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리부트 - 열광과 환멸의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 12
신진욱.이세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낡은 것은 쌓여있고, 새로운 것은 흘러만 간다.”

지금의 우리 정치판을 그람시의 <옥중수고> 속 유명한 문장에 빗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민주화 세력의 힘을 빌려 국회의원이 된 자는, 참사의 구조적 원인과 대한을 찾아야 하는 자리에서 코인 투자를 한다. 물의를 일으킨 의원을 두둔한 어떤 의원은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 반대편에서는 당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언론도 공감하는 쓴소리를 뱉으며 주목받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대중의 공감을 받는 목소리는 본격 정치의 장에서 소수의견으로 머물다가 다른 이슈에 쓸려나간다.

“오만 정이 떨어진다” 물의를 일으킨 의원을 두둔하는 당의 모습에 대한 교수의 비판은 조국 사태 이후 내가 이 당에 줄곧 갖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은 인정하나, 상대에 대한 자동반사적 적대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무한한 관용의 모습은 민주당을 민주주의자들이 모인 집단이기는커녕 후안무치한 무리처럼 보인다. 무능해도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지지의 마지노선은 사라진지 오래다.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창조적 파괴의 소리는 내지 못한 채 언뜻 정의로워 보이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당. 그것이 오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주당이다. 너무 일찍 민주당에 대한 관심을 끈 것일수도 있으나, 이제 여간해선 이들에게 선의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 “정치는 어쩔 수 없이 좀 그렇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조차도, 작금의 민주당의 태도는 “좀 그렇다”라는 지점을 한참 넘었다.

민주당을 비판하는 수많은 칼럼이 있었지만, 대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악의가 있어 보이거나, 관성적이거나, 당위적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정파적이었거나. 악의가 있든 없든, 정파적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그런 칼럼들은 재미가 없었다. 칼럼을 (네이버뉴스를 통해) 듣고 있는 내게 메아리쳤던 게 몇 개나 되는지 손에 꼽는다.

하지만 메아리가 쳤던 몇몇의 칼럼은 정치를 바라보는 무기력하고 영혼없는 내 눈을 생기를 불어 넣었다. 그 칼럼 중에는 염세주의자 같은 문체를 지닌 기자로부터 나온 게 적지 않았다.

한국 정치 리부트

이세영 기자의 글은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신진욱 교수의 글은 몽둥이처럼 뭉툭했다. 신 교수님에겐 미안하지만 학교를 다닐 때도 나는 뭉툭한 몽둥이가 주는 무게감 있는 아픔보다, 송곳처럼 단단하고 잘 빠진 당구채와 같은 매에 더 경각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이세영 기자의 칼럼은 차갑고 도도한 문체만 돋보였던 게 아니라 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문장들이 많았다. 샤츠슈나이더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정당 안 또한 민주적으로 운영 돼야 하는지 묻고, 한나 아렌트를 통해 위선의 생산적 측면과 이를 그 넘어의 위험성에 대해 글에서 경고했다. 또한, 정말 날것 그대로 활용될 여지가 큰 (그리고 실제 그렇게 활용되고 있기도 한)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란 정치에 대한 칼 슈미트의 개념을 풀어주었다. (자세한 것은 책을 읽어봐 주길 바란다.)

물론, 이 기자의 글에는 발터 벤야민도 나오고, 카스무데, 샹탈 무페, 김수영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긴 한다. 칼럼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권위 있는 사람의 이론이나 그들이 한 말을 인용하는 것은 늘상 있다. 나 역시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할 때 많이 모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피상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것과 그 피상 안의 깊은 세계를 우리 현실에까지 끄집어 보여주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차고 넘칠 만큼의 이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럽다. 석사까지는 했어야 하는데.) 한겨레신문의 프리즘을 읽을 때나, 이세영X신진욱 정치크로스를 읽을 때도 이 점 때문에, 공유해 몇 차례고 들었던 것 같다.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해 지혜를 갖고 있던 자들의 고민과 결론을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맞게 풀어내 보여주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단순히 민주당을 비판하는 데에서만 “낡은 것은 쌓여있고, 새로운 것은 흘러만 간다”라는 말을 쓸 줄 알았는데, 책을 덮고 보니 정치에 나의 냉소가 정치에 대해 어떤 눈을 가렸는지 깨닫게 됐던 것 같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민주당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아무리 읽어도 공허하게 소비되는 정치 칼럼보다는 두 지식인의 대화 형식의 이 칼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을 하나씩 던지지만, 사실 대화한다는 느낌은 딱히 들진 않는다. 그리고 서로에게 향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보다는, 해당 주제에 대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느낌도 나고) 분명 생산적 고민을 하게 만드리라 생각한다.

