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를 위한 변론 - 지속가능한 지구생태계와 윤리적 육식에 관하여
니콜렛 한 니먼 지음, 이재경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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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일군의 젊은 청년들이 피켓을 들고 들어와 밥을 먹고 있는 손님들을 향해 찝찝한 단어들을 마구 던졌다. 그들의 소란에 점원들은 뛰어나와 경찰을 부르며 시위를 하러 들어온 이들을 밀쳤다.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라는 시위는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오, 해당 구호만을 통해서 시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떨 이들은 ‘치킨 자격증’ 시허망에 나타나 “닥 먹지 말라”는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단순히 구호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가공된 생닭처럼 하얀 옷을 입구 피칠갑을 한 채로 여렇시 바닥에 뒹구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이 들고 있던 시위 문구는 “배민이 말한 닭은 진지하게 죽어간다”였다.

과거에 읽은 책 중 피터 싱어라는 사람이 쓴 <동물 해방>이란 책이 있었다. 이른바 동물권을 주장하는 책이었다. 해당 책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공리주의에 입각해 쓰여졌다. 긴 책이었지만 단숨에 읽히긴 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의 물음표는 딱히 사라지진 않았다.

나 또한 무차별한 살생을 좋아하진 않는다. 또한 비건들 앞에서 생고기를 뜯어먹는 한 서양 청년을 모습을 볼 때면 “저런 Freak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비건들의 이러한 시위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혹시 흙바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리틀 포르스트>에 나오는 주인공이 서울에 살면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먹는 음식은 제대로 된 따뜻한 저녁 한상이나, 좋은 레스토랑의 좋은 음식이 아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이러저래 뒤섞인 육류가 주 성분이다. 매일 이런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는 사람들 중에는 굳이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여러 화학조미료와 이런저런 고기들이 뒤섞여 나온 제품이 아니라, 신선한 체소들로만 이뤄진 식사를 원하기도 할 것이다. 샐러드처럼 말이다. 그런데 안그래도 배가 고픈 이들 앞에서 만약에 “당신이 먹는 것은 폭력”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에 읽은 책 <소고기를 위한 변론>을 나는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시위 현장에 나가기 전 한번 즈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은 우리 사회에서 유희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먹을 수밖에 없게 되기도 했다. 또한, 육류를 생산하는 사람들 또한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가치사슬 안에서 우연하게도 자신들이 들어선 길에서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강남에서 자신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철저하게 채식을 하면서도 좋은 영양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 반대편에는 육류가 주식이 된 어쩔 수 없는 혹은 자의든 타의든 자연스럽게 육류를 생산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비건이라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너무 매몰차게 그리고 윤리적으로만 다루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책 <소고기를 위한 변론>에서는 소고기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각종 논쟁을 다룬다. 여기에는 비단 공장식 축산이란 산업적 윤리적 측면만이 아니라 소를 많이 키울 경우 자연헤 해를 입힌다는 과학적 논쟁도 책은 다루고 있으며 저자는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과학적 사실을 하나하나씩 들어서 판단을 내린다. 

동물 해방론자 혹은 비건 등. 나는 이들 또한 어쩌면 현재 사회에서 불가피한 어떤 가치에 휘말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보다 자신들이 서 있는 세상의 위치를 더 잘 인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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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30대 기자와 60대 연금학자가 주고받은 한국인의 노후 이야기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전혜원.오건호 지음 / 서해문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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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보통사람은 그래도 안전할 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 해체의 단계다.

길거리에서 페지 줍는 노인들을 보고 있자면 <비밀의 숲>에서 이창준의 편지의 내용이 머리에서 재생된다. 그리곤 혼잣말로 정말 답이 없는걸까...’를 뱉는다.

올해 신간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반복해서 보는 장면과 반복되기만 하는 혼잣말에 대한 무게감 있는 답을 찾고자 빌린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노후 빈곤이라는 구조화되고 방치된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실하게 하는 책이다.

 

오늘만 살겠다는 진보, 내일을 고민하는 진보

 

연금을 주제로 한 전혜원 기자와 오건호 박사의 대화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을 몇 퍼센트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반복되는 국민연금의 문제를, “노후 빈곤 경감을 위해 어떻게 제도를 구성하고 총체적으로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그 답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연금을 둘러싸고 우리가 매번 마주하는 정보란 으레 다르지 않다. 지난 94일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이 발표된 후 상당수 언론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숫자를 바꾸는 안이 발표된 것이니 그렇게 보도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그러나 노후 빈곤 완화를 다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구조개혁 문제는 이번 발표 이전에도 없었다. 현 정부가 모수가 아니라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도 구조개혁이 무엇인지 언급하는 수준에서 다뤄질 뿐이랄까.

