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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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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자본주의를 번영시키지만,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야기한다. 참으로 거대한 아이러니다.
이번에 읽은 책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이 거대한 아이러니 중 한군데를 조명한 책이다. 우리가 보통 자본주의 혹은 불평등을 이야기 할 때, 진보 언론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노사 관계다. 하지만 과연 우리사회에서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은 과연 그것 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노노 관계에서도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으며, 사사관계에서도 아이러니는 발생한다. 노노 관계에서 보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 즉,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가 가증 심할 것이고, 사사 관계에서의 문제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기업간의 불공정 문제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신문에서 몇 차례 동반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대개 내가 읽었던 것들은 뭔가 집대성 돼 있기 보다는, 동반성장이라는 가치와 우리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정 사례가 나오는 것들로, 상당히 거칠게 연결돼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한쪽으로 치우친 입장을 갖고 있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동반성장의 논리는 경제권력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으며, 중소기업과 같은 이해관계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면은 많지 않았다. 시민들의 욕구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곳이 독점하고 있는 것들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있기도 하다. 노노 갈등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인기가 없고, 재계와 같은 곳에서는 공격받고 있는 게 동반성장이 처한 상황이었다.
이 책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은 꽤 얇은 책이다. 200페이지도 넘지 않는다. 또한, 엄청나게 학술적인 책 또한 아니다. 하지만 이 얇은 책은 우리사회에 동반성장이 왜 필요한지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동반성장과 관련해 잘 정리된 책이다. 동반성장이 단순히 사람들의 정의감을 만족시켜주는 이론 혹은 가치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왜 필요한지, 저자인 정운찬 교수는 이야기 해주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의 백미중 하나는 3장이다. 바로 애덤스미스가 주창한 진정한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나온 부분이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됐는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학교 경제학 시간에 간단하게 <국부론> 내에 있는 몇가지 개념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애덤 스미스가 추장한 것으로 넘겨짚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정운찬 교수는 <국부론>과 <국부론>의 바탕이 되는 철학책 <도덕 감정론>의 텍스트를 분석하여, 애덤 스미스가 진정으로 바랐던 자본주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의도적 오독해 자신들에게 맞는 논리로 이용하고 있는 재계의 논리를 비판한다.
어찌 보면 이 책의 경제학을 다루는 층위 그리고 우리 경제를 분석하는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저자의 스펙을 봤을 때, 이는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우리 경제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쉽게 설명한 것 같다(그런 면에서 참 착한 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의 곳곳에는 저자의 경험담이 실려져 있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을 한 사람으로서 그가 해당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보수정부 안에서 동반성장 문제에 대해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그 내밀한 것까지 나는 알 수 있어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어찌 보면 이 책은 안타까운 책이다.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이 같은 텍스트가 나온다는 우리나라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제와 관련된 논의를 하는 층위가 이 책의 저자인 정운찬 선생이 총리를 하던 시절과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이 책에도 등장하고 있는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의도적 오독은 계속해서 진행중이다. 힘에 의해 애덤 스미스의 논리가 점령됐다고 봐도 될 것이다. 보다 높은 차원의 경제의 문제(가령, 칼 폴라니의 사상)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더 높은 차원으로 공정하게 된다는 것이, 자신들에게 득이 될 게 없으니, 현재의 전선이라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게 그들의 모습인 게다.
나는 이 책이 오랫동안 팔리기를 원치 않는다. 이 책은 슬픈 책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외친 게 2012년이다. 하지만 10년이 다 돼가는 데,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구호가 얼마나 정책으로 만들어져 현장에서 시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10년이 다 돼가는 현재 내가 본 것들은, 동반성장을 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일련의 사회적 문제들이다. 1차 노동시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코로나의 타격을 거의 받지 않는 반명, 2차 노동시장의 근로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상태에서 거칠게 노동을 하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와 연대하지 않으며, 기업은 기업과 연대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모두 이약을 사유화에 집중할 뿐이다. 만약 저자가 이 주제와 관련해 2권을 낸다면 비극적인 사례로 될 것들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저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을 한다. 학자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이제는 문제를 푸는 주체들이 할 일만 남았다. 동반성장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 어떤 문제가 되는지, 다수에게 호소를 했다. 그렇다면 그 다수가 현재의 질서를 유지할지 아니면, 아니면 변화를 도모할지의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일이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채의 주옥같은 문장들
[머리말]
나는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격차와, 용인하면 안 되는 격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용인할 수 있는 격차는 ‘기회 평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수용할 수 없다. 만약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또한 불공정한 상태를 방치하여 만들어진 격차, 혹은 부정행위로 만들어진 격차 역시 수용할 수 없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규칙과 감시기구가 중요한 이유는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여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한편,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패한 구성원과 승리한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너무 벌어져 마침내 양극화가 고착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 5pp
1장. 한국 경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규제 완화가 능사는 아니다]
투자활성화 정책의 또 다른 모습은 규제 완화다. 기업은 체질적으로 규제를 좋아할 수 없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20년 이상 동안 정부가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규제를 완화했으나 아직도 기업들은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가 너무 많다고 입을 모은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려는 노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규제를 없애면 그보다 그 많은 규제가 새롭게 만들어져 투자 환경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기업들의 주장을 자세히 따져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첫째,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규제들이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금융 규제와 환경 규제다. 먼저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관련된 규제, 업무 영역에 관한 규제 등은 함부로 없애서는 안된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제들은 금융회사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런 규제들을 섣불리 완화했다가는 금융권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규제를 지나치게 완화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임을 잊어선느 안 된다.
