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독재 - 망국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을 변호하다
한윤형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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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한 줄 평을 쓰면 이렇다.

 

주장(보다는 제안)에 대한 근거를 상당히 지난한 맥락들로 오려 붙여 설명하고 있고 그 서술 방식 또한 상당히 지루하고 만연함...”

 

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돌아오자면 ”, “포개어진다같은 표현을 보고 있자면 얼마나 자기 주장을 말끔하고 확실하게 논증하지 못해 저런 말을 쓰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글에는 종횡무진 텍스트를 누볐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누빈건 맞으나 파죽지세의 기세는 없고 수없이 다른 이야기로 세어 나가다가 구렁이 담 넘듯 다시 본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어간다.

 

참 골 때리는 책이다. 아무라 잘 봐줘도 500패이지가 아니라 250패이지로 줄일 수 있는 양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개론서가 전문서를 압도할 때

 

“‘개론서에 의한 인식심화 학습에 의한 인식을 압도하여 심지어는 탄압까지 한다는 것이다

 

<상식의 독재> 저자 한윤형은 상식이 사회(혹은 정치)에서 지식에 기반한 변화를 어떻게 저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먼저 그는 책에서 상식에 대해 공통의 감각이나 모르면 괄시당할 수준의 지식 차원을 넘어 사실상 따라야 할 도덕 기준이란 의미까지 가졌다라고 설명한다. 상식이 기초적인 지식이 아니라 도덕의 기준까지 된다니, 이 무슨 말인가.

 

일단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식이란, 한국인과 우리 공동체를 인식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지식과 관련된 것들이다. 세상을 떠도는 지식의 여러 조각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대중화된 지식이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이렇다. 우리의 전근대사의 연장 선상에서의 우리의 근대 / 조선 노예제사회 논쟁 검토 / 게으른 조선인 담론 비판 및 민주화와 산업화 성공 원인 / <한국은 하나의 상식이다>의 텍스트를 활용한 한국 문화의 특수성 분석 / 피해자 서사 검토 /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수립 / 한국의 능력주의와 평등주의 / 지정학 지옥 시대에 극복 가능성 / 상식 분화 사회의 혼란과 작동 불능 상태 된 정치 극복 대처 방안. 저자가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식들은 보통 사람들의 인식에 으레 장착돼 있다고 할 수 있는 지식이다.

 

상식이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적 기준이 됐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과함을 느낄 수도 있다. 경우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디 한번 우리 주변에서 상식에 반하는 발언이나 행위가 나타났던 사례를 생각해보자. 사회지도층 인사(그가 유명하지 않았음에도) 입에서 상식에 반하는 발언이 나오면, 대대적인 비난이 이어진다. 원색적으로 문제인 발언이 나올 때도 있으나 곱씹어 볼 발언이 나왔을 때조차 대개는 그 취지를 묵살하고 망언이란 딱지를 붙인다.

 

일반 시민이 욱일기를 게양했다거나(이건 문제다. 다만, 관종에겐 무시도 답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저항의 의미로 태극기를 불태웠을 때도 상당한 비난이 쏟아진다. 뿐만인가.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겐 한국의 상식은 은근 넛징된다. 정체성에 관한 것이니 분명 예민할 수밖에 없지만, 해당 사실에 대한 도전은 허용되지 않고, 수용을 강요하는 분위기도 있다. 외국인들 또한 대중에게 노출된 모습을 보일 때 상식에 거슬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물론, 이런 분위기와 공생하며 자신만의 콘텐츠 영역을 개척한 소련여자 크리스 같은 대범한 인물도 있지만)

 

상식을 의심조차 해선 안 된다는 인식에 도전하기 위해 저자가 책에서 꺼내든 카드는 중 하나는 이영훈이다. 대표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자이자 엠부시 인터뷰를 시도한 MBC기자의 뺨을 대차게 후린 그 (행동하는?) 학자.

 

상식의 문제성을 다루며 그 상식 바깥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인물을 기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빌런 학자의 상식 부수기란 기묘한 에피소드로 폐쇄적인 상식의 단면을 사람들이 감각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빌런 학자의 잘못된 상식 깨부수기

 

저자가 이 에피소드를 위해 준비한 상식은 과거 제임스 펠레 교수가 주장한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이고, 빌런은 물론 이영훈 교수다. 이 교수는 제임스 팔레의 주장에 대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조선 노비들의 존재 형태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그 계급적 성격을 농노라고 부를 만한 존재였다라고 반박했고, 또 다른 저작 <한국경제서>에서는 노비들의 입역노비와 납공노비를 분리하며 반박했다.

 

이 교수가 팔레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유는 그가 조선이란 나라를 특별히 아꼈다거나,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겠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아마 1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의 연구에서 조선에 노비가 많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는 펠레의 주장에 동의했을 것이다(지금처럼). 그는 그냥 경제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이고, 자신의 연구 결과로 봤을 때 팔레의 의견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저런 의견을 낸 것일 게다.