 

같은 국민연금 문제를 다루지만, 전 기자와 오 박사의 이번 작업이 의미와 차별성을 발생시키는 부분은 여기다. 이들은 넓은 시야에서 해당 문제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상상해야 하고 어떻게 미래에 그려나가야 하는지를 짚는다. 그렇다고 연금 문제의 주전장이 되는 디테일 또한 빗겨나가는 게 아니다. 더 확장된 고민 아래서 디테일한 문제들을 보다 다각적으로 건드린다.

 

이들은 지속가능한 연금운영을 위해서 다른 연금(공무원·사학·군인)과 국민연금을 통합하자는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그 아이디어 내 우선순위를 따진다. ‘국가가 연급을 지급보장하겠다는 말의 함정을 짚고 연금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정년연장의 한계도 지적한다. 국민·퇴직·기초연금을 어떻게 조합해 노후 빈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책은 연금을 둘러싼 온갖 그럴듯한 의견과 주장들을 이런 식으로 찬찬히 논파한다.

 

그러나 연금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질문 중 전 기자와 오 박사는 가장 얘기하고 싶은 문제는 바로 진보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에 대한 집착이다. 이 문제는 3(‘더 내고 더 받자는 주장이 감춘 것들)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전 기자는 에필로그에서 오 박사는 프롤로그에서 직접 이 문제를 언급했다. 이 책의 컨셉인 대담이란 연극이 아니라 직접적인 메시지로 말이다. 진보의 소득대체율 인상 집착이란, 보험료는 그대로 두고 소득대체율을 올려서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자는 아이디어다. 또한, 국민연금이 고갈된 뒤에는 세금을 투입하고. 그러나 이에 대해 오 박사는, 보통 보수주의자들이나 내뱉을 주장을 한다. 미래세대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 세대가 소득대체율의 수혜를 받고자한다면 자기 세대에만이라도 보험료율 인상 같은 부담을 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오 박사는 소득대체율을 올린다고 해 모든 노인이 수혜 받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국민연금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가입 기한을 채워야 하는데 제도의 역사가 길지 않아 이를 충족한 65세 이상 노인은 전체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제도가 바뀌더라도 이미 은퇴한 가입자에겐 소급 적용도 안 된다는 것이다. 소득대체율만 높였을 때 이득을 보는 사람도 65세가 되지 않았으면서 국민연금에 가입했던(대부분 제도권에 있었을)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보는 국민연금 수혜가 이들에게 돌아가는데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숨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필요하다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더. 오 박사는 적립방식의 한계를 수용하고 그해 걷은 보험료로 국민연금을 지급하자는, 부과방식 전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현재의 적립방식이 애초에 국민연금의 고갈을 염두해 두었고, 서구 선진국들도 부과방식으로 국민연금을 지급하고 있기에, 보험료율 인상 같은 시민들이 부담을 느낄 방안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오 박사는 서구의 경우 부과방식으로의 전환이 2차대전 동안 기금을 다 썼고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인구구조는 안정적이었기에 부과방식 전환이 완만했다고 설명한다. 오 박사의 다른 칼럼을 찾아보면 KDI를 비롯해 국가 연구 기관들도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낮추면서 적립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제도 운영의 목표였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제도 내부에서 가입자들이 균형 보험료율을 책임지고, 제도 바깥에서 인구구조 개선에 힘쓰면 지속가능하 재정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정 안정은 한 번 달성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국민연금이 존속되는 한 예상 밖의 인구·경제 변수가 언제든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어요. 그때마다 재조정이 요구되겠죠. 필요 이상의 갈등과 실기를 피하기 위해 자동안정화 장치를 고려해 봄 직합니다. 결국 지속가능한 재정을 위한 연속개혁입니다. 조세에 기반한 기초연금은 세대 간 연대라는 원칙에 따라 해당 시점의 국가재정이 책임지되, 초고령사회에 맞춰 지급 범위를 좁혀야 합니다. 퇴직연금은 와전 적립식 연금이니 제도 내부에서 재정균형을 추구하고요.”

 

책의 결론은 명확하다. 구조개혁이란 큰 틀로 봤을 때 (의도치 않게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역진적인 결과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올려선 안되고, 가난한 노인들을 위해 용돈 연금이란 비판을 받는 기초연금을 올리고, 퇴직자들이 안정적으로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게 퇴직연금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연금의 보험료율은 올리고. 그리고 이러한 세 제도를 활용하는 안에 대해 두 사람은 노후 빈곤을 위한 세 개의 지팡이라고 부른다.

 

그간 연금은 개혁되지 않아 여러 제안들이 있었다. 부과 방식으로의 전면적 제안, 공론화 위원회의 결론을 따르자는 의견, KDI에서 발표한 신·구연금 분리 제안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은, “개혁이 되지 않으니, 미래 일은 미래세대가 알아서 하도록 생각을 포기했다거나, “위원회의 상징성에 책임을 방기한 방안혹은 기술적인 대안등이라 비판받았다. 차분한 대안이 없기에,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내놓은 아이디어의 차력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65세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이 책의 이러한 결론은 사람들에게 노인빈곤과 재정이 고갈될 위기에 처한 연금을 어떤 균형 아래에서 지속가능하게 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도 오 박사가 내놓는 결론도 상당히 만족하고 납득가능하고.