또한 기업들이 환경 규제 때문에 승인이 나지 않아서 공장을 원하는 시간에 짓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환경 관련 규제를 무작정 없애버릴 수 없다. 환경문제처럼 부정적인 파급 효과가 큰 사안에 대해서는 규제 완화만이 능사가 아니다.
…
둘째, 기업들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서 철폐할 수 없는 규제들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에서처럼 사업자 간 힘의 불균형으로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분야에서 관련 기업들이 상생 협력하도록 시책을 추진하고, 위반 기업에 대해서는 시정 조치를 하는 것이 그 예다. 또한 하도급거래의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유통 분야의 대형 유통업체와 납품업체, 가맹점본주와 가맹사업자 등의 거래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업자들이 그 지위를 남용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도 공정 경쟁을 보장하고 페어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해 불필요한 규제다. - 27pp
[대기업, 중소기업 간 양극화 해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중소기업은 어떤가. 최고급 기술은 아니지만 투자하고 싶은 곳은 많으나 자금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며 무엇보다 수익률이 너무 낮다. IMF 경제위기 이후 가계로 흘러가지 않은 기업 소득은 주로 대기업 것이고, 중소기업의 수익률은 대기업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그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행위, 특히 납품가 후려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자할 여력은 없지만 투자하려는 의지가 있는 중소기업에게 대기업의 투자 여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결시킬 것인지,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에 대해 앞으로 정부의 정책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ㅇ르 위한 ‘마법의 열쇠’가 대기업, 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에 있다는 주장의 논거다. - 36pp
[동반성장은 우리 사회의 ‘윈-윈’할 수 있는 성장전략이다]
‘동반’이라는 앞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조금만 넚혀 보면 ‘성장’이라는 말이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우리 경제는 재벌 중심의 경제력 집중이 도를 넘다 보니 경제 전체가 역동성을 성실한 상황에 이르렀다. 기업 부문의 역동성이야말로 자본주의 성장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력 집중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지속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반성장은 말 그대로 낙수효과와 분수효과의 선순환을 통해 지금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해결하고 성장의 과실을 부유층과 빈곤층,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 사회가 ‘윈-윈’할 수 있는 균형 성장전략이다. - 52pp
2장. 자본주의의 참모습
[이윤 극대화의 전제조건: 게임규칙의 준수]
법률을 지키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프리드먼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하나가, 그리고 단 하나가 있다. 그것은 기업이 게임의 규칙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활동에 자원을 사용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개되고 자유로운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게임의 규칙’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프리드먼은 여기에 대해 그다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법률보다 광범위한 개념임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유무형의 규칙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법률 조항처럼 명문화하기는 어렵더라도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느낄 수 있는 규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길 경우 법률에 저촉되어 구속되지는 않더라도, 시장 참여자들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장경제 원리에는 법률과 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규칙을 지키고 법률을 준수하며 최선을 다해 이윤을 극대화하라는 말에 틀린 점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한 ‘게임의 법익 안에’ 또는 ‘법률을 준수하는’ 등의 핵심 전제조건들은 무시되고 오로지 이윤 극대화라는 결과만 강조되었을까? - 65pp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참여자들이 서로 독립적이고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경제학의 완전경쟁도 대수의 법칙과 거의 똑같은 전제조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대수의 법칙의 전제조건처럼 완전경쟁 시장도 모든 참여자들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한 사람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하며, 그 사람이 시장에 표출하는 수요나 공급의 규모가 서로 비슷비슷하게 작아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한다. 만약 시장 참여자들의 크기가 서로 비슷하지 않거나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면, 다시 말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장은 완전경쟁 시장이라고 할 수 없다.
