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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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공경희 옮김)

 

1.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75)

 

2. „우리의 문화는 우리 인간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그러니 그 문화가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굳이 그것을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64)

 

3. „의미없는 생활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반은 자고 있는 것 같다구. 그것은 그들이 엉뚱한 것을 쫓고 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데 헌신해야 하네.“ (65)

 

4. „사랑이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61)

 

5. „… 내가 고통을 당하고 보니, 이전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거야.“ (73)

 

6. „미치, 우리의 문화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놔두지 않네. 우리는 이기적인 것들에 휩싸여 살고 있어. 경력이라든가 가족, 주택 융자금을 넣을 돈은 충분한가, 새 차를 살 수 있는가, 고장난 난방 장치를 수리할 돈은 있는가 등등. 우린 그냥 생활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만 가지 사소한 일들에 휩싸여 살아. 그래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삶을 관조하며, ‚이게 다인가?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뭔가 빠진 건 없나?’ 하고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지.“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네. 혼자선 그런 생각을 하며 살기는 힘든 법이거든.“

나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우리 모두 평생의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 스승은 바로 내 앞에 앉아 계셨다. (91)

 

7.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바로 그거였어. 소위 정신적인 안정감이 가장 아쉽더군. 가족이 거기서 나를 지켜봐주고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정신적인 안정감이지. 가족말고는 그 무엇도 그걸 줄 수 없어. 돈도. 명예도.“

선생님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덧붙였다.

일도.“ (64)

 

8. 누구도 빨리 65살이 되면 좋겠다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그게 어떤 것을 반영하는지 아나? 인생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성취감 없는 인생, 의미를 찾지 못한 인생 말야. 삶에서 의미를 찾았다면 더 이상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아.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아마 65살이 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걸.“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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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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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것인가

 

1. 서양에서 분석철학적 방법론은 서양의 재래적 형이상학 (speculative philosophy) 문제점을 비판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며, 그러한 제시가 형이상학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파생되는 언어의 혼동 내지 유희를 간단 명료화하는 방법론의 기능이 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분석철학의 방법론 자체가 분석의 대상에 따라 무한히 다양화해 가고 있다. (116)

 

2. 나의 양심선언의 전문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 문구는 다음의 마디로 축약된다: „우리의 죄악에는 너와 나의 이분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47)

 

3. 칸트는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모를데 가서 모른다고 말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무엇을 모르는가? 자체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타난 물의 현상 (드러난 모습, 지각된 모습) 있어도 자체 (본체 본모습, 실상 실제로 있는 자체의 모습)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칸트철학이 현상과 본체를 이분하는 희랍철학전통,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를 창조주와 피조물로 이분하는 기독교전통의, 매우 종교적인 형이상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데서 발생하는 오류들이다. 그는 자체 (Ding an sich) 모르겠다고 것은 물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물자체는 있는데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가 모르겠다고 회피한 것은 그것은 신성한 무엇으로 그의 마음 속에 남아야만 했던 무엇이다. 무엇의 존재성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 칸트였다. 당시 예수쟁이들은 칸트의 종교관이 너무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무신론적 이단으로 내려쳤지만, 동양철학자인 나의 눈으로 보면 칸트처럼 철저하고 지독한 예수쟁이는 없다. 물자체를 불가지론적으로 남겨 놓은 것은 하나님이 설자리를 남겨두려는 것이다. 물자체가 없어져 버리면 인간의 철학적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져 버린다. 칸트는 서구문명에서 하나님을 없애버릴 있는 용기를 가진 래디칼리스트는 아니었다. (63)

 

4. 헤겔철학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칸트가 남겨놓은 물자체를 융해해 보려는 철학이다. 물자체를 없애버릴려고 하니까 생성론적인 생물학주의로 붙어버릴 밖에 없고, 그래서 생물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붙었고, 그리고 희랍비극에서 변증법을 빌려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위계질서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물자체가 해소되어 버린 생성의 속에서 주체와 개체의 통일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가장 오류는 변증법 자체를 너무 목적론적인 도식에 두들겨 맞추었다는 것이다. (64)

 