 

올드패션한 기자가 한 일

 

이 작업물은 참으로 소박하다. 올드패션하다. 대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고, 형식도 역동적이지 않다. 기자가 질문하고 학자가 답한다. 화려한 인포그래픽은커녕, 단순한 그래프 몇 개가 전부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쪽도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억까라면 이 작업물이 편향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기자는 연금 문제에 대해 중립성을 잃었으며 특정 주장에 대해 프로파간다를 한다며(어그로의 시대에 이런 거라도 있으면...).

 

그런데 콘텐츠의 형식이 달라지면 사람들은 그 문제의 본질에 더 관심을 가지는가? “대한민국 완전 망했네요같은 짤처럼 화려하거나 재밌거나 엉뚱한 파생물에 더 관심을 가지진 않나? 특정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준다는 측면에서 이런 콘텐츠나 짤의 역할은 상당하지만, 어째 문제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그 형식이란 임계점 너머로는 못 넘어가지 않나?

 

이 책은 그 제목부터 표지까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지만, 내용을 읽다 보면 대담을 진행한 기자의 용기와 내공, 성실함을 느끼게 된다. 무슨 말인가. 시사 콘텐츠, 특히 복잡한 제도를 다룬 콘텐츠는 시민들이 머릿속으로 그릴만한 차원에서 이야기가 풀리고 또 그 진행이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다. 독자들은 흔하지 않은 단어와 그 단어를 중심으로 맥락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그리는 작업을 포기한다. 아니면 어색하게나마 (외워지지도 않을) 암기를 시도하던가. 연금과 관련해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졌어도, 매번 나오는 얘기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서 멈추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전 기자는 여기서 다른 선택을 했다. “끝까지 질문한다”, “깊이있게”, “돌직구로 표현될 수 있는 질문들을,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실들을 향해서도 던졌다. 이런 수식어들은 보통 지사형 기자들에게 붙는 것이나, 이런 식의 질문들이 제도의 문제로 향했을 때, 우리는 그간 감각하지 못했던 불의와 마주하게 된다. 불의란 특정한 사람의 의도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으나, 잘못된 시스템에 대해 모두가 침묵하면서 공공연하게 허용되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전 기자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통해 기자가 어떻게 불의와 맞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전문가의 전문분야를 주제로 기자가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대화를 이어나가며 전방위적으로 의심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가? (유튜브 시대에 몇 군데 있긴 하다) 보통의 시사 프로그램이건 기사에서건 기자들이 하는 일이란 주제 관련 말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그중 뾰족한 주장을 뽑는 데 주력한다. 기자의 낮은 전문성은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100% 뽑는데 실패할 수도 있고, 전문가에게 휘둘리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 기자는 두 문제를 가볍게 피한다. 그는 오 오 박사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돼, 국민연금 운영에 있어서 그의 지식과 지혜를 바닥까지 끌어내려 한다. 몇 개의 날카로운 질문에서 전 기자의 이런 면모가 보이는 게 아니라,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어색함 없는 수준 높으면서 긴장감 있는 흐름이 이어진다.

 

물론, 3번 인터뷰를 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지만, 연극이라 할지라도 이는 필요하다. 이런 좋은 흐름의 텍스트가.

 

쉴 생각이 없다면 편안하게라도 일하자

 

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편하게 쉬는 시간보다, 그 시간에 한푼이라도 더 돈을 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마 국민연금을 더 받더라도 폐지를 줍는 사람들은 폐지를 계속 주울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이 책의 저자들이 얘기하는 3개의 지팡이가 있으면, 조금 더 무리하지 않고 자신의 노후를 보낼 수 있지 않을가 싶다.

 

Ps. 1

사실, 이 책을 끝낼 즈음 내 SNS에 돌아다녔던 영상 중 하나는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김희원 한국일보 기자의 언론 옹호 발언이었다. 그의 말 중 귀에 멤돌던 것은 이야기가 되니까 쓰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는 언론이 좌우 가리지 않고 권력 비판 기사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던 도중 나온 것이었다(물론, 어용 지식인의 말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권력을 비판하는 데서야 맞는 말이긴 하나, 저 이야기를 이번에 읽은 책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기자들에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은 정치와의 결부라는 너무 한정적인 배경으로만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말한, “모두가 침묵하는 확장해 가는 불의에 대해서는?”에 대해 기자들이 전 기자만큼 성실한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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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독재 - 망국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을 변호하다
한윤형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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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한 줄 평을 쓰면 이렇다.