국제정치 분야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이른바 ‘세력 균형’이란 개념이 그러하다. 유럽 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들 가운데 어떤 나라도 군림하는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모든 유럽 국가들이 비슷비슷하며 강하지 않은 상태로 쪼개져 있을 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유럽 전체의 후생이 극대화된다는 개념이다. 루이 14세 때의 리셜리외 추기경이 독일을 300여 개의 군소 왕국으로 나누어놓은 정책을 견지해나갔던 것은 세력 균형 이론의 대표적 성공사례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와 독일을 염두에 두고 고안해낸 외교정책 방향이었지만, 적어도 독일 내부의 사정만 보면 서로 동등한 영향력을 간진 주제들이 독립적으로 경쟁할 대 하나의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 74pp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시장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경쟁이 일어나면 경제 전체와 후생이 극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공정한 경쟁 시장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성장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쟁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경쟁에서의 불공정성은 결국 규칙의 문제다. 함께 경쟁하려면 최소한 공정한 규칙이 주어져야 한다. 무조건 똑같은 출발선에 세워놓고 달리라는 것은 공정한 규칙이 아니다. 평소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전문 코치에게 훈련을 받은 선수와 끼니를 겨우 때운 선수가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고 해서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재벌 대기업들이 설사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고 모든 법률을 지켜가며 경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 힘은 중소기업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들의 영향력은 경제 영역을 넘어선지 오래다. 교육, 지역, 문화 등 재벌 대기업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사회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도 감시와 규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커가고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고르게 주고, 그 과정에서 공정성도 담보될 수 있도록 시장의 엄정한 감독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하라고 했다. 또한 기회 균등을 전제로 각자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자고도 했다. 따라서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에 있다면 제거해나가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맞다. 이제 정부는 좋은 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와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기업은 공평한 기회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라야 건강하고 올바르게 성장한다. 그렇게 성장한 기업이 좋은 기업이고, 좋은 기업이 많아야 그 나라의 경제가 발전한다. - 78pp
[1997년 말 외환위기의 경우]
심지어 IMF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고통을 겪는 와중에서도 위기 초래의 당사자였던 재벌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관대했다. 그동안 가려진 재벌들의 부실한 체질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재벌 대기업들의 무리한 과잉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살려냈다. 시장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많은 대기업 퇴출당해야 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수많은 기업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그들을 살리는 데 동의했다.
168조 원의 공적자금 투입 과정에서 정부와 금융기관에 대해 질책했을 뿐,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이라 할 재벌의 과잉투자에 대한 질책은 별로 하지 않았다. 당시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이 재벌 개혁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엄정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정부나 정치권이 재벌에 대해 관대했다는 데에 직접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그러한 주장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재벌 가운데 일부 기업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의 질책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을 전후하여 일반 국민들의 재벌 대기업에 대한 호감도는 과거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졌다. - 85pp
[천재 한 사람이 수만 명을 먹여 살렸는가?]
“천재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떤 천재들은 ‘내가 돈을 벌어야 일자리가 만들어지니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도 했다. 일반인들은 ‘그 천재라는 사람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을 만들어줘야 나와 같은 사람들과 먹고살 수 있지 않겠나’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소위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겨과를 놓고 보니 그 천재는 수만 명을 먹여 살렸던 게 아니라 제 식구들 배만 불린 경우가 많았다.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던 일반인들은 배신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세금으로 구제받은 은행 임직원들이 위기 이전보다 보너스를 더 많이 챙겼다는 사실로 사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너스를 챙긴 사람들은 천재 소리를 듣던 이들이었다. 그런 천재들이 벌인 희대의 쇼는 평범한 사람들이 봤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상식이자 탐욕이었다. ‘천재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패러다임의 지배원리는 다름 아닌 탐욕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 92pp
3장. 자본주의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자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을 따르는 ‘현명함’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각자가 자기기만에 의해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을 무시하려는 ‘연약함’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를 번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연약함’에서 오는 이기심이 방임되어서는 안 되고 ‘현명함’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 마음속의 ‘연약함’을 따라 세상의 평가를 중시하여 부와 지위를 좇는 이기심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키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생활필수품의 분배를 가져온다. 한편 인간 마음속의 ‘현명함’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라 최저 수준 이상의 부를 갖는 것이 행복, 즉 마음의 평온에 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정의를 추구한다. 그리고 생명, 신체, 재산, 명예 등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 공정한 판단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정의에 관한 엄밀하고 보편적인 사회적 규칙, 즉 법을 정해놓는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사회질서 유지에 정의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해서 법을 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정의를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본성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법에 의해 그 분노를 제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것도 본성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동기에 의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인 이기심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가격 매커니즘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번영을 가져오듯이, 분노를 느끼고 싶지 않고 비난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속 ‘공정한 관찰자’가 직접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법치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질서를 가져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국가와 공권력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법치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변에는 법치주의가 분노를 통제하고 비난받는 삶 대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려고 하는 동기의 의도치 않은 발로라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경쟁에서 마음속 ‘현명함’을 우선시하여 페어플레이 규칙을 따른다면, 이기심의 ‘보이지 않는 손’과 공정한 관찰자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는 번영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연약함’을 우선시하여 페어플레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질서는 어지러워지고 사회의 번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사회를 질서와 번영으로 이끄는 것은 ‘현명함’과 모순되지 않는 ‘연약함’을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해 정의감에 의해 제어된 야심과 경쟁이다. 즉 경쟁이 페어플레이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면, 국가는 두 가지 인간 본성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질서와 번영을 이룰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 데에는 각 나라 정치인과 철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 오피니언 리더 들의 보이지 않는 고뇌와 희생, 지도력이 숨어 있다. 애덤 스미스에게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속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르는 사람, 즉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과거에 비해 정치, 경제, 사ㅚ, 문화적으로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은 수많은 현자들의 보이지 않는 열정에 기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자들의 보이지 않는 열정이야말로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다. 수많은 현자들의 열정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후생이 비로소 극대화 될 수 있었다. 이런 열정은 돈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못한다. 돈으로는 그런 ㅇㄹ정을 살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다. - 139pp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인가?]