5. 일언이폐지하건데, 나의 기철학은 존재(Being) 완벽하게 거부하며 오로지 생성(Becoming) 만을 인정한다. 생성의 세계를 설명하는 있어서 존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유형태는 나에게 있어서는 종교일 뿐이며, 그것은 실재의 세계와 무관하다. 이제 우리는 존재 철학사전에서 빼어내릴 있도록 성숙했으며, 동양철학의 모든 발전은 3000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발전해 왔으며 그러하면서도 고도의 문명을 성숙시킬 있었다. (64)

 

6. 인간의 모든 진리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에 구현되어 있다 (기철학의 1원리).

인간의 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기철학의 2원리)

(49,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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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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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 (이정환 옮김)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1. 문과계열과 이과계열의 지식의 괴리에 관한 책으로는 1959년에 스노우C.P. Snow가 쓴 유명한 저서 두 문화와 과학혁명The two cultures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이 있다. 이 책에서 스노우는, 문과계열의 지식인과 이과계열의 지식인이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상대를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감과 혐오감까지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양쪽 모두 상대를 바보들의 집단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책에 지적한 상황은 그 후에 더욱 악화되었다. 스노우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두 문화는 60년 전에 이미 위험한 분리를 시작했다. 두 문화가 서로 대화를 중지한 지 이미 30년이 흘렀다. (34)

 

2. 여러분 중에 열역학의 제2법칙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그러자 강연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유럽에서 현명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해 석기 시대 사람들 정도의 통찰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34)

 

3. 양쪽은 아직 기초적인 교양조차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35)

 

4. 학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수험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과목을 점차 줄인 결과 거짓말처럼 상식조차 모르는 학생이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38)

 

5.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현재 학문의 최전선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있는지 지식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에 관한 조감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교양학부 해체라는 사태는 일본 고등교육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40)

 

6. 한때, 지금이야말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고 하여 모두 스페셜리스트를 동경하면서 제너럴리스트는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는 있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 대중적인 지적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견해가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그것은 낮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다. 스페셜리스트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도 존재하며,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결국 제너럴리스트가 움직이는 것이다. (45)

 

7. 그 이유는 연구직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창조성인데, 창조성은 다른 분야와의 접촉에 의해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에 의해 탄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한 분야에만 집착하여 연구하는 사람이 좋은 연구를 할 수는 없다. (53)

 

8. 도쿄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고등학교 교육의 보충수업이 사실상 시작되었습니다.

(61)

 

9. 입학생의 수준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지금, 이런 인정주의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일본의 대학은 틀림없이 세계 최하 수준의 대학이 될 것이다. (67)

 

10.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콩도르세) (72)

 

11. 일본인 엘리트들에게 가장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문화적 교양이다. (102)

 

12. 그리고 한 사람도 도쿄대학 법학부의 교육에도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사라은 없을 것입니다.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진은, 자기들은 항상 백 퍼센트 올바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생의 어떤 장면에서도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여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이 연전연승을 거둔 사람들이니까요. (109)

 

13. 칸트는 인간의 지성을 오성, 판단력, 이성 등 세가지가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가장 낮은 수준에 해당하는 것은 오성(이해력)이며, 그것을 갖추는 기본은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급관료는 이치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행위의 준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리를 자주 감추어두어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모르게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명령권자(장교)는 반드시 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130, 131)

 

14.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철학강의가 철학과 관련된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철학적 사색을 하기 위한 훈련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폴 풀키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만인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명백하고 확실한 내용을 손에 넣을 수 없다. 여기에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내용을 아느가 하는 것보다는 지()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사색이란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론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에만 매달려 그것을 머리 속에 입력한 우등생이 승자 취급을 받는 일본의 중, 고등교육과는 근본적으로 교육방침 자체가 다르다. (143)

 

15. 미셸 푸코는 철학 교사였을 때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문제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그리고 교양도 역시 지식이 아니다. 교양은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145)

 

16. 물리학적 이념(물리학이라는 과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세계에 관한 살아있는 이념), 역사적 이념, 생물학적 이념 그리고 철학적 계획 등을 소유하지 있지 않은 자는 교양있는 인간이 아니다. (153)