 

주장(보다는 제안)에 대한 근거를 상당히 지난한 맥락들로 오려 붙여 설명하고 있고 그 서술 방식 또한 상당히 지루하고 만연함...”

 

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돌아오자면 ”, “포개어진다같은 표현을 보고 있자면 얼마나 자기 주장을 말끔하고 확실하게 논증하지 못해 저런 말을 쓰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글에는 종횡무진 텍스트를 누볐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누빈건 맞으나 파죽지세의 기세는 없고 수없이 다른 이야기로 세어 나가다가 구렁이 담 넘듯 다시 본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어간다.

 

참 골 때리는 책이다. 아무라 잘 봐줘도 500패이지가 아니라 250패이지로 줄일 수 있는 양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개론서가 전문서를 압도할 때

 

“‘개론서에 의한 인식심화 학습에 의한 인식을 압도하여 심지어는 탄압까지 한다는 것이다

 

<상식의 독재> 저자 한윤형은 상식이 사회(혹은 정치)에서 지식에 기반한 변화를 어떻게 저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먼저 그는 책에서 상식에 대해 공통의 감각이나 모르면 괄시당할 수준의 지식 차원을 넘어 사실상 따라야 할 도덕 기준이란 의미까지 가졌다라고 설명한다. 상식이 기초적인 지식이 아니라 도덕의 기준까지 된다니, 이 무슨 말인가.

 

일단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식이란, 한국인과 우리 공동체를 인식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지식과 관련된 것들이다. 세상을 떠도는 지식의 여러 조각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대중화된 지식이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이렇다. 우리의 전근대사의 연장 선상에서의 우리의 근대 / 조선 노예제사회 논쟁 검토 / 게으른 조선인 담론 비판 및 민주화와 산업화 성공 원인 / <한국은 하나의 상식이다>의 텍스트를 활용한 한국 문화의 특수성 분석 / 피해자 서사 검토 /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수립 / 한국의 능력주의와 평등주의 / 지정학 지옥 시대에 극복 가능성 / 상식 분화 사회의 혼란과 작동 불능 상태 된 정치 극복 대처 방안. 저자가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식들은 보통 사람들의 인식에 으레 장착돼 있다고 할 수 있는 지식이다.

 

상식이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적 기준이 됐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과함을 느낄 수도 있다. 경우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디 한번 우리 주변에서 상식에 반하는 발언이나 행위가 나타났던 사례를 생각해보자. 사회지도층 인사(그가 유명하지 않았음에도) 입에서 상식에 반하는 발언이 나오면, 대대적인 비난이 이어진다. 원색적으로 문제인 발언이 나올 때도 있으나 곱씹어 볼 발언이 나왔을 때조차 대개는 그 취지를 묵살하고 망언이란 딱지를 붙인다.

 

일반 시민이 욱일기를 게양했다거나(이건 문제다. 다만, 관종에겐 무시도 답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저항의 의미로 태극기를 불태웠을 때도 상당한 비난이 쏟아진다. 뿐만인가.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겐 한국의 상식은 은근 넛징된다. 정체성에 관한 것이니 분명 예민할 수밖에 없지만, 해당 사실에 대한 도전은 허용되지 않고, 수용을 강요하는 분위기도 있다. 외국인들 또한 대중에게 노출된 모습을 보일 때 상식에 거슬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물론, 이런 분위기와 공생하며 자신만의 콘텐츠 영역을 개척한 소련여자 크리스 같은 대범한 인물도 있지만)

 

상식을 의심조차 해선 안 된다는 인식에 도전하기 위해 저자가 책에서 꺼내든 카드는 중 하나는 이영훈이다. 대표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자이자 엠부시 인터뷰를 시도한 MBC기자의 뺨을 대차게 후린 그 (행동하는?) 학자.

 

상식의 문제성을 다루며 그 상식 바깥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인물을 기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빌런 학자의 상식 부수기란 기묘한 에피소드로 폐쇄적인 상식의 단면을 사람들이 감각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빌런 학자의 잘못된 상식 깨부수기

 

저자가 이 에피소드를 위해 준비한 상식은 과거 제임스 펠레 교수가 주장한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이고, 빌런은 물론 이영훈 교수다. 이 교수는 제임스 팔레의 주장에 대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조선 노비들의 존재 형태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그 계급적 성격을 농노라고 부를 만한 존재였다라고 반박했고, 또 다른 저작 <한국경제서>에서는 노비들의 입역노비와 납공노비를 분리하며 반박했다.

 

이 교수가 팔레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유는 그가 조선이란 나라를 특별히 아꼈다거나,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겠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아마 1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의 연구에서 조선에 노비가 많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는 펠레의 주장에 동의했을 것이다(지금처럼). 그는 그냥 경제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이고, 자신의 연구 결과로 봤을 때 팔레의 의견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저런 의견을 낸 것일 게다.

