)




30. 그러나 실재에 내재하는 요소로서의 시간의 화살에서 시작해서 시공간이 사회적 창조물임을 덧붙인다면, 또 복수의 시공간들이 모든 구체적인 사회상황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가 활용해야 하는 인식론과 필연적으로 법칙정립과 개별서술의 모순을 지향할 것이다. (146면)




31. 모든 체제가 그렇듯이, 그런 역사적 체제는 부분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닫혀 있다. 즉 그것들은 작동 규칙이 있고(그것들은 체계적이다)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형세와 모순들이 있다(그것들은 역사적이다). (146면)




32. 물론 공평무사한 학자라는 것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가진 가치들은 과학의 필수요소다. (148면)




33. 19세기는 가치에 대해 사실이 승리를 거둔 세기가 아니라 보편주의라는 휘장 아래 가치의 침입을 숨기려는 시도가 상당히 성공한 세기였다. (149면)




34. 모든 설명에서 우리는 항상 동일성과 차이를 다룬다. (152면)




35. 시인이란 한 개인의 고통이 실재하며 주목받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168면)




36. 그것은 오히려 그런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 매우 강렬하고 종종 매우 정서적인 대화를 통해 가능하며, 그 대화는 다양한 목소리들, 진실에 대한 다중적 관점에 도달하기 위해 증거들을 주의깊게 가려냄으로써 강화된다는 주장이다. (170면)




37. 다양한 지식운동 -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문화연구 등... 그 주장의 핵심은, 보편규범들은 물론 보편적 진리들도 메타서사나 거대서사이며, 그것은 사실상 세계체계 내 권력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때문에 인식론적 유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보편진리로 선포된 것들이 실제로는 특수한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주장에 매우 공감한다. (180면)




38. 적어도 나에게는 인식론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사람들은 왜 광범위하게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열띠게 의문시하는 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183면)




39. 근본적으로 복잡성 과학은 때때로 베이컨적, 데까르트적, 뉴튼적 모델로 명명된 근대과학의 기본모델, 즉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고 선형적인 모델에 도전했다. ... 복잡성 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시간의 화살’과 ‘확실성의 종말’을 주장하면서... (195면)




40. “한 단어의 역사에 대해 쓰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다” (Lucien Febvre, 225면)




41. 과거시제와 복수개념에 따라 오는 것은 다중적 시간성, 다중적 공간성, 다중적 시공간성이다. (227면)




42. 다른 것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이 같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2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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