 

17. 다양한 가치관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갖추는 것이 교양이 아니라, 어떤 세계든 표준이나 기준이 아닌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고, 그 각각이 나름대로 존재이유를 주장하고 있으며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리고 그런 것을 지식으로서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다양한 것을 접해보는 태도가 중요한 거야. 그런 접촉에 의해 인간은 연마되는 것이지. 그 최대의 효용성은 편협한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야. 교양의 안티테제는 편협한 정신이야. 인간은 다양성을 공부하고 다양한 가치관을 아는 것에 의해서만 편협한 정신에서 벗어날 수 있지. (223)

 

18. 요컨대 교양(문화)이야말로 인간에게 살아가는 힘을 부여해주는 존재라는 뜻이지. (225)

 

19. 삶은 누구에게도 완성된 것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상황에 대응하여 시시때때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우리는 항상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226)

 

20. 베이컨은 이 저작(대혁신의 제1부 학문의 진보)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기억, 상상, 이성의 세 종류로 나누어 각각 대응하는 지적 세계를 역사, , 철학으로 구분하였고 각각이 더욱 세분화되어가는 구조를 제시했다. 그 중에서 철학이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넓어 대상에 따라 우선 신학, 자연철학, 인간철학으로 나누어 (256, 257)

 

21. 현대 사회의 교양으로서의 네 나지 지적 능력

1. 이론을 세울 수 있는 능력

논리력

표현력

잘못된 논리를 간파하는 능력 (잘못된 논리에 반박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

2.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

계획 수행 능력

다른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

팀을 만들 수 있는 능력

팀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

3. 정보 능력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

정보를 평가하는 능력

정보를 이용하고 응용하는 능력

4. 발상력

문제 발견 능력

문제 해결 능력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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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읽기 - 우리시대의 지성 5-004 (구) 문지 스펙트럼 4
이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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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읽기 (이성원엮음)

 

1.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 중심주의의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의 관념론이다. 중심주의는 관념론의 자궁이다. 관념론은 중심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표상이고, 가장 지배적인 힘이다 (Derrida, Positions, S. 69, 70).“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5, 36

 

2.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뜻은 함께 안다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 양심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1.

 

3. 형이상학의 경제는 차연과 흔적의 망각 안에서 성립한다. 망각 속에서 형이상학은 언제나 자기 동일적이고 자기 현전적인 순수한 기원을 욕구하고, 욕구 속에서 차이를 배제한다. 차이는 외면적인 , 물질적인 , 우연적이고 특수한 것과 동류이다.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현전성, 자기 동일성은 내면적인 , 정신적인 , 필연적인 , 보편적인 것과 동류이다. 이런 이항 대립적 개념체계로서 조직되는 형이상학의 시대에 언어는 음성 언어 위주로 이해되고 책의 관념 속에서 형이상학적 진리개념을 보존한다.

김상환, 데리다 소묘, 19.

 

4. 이런 음성 중심주의 안에서 문자는 음성적 기표를 대신하는 이차적 표기이다. 문자는 음성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성이 대신하는 개념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문자의 존재이유는 음성을 담고 개념적 의미를 담는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 목격할 있는 언어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이런 음성 중심주의적 언어관과 배후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효력을 상실한다. 범람하는 기호들은 대다수가 음성에 대응하지 않으며, 자기 동일적으로 고정된 의미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많은 기호 작용은 목소리 없이, 어떤 개념적 실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기호들은 다만 기표의 기표로서, 기표와 기표의 관계 안에서 기능한다. 데리다는 음성과 초월적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와 문자적 표기를 에크리튀르라 불렀다. 형이상학적 언어 이해의 범위를 이탈하는 에크리튀르가 여전히 기호학적 의미 작용 속에 놓이는 것은 오로지 이유로만 설명할 있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차연이 개입하여 부재하는 타자들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을 텍스트라 불렀다. … 다만 타자와의 차연적 지시관계 만이 있을 뿐이고,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타자에 의해 침범당한 상태에 있다. 텍스트의 세계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기의는 없다.

김상환, 데리다 소묘, 21.

