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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f Knuetel(신유철 역), 로마법 산책, 법문사, 2008
1.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 Rudolph von Jhering(1818-1892)은 자신의 유명한 저술 '로마법의 정신'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로마는 세계를 향하여 세 번 법칙을 명하였고, 여러 민족들을 세번 통일로 이끌었다. 그 첫째는 로마 민족이 아직 그 세력의 전성기에 있을 무렵에 달성한 국가의 통일이고, 그 둘째는 로마 민족이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후에 실현된 교회의 통일이며, 그 셋째는 로마법의 계수를 통하여 중세에 이루어진 법의 통일이다. 첫 번째 통일은 무기의 힘으로 외부적 강제를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나머지 두 번의 통일은 정신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의 세계사적 의미와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세계성의 사유를 통한 민족성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다." (13, 14면)
2. 로마법은 그 성질상 법학자들의 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원문들은 주로 방금 상술한 시기에 실무에 종사하던 법학자들이 저술한 주석서, 의견서, 판례집 및 교과서에서 인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술들에서 발췌한 원문들은 '로마법대전'의 핵심 부분인 학설유취에 모아져 있다. 이 대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기원후 533년에 작성된 초학도를 위한 교재인 법학입문(Institutiones)으로 그 내용은 대체로 기원후 2세기 중엽에 나온 기존서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세계 십대 내지 십이대 주요 서적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대전의 제2부는 학설유취(Digesta)로서 그 속에는 고전기시대 법학자들의 상술한 저술들에서 사항별 자료에 따라 분류하여 발췌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533년에 법적 효력이 부여된 학설유취의 뒤를 이어 534년에 유스티니아누스 칙법전(Codex Instinianus)이 편찬되었는데, 이 칙법전은 로마 황제들의 결정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4부는 535년부터 (575년까지) 반포된 새로운 법률들을 모은 신법전(Novellae)으로 이루어져 있다. (15, 16면)
3. 이 법학자들은 "어떤 이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개별 사안들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의견서를 통하여 각 당사자들과 사법기관을 자문하고 있다. 이들의 창조적 역량은 이러한 사안별 의견서에 담겨 있다. 이로써 로마 사법은 오늘날의 영국법과 마찬가지로 사례법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성격은 고대가 종료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Max Kaser) (17면)
4. "이 시기의 법학은 생활 속의 사안들을 올바로 판결해야 한다는 법발견의 실제적 사명에 충실하여, 개별 사안의 해결을 도모할 목적으로 이론적 개념구성에 관한 여러 가지 착안점들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특히 법을 창조하는 실무에서 활동한 법학 고전기의 대가들은 주로 천재적 직관을 통하여 올바른 법의 인식에 도달하는 길을 발견하고 있으며, 이러한 직관은 이들의 확고한 인생관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적 추론은 법의 개념에 의존하기 보다는 주로 사례 실무의 경험에 그 바탕을 두었던 바, 논리적 추론은 이들이 법을 인식함에 있어 단순한 보조수단에 불과하였다." (Max Kaser) (17, 18면)
5. 천재적 직관 및 사례법의 성격 ... (18면)
6. "이것은(직관은) 종래의 법의 역사 속에서는 존재하였지만, 현재는 고찰의 대상이 아니다. (K. Engisch) (19면)
7. 일반적으로 판례법상의 원칙들은 사안에서 사안으로 귀납적으로 발전됨에 반하여, (유럽 대륙의) 법률법에서는 사안이 법률에 규정된 원칙에 따라 연역적으로 판단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차이는 물론 크지 않다. 왜냐하면 판례법에 있어서도 원칙은 애당초 첫 번째 사안에서부터 확정되고, 그 이후의 사안들은 차별화가 요구되지 않는 한 이 원칙에 따라 판결된다(stare decisis). ... 영국의 case law는 판례들, 즉 실제로 법관들이 판결한 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로마의 사례법은 거의 대부분 순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다. (19, 20면)
8. 이론과 방법에 관한 견해의 대립보다는 오히려 개별 사례의 분석에 더 커다란 매력이 있다 할 것이므로 ... 소위 '한계사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사고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후에, 이들이 다양한 사례의 변형을 통하여 어떻게 법적 문제의 깊이를 측량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21면)
9. 요컨대 상기한 원문에서도 "정신질환의 경우에도 혼인은 유지된다"라는 하나의 원칙이 한계사례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단계에 걸쳐 철저히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결코 직관적 해결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면)