 

애국(?)에 기여한 고민이 된 이 교수의 반박은 가치 판단 이전에 상식 혹은 지식에 대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책을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와도 포개어진다. 저자는 책에서 이영훈만이 아니라 한국인과 한국 사회란 공동체와 관련해 총체적인 분석을 다양한 텍스트와 인물을 끌어와 시도한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제로에서부터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가치와 대중적 지지에 지식을 가두는 게 아니라 지식의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고 또 다른 지식과의 연결을 더듬고 따라갔을 때 도착할 수 있는 다면적인 지식의 모습이다. 그리고 저자의 이런 발견은 지식이란 것을 상식이란 테두리에 가두기에는 너무 크고, 억지로 가두려는 행위는 이 지식을 왜곡하는 행위인지를 깨닫게끔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과정이 지루하고 돌아가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의 이 같은 고민 안에서 이영훈의 의견은 편향된 사람의 과거 연구물이 아니라, 한국의 근본을 바로보기위한 하나의 조각이 된다. 그의 편향적인 성향도 총체적인 지식이란 방향성 아래서는 신경쓸만한 것도 되지 않는 느낌이다. 물론, 이영훈의 연구물을 재검토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이영훈의 마음은커녕 이영훈을 대하는 대중의 생각 또한 바꾸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적 궤적에 대한 탐색은 우리가 어떤 상식에 포섭돼 있고 이에 대해 관성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작게나마 맛보게 해주면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는 주장의 반박을 넘어 더 큰 지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영훈은 여러 저술에서 한국사의 목표가 근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억지로 근대를 발견하려고 둘 필요는 없다는 훌륭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근대에 도달하지 못한 조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에 자괴와 폄하의 시선을 떨치지 못했다. 이영훈은 한중일을 비교하면서 미야지마 히로시처럼 역사의 삼각측량을 통해 특수성을 가늠하지 못했고, 그때그때 한중 비교나 한일 비교를 하면서 뒤떨어진 한국에 대해 아쉬워했다. 사실 그 양자 비교에서 드러난 한국의 특성은 어쩔 때는 중국을, 어쩔 때는 일본을 닮아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폄하의 대상이 될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했다.

한국의 근현대사 논쟁은 흔히 백년전쟁이라는 수사로 소비된다. 그러나 조선 노비제 논쟁을 살펴보다 보니 우리의 근현대사 논쟁은 남북전쟁 이후의 기억 해석 투쟁, 문화 논쟁과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 193pp

 

매번 극우란 사람들이 제시한 의견이 상식적인(?) 사람들이 빠르게 조성한 공론에 제압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몇 차례 목격해왔고 또 목격할 것이다. 이번에 김문수 후보자 사태도 그렇고. 하지만 한쪽을 압도하는 과정 안에서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합의가 깊어지는 과정은 거의 없고 어느 한 쪽을 제압한 이후 남아있는 의문들을 대개는 잊는다. 그러다가 다시 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똑같은 논쟁을 벌이고. 그러다가 우리는 종종 상식을 강요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며 상식에 딴지를 거는 사람 나아가 딴지를 제압하려는 사람 모두에게 냉소적이 돼 간다. 저자의 책은 우리가 어떻게 이 악순환이 고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지를 옅게나마 보여준다. 그리고 상식의 자리를 둘러싸고 대화 없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존재를 확인시켜기도 하고.

 

상식 엘리트 독재 vs 성실한 아마추어

 

주마간산으로 책을 읽었다. 저자가 열심히 조사한 것을 성실히 따라가지도 않았고, 내 머릿속에 있던 상식과 비교하며 내용을 곱씹지도 않았다. 내가 한 행위가 독서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 저자도 바쁘면 책의 서문과 결론 부분만 읽어보라고 했으니, 이런 독자가 있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어쩌면 저자의 아마추어적인 탐구 과정이라 하겠다 솔직히 이 책에서 다룬 주제와 관련해 세련된 서술과 깊이 있는 내용을 쓸 연구자들이 우리나라에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루는 연구자들은 저자의 저술의 빈틈을 찾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지점은, 이 사람이 총체적인 지식을 만들기 위해 도전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어느 한 진영의 상식을 가진 집단이 다른 집단의 상식을 인정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같은 얘기도 다른 말로 하고, 집요하게 상대의 틀린점을 비판하는 동안, 어째 우리의 지식세계란 모두의 동의를 통해 쌓아가는 지식은 없고, 각자의 진영들에서 쌓아가는 것들만이 존재한다. 저자는 아마추어적이긴 해도 삿초동맹을 이끌어 냈던 사카모토 료마처럼 여러 텍스트를 동분서주하면서 서로 상식으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책에서 본 부분이긴 한데, 정확히 어디에서 봤는지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지는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인상깊은 부분이었다. 저자는 과거 엘리트가 생산하는 지식만을 존중하고 신뢰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엘리트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고, 페이스북과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성실하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 또한 존중하게 됐다고 한다. 그들은 어쩌면 성실한 오타쿠나 아마추어로 엘리트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이들의 시도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엘리트가 자신의 지위만큼의 열심히 탐구하는 것도 아니고, 경력과 이름에 걸맞는 상상 이상의 결과물 또한 내놓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ㅎㅎ.