 

5. 중심주의는 현존으로서 존재자의 존재의 규정과 연계되어 있다 (Derrida, De la grammtologie, p. 23).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0.

 

6. 그런 나르시스적 태도는 마침내 자아의 신격화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신격화에 이른 나르시시즘은 허무주의적 역설에 마침내 빠지게 된다. 테일러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신의 태도가 계명된 모더니즘의 목적이라고 천명하였다 (M. Taylor, Errance, p. 56, 59).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1.

 

7. 또한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은 근대적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함으로써 관심의 대상과 문제 영역의 지평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근대적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 또는 객관적 지식은 논리와 합리성, 규칙성 등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비논리적, 비이성적, 비규칙적 현실은 이론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억압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데리다는 획일적 진리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진리와 편견의 구분을 제거하고 진리의 복수성을 주장한다 (Derrida, Spurs: Nietysches Styles, p. 103). 또한 푸코에 따르면 진리의 재생산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권력의 행사는 진리의 창출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Foucault, Power, Knowledge). 이러한 면에서 진리와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되고, 권력에 의해 편향되지 않는 진리의 추구 활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나아가 진리는 테러리즘의 형태로서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타자(the other) 주장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89, 90.

 

8. „탈근대성이라는 개념과 현상의 다중성, 복잡성, 모호성은 현대의 사회현실이 그러한 특징들로 규정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에 따라 탈근대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지배적인 인지와 방법의 틀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된다. … 그들의 방법은 선험적 진리나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위해 정립된 체계적 절차나 가정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며, 현실에 있어서의 주변성, 특이성, 특수성, 패러독스, 다원성, 애매성, 불확실성 등의 측면을 부각시킬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진다. … 탈근대주의이론가들은 개인적 경험과 감정, 상상력을 중시하고 획일적 지식의 획득 가능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 해체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91, 92, 93.

 

9. 데리다에 있어 논리적 개념과 배후의 의도와의 간극을 밝히는 작업은 하나의 윤리적 정치적 의무 인식된다. 그에 따르면 논리 중심적 개념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계몽과 투명성이 보장 가능하다는 환상을 낳게 한다. 이러한 환상은 논리 중심적 이성에 의해 표명될 없는 타자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해체의 목적은 철학적, 사회역사적 텍스트가 논리중심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속에서 타자성의 관점을 찾아내어 관점으로부터 논리중심적 개념성과 획일성의 치초를 와해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와 관련하여 해체는 nothingness에로의 귀착이 아니라 타자성에 대한 개방을 의미한다고 역설한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3.

 

10.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인 데리다가 해체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다 긍정적 작업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기여를 한다. , 레비나스는 윤리를 타자성에 대한 존중 또는 책임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함으로써 해체를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할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 레비나스 자신은 윤리의 문제를 타자의 현전을 전제로 나의 자발적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른바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은 동일성 또는 동일자로 환원될 없는 것으로 데리다의 윤리에 대한 개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비나스와 데리다 모두에게 타자의 존재는 윤리의 가능 조건이며, 나아가 동일성 내지 정체성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그들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서구의 철학 전통은 본질상 존재론적이고, 이러한 존재론적 전통은 모든 형태의 타자성을 동일성 또는 동일자로 환원시키고 억압한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0, 101.

 

11. 데리다는 텍스트의 획일적, 논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해석의 자유와 확정불가능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확정불가능성은 완결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이는 결정과 윤리적 정치적 책임의 필수조건이 된다. , 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계산할 있는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확정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결정만이 도덕적, 정치적 책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정 불가능한 영역은 해석의 자유와 차연, 비동일성의 존재에 의해서만 확보될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상이한 규정성 , 결코 비규정성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부정성이나 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시에 차연은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4.

 

12. 그리고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대한 강조는 논리중심적인 현전의 형이상학의 역사에 의해 억압되고 주변화된 희생과 배제의 역사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한다. 데리다는 텍스트의 획일적, 논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해석의 자유와 확정불가능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확정불가능성은 완결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이는 결정과 윤리적 정치적 책임의 필수조건이 된다. , 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계산할 있는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확정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결정만이 도덕적, 정치적 책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정 불가능한 영역은 해석의 자유와 차연, 비동일성의 존재에 의해서만 확보될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상이한 규정성 , 결코 비규정성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부정성이나 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시에 차연은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9.