10. 이러한 사실은 로마 법학자들이 즐겨 사용한 연상의 방법, 즉 어떤 문제를 논술함에 있어 비교 가능한 다른 문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유사한 사례들을 고찰해 봄으로써 어떤 문제의 해결에 도달하는 방법을 살펴볼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다. 연상적 방법이란 다름아닌 유추판단의 일종으로, 유사한 사례들로부터 어떤 원칙, 즉 판단의 근거(ratio decidendi)를 도출하고, 이에 따라 의문이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40면)
11. 어떤 과제나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이를 결정할 원칙이나 선도적 계획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 사례를 통하여 각 사고의 차원에서 제시되는 여러 대안들을 검증하고, 이로써 올바른 해결책을 찾기 위한 검토 영역을 해당원칙이 발견될 때까지 계속 좁혀나가는 방법으로 복잡한 과제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전략은 특히 정신과학의 분야에서 자주 발견된다. (61면)
12. 만일 이러한 사례들을 "실제로는 중요하지 아니한 사변적이고 공론적인 문제들"로 치부한다면, 이는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로마시대의 법학자들은 이렇게 드문 사례들에 대해서도 어떤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 어떤 원칙이나 사고의 타당 범위가 얼마나 되고, 또 언제부터 다른 원칙이나 생각들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이렇게 기이한 현상 또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실험했던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시대의 법학자들은 추상적 관념 속에 스스로 매몰되지 아니하고, 그들의 사고 속에서 항상 생생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법원칙들로부터 법규를 도출해 내고자 하는 그들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하겠다. (61, 62면)
13.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이성적으로 통제되고 있었던 바, 논리적이고 사실에 합당한 근거를 요구하는 로마인들의 법발견을 직관이 비록 고무할 수는 있었겠지만, 결코 이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Frank Horak과 같이 직관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발견의 차원'과 오직 합리적으로 논증된 언명과 결론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논거의 차원'을 구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62면)
14. "우리의 학문(즉 법학)에 있어 모든 성과는 지도원리들을 보유함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보유가 로마 법학자들의 위대함에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적 개념과 명제들을 결코 자신의 자의를 통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 개념과 명제들은 실재하는 존재로서, 그 현재 상태와 출생 계보를 그들은 오래되고 친숙한 접촉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Friedrich Carl von Savigny) (63면)
15.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든 과정에서 수학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확실성을 갖추고 있었으며, 조금도 과장함이 없이 그들은 그들의 개념으로 계산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Savigny가 말한 것은 바로 로마의 법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한 법발견의 방법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점을 매우 생생히 표현해 주고 있다. '개념으로 계산함'이라는 어귀에 천착함이 없다면, 우리가 받은 인상도 대체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왜 로마법이 ratio scripta, 즉 문자로 표현된 법이성으로 간주되었으며, 왜 이 지구상의 그렇게 수많은, 그렇게 서로 상이한 민족들이 로마법의 법리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을 우리도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63, 64면)
16. 그런데 로마법대전의 네 부분, 즉 법학입문, 학설유취, 칙법전, 신칙법 중에서 오직 학설유취만이 법학의 성립을 위한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자료들을 그 내용 속에 담고 있었다. (72면)
17. 우리가 방주학자(Glossatoren)들의 시기라고 부르는 첫 번째 단계는 대략 1100년 무렵부터 시작하여 126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주된 관심사는 로마법대전의 내용, 특히 학설유취의 내용을 그 당시의 학문적 사고방법을 동원하여 복원하는 것이었다. (73면)
18. 계수(Rezeption)라는 용어는 300년 이상 계속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독일의 영토 내에서 로마법이 효력을 갖게 되는 복잡다단한 역사적 과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 독일에서는 소위 일괄 계수(Rezeption in complexu)를 말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75면)
19. 다시 말하면 실체법적 기초 없이 법리학과 방법론이 발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학문적 연구와 대학 강의의 출발점은 로마법대전의 원문과 그 속에 표현되어 있는 가치판단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는 현금에도 마찬가지이다. (76면)
20. 근간에 더욱 분명해진 것은 이러한 계수의 과정에서 (카톨릭) 교회의 법, 즉 카논법이 결정적인 역할의 하나를 담당하였다는 사실이다. (77면)