아! 신 교수님의 칼럼은 모두 읽을만하다.

이 책의 주옥같은 문장들

그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권위주의 시절 억눌렸던 사회적 요구가 도처에서 분출하던 특수 상황이었다. 이념 지형과 느슨하게 결합한 지역 정당체제가 대선에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드라마틱한 다자 정치 구도를 낳았는데, 어떤 도 자신의 의지를 독자적으로 제도 안에 관철할 능력이 부재했던 현실은 경쟁 정당 간의 절충과 타협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왔다. 이는 실질적인 다자 정치 구도 안에서 당대가 요구한 과거 청산과 사회 개혁 입법들이 격렬한 진통 없이 결실을 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빗어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이제, 산문적인 세속의 권력 질서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지상에 홀연히 강림했다 사라진, 사적이고 찰나적인 광휘 속에 도래했던 메시아적 순간처러 여겨질 분이다. -9pp

‘적과 동시’라는 범주의 핵심은, 공적인 관심사를 놓고 사람들이 집단으로 결합하고 다른 집단과 분리되는 것, 대내적으로 결속하고 대외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가리킨다. 슈미트는 이러한 집단 형성과 균열 형성의 본질이 심리적·감정적·도덕적 적대에 있지 않으며 정치에서 적이란 증오하는 적대자와는 다른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의 현실에서 적과 동지의 관계는 흔히 감정적·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진다. 뜨거운 감동, 간절한 소망, 격양된 분노가 없는 정치는 승리하기 어렵다. 왜일까? 마나 누스바움이 말했듯, 구체적 공동체에 대한 사랑 없이는 헌신의 동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공동체의 동지들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적과의 대결이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46pp

사람들은 스스로 위선을 행하고, 타인의 위선을 알면서도 눈감아준다. 가면을 쓰고 벌이는 역할극과도 같은 이 사회에서 상대의 위선을 공격하고 까발린다면, ‘집합적인 위선의 실천’을 통해 쌓아 올린 공모와 연대의 공동체는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만과 위선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는 근본적으로 일정한 위선과 상호작용에 의해 작ㅇ용하고 유지된다.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공물”이라는 17세기 프랑스의 작가 라 로슈코프의 경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위선의 불가피성과 그것의 ‘의도하지 않는 생산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위선을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선은 정치와 민주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타인과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혁명론>의 많은 분량을 많이 할애해 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위선에 대해 경고한다. 이 파괴적인 위선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완벽히 속이는 데 성공할 때, 다시 말해 자신의 말과 행위가 내면의 순수 동기와 진정으로 일치한다고 철석같이 확신할 때 작동한다.

이런 심리 상태에 포획된 인간은 자기만이 선의 화신이고, 다른 이들은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 정치를 주도할 때 진정성의 폭력이 발생한다. 판단의 근거를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이 아닌 내면의 순수 동깅에 둠으로써 타인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격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들의 경합으로서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고 정치는 선악의 적대적 쟁투로 변질되고 만다. - 80pp

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는 김지하 시인의 절규처럼 현실에 부재한,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했던 무엇이었다. 그 민주주의가 이 땅에 온 지 30년이 넘었다. 이제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실은, 추상적으로 열망했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피상적으로 이해될 때 현실에서 그것은 민주주의를 부식시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어떤 시민, 어떤 참여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 115pp