 

13. 예를 들어 푸코와 같은 경우, 그는 니체의 심미적 자기창조를 하나의 이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하여야 한다 주장한다. … 해체의 동기가 체계의 한계를 폭로하고 타자성의 영역을 부각시킴에 있다면, 배후에는 윤리적 열망과 문제의식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있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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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시공 로고스 총서 8 시공 로고스 총서 8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데리다, 크리스토퍼 노리스 (이종인 옮김)

 

1.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데리다는 결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씌어진 텍스트 바깥에는 실재(과거 또는 현재)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헤겔에게서 뚜렷한 전범을 찾을 수 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였다. 헤결은 모든 형태의 역사와 지식을, 자기현존적인 진리라는 최종점을 가진 목적론의 전개에 동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헤겔의 논리는 글보다 말이 우위에 있고, 음성문자가 상형문자나 표의문자 등 기타 다른 문자체계보다 우위에 있다 (여백, 88)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음성언어 (또는 말의 자연적인 우위성을 인정하는 문자)의 경우에만 이런 의미와 의도 사이의 이상적인 일치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말하여지는 말과 그 말이 일으키는 의미 사이에는 아주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106)

 

2. 데리다의 텍스트는 경계에서의 글쓰기라는 관념 위에서 행해진다. 이 때 경계에서의 글쓰기는, 철학과 그보다는 품위가 낮은 담론의 형태 사이에 전통적으로 설정된 영역과 완충지역을 빠져나가는 그런 쓰기이다. 철학이 다른 담론보다 자기가 우월하다는 뚜렷한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철학이 자기 자신을 진리와 지식의 내적 진동과 긴밀히 연결된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데리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러한 저항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흩뿌리는 힘, 팀파눔 같은 단어의 결정불가능성 (철학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구별짓기를 정지시키는)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해 주는 쓰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다.“ (116, 120)

 

3. 왜냐하면 문자를 통해야만 지식이 전파될 수 있고, 객관성과 진리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6)

 

4. „그 체계 내에는 기표가 기의로 대체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그 어떤 기표도 간단히 별 문제없이 대체되지는 못한다“ (266) … 만약 문자가 언제나 어디서나 차별적 기호의 체계라고 한다면 그리고 의미가 소리와 뜻의 이상적인 조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다양한 구조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문자의 고전적 정의는 모든 형태의 언어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미가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오로지 기호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50)

 

5. 로고스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초월적 기의, 즉 기표의 차별적 놀이 저 너머에 존재하면서 그 놀이를 일거에 중단시키는 기의(의미)를 꿈꾸는 것이다. … 문자가 단 한가지 뜻을 가진 진리의 질서에 대해 그것을 격하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거부하는 강조점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해체론의 시작인 것이다. (129)

 

6. 차이의 논리는 비자기동일적인 논리이며 고전적인 이성을 제어하는 모든 규범적 제약 사항을 벗어나는 논리이다. (137)

 

7. … 의미가 다양한 차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기표와 기의의 동일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 (137)

 

8. 언어가 서로 다른 (비자기동일적인) 용어의 체계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어는 음성중심적인 개념의 범위를 벗어나서, 데리다가 입증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138)

 

9. 도대체 그 어떤 이상한 논리 (논리의 왜곡)에 입각하여, 소쉬르는 일반언어학의 개관에서 문자를 제외시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중요한 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문자의 도움을 동원하는가? … 우리는 그것을 그라마톨로지(원래는 기호학)라고 명명할 것이다. …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그 위치는 이미 결정되었다. (140)

 