21.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은 로마법이 교회법의 일부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교회의 특별법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독교 신앙의 기본 명제와 상충하지 않는 한, 교회는 로마법에 따라 생활한다(ecclesia vivit secundum legem Romanam)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78면)
22. 한편 교회는 비단 혼인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예컨대 유언, 점유, 계약, 이자 등 사법의 다른 주요 영역들에 대해서도 교회법원의 관할권 및 교회의 입법을 관철시켰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로마법이 계수되는 과정에서 교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겠다. (78면)
23. 첫째로 이 시기에는 교육 받은 율사들이 재판절차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지금까지 활동하던 비전문법관, 즉 소위 향판(Schoeffen)들을 법정에서 축출하였다. ... 다음으로 향판들이 선호하던 구술절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 소송과 유사하게 서면절차로 대치되었다. 이리하여 사실의 주장과 반대사실의 주장으로 이루어지던 권리 주장의 교환 대신에 일련의 서류들이 순서대로 제출되어야 하였으며, 각 당사자 측에서 자신의 권리 주장에 필요한 주요 사실들을 서류에 적시해야 하였다. 향판들은 이러한 서면절차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소송당사자들도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율사를 변호인으로 참여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소송제도의 변화는 교육을 받은 율사들에게 법관 또는 변호사의 역할을 전담하게 하였다. (81, 82면)
24. 이 시기의 두 번째 주요한 특징은 완전 계수를 통하여 사법의 핵심 분야에서도 학문화가 관철되었다는 점이다. (82면)
25. 따라서 로마법은 법률의 흠결을 보완하는 보충적 기능을 갖게 되었지만, 지방의 특별법, 즉 각 도시의 규약들이 보충적인 로마법에 우선하여 적용되었다. (83, 84면)
26. 판덱텐(=로마법대전의 학설유취) (93면)
27. 자연법론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초실증적 법명제들이 존재한다는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는 바, 이는 이미 고대부터 알려진 사상이며, 로마시대의 법학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법론은 이와 같은 명제들을 탐구함에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모든 다른 법명제들을 이러한 초실증적 명제들로부터 도출하려고 하였으며, 나아가 하나의 보편 타당한 법질서를 설계해 보려고 하였다. (94면)
28. 그(Hugo Grotius)는 인간의 두 가지 기본 속성, 즉 첫째로 동류의 사람들과 상호 배려 하에 질서 잡힌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과 둘째로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이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Grotius는 선험적으로, a priori, 어느 명제가 인간의 사회적 및 이성적 본성에 부합할 경우에 그 명제는 자연법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95면)
29. "우리가 입법을 완성함에 가장 많이 감사해야 할 자가 바로 로마인들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히는 바이다. 그들의 지식을 통하여 우리는 풍요롭게 되었고, 그들의 준칙들을 통하여 우리는 강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그들 제국의 일부를 회복하였다." (99면)
30. "19세기와 20세기의 모든 법전들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즉 현대의 법전들은 대체로 Instinianus의 불멸의 로마법대전을 재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다만 현금의 시대에 순응하였고, 현대적 언어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100면)
31. "역사학파란 법의 소재란 민족의 과거 전체를 통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는 자의에 의하여 주어질 수 없고, 우연히 이것 또는 저것이 될 수도 없으며, 민족 자신의 가장 내적인 본성과 그 역사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각 시대의 명철한 행위는 이렇게 내적 필연성에 따라 주어진 소재를 통찰하여, 이를 젊게 하고,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Savigny) (102면)
32. 그런데 문화민족인 독일의 민족정신이 이미 수백 년에 걸쳐 로마법을 수용한 것이므로, 독일의 법조인층은 이 법을 자신의 학문적 작업의 기초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성립에 이르기까지 소급하여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볼 때에만 비로소 그 대상이 해명될 수 있는 것이므로, Savigny는 법학은 우선 고대 로마법을 탐구하여야 하고, 로마법의 현대적 활용에 의한 변형들은 일단 차치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03면)
33. 오히려 역사학파는 민족의 공통의식이 두 기관, 즉 입법과 학문을 통하여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민법전의 편찬이 문제되었던 그 당시, 즉 19세기 초에는 아직 이와 같은 큰 작업을 감당할 학문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음을 Savigny는 아주 정당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103, 104면)
