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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아트 밀 자서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 훈복문화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역사는 여전히 내가 가장 강한 흥미를 가지고 읽는 것이었는데, 나는 특히 고대사를 좋아했다. 나는 늘 미트포오드(Mitford)의 ‘그리스사’를 읽었다. (20면)
2.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으뜸가는 모범이 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은 여러 가지 오류를 고치고, 인테렉트스 시비 페르밋누스(Intellectus sibi permissus, 수동적 오성)에 따라다니는 여러 가지 혼동을 일소하는 데는 제일 좋은 훈련이 되는 것이다. 이 수동적 오성은 통속적인 용법에 온갖 연상의 무더기를 꾸며왔던 것이다. 애매한 전칭 명제들을 내세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의미하는 바를 명확한 용어로 표현하게 하거나, 그가 떠들어대고 있는 것을 실상은 그가 알지 못한다고 스스로 고백하게 하는 엄밀하고 날카로운 음미(elenchus), 모든 일반적 명제를 개별적 명제에 의하여 끊임없이 검증하는 것, 큼직한 추상 명사의 의미를 밝히되 이 명사와 또 이 밖의 것들을 포함하는 훨씬 더 범위가 넓은 유개념의 명사를 세워 놓고 이것을 자꾸 쪼개어 감으로써 마침내 문제되는 것에까지 추궁해 내려가는 격식을 갖춘 포위 논법 - 이것은 이 추상 명사를, 이 명사와 어원이 같은 것들 하나 하나로부터 엄정하게 구별함으로써 그 범위와 정의를 명확히 규정하면 되는 것이다 -. 이 모든 것은 정확한 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으로는 다시없이 소중한 것이요, 또 이 모든 것은 어린 내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정신의 일부를 형성하기까지 했다. (29, 30면)
3. 내가 받은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배운 것이 기억력의 단지 연습이 되어 버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르치는 모든 단계에 이해하는 일이 따르게 하려고 힘썼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능하면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에 앞서게 하려고 힘썼다. (38면)
4. 오랫동안 나는 손재주를 요하는 어떤 일에든지 아주 서툴렸고 아직도 무척 서투르다. ... 나는 일상생활의 문제에 부주의하고 똑똑하지 못하며 또 대체로 정신이 느릿하다고 늘 주의를 들었다. (43면)
5. 그(제임스 밀)는 종교를 도덕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보았다. 첫째로는 허구적인 여러 미덕 - 인류의 복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교리 신앙, 헌신의 감정, 여러 가지 의식 -을 만들어 놓고서 이런 것들을 진정한 덕의 대용물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덕의 표준을 근본적으로 개악하기 때문에 그것은 도덕의 최대의 적이 된다. 그리고 끝으로 종교란 겉으로는 온갖 아첨의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사실에 있어서는 가장 증오할 만한 자로서 그려내고 있는 존재의 뜻을 행하는 것이므로, 바로 도덕의 최대의 적인 것이다. ... “지옥을 만들어내는 존재를 생각해 보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 인류의 대다수가 끔찍스러운 영겁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분명히 알면서, 따라서 그렇게 할 의도를 가지고 인류를 창조한 존재를 생각해 보라. (48면)
6. 아버지의 도덕상 교훈은 언제나 주로 소크라테스 학도의 그것이었다. 즉 정의, 절제(아버지는 이것을 아주 넓은 범위에 적용하였다), 진실, 인내, 고통과 특히 수고하는 일에 서슴지 않고 대하는 마음의 준비, 공익의 존중, 사람들을 그 진가에 의하여, 그리고 사물들을 그 본질적 유용성에 의하여 평가하는 것, 방종한 안일과 태만의 생활에 대립되는 분투노력의 생활 - 그는 이런 것들을 가르쳤다. (54면)
7. 나는 영국의 생활에 경험이 아주 적었고, 또 내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 마음속에 큰 그리고 사리사욕을 떠난 공공의 목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나는 영국에서 소위 사교계라 하는 것의 저열한 도덕적 풍조를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65면)
8. 이 사람들(쎄이, 쌩 시몽)에게서 내가 얻은 주요한 소득은 대륙의 자유주의에 대한 강렬하고 영속적인 흥미였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 나는 언제나 영국의 정치 사정뿐만 아니라 또한 대륙의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늘 주의하고 소식을 알고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은 그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또 나의 발전에 매우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나는 세계적인 문제를 그저 영국의 표준에서만 판단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과오는 영국인에게 있었던 것인데, 심지어 전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아버지도 부득불 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오였다. (67, 68면)