 

나 또한 어쩌면 저자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이를 하나의 산업으로 굴려보고자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참...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이렇게 만나게 돼 반갑다. 책은 많이 팔릴 것 같지 않으나, 책의 정신아 조금 더 널리 공유될 수 있으면 한다.

 

Ps 1.

솔직히 나는 이 책의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하면 <쌀 재난 국가>를 받는 이런 식으로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해당 책을 읽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우리 사회의 문제를 너무 환원주의적으로 풀려는 시도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기원을,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수도 없고 농촌에서도 풍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벼농사 문화에서 찾으니, 어색하고 이 방향성이 정말 맞나 싶기도 했다. 이철승 교수의 책을 읽었을 댄 그냥 재밌는 해석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이 책을 통해서는 은근 설득이 됐다.

 

Ps 2.

어쨋든 저자는 이 책의 서술 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은, 서술 방식의 지루함을 견뎌야 할 것이다.



https://blog.naver.com/biswang/223552158026

저는 생각의힘 출판사 책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읽을 기회가 많으면 좋을 것 같네요^^
언제든 리뷰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bisw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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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리부트 - 열광과 환멸의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 12
신진욱.이세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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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쌓여있고, 새로운 것은 흘러만 간다.”

지금의 우리 정치판을 그람시의 <옥중수고> 속 유명한 문장에 빗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민주화 세력의 힘을 빌려 국회의원이 된 자는, 참사의 구조적 원인과 대한을 찾아야 하는 자리에서 코인 투자를 한다. 물의를 일으킨 의원을 두둔한 어떤 의원은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 반대편에서는 당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언론도 공감하는 쓴소리를 뱉으며 주목받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대중의 공감을 받는 목소리는 본격 정치의 장에서 소수의견으로 머물다가 다른 이슈에 쓸려나간다.

“오만 정이 떨어진다” 물의를 일으킨 의원을 두둔하는 당의 모습에 대한 교수의 비판은 조국 사태 이후 내가 이 당에 줄곧 갖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은 인정하나, 상대에 대한 자동반사적 적대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무한한 관용의 모습은 민주당을 민주주의자들이 모인 집단이기는커녕 후안무치한 무리처럼 보인다. 무능해도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지지의 마지노선은 사라진지 오래다.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창조적 파괴의 소리는 내지 못한 채 언뜻 정의로워 보이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당. 그것이 오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주당이다. 너무 일찍 민주당에 대한 관심을 끈 것일수도 있으나, 이제 여간해선 이들에게 선의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 “정치는 어쩔 수 없이 좀 그렇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조차도, 작금의 민주당의 태도는 “좀 그렇다”라는 지점을 한참 넘었다.

민주당을 비판하는 수많은 칼럼이 있었지만, 대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악의가 있어 보이거나, 관성적이거나, 당위적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정파적이었거나. 악의가 있든 없든, 정파적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그런 칼럼들은 재미가 없었다. 칼럼을 (네이버뉴스를 통해) 듣고 있는 내게 메아리쳤던 게 몇 개나 되는지 손에 꼽는다.

하지만 메아리가 쳤던 몇몇의 칼럼은 정치를 바라보는 무기력하고 영혼없는 내 눈을 생기를 불어 넣었다. 그 칼럼 중에는 염세주의자 같은 문체를 지닌 기자로부터 나온 게 적지 않았다.

한국 정치 리부트

이세영 기자의 글은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신진욱 교수의 글은 몽둥이처럼 뭉툭했다. 신 교수님에겐 미안하지만 학교를 다닐 때도 나는 뭉툭한 몽둥이가 주는 무게감 있는 아픔보다, 송곳처럼 단단하고 잘 빠진 당구채와 같은 매에 더 경각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이세영 기자의 칼럼은 차갑고 도도한 문체만 돋보였던 게 아니라 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문장들이 많았다. 샤츠슈나이더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정당 안 또한 민주적으로 운영 돼야 하는지 묻고, 한나 아렌트를 통해 위선의 생산적 측면과 이를 그 넘어의 위험성에 대해 글에서 경고했다. 또한, 정말 날것 그대로 활용될 여지가 큰 (그리고 실제 그렇게 활용되고 있기도 한)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란 정치에 대한 칼 슈미트의 개념을 풀어주었다. (자세한 것은 책을 읽어봐 주길 바란다.)