34. 이 학파의 업적들은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판덱텐 법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판덱텐이라 함은 로마법대전의 핵심 부분인 학설유취를 말한다.) 이 법학은 로마법의 소재에서 명확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형성해 냄으로써, 사적 자치의 보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후에 독일 민법이 제정될 수 있는 자료와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104면)
35. 판덱텐 법학은 Windscheid의 판덱텐 교과서와 판덱턴의 가장 현대적인 활용이라고 불리웠던 이유가 없지 아니한 독일 민법(BGB)으로 마감되었다. (105면)
36. "그 때 우리는 동아리 회관의 옥상에 모여 '독일 민법 만세!'를 외치며, 새로운 법전을 위해 축배의 잔을 들었다" (Gustav Boehmer). 그 때란 1900년 1월 1일 자정을 말한다. 1896년에 제정된 독일 민법의 효력이 발생하는 시각이었다. 물론 - 그 후 족히 100년이 지난 - 오늘날에도 독일의 평균 수준의 법조인이라면 "우리 민법은 로마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세부적인 내용, 즉 1900년 이전의 법의 상태가 어떠하였고 판덱텐 법학이 가졌던 정신적 세력이 어떠하였는지는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사법의 주요 내용이 어떠하였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이미 50여 년 전에 Max Kaser는 독일의 민법학에 대하여 "현행 법전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스스로를 역사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법학방법론이 소위 '역사적 논거'를 입법 자료에서 도출되는 논거, 즉 법률 제정의 절차에 참여한 기관 혹은 사람들의 공식적 내지 비공식적 의사 표명에 근거한 논거로 이해하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만일 그러하다면 해석자는 입법자 이전의 사실들에 관하여 더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식론적 관심을 부당히 제한하여 말살하는 것으로서, 특히 독일 민법은 대단히 많은 내용들을 당연한 것으로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예컨대 Theodor Kipp은 1900년에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독일 민법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시대를 막론하고 종래의 공통법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독일 민법의 가장 중요한 기초 중의 하나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108면)
37. "만일 사람들이 오직 이 법전만을 연구한다면, 그들은 프랑스 민법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J. E. Portalis) (108면)
38. 물론 로마법의 영향은 모든 법영역에서 입증될 수 있는 바, 예컨대 상법 및 해상법, 국제사법, 노동법, 소송법, 강제집행법, 나아가 형법을 포함한 공법 전반에 걸쳐 로마법의 영향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중점은 역시 민법에 있다 하겠다. 또한 독일 민법은 주지하다시피 1958년의 한국 민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므로 ... (109면)
39. 한국 민법이 때로는 독일 민법보다 더 로마법에 접근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예컨대 한국 민법 제269조(공유물의 분할), 제445조 및 제446조(보증인 및 주채무자의 면책통지), 제500조 내지 제505조(경개와 담보이전), 제507조(혼동), 제688조 제3항(수임인의 손해), 제696조(수치인의 통지의무) 등 참조. 한국 민법에 대해서는 KYU-CHANG CHO의 독일어번역본, Koreanisches Buergerliches Gesetzbuch, Seoul 1984 참조. (109면)
40. 독일 민법의 체계는 총 5권, 즉 총칙(1-240), 채권법(241-853), 물권법(854-1296), 가족법(1297-1921) 및 상속법(1922-2385)으로 구분되어 있는 바, 그 뿌리는 결국 로마 시대의 법학자 Gaius의 체계로 소급된다. Gaius는 기원후 161년경에 자신의 교과서(Gai Institutiones)의 내용을 personae, res, actiones 즉 인격(=권리주체), 물건(=권리객체), 행위(=권리청구)로 분류하였으며, 여기서 res라 함은 물건과 청구권 기타 권리들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111면)
41. "원칙이란 이미 주어진 내용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원칙에서 법규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법규에서 원칙이 형성된다." (Ulpianus) (115면)
4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법전의 규정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로마 공통법에 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122면)
43. 그러나 이러한 보충규정이 없을 때에도 여기서 말하는 과실이란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따라서 채무자 개인에게 가능한 주의의무가 아니라 직업에 따른 전형적 주의의무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해야 한다는 점에 관하여 이미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25면)
44. "자신의 파렴치한 행위를 원용함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모순의 행위는 용인될 수 없다." (132면)