9.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자연의 법칙’, ‘옳은 이치’, ‘도덕적 감각’, ‘타고난 정의감’ 등등의 문구에서 연역된 도덕적 입법에 있어서의 세상 일반의 추론 양식들에 대하여 벤담이 비판을 가한 장이었다. 그는 이런 추론을 가면을 쓴 독단론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독단론은 자기의 여러 감정을 요란스러운 말로 감싸 남에게 덮어 씌워 강요하는데, 이 요란스러운 말들은 이 감정의 이유는 전해 주지 못하고 도리어 이 감정을 그 자체의 이유로 삼는다. (71, 72면)
10. 그러나 이제는 기왕의 모든 도덕가들이 초극되고, 사상계에서 그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이 느낌은 벤담이 여러 가지 행위의 갖가지 종류와 계층을 분석함으로써 행위의 도덕성에다가 행복의 원리를 적용하는 일을 과학적인 것이 되게 한 그 솜씨 때문에 더 강해졌다. 그러나 그때 무엇보다도 나로 하여금 경탄케 한 것은 죄악의 분류였다. (72면)
11. ‘벌할 만한 행위’라고 하는 크고 복잡한 주제에 대하여, 쾌락을 주는 결과와 고통을 주는 결과라고 하는 윤리적 원리에 의거하여 또 이 문제들에 대하여 벤담이 처음으로 끌어들인 세밀한 방법을 따라, 과학적 분류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마치 그곳으로부터 넓고 넓은 정신세계의 전모를 굽어볼 수 있고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고 먼 데까지 여러 가지 지적 소산물이 펼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나를 데리고 간 듯느꼈다. (72면)
12. ‘입법론’의 마지막 권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사람이 달라졌다. 벤담이 이해한 그대로 이해된 그리고 그가 적용한 방식 그대로 이 세 권의 책, 즉 ‘입법론’에서 적용된 ‘공리의 원칙’은, 내 지식과 여러 가지 신념을 서로 아무 상관없이 떨어진 그리고 단편적인 구성 요소들을 한데 뭉쳐, 체계 있게 하는 근본 원리로서 통일을 주었다. 이제 나는 내 의견을 가지게 되었다. 종교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여러 의미의 하나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남에게 가르쳐 주고 또 이것을 널리 퍼뜨림으로써 외부에 대한 내 일생의 주요 목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학설을 통해서 인류의 상태를 여러 모로 변화시켜 보려는 하나의 웅대한 상념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73, 74면)
13. 생활의 수단으로 쓰는 글은 생명 있는 글이 못 되며, 또 필자가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사상가들을 만들어내게 될 책들은 그것을 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며, 또 다 쓰였을 때에도 일반적으로 너무 늦게 세상에 알려지고 명성을 얻기 때문에 생활의 수단으로서 의지할 수는 없다. (88면)
14.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하면, 일생을 통하여 직장에서 내가 할 일들은 이와 함께 내가 수행하고 있던 다른 정신적인 일에서 실상 휴식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아무 재미없는 시시한 일이 되지 않을 만큼은 지적인 일이었고, 또 늘 추상적 사색을 하거나 곰곰이 생각해서 글을 쓰곤 하는 사람의 정신력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는 않는 것이었다. ... (89면)
15. 이와 동시에 나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데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 타협의 필요성, 중요한 것을 살리기 위해서 중요치 않은 것을 희생시키는 기술을 실지로 배우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면 최선의 것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배웠다. 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낙심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내생각대로 된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용기를 얻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정 아무 것도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라도 남에게 전적으로 제압된 것을 아주 평정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배웠다. 나는 일생을 통하여 이러한 여러 가지 수양이 개인의 행복에 다시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론가이든 실제가이든 누구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최대한의 선을 성취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조건이라는 것도 알았다. (91면)