물론, 이 기자의 글에는 발터 벤야민도 나오고, 카스무데, 샹탈 무페, 김수영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긴 한다. 칼럼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권위 있는 사람의 이론이나 그들이 한 말을 인용하는 것은 늘상 있다. 나 역시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할 때 많이 모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피상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것과 그 피상 안의 깊은 세계를 우리 현실에까지 끄집어 보여주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차고 넘칠 만큼의 이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럽다. 석사까지는 했어야 하는데.) 한겨레신문의 프리즘을 읽을 때나, 이세영X신진욱 정치크로스를 읽을 때도 이 점 때문에, 공유해 몇 차례고 들었던 것 같다.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해 지혜를 갖고 있던 자들의 고민과 결론을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맞게 풀어내 보여주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단순히 민주당을 비판하는 데에서만 “낡은 것은 쌓여있고, 새로운 것은 흘러만 간다”라는 말을 쓸 줄 알았는데, 책을 덮고 보니 정치에 나의 냉소가 정치에 대해 어떤 눈을 가렸는지 깨닫게 됐던 것 같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민주당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아무리 읽어도 공허하게 소비되는 정치 칼럼보다는 두 지식인의 대화 형식의 이 칼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을 하나씩 던지지만, 사실 대화한다는 느낌은 딱히 들진 않는다. 그리고 서로에게 향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보다는, 해당 주제에 대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느낌도 나고) 분명 생산적 고민을 하게 만드리라 생각한다.

아! 신 교수님의 칼럼은 모두 읽을만하다.

이 책의 주옥같은 문장들

그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권위주의 시절 억눌렸던 사회적 요구가 도처에서 분출하던 특수 상황이었다. 이념 지형과 느슨하게 결합한 지역 정당체제가 대선에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드라마틱한 다자 정치 구도를 낳았는데, 어떤 도 자신의 의지를 독자적으로 제도 안에 관철할 능력이 부재했던 현실은 경쟁 정당 간의 절충과 타협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왔다. 이는 실질적인 다자 정치 구도 안에서 당대가 요구한 과거 청산과 사회 개혁 입법들이 격렬한 진통 없이 결실을 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빗어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이제, 산문적인 세속의 권력 질서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지상에 홀연히 강림했다 사라진, 사적이고 찰나적인 광휘 속에 도래했던 메시아적 순간처러 여겨질 분이다. -9pp

‘적과 동시’라는 범주의 핵심은, 공적인 관심사를 놓고 사람들이 집단으로 결합하고 다른 집단과 분리되는 것, 대내적으로 결속하고 대외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가리킨다. 슈미트는 이러한 집단 형성과 균열 형성의 본질이 심리적·감정적·도덕적 적대에 있지 않으며 정치에서 적이란 증오하는 적대자와는 다른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의 현실에서 적과 동지의 관계는 흔히 감정적·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진다. 뜨거운 감동, 간절한 소망, 격양된 분노가 없는 정치는 승리하기 어렵다. 왜일까? 마나 누스바움이 말했듯, 구체적 공동체에 대한 사랑 없이는 헌신의 동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공동체의 동지들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적과의 대결이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46pp

사람들은 스스로 위선을 행하고, 타인의 위선을 알면서도 눈감아준다. 가면을 쓰고 벌이는 역할극과도 같은 이 사회에서 상대의 위선을 공격하고 까발린다면, ‘집합적인 위선의 실천’을 통해 쌓아 올린 공모와 연대의 공동체는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만과 위선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는 근본적으로 일정한 위선과 상호작용에 의해 작ㅇ용하고 유지된다.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공물”이라는 17세기 프랑스의 작가 라 로슈코프의 경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위선의 불가피성과 그것의 ‘의도하지 않는 생산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위선을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선은 정치와 민주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타인과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혁명론>의 많은 분량을 많이 할애해 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위선에 대해 경고한다. 이 파괴적인 위선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완벽히 속이는 데 성공할 때, 다시 말해 자신의 말과 행위가 내면의 순수 동기와 진정으로 일치한다고 철석같이 확신할 때 작동한다.

이런 심리 상태에 포획된 인간은 자기만이 선의 화신이고, 다른 이들은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 정치를 주도할 때 진정성의 폭력이 발생한다. 판단의 근거를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이 아닌 내면의 순수 동깅에 둠으로써 타인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격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들의 경합으로서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고 정치는 선악의 적대적 쟁투로 변질되고 만다. - 80pp

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는 김지하 시인의 절규처럼 현실에 부재한,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했던 무엇이었다. 그 민주주의가 이 땅에 온 지 30년이 넘었다. 이제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실은, 추상적으로 열망했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피상적으로 이해될 때 현실에서 그것은 민주주의를 부식시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어떤 시민, 어떤 참여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 115pp

‘정당이 얼마나 민주적이어야 하는가’는 지도부와 당원, 다수파와 소수파 사이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나 논쟁의 최전선에 불려 나온 주제다. 극단적 당원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쪽에선 ‘당내 민주주의 없이 당 밖의 민주주의도 없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러나 조반니 사르토리나 샤츠슈나이더 같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를 ‘정당 간 상호 경쟁’이 만들어 내는 정치적 결과물로 본다. 국가라는 정치 공ㅇ동체에 중요한 것은 ‘정당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이지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얘기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정당 안이 아니라 정당 사이에 있는 것”(샤츠 슈나이더)이다.