10. 칸트는,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회의주의 (우리는 실제에 대해서 확실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우리는 정말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다는 입장)의 주장에 대해서, 실재하는 세계가 존재하며 또 그 세계가 우리의 지각과 일치한다고 논증함으로써 대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추론은 기껏해야 순환론적인 것에 불과하며 더욱 강력한 회의적인 답변에 노출되고 말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철학자들이 해야할 일은 그들 자신의 탐구 혹은 모든 인지적 탐구에 내재된 전제조건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고할 떄 결여된다면 무의미해지고 비논리적이고 비목적적이 되어 버리는 지적인 행동원칙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은 회피불가능한 선험적 개념구조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 사실로서 의심할 나위가 없게 되는 이성적 기반에 입각하여, 인간지식의 전체적 구조를 재구축할 수 있다. 데리다는 칸트의 이러한 논의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여 문자 (혹은 원문자)를 모든 가능한 지식의 전제조건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은 문자가 관념을 통용시키고, 확대되는 문서를 보존하고, 그리하여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자명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데리다의 주장은 아주 과격한 칸트적 의미에서 선험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문자의 사전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문화, 역사, 지식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자는 단순히 과학에 봉사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관념적인 대상들, 즉 과학적 객관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라마톨로지, 27) (142, 143)

 

11. 철학이 자기현존적인 기원이나 진리에 대한 욕망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것은, 문자를 단지 그 자신의 더 높은 목적에 종사하는 도구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로고스 중심적인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문자의 역사에도 적용된다. …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는 것은 문자를 말에 복속시키는 뿌리깊은 현존의 형이상학 (Metaphysics of presence)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로 암묵적인 목적론(teleology) (역사적 진보를 조직하는 개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목적론도 현존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지배적인 전제 사항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143, 144)

 

12. „나는 일반화된 문자가 단지 창안해야 할 체계, 가설적 특징, 또는 미래의 가능성 등에 대한 사상,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성언어가 이미 문자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55) 루소론은 데리다의응용 그라마톨로지가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멋진 사례이다. (144)

 

13.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자는 이미 루소가 갖고 있던 사회와 언어에 대한 사상 속에 언제고 어디서건 존재했다. … 플라톤과 소쉬르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소에게도대리보충의 논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147)

 

14. (루소)는 말하자면, 두가지 명제 사이에 사로잡힌 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문자로 과거의 경험을 서술해야 한다는 욕망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이 정확한 회상을 완전히 넘어서서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 고백론은 루소의 진정성을 증거한다.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역할의 놀이적 타협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쓰기)는 때늦은 자기정당화의 행위가 된다. … 그러나 미래의 혜택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일부러 연기하는 이러한 행위에는 위험도 따른다.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 또는 행위하는 것은 진적으로 진정한 것이 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149)

 

15. 루소는 자기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격을 좋게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위선의 순간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을 적발하고, 또 그런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처럼 강박적으로 자신의 동기를 드러내는 것도 루소를 독자들에게 더욱 흥미로운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자기선전적인 계략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준다. … (폴 로망의 고백론 해체적 읽기에 따르면) 자신의 성격상의 약점이나 결점을 시인하려는 루소의 모든 노력은 어느덧 왜곡되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서사의 논리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152, 153)

 

16. 그래서 루소는 문자가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와 부작용을 지니고  있음에도 반드시 문자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그는 이 문제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가질 수 없다.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를 인식하는 것은미끼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자의 존재 없이는 윤리는 없으며, 따라서 부재, 위선, 우회, 문자 없이는 윤리도 없다.“ (140) (154)

 

17. 그러나 데리다는 루소를 읽으면서, 이 사상가의 위대한 미덕을 이렇게 말했다. 루소의 저작은 일종의 비자발적인 자기비판에 복종하는 그 순간에조차도 로고스 중심적인가치에 철저하게 매달린다고. (155)

 

18. 이러한 변화의 순간은, 서로 얼굴을 맞대며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문자의 기술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면서 도래한다. 문자를 가진 사람들은 법률에 접근하는 권리와 법조항을 강제, 활용하는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의사를 강요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반면 문자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 법조항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범죄자, 사회부적응자, 법을 준수하는 시민공동체에서 축출된 희생양적 인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158)

 

19. 기표의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자기만족적인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내던질 각오를 해야만) 정신분석은 언어의 구조적 무의식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3)

 

20.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 (그라마톨리지, 158) (183)

 