16. 세상에서 좋아하지 않는 견해를 품은 사람들은 그것을 표현할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항상 논변하였고, 또 논변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위클리프라는 가명으로 연속 5회에 걸쳐 종교에 관한 모든 의견의 자유로운 공표의 문제를 충분히 그리고 광범하게 다룬 공개장을 써서 ‘모닝 크로니클’에 기고하였다. (94면)
17.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곧 높은 공공 정신과 무엇보다도 전체의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108면)
18. 오랜 시일을 두고 이 훌륭한 글을 뒤적거린 것이 나 자신의 글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22면)
19. 이렇게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큰 유익이 되었다. 이 시기에 내 사상을 곧장 인쇄에 돌릴 필요 없이 소화하고 성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만저만 소중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었다면, 이 여러 해 동안 일어나고 있던 내 사상과 성격의 중대한 변모에 많은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137면)
20. 인류 전체에 유익한 어떤 것에는 쾌락의 관념 연합을 결부시키고 인류 전체에 해로운 모든 것에는 고통의 관념연합을 결부시켜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 그들은 그저 흔히 쓰여 오던 낡은 수단, 즉 칭찬과 꾸지람 및 상벌에만 의지하는 것 같이 보였다. (141면)
21. 분석의 장점은 편견의 결과를 모조리 약화시키고 뒤집어엎는 경향을 가진 점이다. 즉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그저 우연히 결부되어 있는 관념들을 마음속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다. (142면)
22. 왜냐하면 전에는 언제나 도저히 그럴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 즉 분석의 습관이 감정을 약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제 와서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은 깨달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42면)
23. 그러므로 분석적 습관은 신중한 사색과 통찰에는 좋지만, 이로 말미암아 언제나 열정이나 미덕이 송두리째 없어지기 쉽다. (143면)
24. 내 교육은 결국 이상과 같은 고귀한 감정을 분석의 해체시키는 힘에 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게 내 마음 속에 생기게 해주지는 못했고, 한편 내 지적 수양의 전 과정은 조숙하고 미숙한 내 분석을 내 정신의 뿌리 깊은 습성이 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항해를 떠나자마자 암초에 걸렸다고 혼자 중얼거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143면)
25. 그리고 내 성격을 다시 새롭게 형성하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석적이 된 정신 속에 새로이 인간적 욕망의 다른 어떤 대상에도 쾌감의 연상을 결부시킬 수 있는 힘이 자연 안에는 전혀 없어 보였다. (144면)
26. 그대가 행복한가 안 한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리하면 그대는 곧 행복하지 않게 되고 만다.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의 자아의식, 그대의 검토, 그대의 자문자답을 그 목적에 집중해 보라. 그리하면 다른 점에서 행복한 상태에 있는 한 그대가 호흡하는 공기와 함께 행복을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147면)
27. 여러 가지 능력 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러 가지 감정을 배양하는 것이 내 윤리적 및 철학적 신조의 주요한 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나는 이제 시와 예술이 인간적 교양의 방편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에서 읽거나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이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148면)
28. 내가(홉스와 아버지에게 배워) 항상 쓰던 연구 방법은 추상적 원리들을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체적 실례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었으므로... (163면)
29. 특히 모든 역사를 유기적 시기(organic periods)와 비판적 시기(critical periods)로 나눈 데 대해서는 크게 동감하였다. (167면)