물론 내부 운영이 민주적이면 저당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가 커지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고 해서 그 정당의 대외 경쟁력까지 함께 상스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오늘날 당내 민주주의가 강조되는 정당이 어떤 곳인지를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 사회운동 조직에 뿌리를 둔 운동 정당이나, 규모가 작은 계급, 이념 정당이다. 한국에선 녹색당, 정의당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당에는 집권이 아닌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최대 관심사다.

그러나 집권이 목표인 정당이라면 달라야 한다. 다수 유권자의 선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흐름에 신속하는 게 필수다. 하지만 집권을 노리는 규모 있는 원내 정당들에서도 당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당원 권리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는다. 2012년 이후 민주당에서 공직, 당직 선거의 흐름을 좌우한 것도 활동력이 왕성한 열성 당원들과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정치 팬덤이었다.

그렇다면 대규모 정치조직인 현대 정당은 왜 소수의 강경파와 적극적 팬덤에 취약한가. 다름 아닌 ‘참여의 격차’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대의정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선 시민이든 당원이든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필요하다. 거기엔 적잖은 비용이 든다. 시간과 노력, 열정을 가진 소수만이 정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참여의 문턱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건 확고한 정치 신념의 힘이기도 하다. 신념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종교적 열정에 견줄 정도다. - 123pp

이 정부 들어 두드러진 팬덤 정치의 작동 구조 역시 상술한 메커니즘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승계된 ‘절대적 권위’를 중심축 삼아 권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분배되는 위계 구조 속에서, 각 단계의 권력 주체들은 정당성의 원천을 ‘내부’에 갖기보다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의존하게 된다. 중심의 권위가 약해질수록 상층의 의사 결정이 ‘하부로부터의 압력’에 취약해지는 구조다. 임기 말이 다가올수록 팬덤과 밀착도가 높은 중하위 그룹이 ‘개혁 완수’와 ‘대통령 수호’를 명분으로 내부 의사 결정을 주도하게 되는 배경이다.

문제는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이 구조 아래선 난망해진다는 점이다. 지도부는 자신들을 압박한 소장 그룹에, 소장 그룹은 다시 강성 팬덤에 책임을 미룬다. 그러나 ‘익명의 다수’는 책임질 수 없고, 책임을 이양할 대상도 없다. 그 결과 목격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난장’이다. 이것이 ‘촛불의 열망’ 위에 들어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모습이라면, 너무도 허무하지 않은가. - 125pp

정치의 미학화는 당장의 궁지를 벗어나게 해주는 비상 사다리는 될지언정 권력이 직면한 정당성 위기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퇴임 직전까지 줄곧 40% 안팎의 지지도를 유지했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정당성 위기의 원인(무능)에 대한 근원적 처방과 독단적 통치 스타일의 혁신 없이는 윤석열에게 탁현민의 할아버지가 붙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치의 미학화’와 대척하는 지점에 ‘미학의 정치화’가 있다. 정치의 미학화가 문제 해결이 안 되는 현실을 ‘견디게’ 만든다면, 미학의 정치화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표현함으로써 집합적 감성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게’ 만든다. 발터 베냐민은 이런 ‘정치화된 미학’의 사례로 1·2차 세계대전 사이 중서부 유럽과 러시아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로 삶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려 했던 전위 예술운동을 꼽았다. - 16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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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미래 - 경제에 현혹된 믿음을 재고하다
장 피에르 뒤피 지음, 김진식 옮김 / 북캠퍼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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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또한 사람들의 인식의 문제다.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하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이란 책을 통해서 경제에 대한 자신의 이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단순히 마르크스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경제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경제 체제는 계속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주요하게는 절제되지 않았던 신박한 금융가들의 투기가 있었던 것과 별개로, 미국 시민들은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면서도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그와 같은 일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규제를 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지 못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처음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을테지만,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대변할 사람이 아니라, 그 분노 저면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야 했다. 샌더스처럼 말이다.

 이번에 읽은 책 <경제와 미래>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 시스템에 대한 헤게모니를 다룬 책이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는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가 왜 자동으로 작동하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때문인지 경제라는 것을 충분히 수정 가능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어쩌면 경제라는 것은 바꾸기에는 너무 거대한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바꾸는 게 정말 혁명이고 거대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어떠한 경제적인 질서에 종속돼 살아가는지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이는 거대 권력이 계속 교체되더라도 시민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다. 대선 뒤에 이 책을 읽어보니 정말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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