도덕법칙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류 행복 증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신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언급은 스미스의 특정적인 주제인, 인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원래의 의도와 관련이 없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서의 손은 누구의 손인가? 그것은 신의 손이다. 신의 손에 따라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이루게 되는데, 경제원론에서는 그것을 효용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스미스가 말했던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이루는 되는 것은 인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계획’이다.
신의 손은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는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능력을 통해서다.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될 수 있다. 도덕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의법칙만 따른다면, 즉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는 식이라면 그 사회의 행복은 절대 극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 140pp
[자유방임적 자유주의보다 동반성장이 애덤 스미스의 철학에 더 가깝다]
정부는 가급적 전면에 다서지 말아야 하며 일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그래야 경제가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후생이 극대화된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가르침이대. 여기에서 벗어나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모르는 무식하고 불순한 사상이다. 이것이 동반성정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다.
그러나 동반성장이야말로 재벌 대기업이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적 사상보다 훨씬 더 애덤 스미스의 본래 사상에 가깝다. 나아가 친재벌 이념가들이 말하는 자유방임적 완전경쟁 시장보다 우리 경제가 추구해야 할 자본주의의 참모습이 더 가깝다. 애덤 스미스는 그들이 믿는 것처럼 경쟁을 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사회 전체의 후생이 저절로 극대화된다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이기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놔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도 믿는다. 이런 생각은 인간이 이기심만을 추구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오해를 낳게 한다. 이기심만 가득한 이익 추구는 탐욕이다. 물론 탐욕도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탐욕은 인간의 본성 중에 절제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자본주의와 시장이 탐욕까지 용납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자본주의는 탐욕과는 원래 아무 상관이 없다. 자본주의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공부했다면, 자본주의는 정당한 이익 추구를 보호하려는 것이지 탐욕 추구까지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상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이기만 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도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여 사회 전체의 후생이 극대화되려면 중요한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 전제조건들이 충족되는 경제는 굉장한 수준의 도덕성이 필요하다. 친재벌 성향의 이념가들이 만약 자신들이 추종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가 이런 생각을 했던 철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틀림없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자신들이 해왔던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의 경솔함을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 143pp
4장. 시대정신, 동반성장
[경제민주화와 동반성장]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재화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를 소비자 또는 다른 기업에게 내놓는다. 그러면 소비자 또는 다른 기업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제품을 고르고 그에 대한 대가를 기업에게 지불한다. 이때 기업과 노동자는 그들이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나 다른 기업과의 교환을 전제로, 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내용으로 하는 교환관계를 맺는다.
이와 같이 현대 경제의 생산과 소비 체제는 각 구성원들이 상호간에 크고 작은 다수의 교환관계를 맺고 있는 커다란 교환 체제인 것이다. 일단 교환 체제가 확립되면 각 개인은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 없으며,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의존성‧상호관련성은 대부분의 생신이 우회적인 성격을 갖는 현대 경제에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생산의 우회도가 더욱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종류도 더욱 다양해졌다. 그 결과 생산자와 소비자,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와 기업 및 한 기업과 다른 기업간의 교환 체제는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경제사회를 하나의 커다란 교환 체제로 볼 때, 경제민주주의란 경제사회의 구성원 간에 이해가 상충될 때 각자가 별 손해 없이 다른 구성원 간에 이해가 상충될 때 각자가 별 손해 없이 다른 구성원과의 교환을 거부할 수 있는 장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의 가치를 갖는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그 노동자가 100만 원 이하의 보수를 제공하는 고용주의 고용 제의를 손해 없이 거절하고 다른 고용주를 찾아 나설 수 있다면, 그 노동자가 속한 노동시장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형평이 이루어져,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각자가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교환을 거부할 수 있을 때, 경제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자면 노동자는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생활수단이 있어야 하고, 노동시장에는 새로운 일거리가 충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노동시장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 - 157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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