30. 나는 영국 헌법에서 귀족 계급들, 즉 귀족과 부자가 우월한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어떠한 투쟁을 해서라도 없애 버려야 할 악이라고 생각하였다. ... 실로 그것은 국민을 타락케 하는 큰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국민을 타락시키는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국가 안에서 사리사욕을 공공의 이익보다도 앞세우고, 또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입법권을 남용함으로써 정부의 행위를 대대적으로 공공연한 패덕 행위의 본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부와 부의 간판이 진정으로 존경받는 유일한 것이 되었고, 또 국민의 생활은 주로 이것을 추구하는 데 온통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174면)
31. 이런 정신 상태에 있을 때에 프랑스 7월 혁명이 터졌다. 그것은 나를 극도로 흥분시켜 열정을 품게 했고, 또 이를테면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나는 즉시 파리로 가서 라파예트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극좌 정당의 영수 몇 분과 가지게 된 교제의 기초를 세워 놓았다. (175면)
32. 모든 추리가 삼단논법에 귀착된다는 것과 모든 삼단 논법에서 결론은 이미 전제들 속에 들어 있다는 것도 거의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전제 속에 이미 들어 있고 포함되어 있는 결론이 어떻게 새로운 진리일 수 있는가 (183면)
33. 나의 새로운 경향은 어떤 점에서는 강화되어야 했고 다른 어떤 점에서는 완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상 면에서 장차 있을 유일한 중요한 변화는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류에 대한 궁극적 전망에 있어서 수정된 사회주의에 더욱 접근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정치적 이상이 흔히 민주당 인사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순수한 민주주의로부터 수정된 민주주의로 옮아간 것이었다. (193면)
34. 이 책(경제학 원리)이 그저 추상적인 학술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응용의 책인 데다가 경제학을 고립된 학문으로 다루지 않고 보다 큰 전체의 일부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경제학을 사회 철학의 한 분과로 다루었던 것이다. (235면)
35. 복수투표권을 인정하자는 것인데, 전처럼 재산을 보고 투표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확실히 우월함을 보고 주자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253면)
36. 우리나라의 상류 계급과 중류 계급 거의 전부, 그리고 심지어 자유주의자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까지, 열광적으로 남부의 세력에 편드는 것을 내가 어떠한 감정으로 보고있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노동 계급과 몇몇 문인 그리고 몇몇 과학자들만이 예외로 이 일반적 열광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다. (263면)
37. 우리나라의 권력 계급의 마음 속에서 영구적으로 개선된 것이 얼마나 적으며, 그들이 툭하면 내세우는 자유주의적 견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하는 것을 나는 이때만큼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다. (263면)
38. 이러한 비뚤어진 여론에 대해서 항변하는 극소수 사람들 가운데 한몫 끼는 것은 나의 당연한 의무였다. (264면)
39. 이 마지막 해 즉 1865년 초에, 나는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주 나에게 표시한 희망에 따라 내 저작 가운데서 노동계급에게 가장 많이 읽힐 듯싶은 것을 골라 값싼 대중판을 간행하였다. ‘경제학 원리’, ‘자유론’, ‘대의정치론’이 그것이다. 이것은 내 금전상 이익의 상당한 희생이었다. (271면)
40. 노동자의 인정을 받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완전히 솔직한 태도이다. (276면)
41. 여성 참정권과 비례 대표제에 대한 주장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나 한 사람만의 망령된 생각이라고 여겨졌다. (278면)
42. 의회에서 나는 노동자의 편에 서 있었고, 또 정부의 행동을 통렬히 공격한 바 있었다. (282면)
43. 얼마 후 토리당 정부가 공원에서의 대중 집회를 금지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을 때 나는 강력히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뿐만 아니라, 또한 꽤 많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를 규합하여, 마침 회기가 끝날 무렵을 이용해서, 토론에서 상대방을 압도하여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그 법안을 말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 법안은 다시 제안되지 않았다. (284면)
44. 2년 이상이나 우리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288면)
45. 이 문제에 대한 운동은 1866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나는 상당히 많은 여류 명사들이 서명한 여성 참정권 요구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2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