21. 그 자체로 자신들의 중앙이었고 살아있는 목소리로 교섭한 고대의 자급자족적 도시와는 대립되게, 근대의 수도는 언제나 문자언어를 독점한다. 그것은 문자로 씌어진 법, 칙령, 문서로써 명령한다 (그라마톨로지, 302). 루소는 민주주의의 실제 운영방식에 대해서 깊은 환멸을 느꼈다. 선출된 대의원을 통해 인민에게 권력을 되돌려 준다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대리보충적 권력의 나쁜 질서를 생산했고 또 다양한 위임기관에 특권을 부여했다. (185)

 

22.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두 세계의 신화적인 만남 속에서 자신이 어떤 세계를 동정하고 있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현대의 문명을 싫어한다. 그 편협하게 합리적인 에토스, 계몽주의를 내세우면서 역사와 진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럽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뿌리깊은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덜 진보된 민족들이 보여주는 자연과의 친화성, 신화적 (계몽적이고 과학적인 것에 대립하는) 범주에 의존하는 사고방식, 역사적 발전이라는 잘못된 개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 등을 존경했다. 야생의 문화는 영원한 현재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차가운 문화였다. 그들은 주변환경에 편안함을 느끼며 서구의 뜨거운 문명과는 달리 기술적,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늘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결국, 인류학자는 자신의 연구과제가 안고 있는 신화적 입장을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비로소 이런 고질적인 오만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94)

 

23. 신화적 사고는 오랜 지반을 가진 사회적 담론의 잔해로 자신의 이데올로기 궁전을 건설한다 (레비스트로스, 그라마톨로지에 인용됨, 139) (202)

 

24. 데리다는 이러한 양분법 (브리콜뢰르 대 엔지니어)을 또 하나의 이항대립적 사례로 파악한다. … „가장 근본적인 담론과 가장 창조적이며 체계적인 엔지니어는 역사, 언어 등의 세계에 의해서 경악했고 또 농락을 당했다. .. 그들은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도구를 빌려온다.“ (139) (203)

 

25. 해체론은 철학 너머의 길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이성의 너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런 로고스 중심적인 전통을 구성하는 언어, 개념, 범주 등의 검증이다. (209)

 

26. 한가지 가능성은 언어, 신화, 인간과학을 급진적으로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사유하려는 제한된 방식을 말한다. 즉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처럼 우리의 의미화작업이 구체적 실체나 순수하고 자기동일적인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와 차이의 놀이에 들어갈 때에만 의미를 형성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차별적 놀이의 원천을 진정한 자연 혹은 말의 순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기원의 신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 또 다른 가능성은 이러한 향수 어린 사유방식을 포기하고, 강력한 의지를 발동하는 해석적 선택의 범위가 무제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식의가치의 재평가작업이 될 것이며, 아직도현존의 형이상학에 붙들려있는 현재의 구조주의적 이론에 (때늦었지만) 이런 재평가 작업을 응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런 비판에 힘을 실어주려면 구조의 개념을 새롭게 생각해야 하며, 구조의 차별적 요소를 전혀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 „이러한 긍정적인 자세는 비중심을 중심의 상실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292) (210, 211)

 

27. 철학 너머의 길은 철학서의 책장을 넘기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나쁜 철학하기로 끝나고 만다). 그 길은 오히려 철학자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읽는데 있다.“ (288) (212)

 

28. 첫째, 데리다의 저서는 읽는 사람의 논쟁적 형편에 맞게 일부 진술만을 발췌해 가면서 읽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논의의 구체적인 문맥을 놓치게 된다.

둘째, 해체론은 철학적 이성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오히려 해체론은 철학적 전거를 분명히 밝히는 조건들 속에서 철학적 이성을 진지하게 다룬다.