45. "설사 여러분들이 원하는 숫자만큼 많은 민법전들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 민법전들은 결국 모두 로마법에 그 근거를 두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법에 대한 원용 없이는 여러분들이 그 법전들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로마법을 대문 밖으로 좇아 낸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항상 로마법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법은 말하자면 창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독일 민법의 기초자들은 로마법을 대문 밖으로 좇아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더욱 발전되고 시대에 맞는 형태로 로마법을 구현해 보고자 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민법의 내용은 독일 민법전의 시행 전이나 시행 후에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음은 올바른 고찰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겠다. (158면)
46. "이 강물은 특히 로마의 원천에서 기원하고 있고, 독일 민법은 마치 제방과 같이 강물을 가두어 놓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강물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Josef Partsch) (158면)
47.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법전은 프랑스 민법(Code civil)이었다. (159면)
48. Tryphoninus는 규율적 정의, 즉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주라(suum cuique tribuere)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는 바, 고전기 후기 말의 법학자 Ulpianus는 이로써 정의 그 자체를 파악하고 있으며, 이 원칙은 Cicero와 Stoa학파를 통하여 Aristoteles까지 소급된다.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주라"는 명령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바, 이에 관하여는 아직까지 우리의 원문과 관련하여 고찰된 바가 전혀 없다. 이 명령은 분배적 정의(justitia distributiva)의 영역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이 때에는 각자의 품위에 따른 정의의 실현이 문제된다 (소위 기하학적 정의). 이 경우 각자는 자신의 것을 얻게 된다. 한편 이 명령은 소위 "대수학적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규율적 정의(justitia correctiva)의 영역을 표현할 수도 있는 바, 이 때에는 권리침해로 인한 채무, 특히 절도나 상해의 경우에 발생하는 (권리자의) 의사에 반하는 "교환"에 대한 제재가 문제된다. 규율적 정의에 따르면 의사에 반하는 "교환"은 재판관이 "정의에 반하는 (행위자의) 이익에서 다시 무엇을 빼앗아" 이익을 본 자가 손실을 당한 자에게 주도록 함으로써 조정되어야 함이 중요하다. 이러한 조정은 재판관이 행위자에 대하여 소유자에게 반환할 책임을 부여하거나, 정확한 손해액을 배상하도록 판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각자는 자기의 것을 지키게 된다. (169, 170면)
49. 첫 번째 이유는 법학방법론과도 관련되어 있다. 로마의 법학자들로부터 우리는 법적 요건과 효과의 사고("만일 ...하다면 , ...하다)를 통해 이성적 법발견의 방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법원칙들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비록 로마의 법학자들이 그들의 법을 오늘날의 경우처럼 엄격한 체계의 틀 속에 가두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인 상호연관성을 고려하면서 사유하는 방법을 배웠다. (189면)
50. "사실상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적인 기초가 훨씬 단단하다. 물론 쟁점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와 논쟁이 심할 수도 있겠으나, 재판관들은 모두를 구속하는 방법론이 존재하며, 또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해석은 전통적인 원칙들에 입각하여 행해지고 있다. ... 동료들과의 많은 대화에 비추어 볼 때, 통상 생각하는 것만큼 법학 교육이 각양각색으로 다르게 실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89면)
51. 그 동안 추출된 수많은 "법의 일반 원칙들"은 일차적으로 민주주의, 법치국가, 사회국가, 기본권 및 인권의 보장 등 유럽연합의 구성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원칙들, 예컨대 비례성의 원칙, 법적 안정성의 원칙, 신뢰 보호의 원칙, 법적 명확성의 원칙, 법적 청문의 원칙, 일사부재리의 원칙 등이다. (190. 191면)
52. 이와 관련하여 "위험을 부담하는 자는 그 이익도 또한 향유하여야 한다"는 격언은 지금까지 그 의미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다 하겠다. (205면)
53. "이 세상에서 로마법대전, 특히 Digesta보다 더 많이 의문을 해소해 주고, 내용이 풍부하며, 문제의 핵심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접근하는 법서는 없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따라서 유럽에서 가장 세력 있는 민족들이 오래 전부터 로마법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하여도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Gottfried Wilhelm Leibniz) (2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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