 

애국(?)에 기여한 고민이 된 이 교수의 반박은 가치 판단 이전에 상식 혹은 지식에 대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책을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와도 포개어진다. 저자는 책에서 이영훈만이 아니라 한국인과 한국 사회란 공동체와 관련해 총체적인 분석을 다양한 텍스트와 인물을 끌어와 시도한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제로에서부터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가치와 대중적 지지에 지식을 가두는 게 아니라 지식의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고 또 다른 지식과의 연결을 더듬고 따라갔을 때 도착할 수 있는 다면적인 지식의 모습이다. 그리고 저자의 이런 발견은 지식이란 것을 상식이란 테두리에 가두기에는 너무 크고, 억지로 가두려는 행위는 이 지식을 왜곡하는 행위인지를 깨닫게끔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과정이 지루하고 돌아가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의 이 같은 고민 안에서 이영훈의 의견은 편향된 사람의 과거 연구물이 아니라, 한국의 근본을 바로보기위한 하나의 조각이 된다. 그의 편향적인 성향도 총체적인 지식이란 방향성 아래서는 신경쓸만한 것도 되지 않는 느낌이다. 물론, 이영훈의 연구물을 재검토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이영훈의 마음은커녕 이영훈을 대하는 대중의 생각 또한 바꾸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적 궤적에 대한 탐색은 우리가 어떤 상식에 포섭돼 있고 이에 대해 관성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작게나마 맛보게 해주면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는 주장의 반박을 넘어 더 큰 지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영훈은 여러 저술에서 한국사의 목표가 근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억지로 근대를 발견하려고 둘 필요는 없다는 훌륭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근대에 도달하지 못한 조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에 자괴와 폄하의 시선을 떨치지 못했다. 이영훈은 한중일을 비교하면서 미야지마 히로시처럼 역사의 삼각측량을 통해 특수성을 가늠하지 못했고, 그때그때 한중 비교나 한일 비교를 하면서 뒤떨어진 한국에 대해 아쉬워했다. 사실 그 양자 비교에서 드러난 한국의 특성은 어쩔 때는 중국을, 어쩔 때는 일본을 닮아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폄하의 대상이 될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했다.

한국의 근현대사 논쟁은 흔히 백년전쟁이라는 수사로 소비된다. 그러나 조선 노비제 논쟁을 살펴보다 보니 우리의 근현대사 논쟁은 남북전쟁 이후의 기억 해석 투쟁, 문화 논쟁과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 193pp

 

매번 극우란 사람들이 제시한 의견이 상식적인(?) 사람들이 빠르게 조성한 공론에 제압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몇 차례 목격해왔고 또 목격할 것이다. 이번에 김문수 후보자 사태도 그렇고. 하지만 한쪽을 압도하는 과정 안에서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합의가 깊어지는 과정은 거의 없고 어느 한 쪽을 제압한 이후 남아있는 의문들을 대개는 잊는다. 그러다가 다시 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똑같은 논쟁을 벌이고. 그러다가 우리는 종종 상식을 강요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며 상식에 딴지를 거는 사람 나아가 딴지를 제압하려는 사람 모두에게 냉소적이 돼 간다. 저자의 책은 우리가 어떻게 이 악순환이 고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지를 옅게나마 보여준다. 그리고 상식의 자리를 둘러싸고 대화 없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존재를 확인시켜기도 하고.

 

상식 엘리트 독재 vs 성실한 아마추어

 

주마간산으로 책을 읽었다. 저자가 열심히 조사한 것을 성실히 따라가지도 않았고, 내 머릿속에 있던 상식과 비교하며 내용을 곱씹지도 않았다. 내가 한 행위가 독서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 저자도 바쁘면 책의 서문과 결론 부분만 읽어보라고 했으니, 이런 독자가 있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어쩌면 저자의 아마추어적인 탐구 과정이라 하겠다 솔직히 이 책에서 다룬 주제와 관련해 세련된 서술과 깊이 있는 내용을 쓸 연구자들이 우리나라에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루는 연구자들은 저자의 저술의 빈틈을 찾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지점은, 이 사람이 총체적인 지식을 만들기 위해 도전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어느 한 진영의 상식을 가진 집단이 다른 집단의 상식을 인정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같은 얘기도 다른 말로 하고, 집요하게 상대의 틀린점을 비판하는 동안, 어째 우리의 지식세계란 모두의 동의를 통해 쌓아가는 지식은 없고, 각자의 진영들에서 쌓아가는 것들만이 존재한다. 저자는 아마추어적이긴 해도 삿초동맹을 이끌어 냈던 사카모토 료마처럼 여러 텍스트를 동분서주하면서 서로 상식으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책에서 본 부분이긴 한데, 정확히 어디에서 봤는지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지는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인상깊은 부분이었다. 저자는 과거 엘리트가 생산하는 지식만을 존중하고 신뢰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엘리트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고, 페이스북과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성실하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 또한 존중하게 됐다고 한다. 그들은 어쩌면 성실한 오타쿠나 아마추어로 엘리트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이들의 시도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엘리트가 자신의 지위만큼의 열심히 탐구하는 것도 아니고, 경력과 이름에 걸맞는 상상 이상의 결과물 또한 내놓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ㅎㅎ.

 

나 또한 어쩌면 저자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이를 하나의 산업으로 굴려보고자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참...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이렇게 만나게 돼 반갑다. 책은 많이 팔릴 것 같지 않으나, 책의 정신아 조금 더 널리 공유될 수 있으면 한다.

 

Ps 1.

솔직히 나는 이 책의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하면 <쌀 재난 국가>를 받는 이런 식으로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해당 책을 읽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우리 사회의 문제를 너무 환원주의적으로 풀려는 시도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기원을,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수도 없고 농촌에서도 풍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벼농사 문화에서 찾으니, 어색하고 이 방향성이 정말 맞나 싶기도 했다. 이철승 교수의 책을 읽었을 댄 그냥 재밌는 해석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이 책을 통해서는 은근 설득이 됐다.

 

Ps 2.

어쨋든 저자는 이 책의 서술 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은, 서술 방식의 지루함을 견뎌야 할 것이다.



https://blog.naver.com/biswang/223552158026

저는 생각의힘 출판사 책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읽을 기회가 많으면 좋을 것 같네요^^
언제든 리뷰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bisw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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