셋째,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중 특히 그 마지막 문장들은 엄정한 데리다식 논의의 수준에는 미달하는 텍스트이다. 그리하여 이 논문은 …. (니체식 담론의 변환을 통해서) 그 자신을 선포하는 (293) 것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끝나고 있다. (212)

 

29. 데모크리토스 같은 고대 사상가에서 마르크스를 거쳐 현대의 유물론자에 이르기까지, 유물론적 사상의 주된 특징은 무시간적, 무변화적 진리로 가장하고 있는, 덜 익은 개념 (혹은 은유)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 중에는, 데리다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형태도 있는데 … (215)

 

30. 왜냐하면 해체론은 실체를 강조하는 미숙한 형이상학도 회피해야 하는 한편, 텍스트에 대한 물신화된 개념도 회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물신화된 개념은 실재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의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은 각종 관념론적인 기만에 빠져 버리고 만다. (216, 217)

 

31. 자신의 목적은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지시성의 문제가 전통적 이론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은 보여주려는 것일 뿐 … (218)

 

32. 데리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저기 바깥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언어가 다양한 실제적 방식으로 그 세계와 조응한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리다가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은 칸트의 선험적 실체론이다. 즉 구체화된 지시의 개념을 부과하고 그리하여 세계(세상)와 텍스트 사이의 생산적 교환의 차원을 봉쇄해 버리는 그런 사상이다.  … „문자를 보증이 된 외부에 성급하게 연결시키려 하거나 관념론으로부터 경솔하게 일탈시키려고 한다면, 그 때마다 사람들은 최근에 성취한 이론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관념론으로 확실히 퇴행해 버리고, 그리하여경험론과 형식론의 비유법 속에서 그것 (관념론)과 연결된다.“ (222, 223)

 

33. 확실히 데리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매우 불신한다. 이 철학자들은 마음보다는 물질, 말보다는 사물(세상)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일거에 형이상학의 저 너머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했다. …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그 어떤 사실도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텍스트에서는 모순 그 자체, 변증법 그 자체가 형이상학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난다라고. … 관념론과 현실론적 입장이 서로 부딪쳐 온 오랜 역사는, 이 두 철학이 동일한 형이상학적 노력 속에서 더 심층적으로 충돌했음을 감추고 있다. 그러므로 정말 필요한 것은, 고대 유물론자들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들 텍스트에는 마음과 물질이라는 개념적 대립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마음과 물질의 범주를 다시 생각하려는 노력이 분명히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225, 226)

 

34. 리오타르가 볼 때, 우리는 인간진보와 해방이라는 거대한메타서사를 믿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로 진입했다. (233)

 

35. 리오타르는 화행론의 용어를 빌려서 진위를 가려내는, 과거의 진술적 기준과 실천적 효과를 측정하는 현대의 수행성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발화의 수행성은 지시적이든 규범적이든, 그 발화가 지칭하는 지시 대상에 대해서 확보한 정보의 양에 따라 수행성이 높아진다.“ (235)

 

36. 그는 철학은 일종의 쓰기이며, 그래서 철학자들이 문학비평가들처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꼼꼼한 읽기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236)

 

37. 하나의 가능한 답변은 리오타르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다. 즉 합법화시켜 주는 이성의 과거형태가 더 이상 진정한 비판의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 „그 뒤 인생을 겪고 보니 (이렇게 퍼스는 쓰고 있다), 바라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진정으로 바라는 유일한 것은 관념과 사물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합리성 그 자체에 대하여 무슨 이유를 따져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퍼스와는 달리, 데리다는 현재의 (기술적인 것과 그 밖의) 형태 속의 합리성을 구체적인 역사적 구성물로 파악하며 그래서 합리성을 궁극적인 터전의 일종으로 보지 않는다. (241, 242, 244)

 

38. 해체론은 서구의 철학, 과학, 기술 일반의 출현을 형성했던 이성의 원칙이 지닌 한계를 생각해 보려는 엄정한 노력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245)

 

39. 부브레스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뚜렷한 소명의식을 깨닫게 하고 또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문학적 양식을 강조하는 한때의 유행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지한 철학을 위협하는 두 가지는 철학을 한편으로는 사상사와 혼동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사학 (또는 텍스트 비판의 일종)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264, 265)

 

40. 철학은 의미있는 발화 (일부 철학자들이 말하는 개념적 문법)의 조건을 분명히 함으로써 언어의 의미를 밝히려는 엄정한 노력이다.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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