‘정당이 얼마나 민주적이어야 하는가’는 지도부와 당원, 다수파와 소수파 사이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나 논쟁의 최전선에 불려 나온 주제다. 극단적 당원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쪽에선 ‘당내 민주주의 없이 당 밖의 민주주의도 없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러나 조반니 사르토리나 샤츠슈나이더 같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를 ‘정당 간 상호 경쟁’이 만들어 내는 정치적 결과물로 본다. 국가라는 정치 공ㅇ동체에 중요한 것은 ‘정당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이지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얘기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정당 안이 아니라 정당 사이에 있는 것”(샤츠 슈나이더)이다.

물론 내부 운영이 민주적이면 저당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가 커지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고 해서 그 정당의 대외 경쟁력까지 함께 상스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오늘날 당내 민주주의가 강조되는 정당이 어떤 곳인지를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 사회운동 조직에 뿌리를 둔 운동 정당이나, 규모가 작은 계급, 이념 정당이다. 한국에선 녹색당, 정의당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당에는 집권이 아닌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최대 관심사다.

그러나 집권이 목표인 정당이라면 달라야 한다. 다수 유권자의 선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흐름에 신속하는 게 필수다. 하지만 집권을 노리는 규모 있는 원내 정당들에서도 당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당원 권리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는다. 2012년 이후 민주당에서 공직, 당직 선거의 흐름을 좌우한 것도 활동력이 왕성한 열성 당원들과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정치 팬덤이었다.

그렇다면 대규모 정치조직인 현대 정당은 왜 소수의 강경파와 적극적 팬덤에 취약한가. 다름 아닌 ‘참여의 격차’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대의정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선 시민이든 당원이든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필요하다. 거기엔 적잖은 비용이 든다. 시간과 노력, 열정을 가진 소수만이 정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참여의 문턱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건 확고한 정치 신념의 힘이기도 하다. 신념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종교적 열정에 견줄 정도다. - 123pp

이 정부 들어 두드러진 팬덤 정치의 작동 구조 역시 상술한 메커니즘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승계된 ‘절대적 권위’를 중심축 삼아 권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분배되는 위계 구조 속에서, 각 단계의 권력 주체들은 정당성의 원천을 ‘내부’에 갖기보다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의존하게 된다. 중심의 권위가 약해질수록 상층의 의사 결정이 ‘하부로부터의 압력’에 취약해지는 구조다. 임기 말이 다가올수록 팬덤과 밀착도가 높은 중하위 그룹이 ‘개혁 완수’와 ‘대통령 수호’를 명분으로 내부 의사 결정을 주도하게 되는 배경이다.

문제는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이 구조 아래선 난망해진다는 점이다. 지도부는 자신들을 압박한 소장 그룹에, 소장 그룹은 다시 강성 팬덤에 책임을 미룬다. 그러나 ‘익명의 다수’는 책임질 수 없고, 책임을 이양할 대상도 없다. 그 결과 목격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난장’이다. 이것이 ‘촛불의 열망’ 위에 들어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모습이라면, 너무도 허무하지 않은가. - 125pp

정치의 미학화는 당장의 궁지를 벗어나게 해주는 비상 사다리는 될지언정 권력이 직면한 정당성 위기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퇴임 직전까지 줄곧 40% 안팎의 지지도를 유지했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정당성 위기의 원인(무능)에 대한 근원적 처방과 독단적 통치 스타일의 혁신 없이는 윤석열에게 탁현민의 할아버지가 붙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치의 미학화’와 대척하는 지점에 ‘미학의 정치화’가 있다. 정치의 미학화가 문제 해결이 안 되는 현실을 ‘견디게’ 만든다면, 미학의 정치화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표현함으로써 집합적 감성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게’ 만든다. 발터 베냐민은 이런 ‘정치화된 미학’의 사례로 1·2차 세계대전 사이 중서부 유럽과 러시아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로 삶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려 했던 전위 예술운동을 꼽았다. - 166p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